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087
번개가 휘몰아치고 창을 쥔 미라들이 쏟아지는 하늘을 가로지르며 박동혁은 외쳤다.
“한대성, 이 개새끼! ……어억!”
마음에서 우러나온 육두문자가 썩 듣기 불편했는지, 박동혁을 태운 해츨링이 다짜고짜 몸을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쉭!
덕분에 창날을 곧추세우며 쇄도해 오는 미라를 피할 수 있었지만.
가까스로 해츨링의 목덜미를 움켜쥐어 낙마… 아니, 낙룡(落龍)을 모면한 그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너희들 주인이니까 말 함부로 하지 말라는 거냐? 알았어, 미안해. 빌어먹을. 근데 상황을 좀 봐라, 이 파충류들아! 내 입에서 욕이 안 나오게 생겼는지!”
안 그래도 이런 판국에 용을 타고 마카오까지 가라고 했을 때부터 뒷덜미가 싸늘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웬 괴상한 미라들까지 공격해 오는 게 아닌가.
화륵-! 퍼버벙-!
화염구 한 덩이가 벼락을 가르고 지나가 미라들에게 작렬했다.
불에 탄 몇몇 미라들은 동귀어진을 감행할 생각인지, 화염을 몸에 두른 채 돌진해 왔다.
서걱-!
뒤이어 패도적인 기세로 날아온 반달 형태의 검기가 미라들의 신형을 수십 가닥으로 절단해냈다.
오른팔이 마력의 불꽃에 휩싸인 황준영과, 은빛 마검을 역수로 쥔 신초영이 차례차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런 위험 임무를 맡겼다는 건, 그 남자가 우리를 그만큼 신뢰한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도루묵으로 만들지 말죠.”
이런 상황마저 즐기는 둘의 반응이 박동혁은 어이가 없었다.
“사제가 쌍으로 호구야, 호구.”
큼지막한 그의 참마도가 진로를 방해하던 미라들을 썰어 내던 그때.
파바박-!
선홍빛 기운이 얽힌 미라들의 창이 그의 사각에서 날아왔지만, 박동혁은 눈치채지 못했다.
콱-!
카악-!
창은 정확히 박동혁을 태운 해츨링의 날개를 관통했고, 연이어 두 자루의 투창이 각각 나머지 한 장의 날개와 기다란 꼬리에 내리꽂혔다.
“어어!”
그제야 상황을 인지한 박동혁이 당혹스러운 비명을 질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두 장의 날개를 전부 잃은 해츨링이 몸을 거꾸로 뒤집은 채 아래로 추락하자, 박동혁도 덩달아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어?! 아저씨!”
“동혁이!”
급전직하하는 그를 본 황준영이 다짜고짜 자신의 몸을 내던지며 손을 뻗었다.
아슬아슬하게 박동혁이 그 손을 잡을 수 있었고, 날개를 좁혀 낙하 속도를 끌어올린 해츨링이 아래로 떨어지던 둘을 등에 태웠다.
“후우….”
가슴을 쓸어내린 신초영이 난색이 짙은 얼굴로 전방을 보았다.
하늘을 빼곡히 채운 미라들.
저것들을 뚫고 과연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확신이 잘 서지 않았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음에도, 차갑게 식은 땀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던 순간.
-쩌적.
“어……?”
먹구름이 깨졌다.
깨졌다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충격을 받은 유리잔처럼 자글자글한 균열이 새겨진 먹구름이 마구잡이로 갈라지고 있었으니까.
“이, 이건 또 뭐야.”
“……쉴 틈이 없군.”
종잡을 수 없는 이상 사태에 박동혁과 황준영이 붕괴하는 먹구름을 바라보며 숨을 삼키던 찰나.
무언가 이상한 것을 직감했다.
끼이이-?
어째서인지 미라들도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둥-.
첫 음은 낮지만, 끝은 무겁고 길게 울리는 북소리.
그 북소리와 함께, 갈라진 먹구름의 틈새에서.
무수한 ‘눈’이 나타났다.
망막이 있고 동공이 있는, 타원형의 거대한 눈.
그 눈들이 칼날이 번뜩이는 듯한 안광을 쏘아 내며 하늘 가득히 개안(開眼)했다.
“…….”
눈과 마주한 이들은 잠시 모든 생각을 잊고 멍하니 굳고야 말았다.
인지(人智)의 영역을 어지럽히는 기이하고 압도적인 광경.
그때.
쉭-! 쉭-!
돌연, 거대한 눈들의 동공에서 불화살이 소낙비처럼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콱-! 퍽-!
끼, 이이……?!
불화살은 직선으로만 날아가지 않고, 허공에서 방향을 정교하게 틀어대며 미라들에게만 명중했다.
“이, 이게 다 뭐야?”
살충제라도 맞은 모기처럼, 화살에 맞고 맥없이 추락하는 미라 떼를 본 신초영이 말문을 잃은 가운데.
그들은 보았다.
펄럭-.
검과 화살, 그리고 방패를 든 마수들이 날개를 휘날리며 눈을 뚫고 튀어나오는 모습을.
***
[‘천공의 눈’이 열렸습니다.]
짧은 글귀의 메시지를 보내는 시스템 UI를 제외하면.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부지불식간에 구름을 찢어발기고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눈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눈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들의 존재도.
“……천사?”
부모의 손을 잡고 대피소로 향하던 한 어린 소년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튀어나왔다.
모두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한 마디가 아닐 수 없다.
검은 갑옷을 입고, ‘쌍(雙)’이 아닌, 등허리 한 방향에만 돋은 세 장의 ‘짝’ 날개를 펄럭이는 저것들은.
조금 어중간한 모양새긴 해도, 그나마 흡사하게 생긴 것을 꼽자면 ‘천사’에 가깝긴 했으니까.
하물며 흉물스레 생긴 날개 달린 미라와 대비되어, 천사라는 이미지는 더더욱 뚜렷해진다.
‘틀린 말은 아니지.’
대한민국 상공.
지금쯤, ‘천마병(天魔兵)’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얼추 예상된 대성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 또한, 처음으로 천마병을 보았을 때 웬 지옥에서 천사가 나오냐며 의문을 느꼈던 적이 있으니까.
‘정확히는 타락(墮落) 천사지만.’
세세한 배경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때 처음으로 천공의 마수들과 마주쳤을 때 시스템이 그런 정보를 보냈던 적이 있었다.
외(外) 차원에서 추방당한 끝에 마수로 전락한 타락 천사들이라고.
끼이이-?!
콱-! 콰과과각-!
그리고 그 타락 천사들이, 지금 ‘천공의 눈’을 비집고 나와 날개 달린 미라들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 세계 250개국의 인류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화(神話) 속에 들어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나 초현실적이고,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하늘에는 거대한 눈이 열리고, 짝 날개를 가진 천사들이 각자 손에 쥔 무기를 휘두르며 괴물들을 도살했다.
파지직-!
어떤 나라의 천사들은 검을 치켜들어 검은 벼락을 떨어뜨리고,
지이잉-. 파-앗!
어떤 나라의 천사들은 창을 올곧게 앞세워 흑빛 광선을 쏘아냈다.
‘천마병은 하늘이 존재하는 곳이면 영역을 불문하고 어디서든 불러낼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이로써 <백색 영지의 수호막>이 적용되지 않은 다른 나라의 안전은 천마병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뜬금없는 사명감 때문에 막대한 마력을 바쳐가며 이러는 건 아니다.
‘이 이상 제물이 늘어나는 걸 놔둘 순 없지.’
저 미라들이 땅에 당도해 대학살을 벌이는 순간, 거신 부활의 자양분이 늘어나는 셈이니까.
저놈들이 좋을 대로 활개 치는 꼴만큼은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때.
-주룩.
천마병의 활약을 지켜보던 대성은 잠시 인중을 쓱 훑었다.
새빨간 피가 묻어났다.
“…….”
2년 전부터 지금까지 쭉.
가족을 지키기 위해 발라르크의 철성과 고위 마수를 24시간 로드시킨 상태다.
그것 또한 지옥의 힘을 끌어 쓰는 작업이니만큼, 매분 매초 마력이 소모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와중에, 이번엔 전 지구적 규모로 천마병이라는 고위 마수까지 구현시킨 상황.
‘오래 할 짓은 못되겠어.’
대성이 하나의 세계를 뒤흔들 만큼의 힘을 쏟아 부은 끝에야.
가느다란 ‘코피’ 한 줄기가 조용히 터진 것이다.
‘그나저나…….’
대성은 핏줄기를 대충 훔친 뒤, 초대형 게이트가 있는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언뜻 활짝 열린 것처럼 보이나, 문의 표면엔 자기장들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다름 아닌 여타 게이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외부의 진입을 차단하는 ‘방벽’이었다.
문제는 그 방벽의 크기가 지금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
‘저거, 억지로 뚫으려면 뚫을 수 있는 건가?’
작은 게이트의 방벽이야, 2년 전에도 그랬듯이 업화대검을 쑤셔 넣어 억지로 잘라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저 하늘을 가득히 뒤덮은 자기장의 벽도 과연 그 억지가 통할지 의구심이 들었다.
“염병.”
대성이 거친 욕설을 뱉는 그때.
끼이이……!
천마병을 상대하던 미라들의 시선이 대성에게 몰렸다.
저 인간!
저 인간만 죽이면 천마병도 알아서 물러갈 터!
퍼뜩 그런 직감이 스친 미라들은 모든 병력을 대성에게 집중시키기로 했다.
끼이이이-!
한반도에 있던 미라들이 서로와 공명(共鳴)하기 무섭게, 영혼에 새겨 넣는 듯한 귀기 어린 소음이 밤하늘을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일정 간격을 두고 멀리 떨어져 있던 미라들이 한 점에 모여들며 결합하기 시작했다.
꿀렁-. 꿀렁-.
“입맛 떨어지게 하는 데는 아주 도가 튼 새끼들이야.”
벌레라도 씹어 뱉은 것처럼 말하는 대성의 얼굴에, 이윽고 거대한 음영이 한가득 드리워졌다.
한편, 배리어 안쪽에서 희망을 맛보던 사람들의 표정 또한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끼이이이이이-!!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흉측한, 어떤 거대한 덩어리.
팔과 다리의 경계도 불투명하고, 그저 울퉁불퉁한 완자처럼 생긴 표면에는 썩어 문드러진 인면(人面)이 종기처럼 우수수 튀어나왔다.
인면은 끈적거리는 입을 쩍쩍 벌리며 심연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듯한 괴성을 토하고 있었다.
쉬익-! 팍-!
천마병이 활시위를 튕겨 미라의 결합체를 향해 불화살을 퍼부었다.
하지만 철판에다 바늘을 찌른 격.
화살들은 허망하게 튕겨 나갔다.
바로 그때.
덩어리의 모습을 본 대성의 뇌리에 어떤 사고가 스치기 무섭게.
“가만히 있어!”
마력을 담아 널린 확산한 대성의 짧은 한마디가 천마병의 귀에 울려 퍼졌다.
비처럼 퍼부어지던 불화살 세례가 언제 그랬냐는 듯 뚝 그쳤다.
“저놈은 내가-.”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
쩌-억.
덩어리의 정중앙이 위아래로 쫙 갈라지더니…….
-덥썩!
하고, 대성과 그가 타고 있던 섬멸룡까지 통째로 집어삼켰다.
“아, 아아……?”
“헉……!”
고층건물에서 그 광경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박정호와 협회의 이사진들이 짧은 경악성을 질렀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건, 저 아래서 하늘의 전투를 바라보던 무수한 피난민들도 마찬가지.
눈치 빠른 이들은 이젠 정말 희망이 사라졌다는 생각을 하며 멈췄던 발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지 못한 이들은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엉덩방아를 찧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도 아직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은 소수의 이들은.
입술을 경련하고, 주먹을 꽉 쥐며 저 덩어리를 응시했다.
분명.
분명 저 용을 탄 남자라면 보란 듯이 덩어리를 찢고 나오리라.
그렇게 생각했지만…….
“…….”
정적이 30초를 넘어 이내 1분을 넘어서자, 희망을 품은 이들조차 사색이 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희망을 놓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메마른 침을 삼키는 이가 딱 한 명 있었다.
“……아니야.”
“협회장님!”
바로 박정호였다.
그는 이제 포기하고 대피소로 향하자는 임원들의 손길을 뿌리쳤다.
“잠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보게! 조금만 더……!”
어차피 이 모든 걸 대성 혼자서 해결하리라는 속 편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안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어쩌면’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법.
전경이 내다보이는 유리창에 손바닥을 짚은 박정호는 절실한 눈빛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분명, 대성이라면 그 커다랗던 불꽃의 검을 휘둘러 극적으로 빠져나오거나.
아니면 검은 용이 엉망진창 저 괴물을 내부에서부터 찢어발기든가 할 거라고.
그런 뻔하디 뻔한 장면이 펼쳐질 거라며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쿠구구구-.
공중에서 침묵을 지키던 덩어리가 점점 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어, 어어……?”
눈알을 끌어올린 박정호의 고개도 덩어리를 따라 점점 올라갔다.
그렇게.
-훙.
쉬지 않고 계속 위로 올라가던 덩어리가, 이내 대기권에 뜬 초대형 게이트 안쪽으로 사라졌다.
“…….”
박정호의 눈에 초점이 옅어졌다.
초대형 게이트는 여전히 활짝 열려 있었고, 희망 그 자체였던 남자는 괴물에게 집어 삼켜진 채 사라지고야 말았다.
“……이젠 진짜 가셔야 합니다.”
임원 중 하나가 비통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며 박정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지…….”
박정호의 고개가 푹, 하고 떨어졌다.
***
핵폭탄이 몇 번은 떨어진 것만 같은 폐허였다.
가뭄이 닥친 듯 말라비틀어진 평원 위로, 앙상하게 뼈만 남은 건물들만이 이곳이 원래 중세풍의 형태를 간직한 세계였다는 사실을 겨우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각양각색의 모습을 한 괴물들이 어느 거대한 소용돌이 앞에 옹기종기 모여 이렇게 수군거렸다.
“여기를 왜 오지?”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의사(意思)가 담긴 멀쩡한 문장이 괴물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이 목을 빼며 지켜보는 소용돌이 너머엔, 날개 달린 괴물들의 공습을 받는 지구가 있었다.
선발대로 보낸 공수 부대가 하얀 머리 인간을 집어삼킨 광경을 보고 쾌재를 지르던 한창이었다.
그런데.
장해물을 먹어치웠으면 그 기세로 나머지 인간도 죽이든가 해야지.
난데없이 이쪽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뭐 문제 있나?”
“겉보기엔 멀쩡해 보여.”
“뒤로 물러나. 저놈 입으로 하는 말을 직접 들어보자고.”
차원을 잇는 통로 바로 앞쪽까지 덩어리가 올라오자, 괴물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이내 통로를 넘은 덩어리가 완전히 이쪽 세계로 접어들기 무섭게, 괴물들이 추궁하듯 물어왔다.
“왜 온 거야?”
“그놈 먹었으면 쭉 갔어야지.”
“안 그래도 주교님께서 단단히 화가 나신 마당이다. 알아?”
그때.
열심히 조잘대던 그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뭔가 이상했다.
아까부터, 덩어리가 아무런 말도 못 하며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었다.
“너-.”
괴물 중 한 명이 왜 그러냐는 말을 하기 직전.
덩어리의 몸에 종기처럼 솟은 무수한 인면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살려줘.” “분명 먹었는데…….” “도와줘.” “싫어.” “아파.” “왜 이러는 거야?” “먹었어! 먹었는데…….” “안에서 뭔가.” “가만히 있어!” “속이 이상해.” “배가 터질 것 같아.”
급기야 얼굴을 고통스레 찡그린 인면들이 시커먼 눈물까지 흘려 댔다.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낀 괴물들이 할 말을 잃은 순간.
푸확-!
검은 용의 발톱이.
덩어리의 살갗을 찢어 내고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걱……?!” “아, 아아…….” “아!”
촤아악-!!
인면들의 단말마가 겹겹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풍선 같았던 덩어리가 선연한 핏물을 뿜어내며 터졌다.
픽-. 피빅-.
피에 젖은 덩어리의 살점이 어지러이 흩날리며 괴물들에게 쏟아져 내렸다.
“돌아가면 샤워부터 해야겠어.”
-쿵!
섬멸룡의 육중한 발소리와 함께 대성이 그곳에 나타났다.
괴물들이 바짝 얼은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대성은 손가락 끝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에테르의 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권능이야.’
<염사>를 이용해 안쪽부터 덩어리를 조종하며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맨몸으로 이 거대한 게이트의 ‘방벽’을 뚫고 들어가는 게 곤란했던 참이었는데.
‘버스가 생겨서 다행이군.’
역시 방벽은 같은 계통의 차원에 사는 존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대성은 입에 들어간 덩어리의 살점을 질겅질겅 씹으며 섬멸룡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고요히 가라앉은 눈동자를 굴려, 이 드넓은 폐허 저편에 자리 잡은 고성(孤城)을 노려보았다.
“…….”
혼세의 혈.
2년 전, 엘하임의 기억 속에서 어렴풋이 느낄 수 있던 그곳과 똑같은 기운이 저 성채에서 느껴졌다.
뭘 해야 할지 감이 잡힌다.
입꼬리를 희미하게 끌어올린 대성이 괴물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가 너희들이 사는 혼세인가 뭔가 하는 곳이냐? 누추하군.”
퉷.
대성이 피범벅이 된 살점을 바닥에 뱉었다.
“내가 깨끗하게 청소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