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82화 (82/180)

# 82

082

연구소는 들어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가는 출구 또한 반대편 하수도와 이어져 있었다.

덜컹.

머리 위에 닫힌 철문을 들어 올리고 밖으로 몸을 뺀 신초영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퀴퀴해서 미치는 줄 알았네.’

물론 분위기를 살펴 속으로만 그리 생각했다.

황준영도 황준영이겠지만, 박동혁 또한 많은 일을 겪었기에 표정이 절대 밝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불타는 연구소를 뒤로하고 지상으로 빠져나온 그들 앞에 펼쳐진 장소는, 아까와 같은 도봉산 중턱 어딘가.

생각지 못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대성 덕분에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신초영 입장에선, 이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에게 받은 도움이 한둘이 아니었고.

황준영과 박동혁이 뒤늦은 해후(邂逅)를 나누는 사이, 그녀는 대성한테 감사의 말을 재차 전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저…….”

입을 떼기 무섭게 신초영은 도로 입술을 꾹 다물고 숨을 삼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 왜 저러지?’

여태까지 어떤 돌발사태가 벌어져도 석상 같은 표정만 짓던 남자가 안면 가득 핏줄을 끌어올리며 섬뜩하게 눈을 번들거리고 있었으니까.

‘갑자기 왜 그러세요?’라는 사소한 질문조차 함부로 건네기 힘들 정도의 노기.

@자신도 모르게 신초영의 안색은 새파랗게 물들었다.

[주군, 들리십니까.]

[대부인의 침소에 숨어든 쥐새끼를 발견했습니다.]

‘이 새끼들이. 기어코 선을 넘어?’

지금 막, 그런 발라르크의 보고가 들어오던 참이다.

머리가 하얗게 물들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런 기분이 든 게 얼마 만일까.

[필드, ‘발라르크의 철성’을 로드 한 장소에 체크포인트의 존재를 확인.]

[지정한 체크포인트로 이동합니다.]

-팟.

목덜미에 칼이 들어온 듯한 오싹함에 몸서리치던 신초영이 흠칫했다.

“……. 응?”

눈을 한 번 깜빡이는, 0.5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갑자기 대성의 모습이 사라졌다.

황준영과 박동혁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느라 아직 눈치 못 챈 상태.

“뭐, 뭐야? 무슨……. 엥?”

혼자만 바보 된 듯한 모습으로 멀뚱멀뚱 선 신초영이었다.

***

대성은 체크포인트를 설정해둔 부엌에 도착했다.

“…….”

이틀, 아니 거의 사흘 만에 집에 돌아왔지만, 머리끝까지 치민 분노 때문에 반가운 기분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혜정도, 지수도 곤히 잠든 야심한 시각. 가족들이 깨지 않도록 대성은 조용히 베란다로 걸어갔다.

훤히 열린 베란다 문.

펄럭-.

<비행> 스킬로 날개를 펼쳐 베란다 바깥쪽 하늘로 향하자…….

“오셨습니까, 주군.”

쥐새끼의 배에 뇌창을 쑤셔 넣으며 태연하게 말하는 발라르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성은 게거품을 쏟아내는 박쥐 사내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우리 엄마 방에 들어왔다고?”

“네.”

“목숨은?”

“염려 마십시오. 대부인께서 조금의 해도 입으시지 않도록 제가 완벽하게…….”

“아니, 말고.”

“…….”

“이놈 목숨 말이야.”

“……. 지장은 없습니다. 방금 막 기절한 참이긴 합니다만.”

발라르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성은 박쥐 사내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타워팰리스를 벗어났다.

도곡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티역 인근에는 아무도 쓰지 않는 물류창고가 하나 있다.

그 물류창고에 도착한 대성은 콘크리트가 가루가 지저분하게 흩어진 바닥에 박쥐 사내를 내던졌다.

“억……. 끅……. 헉…….”

박쥐 사내는 이미 혼절한 상태임에도, 악몽을 꾸듯이 이상한 신음을 냈다.

창에 찔려 살갗에 큼지막하게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성화’ 모드의 특수 스킬이 발동됩니다.]

[특수 스킬 : <치유>]

황록(黃綠)의 불꽃이 재빠르게 상처 부위를 아물게 했다.

까뒤집혔던 박쥐 사내의 동공이 도로 제자리를 되찾았다.

“으, 으윽…….”

격통 때문에 번잡했던 머릿속이 정리된 박쥐 사내가 입가를 꿈틀거렸다.

그렇게 가물거리던 시야가 복구되기 무섭게.

“흐, 흐아악-!”

박쥐 사내는 눈앞의 남자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바닥에 손바닥을 짚으며 두어 발짝 물러서다, 이내 몸을 일으켜 줄행랑을 쳤지만…….

[권능, <염사>가 발동됩니다.]

촥!

열 갈래로 방사(紡絲)된 에테르의 실이 박쥐 사내를 옭아맸다.

거미줄에 사로잡힌 나방 꼴이 된 박쥐 사내가 꼴사납게 앞으로 넘어졌다.

코뼈가 깨지고 피가 왈칵 흘러내렸으나, 오감을 잠식하는 짙은 두려움이 그런 고통마저 지워냈다.

저벅-.

발소리가 이어졌다.

“힉! 히익!”

박쥐 사내가 거의 발작하듯이 몸을 비틀며 버둥거렸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전신에 묶인 실이 점점 그를 뒤로 끌어당겼다.

악마가.

지상에서 존재해선 안 될 하얀 악마가 눈을 번들거리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권능, <발검>이 발동됩니다.]

그 순간, 낫처럼 곡선을 그리며 굽은 칼날이 대성의 손등부터 시작해 팔뚝 부근까지 튀어나왔다.

동시에 <염사>의 운용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코앞까지 박쥐 사내를 끌고 왔다.

박쥐 사내는 온몸이 보이지 않는 실에 묶여 어정쩡한 자세로 속박된 상태.

슥.

대성은 칼날이 된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서걱.

그리고 팔을 내렸다.

“끄, 끄으으으읍?!”

요란하지는 않은, 하지만 뼛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고통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팔다리를 자른 것도, 혹은 이미 한 번 곤욕을 치렀던 복부에 칼을 찔러넣은 것도 아니다.

팔뚝 한 꺼풀.

실에 칭칭 감겨 툭 튀어나온 팔뚝을, 딱 더도 덜도 말고 ‘회 한 점’ 두께로 잘라냈다.

피딱지 같은 살점이 떨어졌다.

“잠깐, 잠……. 기다려……. 흐윽, 기다려보세요, 잠…….”

서걱.

“허, 허억?!”

서걱. 서걱-.

“끄으으으으윽…….”

서너 번 그 작업을 반복하니 잘린 팔뚝 단면으로 새하얀 뼈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칠 것 같다.

차라리 피를 확 쏟아내서 과다 출혈로 죽었으면, 아니면 쇼크사로 즉사했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서걱. 서걱-.

의식은 의식대로 뚜렷한데, 통증은 또 통증대로 가감 없이 전해진다.

“욱, 걱…….”

어느새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혀를 깨문 박쥐 사내가 토혈을 뱉으며 가쁜 목소리로 말했다.

“물어……. 묻고 싶은 게 있으면……. 꺼억……. 그냥 물으라고…….”

여기서 풀려날 수 있어도 좋고, 아니면 죽어도 좋다.

그냥, 그냥 이 악몽 같은 고문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묻고 싶은 게……. 허, 억……. 묻고 싶은 게 많을 거 아냐. 내가 누구라던가…… 아니면 이런 짓을 내게 시킨 배후라던가…….”

“…….”

“시-이팔! 듣고 싶은 대답이 있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그냥 질문해, 이 미친 새끼야! 미친 짓거리 그만하고 물어! 물으라고!”

검광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푸슉.

그런 소리와 함께, 박쥐 사내의 혀가 잘려나갔다.

“으으으으읍?!”

“묻고 싶은 거…….”

이로써 어떤 질문이 날아와도 박쥐 사내는 대답이 불가능해졌다.

혀가 잘린 그는 급기야 바닥에 이마를 쾅쾅 찍었다.

잘끈 깨문 입술 틈새로 핏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그 광경을 차갑게 쏘아본 대성이 말을 이었다.

“묻고 싶은 거 없어.”

“으읍, 으으으으읍!?”

“난 그냥 네가 죽을 때까지 아팠으면 좋겠다.”

그것이 남의 가족을 함부로 건드린 것에 대한 마땅한 대가 아니겠는가.

***

이해할 수가 없다.

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상식이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어…….”

엘하임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언뜻, 공진 중인 게이트와 비슷하게 생긴 회오리가 그의 앞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주시(注視)>의 권능.

엘하임, 그가 펼친 권능은 아니다.

“자객을 보냈다기에 어떤가 싶어서 봤더니…….”

“그, 그게…….”

“저게 대체 뭐냐. 졸전(拙戰) 이전에 아예 싸움이 성립이 안 되고 있지 않으냐.”

‘혼세의 혈’ 내부.

‘어둠 속 사내’의 스산한 목소리가 비수처럼 엘하임의 등에 꽂혔다.

사내를 중심으로 일렁이는 어둠의 공간에서 헤드라이트 같은 빛줄기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빛줄기의 끝자락이 나선으로 회전하며, ‘저쪽 세계’에서 박쥐 사내를 도륙 중인 대성의 모습을 비췄다.

이(異)차원의 풍경을 엿보는 힘.

주교인 ‘어둠 속 사내’가 가진 다섯 가지 권능 중 하나.

바로 <주시>의 권능이었다.

끄아아아악!

꺼억, 끄어어억!

그리고 <주시>가 보여주는 풍경 속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펼쳐지고 있었다.

혼세의 존재인 엘하임과 주교조차 ‘제법’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잔혹성.

팔뚝부터 한 뼘 두께로 살갗이 잘려나가기 시작했던 박쥐 사내는 어느새 몸뚱이의 절반이 사라진 상태였다.

끄으윽…….

죽여줘……. 죽여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안 돼.

죽기엔 아직 일러.

정신 차려. 기절하지 마.

말했잖아. 넌 죽기 직전까지. 도저히 나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살이 잘리고, 피를 쏟아내고, 심장이 멈출 때까지.

고통받아야 해.

조금씩 피륙이 잘려나가 팔 전부가 뜯긴 시점에서 박쥐 사내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저 하얀 악마의 칼에서 초록 불씨가 피어올라 박쥐 사내의 상처 부위를 서서히 치료해갔다.

[‘성화’ 모드의 두 번째 특수 스킬이 발동됩니다.]

[특수 스킬 : <은총>]

그런 메시지가 떠올랐다는 걸, 당연히 대성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리라.

“…….”

‘어둠 속 사내’는 불쾌했다.

손속을 두지 않는 저 하얀 악마의 무정한 고문 행위 때문이 아니다.

그냥 순수하게, 이 상황 자체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이걸 왜 봐야 하지?”

“주교님, 그게…….”

“말해봐라, 엘하임. 네놈은 그냥 저걸 지켜만 보고 있을 거냐?”

질책하듯 날아온 그 질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걸까.

망연자실한 감정이 고스란히 떠오른 얼굴로, 엘하임이 ‘어둠 속 사내’를 돌아보았다.

“위험한 놈이니까 전면전을 피해야 한다고?”

“주교님, 기다려보십시오. 아직…….”

“덕분에 저놈이 어떤 놈인지 잘 알았다. 적어도 자객이니 뭐니 조잡한 수단으로 어찌할 놈이 아니란 건 확실하군.”

꿀꺽.

다음에 이어질 ‘어둠 속 사내’의 말에 집중하며, 엘하임이 목구멍을 무겁게 울리던 그때.

“가라.”

“주교님!”

“아, 그래. 자신 없겠지. 안다. 넌 고작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니까, 엘하임. 쓸모없는 녀석.”

뒷덜미가 저릿해질 만치 신랄한 모독이 이어졌다.

엘하임은 어금니가 으스러질 기세로 이빨을 깨물었다. 몸이 경련했다.

그 모습이 썩 보기 유쾌하다는 듯이 ‘어둠 속 사내’가 실소했다.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는 너를 내가 신뢰해서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다.”

계속되는 멸시와 모욕.

엘하임의 꾹 쥔 주먹에 손톱이 파고들며 피가 스며 나왔다.

바로 그때.

얼굴을 숙이며 말문을 열지 못하는 그의 고개가 올라가게 하는 발언이 이어졌다.

“내가 직접 네놈에게 <강신(降神)>하겠다.”

“…….”

“나를 등에 업으면, 하찮은 너라도 조금은 저놈과 대적할 수 있겠지.”

<강신>의 권능.

즉, ‘어둠 속 사내’가 직접 힘을 빌려준다는 의미였다.

정신과 정신, 영혼과 영혼의 결속에 가깝기에 주교가 지닌 본연의 힘을 발휘할 순 없겠지만…….

“제, 제게 <강신>을?”

엘하임, 그의 힘에다가 4할, 아니, 단 2할이라도 저 ‘혼세의 혈’의 지배자가 지닌 힘이 더해진다면.

할 수 있다.

동방의 제단을 무너뜨리고, 두 명의 테이커를 없앤 저 하얀 악마와도 능히 상대가 가능할 터!

“내게 가까이 다가와라, 엘하임.”

“주교님…….”

엘하임이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어둠을 향해 다가갔다.

홀린 듯이.

***

그리고 공간이 찢어졌다.

박쥐 사내의 폐부를 찔러 마침내 숨통을 끊을 작정이었던 대성의 손이 멈췄다.

화-악!

거대한 네 개의 주먹이 부지불식간에 쏟아졌다.

콰과과광!!

우레와 같은 굉음을 자아내며 쏟아진 연타의 세례가, 대성이 ‘있었던’ 지점에 작렬했다.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이 움푹 함몰되었고, 처참한 형체였던 박쥐 사내는 그렇게 한 줌의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고맙다.”

물류창고의 허공이 균열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저만치 물러섰던 대성이 그리 말했다.

쿵!

뭉클거리며 퍼지는 먼지 사이로, 거구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꾸 이렇게 꼬여줘서.”

이제는 죽어 사라진 박쥐 사내의 살점과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대성이 섬뜩한 웃음을 지었다.

먼지를 뚫고 나온 거구의 괴물은 온몸이 괴석(塊石)으로 가득했고, 어깻죽지에 달린 팔 말고도, 등허리에 솥뚜껑처럼 두꺼운 양팔이 솟아 나와 있었다.

“내가 먼저 갈 수고를 덜어줬어. 벌레 새끼들.”

[그래, 계속 그렇게 주절대라.]

괴석의 괴물, 엘하임이 마주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니, 엘하임이 아니었다.

고오오-.

녀석의 머리 뒤에, 어둠의 격류(激流)가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쳤다.

[그 천박한 아가리에 비명이 튀어나오는 순간도 머지않았으니.]

목소리는 얼핏 노인의 얼굴처럼 보이는 어둠의 격류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대성은 그것이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너군?”

[…….]

“어두운 곳에 숨어서 벌레 새끼들한테 명령을 내리던 머저리가.”

[그걸 네놈이 어떻게-.]

“이젠 하다못해 다른 놈을 총알받이로 내세워서 기웃거리는군. 자존심도 없나?”

[이놈!]

우르르릉!

어둠 속 사내’가 <강신>한 엘하임의 거체가 발을 박찬 순간, 공간 전체가 뒤흔들리며 뒤쪽에 있던 물류창고의 벽면이 통째로 뜯겨나갔다.

“아니야.”

[권능, <염사>가 발동됩니다.]

내뻗은 대성의 팔에서 <염사>의 실이 퍼져나갔다.

촤르륵!

그물망처럼 넓게 퍼진 무색(無色)의 실이 순식간에 한 점으로 모여들며 ‘어둠 속 사내’를 속박했다.

[그, 윽!]

폭주 기관차처럼 질주하던 ‘어둠 속 사내’가 멈춰섰다.

놈이 발버둥을 칠 때마다 <염사>의 실이 요동쳤고, 그 진폭이 고스란히 대성의 팔에 전해져 왔다.

이깟 명주실 따위로 놈을 어떻게 해보려고 사용한 권능은 아니다.

“너 같은 놈이랑 싸우기엔.”

<염사>를 쓰지 않는 그의 왼손에 검은 보름달이 떠올랐다.

[필드, ‘귀왕의 영지’를 구현합니다.]

[해당 필드가 내장된 고유결계를 전개할 범위를 설정해주십시오.]

“여긴 너무 무대가 협소해.”

그리고.

파각!

대성이 손안의 보름달을 으깼다.

검회색 연기가 퍼지며 ‘어둠 속 사내’의 시야를 뒤덮었다.

스스스-.

이윽고 연기가 사그라진 뒤, 다시 눈을 뜬 ‘어둠 속 사내’는 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죽음의 황야를.

어떻게 된 거지?

이 하얀 악마는, 기어코 차원 속에 또 다른 차원을 불러오는 힘마저 지녔단 말인가?

그 가공한 힘을 고작 개인이 행사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아니!’

‘어둠 속 사내’는 머릿속 잡념과 의문을 모조리 떨쳐내려는 듯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해하지 않겠다!’

무의미한 상념이다.

눈앞에 무슨 일이 벌어지던, 저 하얀 악마가 무슨 힘을 행사하던.

‘이해할 시간에 저놈을 죽인다!’

쿠학!

억세게 죄어오던 <염사>의 실을 모조리 끊어내기 무섭게.

쿵! 쿵! 쿵!

한 번 더, ‘어둠 속 사내’가 드넓은 대지를 무너뜨릴 기세로 돌진했다.

“…….”

황야를 차올릴 때마다 10미터씩 도약을 거듭하는 ‘어둠 속 사내’의 사나운 돌진에 아까와는 달리, 대성은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그아아아아악!]

흉포한 기합과 함께 ‘어둠 속 사내’가 네 개의 주먹을 일제히 내지르는 순간.

투콰-앙!

마력의 강기(强氣)를 둘러 입은 대성의 주먹이 녀석의 주먹과 허공에서 격돌했다.

파각.

[뭐!]

서로의 일격이 오간 찰나, ‘어둠 속 사내’의 눈에 동요의 기색이 스쳤다.

주먹 마디 하나하나에 촘촘히 박혀 있던 날카로운 괴석이 단 한 조각의 예외도 없이 박살이 났기 때문이다.

본래 엘하임의 육신이 지니고 있던 권능이 파훼 당하는 순간이었다.

‘<석화>가…….’

그리고 ‘어둠 속 사내’가 보인 그 일순의 동요는 거대한 틈을 만들어냈다.

콰-앙!

[어헉?!]

‘어둠 속 ’사내의 명치에 정면으로 충돌한 대성의 주먹이 끔찍한 폭음을 자아냈다.

꽈가각.

[걱!]

가슴팍에 솟은 괴석이 으스러지며, <강신> 중인 엘하임의 입에서 새카맣고 커다란 핏덩이가 튀어나왔다.

잠깐 암전한 정신이 되돌아오고, ‘어둠 속 사내’는 어느덧 저 하얀 악마로부터 50m가량의 거리가 벌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디멘션 테이커’들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엘하임의 육신에 ‘혈’을 지배하는 주교인 자신이 직접 <강신>까지 했거늘.

‘이 격차는 대체…….’

노인 얼굴을 한 <강신>의 어둠이 찌푸려지듯 술렁인다.

미간이 좁혀지고,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지고, 암흑 속에서 번뜩이던 안광이 빛을 잃었다.

그건, 누가 봐도 ‘어둠 속 사내’가 두려움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뚜둑.

대성이 그제야 주먹을 풀며 조롱하는 어조로 말했다.

“아직 칼도 안 꺼냈어.”

[…….]

“끝인가?”

마지막 그 한마디가 채찍이 되어 ‘어둠 속 사내’의 역린을 휘갈겼다.

끝이냐고? 그래.

여기서 끝내겠다.

[으아아아아!]

이 지리멸렬한 싸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엘하임의 뒤통수에 넘실거리는 ‘어둠 속 사내’가 위아래로 크게 입을 벌렸다.

<강신>의 진면목.

동시에, 숙주의 존재력을 바닥까지 긁어모으는 최후의 한 방.

모든 게 끝난 뒤엔, 승자가 누가 됐든지 간에 존재력을 상실한 엘하임은 살아남지 못하리라.

‘상관없다!’

저 하얀 악마를 죽일 수만 있다면.

엘하임 한 명의 목숨을 버리는 것만으로, 저 괴물 같은 놈을 죽일 수 있다면 그 정도는 싼 거다.

입을 벌린 어둠의 격류 안쪽에서, 공멸(共滅)의 섬광이 소용돌이쳤다.

“와라.”

[<업화대검>을 구현합니다.]

화르륵-!!

불꽃의 검이 나타났다.

“얼른.”

팟.

사방에 정적이 내려앉는 것과 동시에, 광채가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

격류에서 뿜어진 공멸의 섬광이 광대한 황야마저 집어삼켰다.

대성은 굽이치며 쏟아져 날아오는 공멸의 섬광을 마주했다.

하얀 머리칼이 휘날리고.

빛이 난잡하게 번쩍였다.

탁-.

대성이 사뿐거리는 동작으로 발을 굴림과 동시에.

파앙-!

[‘혈귀화’가 발동됩니다.]

[활성화되면 일정 시간 당 일정량의 HP가 소모합니다.]

[모든 스테이터스 및 스킬의 공격력이 300% 상승합니다.]

짧은 도약이지만, 지표면이 엉망진창으로 깎여 나갔다.

반인반마(半人半魔).

붉은 기류로 뒤덮인 하얀 악마, 대성이 업화대검을 내질렀다.

[‘업화’ 모드의 첫 번째 특수 스킬이 발동됩니다.]

[특수 스킬 : <작염(灼炎)>]

그 순간.

대성의 손아귀에서 불꽃의 칼이 사라졌다.

아니.

‘물질’의 영역을 초월해 아예 업화의 불꽃 그 자체가 되어 대성과 동화(同化)한 것이다.

콰아아아-악!

지상에 강림한 불의 거인이 황야를 질주하며 섬광 속으로 몸을 던졌다.

[허…….]

입을 크게 벌려 공멸의 섬광을 쏟아내면서도 ‘어둠 속 사내’는 마음속 깊이 통탄하고야 말았다.

이내.

거인과 섬광이 충돌했다.

사라진 쪽은 섬광이었다.

[…….]

빛을 잡아먹고, 지상을 까맣게 태우며 달려오는 불의 거인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은 ‘어둠 속 사내’의 머릿속에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진짜 뭐지, 저놈?

***

그리고.

“커헉?!”

혼세의 혈에서 절규가 터졌다.

‘어둠 속 사내’의 왼쪽 눈과 오른팔에서 시커먼 피가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끄, 끄으으으윽!!”

<주시>의 권능을 담당하던 왼쪽 눈이 파열하고.

<강신>의 권능을 담당하던 오른팔이 부서졌다.

영혼을 결속시켰던 숙주가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권능의 행사자에게까지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 이…….”

왼팔로 한쪽 눈을 감싸 쥔 ‘어둠 속 사내’가 남은 한쪽 눈을 매섭게 부라렸다.

망가진 <주시>로 인해, 이차원의 풍경을 비추던 나선 회오리가 차츰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회오리 너머.

하얀 악마, 대성이 정확히 ‘어둠 속 사내’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며 중지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곧 그쪽으로 간다. 조금만 기다려라.”

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회오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어둠 속 사내’의 눈이 뒤집혔다.

“한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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