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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88화 (88/180)

# 88

088

무채색의 공간 너머에서 불길한 바람이 섞여 들어왔다.

뱀의 혀가 목덜미를 쓱 훑고 지나는 듯한 소름에, 카리나는 무심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놈이…….’

왔다.

이곳, ‘혈(穴)’마저 뒤흔드는 강대한 존재가.

역병에 걸린 듯 온몸이 검푸른 색으로 물든 여성, 카리나가 초조한 눈빛으로 ‘혈’의 중심에서 요동치는 어둠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교……!”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요양 중일 사내의 직위를 입에 담으려던 순간.

선이 가느다랗고 혈색이 창백한 남자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나직하게 올라갔다.

“호들갑 떨지 마.”

“……볼크스.”

“얼마 안 있으면 일어나실 거야. 그때까지는 우리 둘끼리 문제를 해결하자고.”

흑단처럼 늘어진 검은 장발 사이로 산양을똑 닮은 눈이 조용히 시선을 보내왔다.

그 시선과 마주한 카리나의 얼굴엔 또렷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물론 장발 사내, 볼크스를 향한 공포는 아니었다.

“우리 둘끼리라니. 주교님의 권능을 등에 업은 엘하임마저 죽인 놈이야. 우리 둘이서 뭘-.”

“그때와 지금이 똑같나?”

짙은 난색이 묻어나는 카리나와 달리, 볼크스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침착했다.

아니, 침착을 가장하고 있었다.

볼크스 또한 카리나와 같은 심정일 터. 예상에도 없었던 상황이 퍽 당황스럽고, 난폭한 적의 위세에 털이 곤두서는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무수한 전투병이 저 아래에 있고, 저놈과 달리 우리는 만전(萬全)의 상태지.”

“…….”

“긴말할 것 없어. 여기서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저놈의 손길이 주교님께 닿는다.”

“그렇긴 하지만…….”

“짊어진 대의를 잊지 마라.”

‘대의’라는 단어를 들은 카리나는 숨을 삼켰다.

최후의 보루가, 최후의 희망이 어둠 속에 잠들어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교가 있는 이곳, ‘혈’은 성역(聖域) 그 자체.

외적이 침범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음에 드리운 두려움 때문에 일순 흐려진 사명이 다시금 고개를 들자, 카리나는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그렇게 카리나와 볼크스는, ‘혈’을 빠져나갔다.

2년 전, 엘하임의 죽음으로 인해 이제는 2명이 된 혼세의 삼주(三柱)가 출정하는 순간이었다.

***

마력 절약을 위해 섬멸룡의 구현을 잠시 해제한 뒤.

대성은 그야말로 브레이크 빠진 폭주 기관차처럼 날뛰고 있었다.

용광로처럼 붉게 타오르는 대검이 마구잡이로 검격(劍擊)을 이어갈 때마다 곳곳에서 폭음이 터지고 용암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아아-! 아아아아악-!”

“히익, 히아아아아악-!!”

재해에 버금가는 공격이 연이어 휘몰아치자, 혼세의 전투병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대성은 굳이 줄행랑을 치는 놈들까지 일일이 추적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지금 적들과 싸우고 있다는 인식 또한 하지 않았다.

그저, 머리의 나사를 조금 느슨하게 푼 채 생각하기도 전에 우선 손에 쥔 칼부터 움직일 뿐.

‘더.’

이곳은 지구 밖 외(外) 차원.

그것도, 오랫동안 그의 역린을 긁어댄 괴물들의 본산지, 혼세가 아니던가.

‘더.’

고상하게 싸울 필요도,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주변에 끼칠 피해를 우려할 필요도 없다.

미친 듯이 휘두르고, 태우고, 해방하면 그만인 싸움.

‘더!’

콱-!

기세를 살짝 죽이고 멈춰선 대성은 업화대검을 수직으로 세워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업화’ 모드의 첫 번째 특수 스킬이 발동됩니다.]

[특수 스킬 : <격노>]

화르륵-!

펑-! 퍼버벙-!!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불의 소용돌이가 휘돌았다.

“어, 어으아아악-!!”

“끄, 끄르흑……!!”

화르륵-!

쿠구궁-!

혼세 전체를 집어삼킬 듯이 몸뚱이를 키워가는 <격노>의 세례가 순식간에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도망쳐! 여기 있다간 다 죽겠어!”

“저 미친놈!”

“끄아아악-! 누가! 누가 이 불 좀 꺼줘!”

불지옥이 도래한 혼세에 비명과 절규가 아득히 수놓아졌다.

화마(火魔)에 휘말린 전투병들은 짧은 단말마를 전부 내지르기도 전에 불길에 타들어 재가 되었다.

“…….”

“…….”

그리고 이 참담하기 그지없는 마경(魔境)을, 볼크스와 카리나가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벅-.

업화의 불길을 뚫고 나온 대성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너희들은 안 도망쳐?”

일체의 감정도 묻어나오지 않는 그 기계 같은 목소리가 오히려 더욱더 섬뜩함을 증폭시켰다.

숨이 턱, 하고 막힌 볼크스가 가까스로 호흡을 내뱉으며 말했다.

“카리나.”

“……볼크스.”

“가.”

팟-!

먼저 움직인 쪽은 카리나였다.

전신을 짓누르는 공포를 떨쳐내기 위한 발악에 가까운 쇄도.

고오오오오-!

혼세의 기운을 끌어모은 그녀의 두 손에 주홍빛 구체가 생성되었다.

<폭렬>의 권능.

삼주가 가진 권능 중에서도 가장 피격 범위가 넓은 권능이었다.

“으아아아아-!!”

진노를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파아앗-!!

그러자, 허공에 체류한 주홍 구체가 다시 수많은 작은 구체로 산산조각 폭사하며 쪼개졌다.

그렇게 빗방울처럼 흩어진 구체는 수십 자루의 예리한 칼날이 되어 대성을 향해 쏟아졌다.

“발악하는군.”

팍-!

진각(震脚)을 밟은 대성의 신형이 광활한 대지를 누비듯이 주파했다.

콱-! 콰곽-! 콱-!

그런 그가 지나가는 길에 0.5초도 안 되는 간격을 앞두고 주홍빛 검이 폭우처럼 떨어졌다.

‘저걸 저렇게?’

권능을 행사하는 당사자인 카리나는 물론, 볼크스조차 경악스러워 말을 잇지 못했다.

일일이 놀라고 있을 시간도 없다.

밀려오는 좌절감을 뿌리친 볼크스가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날뛰지 마라!”

그러자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하고 투명한 손바닥이 대성을 찍어 눌렀다.

콰아앙-!

순식간에 지면이 움푹움푹 함몰되고 먼지 구름이 자욱하게 퍼졌다.

<중력>의 권능.

권능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위력은 줄어든다.

그래서 볼크스는 최대한 좁게, 작은 점을 찍어 누른다는 느낌으로 권능을 발현시켰다.

그가 목에 한껏 핏대를 끌어올린 채 외쳤다.

“카리나! 지금이다! 이 틈에 얼른 저놈에게……!”

그리 외치며 카리나 쪽을 돌아보던 볼크스가 잠시 말을 삼켰다.

그녀가, 믿을 수 없는 뭔가를 봤다는 듯이 휘둥그레 눈을 떴기 때문이다.

섬찟한 기분이 스친 볼크스가 그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긱-. 기기긱-.

움직이고 있다.

압축되고 압축된 중력장에 짓눌려, 본래는 새끼손가락 마디조차 못 움직여야 정상일 상대가.

“놔…….”

대성이 상체를 비스듬하게 숙인 채 두 다리를 질질 끌며 움직이고 있었다.

콱-!

꽈직-!

단단한 혼세의 대지가 엉망진창 찌그러질 정도로 강력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저 남자의 뼈가 가루처럼 으깨지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발을 묶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푸확-!

“카, 학……?!”

강한 힘을 정교하게 다룰수록 시전자에게 돌아오는 반동도 큰 법.

볼크스의 이목구비에서 검은 피가 터져 나왔다.

“볼크스……!”

놀람도 잠시.

카리나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좌우지간 틈은 생겼다!’

적어도 방금 같은 정신 나간 질주는 선보이지 못할 터.

우웅-!

다시 한 번, 카리나의 손에서 주홍빛 구체가 생성되었다.

그녀는 세찬 포효를 내지르며 두 손에 응축된 무형(無形)의 기운을 터뜨렸다.

파바바박-!

구체가 쪼개지며, 아까보다 더 수많은 칼날의 폭우가 비척대는 대성에게 쏟아졌다.

그리고…….

콱-! 콰곽-!

‘됐어!’

황홀감에 젖은 미소가 카리나의 입가에 번져갔다.

지금 두 눈이 헛것을 보는 게 아니라면.

<폭렬>의 칼날은 정통으로 대성의 몸에꽂혔으니까.

검이 살을 파고드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선혈이 사방팔방으로 튀며 피바다를 이루었다.

“죽어……!”

카리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한 번 더 주홍빛 구체 두 개를 소환하고, 터뜨렸다.

수십 갈래로 뻗친 검의 폭풍이 혼세의 땅을 가르고 주변에 타오르는 불길을 베어 냈다.

콱-! 콰과과과-!

그녀는 모든 울분을, 분노를 저 남자에게 쏟아 붓기로 작정했다.

죽어간 엘하임의 원념이 이 광경을 보며 크게 흡족할 때까지.

“죽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에 꿰뚫린 대성의 몸이 기역 자로 꺾였다.

카리나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그렇게 탈진할 때까지 검을 날렸다.

콱-! 콱-!

“카리나…….”

“으아아아-!”

“카리나!”

내상에 허덕이던 볼크스가 피를 토하면서까지 고함을 지른 그제야.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검을 난사(亂射)하던 카리나의 움직임이 멎었다.

볼크스가 흘러내리는 코피를 쓱 닦으면서 말했다.

“됐어. 그만해.”

“……이 정도면, 허억……. 이 정도면 죽었겠지?”

“목을 잘라 버려, 카리나.”

“아니, 상식적으로-.”

“잘라.”

“……알았어.”

-팟.

대성의 몸에 꽂힌, 이루 셀 수 없이 수많은 검이 한순간에 소멸했다.

철벅-!

축 늘어진 그의 몸이 땅바닥에 낭자한 피 웅덩이로 가라앉았다.

카리나는 <폭렬>의 권능으로 만들어낸 칼 한 자루를 움켜쥔 뒤,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

“…….”

그리고는 질렸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독종은, 온몸이 내장마저 쇠꼬챙이에 찢기고 숨이 멎는 순간까지 손에서 검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서 이딴 놈이…….”

솔직히 말해 정체가 궁금했지만, 그보다 확인 사살을 가해 이 악연을 영원히 끝내고픈 마음이 더 컸다.

-스릉.

위로 치켜든 그녀의 칼이 탁한 하늘빛에 반사되어 번뜩인 순간.

[‘성화’ 모드의 특수 스킬이 발동됩니다.]

[특수 스킬 : <치유>]

이제는 진짜 끝이라는 안도감이 카리나의 집중을 느슨하게 한 걸까.

아니면 그저 단순히, 보지 못했던 걸까.

-꿈틀.

업화대검의 칼자루를 단단히 붙잡은 대성의 손이, 아주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와 동시에, 치켜들었던 카리나의 칼이 아래로 떨어졌다.

깡-!

“……!”

카리나는 순간 심장이 멎을 뻔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찌르르, 하고 손목에서부터 울린 진동이 이내 사슬처럼 휘감겨 올라와 그녀의 몸을 경직시켰다.

“뭐, 뭐…….”

놀란 건 볼크스도 매한가지.

죽은 게 분명했던 적이 갑자기 검을 꼿꼿이 세우며 일격을 막아냈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카리나와 볼크스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어붙은 가운데.

철벅-.

대성이 한쪽 무릎부터 세우며 천천히 직립(直立)했다.

방금 전까지 피 웅덩이에 널브러진 탓에 얼굴은 모공 하나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악귀(惡鬼)의 얼굴.

언어 중추에 무슨 이상이 생긴 것도 아니건만, 카리나는 미친 듯이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 이, 이, 이게…… 마…… 말이나 되냐고.”

“…….”

“바, 바, 반칙이야……! 죽었잖아! 한 번 죽었는데 이런 게 어딨어! 그, 그, 그걸 맞고 산다는 게 빌어먹을 말이나 되는…… 컥-?!”

콱-!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이, 발악하는 카리나의 안면을 뒤덮었다.

꼼짝도 못 하게 된 카리나가 허공에 뜬 채 허우적댔다.

“카, 카리나……!”

그 광경을 본 볼크스가 팔을 뻗어 저도 모르게 <중력>의 권능을 사용하려다 말았다.

이대로 가다간 카리나도 휘말린다.

볼크스가 자신의 무력함에 치를 떨던 그때.

-슥.

문득 저 하얀 머리 남자의 눈길이, 뒤편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기둥에 고정됐음을 눈치챘다.

“잠깐,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볼크스가 메마른 목소리를 입 밖으로 뱉어낸 순간.

붕-!

대성이 허리를 옆으로 비틀며 넓게 팔을 휘두르자, 그의 손을 떠난 카리나의 몸이 미사일처럼 날아갔다.

불기둥 쪽으로.

화르륵-!

“……?! 헉, 끄, 어걱……?! 끄, 끄아아아아아악-?!”

듣는 이의 고막을 칼로 쑤시는 듯한 불쾌한 비명이 이어졌다.

불길 속에 잠겨 거뭇하게 된 카리나의 사지가 뭍 밖에 끌려 나온 생선처럼 펄떡거렸다.

“이노오오-옴!!”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볼크스가 격분하며 권능을 발현했다.

쿵-! 쿵-!

수십 톤의 납덩이가 떨어진 듯한 압력이 대성에게 들이닥쳤다.

쇠를 쇠로 내려치는 것만 같은 굉음과 함께, 땅거죽이 튀어 오르고 먼지구름이 쉬지 않고 피어올랐다.

쾅-! 쾅-! 쾅-!

볼크스는 멈추지 않았다.

권능의 남발로 인해, 안 그래도 내상을 입은 육체가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뼈가 삐걱대고 온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으나, 낭떠러지 끝까지 몰린 볼크스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단지, 속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억울함이 담긴 한 마디만 외칠 뿐.

“대체 어떻게 해야 널 죽일 수 있는 거냐!”

저벅-.

이내 흙먼지를 뚫고 대성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볼크스가 사력을 짜내 펼친 중력장은 여전히 발동되고 있는 상태에서.

“아아……. 아아아아아아아-!!”

양팔의 감각이 마비되고 칠공(七孔)에선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피가 흘러넘쳤다.

잠시 뒤.

“걱…….”

제풀에 지쳐 먼저 땅바닥에 두 무릎이 닿은 건 볼크스였다.

여섯 차례째 권능을 사용했을 때부터는 필름이 가위에 잘린 것처럼 기억이 뚝 끊기고 정신이 날아갔다.

그리고 문득 흐릿했던 초점이 되돌아온 볼크스의 시야 앞에는, 대성의 거구가 들이차 있었다.

콱.

대성이 볼크스의 검은 장발을 거칠게 쥐어 잡았다.

“꺼, 헉……?!”

“부탁 좀 하자.”

“…….”

“너희들이 모시는 그 ‘주교’라는 놈. 당장 내 앞에 데려와.”

“주교님은 지금 요양 중이셔서 함부로-.”

“대답 잘 들었다.”

잠깐 팔뚝에 힘을 준 대성이 이내 팔을 머리 위로 크게 들어 올렸다.

콰드드드득-!

그러자 무가 뿌리 끝자락까지 뽑히는 것처럼, 볼크스의 목이 몸에서 뽑혀 나왔다.

-휙.

그는 거들떠보기도 싫은 수급(首級)을 저 뒤쪽의 불기둥 쪽으로 무심하게 던졌다.

“이놈들이랑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치유>는 죽음에 직면한 육신을 소생시키는 대신.

재사용까지 아주 오랜 쿨 타임을 가졌고 이미 한 번 소모된 마력은 충전시키지 못한다는 단점을 지녔다.

‘이런 상황만 아니면 쓸 필요도 없었을 텐데…….’

저 시시하기 짝이 없는 중력 놀이에 발이 묶여, 그만 적의 공격을 허용하고야 말았다.

원래 같았으면 절대 저지르지 않았을 실책을 범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천마병 구현에 이렇게 많은 마력을 소모할 줄은.’

전 세계 70개국의 하늘에 구현한 천마병을 유지하는데 드는 마력 소모가 너무 심했다.

감기 몸살에 걸린 것처럼 기력이 쭉쭉 빠져나간 탓에 대성은 본래 제힘을 다 쓰지 못했다.

이대로 미적대고 있어 봤자 좋을 게 하등 없는 상황.

‘요양 중이라는 건, 그러니까 주무시고 계신다 이 말이지?’

대성은 ‘혈’의 기운이 느껴지는 저 먼 곳의 고성을 바라보았다.

저곳에 침입해, 넓은 내부를 일일이 뒤져 가며 ‘어둠 속 사내’를 찾는 게 과연 현명한 판단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이상, 이 시궁창 같은 세계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건 사양이었다.

“섬멸룡 구현.”

[<한대성의 섬멸룡>이 구현의 인에서 소환됩니다.]

대성은 다시 등장한 섬멸룡의 등에 올라탄 뒤, 하늘 위로 비상했다.

후우-웅!

빠르게 땅이 멀어지고, 우중충한 혼세의 하늘이 가까워졌다.

‘저놈이 쥐구멍에서 나올 생각이 없다면…….’

살짝 산소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까지 날아오른 그제야, 비상을 멈춘 그는 섬멸룡의 등에 올라탄 채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쥐구멍을 태워 버리면 알아서 기어나오겠지?’

아니, 놈이 있는 ‘혈’ 뿐만 아니라.

아예 ‘혼세’ 그 자체를 시공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도록 모조리 지워 버리고 싶었다.

-탁.

대성이 고삐를 치듯 섬멸룡의 목덜미를 두드리자.

쩌-억.

섬멸룡이 얼굴 가죽이 찢어질 기세로 크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화아아아-.

이내 금빛을 띤 소용돌이가 녀석의 입안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섬멸의 기운이 차오릅니다.]

황금색 광휘(光輝)가 세상의 소리마저 집어삼킨 적막한 순간,

“어디 이러고도 거기에 계속 처박힐 수 있나 보자. 쥐새끼야.”

[섬멸룡이 광살포(光殺砲)를 쏟아냅니다.]

------!!

섬멸룡의 입에서 뻗어나간 광선 한 줄기가 고성을 향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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