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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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막을 태우는 듯한 폭발이 혼세를 뒤덮었고, 폭음은 한 박자 늦게 울려 퍼졌다.
콰-앙!
대기가 요동치고,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나 볼 법한 버섯구름이 하늘에 걸린 먹구름 높이까지 피어올랐다.
‘굉장하군.’
지옥에 있었을 당시, 발라르크의 철성을 공략했을 때 딱 한 번 섬멸룡이 ‘광살포’를 쏘아 내는 광경을 보았다.
물론 그때도 진저리를 칠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력이었지만…….
지금 대성이 본 광살포는 그때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파괴력을 자아내고 있었다.
쿠구구-.
광살포에 직격당한 혼세의 고성이 꼭대기부터 밑동까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설마 한 방으로 끝날 거라곤 예상 못 했는데.’
적어도 서너 방은 쏠 것을 염두에 두고 발사한 광살포였다.
푸륵, 푸우-.
있는 힘껏 브레스를 토해낸 탓에, 탈진해버린 섬멸룡이 가파른 숨을 토해냈다.
대성은 그런 섬멸룡의 목덜미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나름대로 추측을 해보았다.
‘발라르크가 아닌, 나한테서 귀속되어 위력이 증가한 건가.’
섬멸룡은 종속 계약을 맺은 주인과 많은 부분에서 감응하고, 닮는다.
힘과 정신, 감정 등.
즉, 주인이 강하면 강할수록 섬멸룡도 덩달아 막강해지는 것이다.
“괜찮군.”
손에 있는 것들의 가치를 새로이 발견하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섬멸룡이 광살포 한 방으로 끝장낸 덕분에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지 않았는가.
대성이 흡족해하던 그때였다.
저벅-.
무너진 고성의 파편을 딛고 일어서는 존재를 눈에 담은 그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휘어졌다.
“이제야 그 낯짝을 볼 수 있겠어.”
한편으로는 존경심마저 들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겨우 모습을 드러내다니.
-훙!
날개를 접어 몸을 쭉 편 섬멸룡이 기민하게 버섯구름을 뚫고 지상으로 착지했다.
지상에 달라붙어 타오르는 업화의 불길과 광풍의 중심지에 들어선 듯한 먼지구름 속에서.
대성은 보았다.
“후우…….”
무릎을 꿇은 채, 조용히 손으로 바닥을 쓸어내며 깊은 한숨을 내쉬는 노인을.
직감했다. 저 노인이 바로 ‘어둠 속 사내’란 걸.
그 노인의 뒷모습을 지그시 응시하며 대성이 말했다.
“예전에 분명 내가 말했지?”
“…….”
“곧 그쪽으로 가겠다고.”
바람 부는 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노인은 대성을 돌아보는 대신, 이제는 한 줌의 재가 된 고성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 이틀 정도 걸어가면 우리들의 마을이 나온다.”
“…….”
“그 마을과 맞닿은 곳에는 탑이 있다. 우리는 자원하는 이들을 그 탑으로 데려가, ‘병사’로 키웠지. 열에 여덟은 병사가 되기를 자처한다. 어떤 낙도 없는 이 암흑 대륙에서 시간만 보내느니, 차라리 힘을 기르는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
너무나 아득히 떨어져 있어,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 곳을 가리키던 노인의 손가락이.
슥-.
‘고성’이 있었던 곳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지금 네가 무너뜨린 이곳은 이 암흑 대륙의 맥(脈)이 모여드는 중심지였다. 우리는 이곳을 ‘혈’이라고 불렀고, 나는 그 혈을 지탱하는 존재였지.”
그리고 보다시피.
고성은 파괴되었고 ‘혈’에 있던 노인은 무채색의 공간을 벗어나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너 때문에 이제 이 암흑 대륙은 차원의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거신께서도 이젠 온전한 몸으로 부활하실 수 없게 되었고.”
“잘됐네. 내가 원한 게 그거거든.”
“이 씹어 죽여도 모자랄 놈-!”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노인의 입에서 터진 고함이 천지를 울렸다.
진노가 자아내는 파동이 시야를 가득 메운 먼지구름을 걷어냈다.
“정녕 네놈이,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아직도 모른다는 말이냐?! 이루 셀 수 없는 수많은 차원, 수많은 행성의 종족들이 네놈 때문에 설 자리를 잃어버렸단 말이다! 그게 얼마나-.”
“라미쉬.”
그 말이 대성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노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노인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어, 어떻게 내 이름을…….”
“노인네라 그런지 말이 많아. 듣고 있기 괴롭다.”
엘하임의 기억을 통해 많은 걸 알게 된 대성의 머릿속에는, 당연히 눈앞의 노인, 라미쉬에 대한 정보도 들어 있었다.
“멸망한 행성, 헥카르의 유일한 생존자. 나는 너를 알고 있다. 그리고 네놈들이 ‘혼세’라고 부르는 이 대륙의 진실도.”
“중간계의 인간인 네가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냐!”
“그걸 내가 너한테 알려줄 의리는 없고.”
쩌적-.
유리알에 금이 가는 소리가 대성과 라미쉬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라미쉬는 초탈하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음에도 애통한 심경을 표정에서 숨기지 못했다.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막 열리는 게이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은 균열이, 이 암흑대륙의 하늘과 땅을 집어삼켰다.
대성이 하나의 차원이 붕괴하는 광경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사이, 라미쉬가 말했다.
목구멍에 칼을 씹어 삼키는 것만 같은 목소리로.
“……내겐 이제 남은 게 없다.”
“그래?”
“혈은 끊겼고, 혼세는 무너졌다. 많은 이들이 바랐던 세상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단 말이다…….”
라미쉬가 흙을 한 움큼 쥐었지만, 그마저 돌풍에 휘말려 저만치 날아갔다.
바람에 흩날리는 뿌연 먼지를 눈으로 좇던 라미쉬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끝을 살짝 흐리며 몸을 일으킨 그가 대성을 돌아보았다.
총알이라도 맞은 듯 안구가 헤집어진 왼쪽 눈.
괴사(壞死)하여 썩어 문드러진 고목 같이 되어 버린 오른팔.
각각 <주시>와 <강신>의 권능을 담당했으나, 2년 전 대성에 의해 이젠 불구(不具)가 된 신체 부위였다.
하지만 괜찮다.
아직 오른쪽 눈과 왼쪽 팔이 남아 있으니까.
파지직-!
라미쉬의 왼쪽 팔에 검은 전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천벌>의 권능이 만들어낸 전류는 이내 라미쉬의 몸을 휘감았다.
“적어도 마지막에는-.”
파지직-!
시커먼 번개가 괴사한 라미쉬의 오른팔에 근섬유처럼 뒤덮였다.
“네놈이 죽음을 구걸하는 모습만큼은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겠다!”
라미쉬가 천둥 그 자체가 된 양팔을 힘차게 지면에 내려찍었다.
쾅-!
유리알처럼 갈라지던 지반이 순식간에 위로 솟구쳤다.
쩌적-. 쾅-! 우르르-!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벼락이 작렬하고 뇌성벽력이 울렸다.
대륙을 찢는 충격파 속에서 대성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라미쉬가 내리치는 <천벌>의 권능 때문이 아니다.
‘슬슬 한계인가.’
과도한 구현화의 남발로 인해 마력이 소진되면서, 몸에 막대한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주룩.
다시금 코피가 터지고 이마에선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어쩔 수 없지.’
마력 부족으로 인해, 이 이상 발라르크의 갑옷과 업화대검을 몸에 붙드는 것도 한계다.
이대로 가다간 본래 위력의 절반밖에 내지 못하는 상황.
제힘도 못 내는 아이템에 마력을 소모하느니, 차라리 구현화를 해제하는 게 나을 터.
[<한대성의 섬멸룡>의 구현화가 해제됩니다.]
[<섬멸 용기사 발라르크의 갑옷>의 구현화가 해제됩니다.]
[<업화대검>의 구현화가 해제됩니다.]
갑주가 사라지고 드러난 그의 흉터투성이 상체에서 근육이 물결쳤다.
모든 것을 벗어던지니 몸이 한결 가벼워짐과 동시에 현기증이 말끔히 사라졌다.
땅에서 갈라져 나와 하늘로 솟구치는 바윗돌에 안착한 대성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와라.”
강력한 신수(神獸)도, 몸을 지킬 갑주도, 휘두를 칼도 없어진 대신.
근래 2년간, 가장 사납고 난폭한 투기(鬪氣)가 그의 전신에서 끓어 넘치고 있었다.
“……!!”
뇌신(雷神)이 된 라미쉬가 검은 번개를 사방에 흩뿌리며 대성에게 달려들었다.
콰-앙!
무너진 세계 속에서 두 개의 커다란 힘이 충돌했다.
그리고 허공에 어지러이 얽혀 무수한 공방을 주고받는 둘은 곧 게이트 밖으로 튕겨 나갔다.
***
기나긴 행렬의 후미에 섰다가, 이제 막 대피소로 접어들던 참이던 사람들은 보았다.
“어!”
“저, 저거!”
흑운(黑雲) 너머, 온 세상을 덮었던 초대형 게이트에서 이변이 발생했음을.
쿠구구-.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에, 밖에 있던 이들이 인상을 찡그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그곳에 있던 대다수는 저것이 어떤 재앙을 알리는 전조라고 생각한 나머지, 절망을 느꼈다.
그러나.
쿠구구…….
“어, 어어?”
“야, 서, 설마…….”
아무 밀도 일어나지 않자 질끈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뜬 사람들이 경악에 사로잡혔다.
초대형 게이트가 검은 구름을 빨아들이며 점점 안개처럼 옅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끼이이-?!
끼……! 끼이이……!?
창공에서 천마병과 박투(搏鬪)를 펼치던 미라들이 돌연 몸을 뒤틀더니, 이내 재로 소멸했다.
미처 대피소에 도착하지 못한 이들은 물론.
대피소 안에 있던 이들마저 그 소식을 듣고 밖을 빠져 나왔다.
“아, 아아……!”
환희에 찬 소리가 인파에서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확실하다.
게이트가, 그리고 미라가.
사라지고 있었다.
벼락을 쏟아내던 검은 하늘이 점점 맑게 개어갔다.
원래의 형태를 되찾은 하늘에서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하자, 몇몇 이들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희열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몇몇은.
“……응?”
이상하다는 듯이, 게슴츠레 눈을 뜨며 목을 길게 뺐다.
무언가가, 쾌청하게 변해가는 하늘에서부터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저거…… 사람 아니야?”
유달리 시력이 좋은 누군가가 그런 말을 입에 담기 무섭게.
쾅-!
“헉……?!”
마치 지뢰라도 터진 것만 같은 폭음이 지축을 흔들었다.
길가에 마구잡이로 널브러진 차들이 바람에 휩쓸린 낙엽처럼 흩날리고 아스팔트 도로가 뒤집혔다.
“또 뭔가!”
방금 지하 대피소에서 숨을 죽이던 박정호가 이사진과 직원의 만류를 뿌리치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렇게 죽음이 두렵지 않은 몇몇 사람들이 하나둘씩 지상으로 올라왔고.
“아…….”
그들의 입에서 탄식인지, 탄성인지 모를 신음이 흘러나왔다.
방금 미라 괴물에 잡아먹혀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하얀 머리의 남자가.
파지직-!
쾅-!
전신이 검은 번개로 이뤄진 괴물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으니까.
“하, 한대성 씨……?”
KHA 건물 입구에서 그 싸움을 지켜보던 박정호는 과연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대성과 번개 괴물이 공방을 주고받을 때마다 뿜어지는 여파에 도로가 부서지고 건물의 유리창이 와장창 깨져갔다.
명백히 인외(人外)의 경지에 접어든 사투.
파지직-!
“12년이다!”
검은 번개를 창처럼 만들어 손에 쥔 라미쉬가 그렇게 외치며 팔을 휘둘렀다.
그의 손을 떠난 번개의 창이 대기를 가로지르며 날아가 지표면을 까맣게 불태웠다.
쾅-!
대성이 직각으로 땅을 내려찍자 눈앞에 아스팔트 땅이 솟구치며 방벽이 생겨났다.
하지만 번개와 충돌한 순간 방벽은 가루가 되며 파괴됐다.
“무려 12년이란 시간을 공들여 세운 계획이었다! 그런데 네놈이!”
진각(進脚)을 밟아 순식간에 대성과 거리를 좁힌 라미쉬가 마구잡이로 주먹을 내려찍었다.
쾅-! 쾅-! 쾅-!
“네놈이 다 망쳤지!”
머리 위로 교차한 대성의 팔은 <경화>의 권능으로 인해 괴석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단단한 껍질이 연타를 모조리 막아내자, 라미쉬가 그의 어깨를 잡고 근처에 세워져 있던 건물로 던져 버렸다.
와장창-!
날아간 대성의 몸이 마천루 외벽을 쭉 그으며 솟구칠 때마다 창문이 사정없이 깨져나갔다.
그리고 정확히 15층 지점에서 대성의 모습이 사라지자,
팍-!
밀어내듯이 대지를 박찬 라미쉬는 한 번의 도약만으로 구멍이 뻥 뚫린 15층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난장판이 된 사무실 안쪽에서 피범벅이 된 대성이 쓰러져 있었다.
“네놈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쿵-. 쿵-.
땅을 육중하게 울리며 대성을 향해 걸어가던 라미쉬가 검은 번개의 주먹을 치켜들었다.
“차라리 다른 놈들처럼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것을-!”
그리고 낙뢰(落雷)나 다름없는 일격을 대성의 얼굴에 내려찍었다.
쾅-!
파스스-.
살벌한 타격이 가해진 순간, 대성의 몸이 그림자처럼 변해 사라졌다.
“가짜?”
라미쉬가 놀란 그때였다.
콰가가각-!
“억……?!”
돌연 그의 몸에 수많은 검상(劍傷) 그어지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직-!
불똥처럼 튀는 벼락 사이로 라미쉬의 피가 사방에 흩날렸다.
‘틀림없어. 이건 분명……!’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칼날의 폭풍 속에서 라미쉬는 깨달았다.
이건 분명 권능의 힘이라고.
‘<은신>과 <발검>을……!’
다름 아닌 그가 직접 혼세의 병사들에게 하사했던 힘이기에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방금 그 그림자는, <분신>의 권능일 터.
대성이 이 2년 사이에 <분신>의 권능까지 손에 넣었을 줄은, 라미쉬로써도 예상 못 했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벌레 같은 녀석이 감히 혼세의 힘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사실이!
“이까짓 재롱으로 뭘 어쩌겠다는 말이냐-!”
화약이 폭발하는 듯한 노성을 터뜨린 라미쉬의 오른쪽 눈이 안광을 뿜어냈다.
세찬 빛을 터뜨리며 발동한 <상쇄>의 권능.
그것이, 권능으로 몸을 숨기며 난무를 펼치던 대성에게 제동을 걸었다.
“들켰군.”
“이 벌레 같은 인간이……!”
성난 야수처럼 라미쉬의 오른쪽 눈이 번들거렸다.
<상쇄>는 문자 그대로 자신을 제외하고, 일정 반경에 있는 모든 권능을 해제시키는 힘.
이로써 저 벌레 같은 인간이 얕은수를 쓰는 일은 없어졌다.
남은 건, 맨몸이 된 저놈을 때려죽이는 것뿐.
쾅-!
바닥에 발을 찍은 라미쉬의 주변으로 벼락이 몰아쳤다.
“이 건물 째로 네놈을-.”
하지만 라미쉬가 말을 끝마치는 순간은 오지 않았다.
촤르륵-!
“……?!”
느닷없이 바닥과 천장에서 튀어나온 금색 사슬이 그의 몸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라미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속박>의 권능을……?!”
그럴 리가 없다.
오른쪽 눈이 멀쩡하게 뜨인 이상, 권능을 발현하는 건 불가능할 텐데!
혼란에 휩싸인 라미쉬가 사슬에 묶인 몸을 버둥거리던 가운데.
대성이 몸에 묻은 콘크리트 가루를 털어내며 말했다.
“<속박>의 권능? 그런 것도 있었나 보군. 참 별 게 다 있어.”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이건 네놈이……!”
“내가 다룰 줄 아는 장난감이 좀 많아서 말이지.”
그런 대성의 시야엔, 라미쉬는 보지 못하는 홀로그램 창이 부유하고 있었다.
테두리가 금빛의 띠로 둘러싸인.
천상의 ‘상점 창’이.
《단죄의 사슬》
* 천상계의 심판관, ‘히카누’가 이단들을 심문할 때 쓴 사슬.
* 사방에서 사슬을 소환하여, 지정한 대상을 속박합니다.
* 사슬은 다수의 대상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 해당 아이템은 실내 공간에서만 사용 가능합니다.
* 아이템이 적용되는 대상의 악심(惡心)이 짙으면 짙을수록 사슬의 강도가 높아집니다.
* 히카누가 사용하던 진품(眞品)이 아니기에 사슬은 20초가 지나면 자동으로 소멸합니다.
“비싼 공적 포인트 주고 산 보람이 있었군.”
“무슨……!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대체!”
“그건 중요하지 않아.”
저벅-.
대성은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실은 뒤,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라미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짤랑-. 짤랑-!
라미쉬가 발버둥을 칠 때마다 금빛 사슬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대성은 힘줄이 울긋불긋하게 솟은 주먹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이게 중요하지.”
고오오오-!
진홍빛 기류가 회오리바람처럼 그의 손에 모여들었다.
되도록 마력을 아끼려고 했으나.
역시 이런 순간만큼은 욕망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콰-앙!
“컥……?!”
대기를 찢으며 날아간 일격이, 라미쉬의 안면에 작렬했다.
그러자 <상쇄>의 권능을 발동시키던 놈의 오른쪽 안구가 망막 통째로 터졌다.
“허윽, 허, 억……?!”
두개골을 뒤흔드는 불같은 통증에 라미쉬의 숨통이 막혔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활어처럼 팔다리를 허우적대는 놈을 마주 보며, 대성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 고작 12년 가지고 뭐라 했었는데.”
콰드득-!
“적어도 80년 동안 인생을 날린 사람 앞에서 할 말은 못 됐어.”
<상쇄>에서 해방된 그의 주먹에서 예기 어린 괴석이 솟아올랐다.
“이, 이럴 순-.”
“있지.”
쾅-!
한 번 더, 무자비한 일격이 라미쉬의 얼굴에 쑤셔 박혔다.
쨍그랑-!
그와 동시에, 20초의 지속 시간이 종료된 사슬이 산산조각 깨지고.
주먹에 얻어맞은 라미쉬의 몸이 건물 밖으로 날아가 맞은편에 세워진 빌딩 외벽과 충돌했다.
“쿠, 헉-?!”
핏덩어리를 토해낸 라미쉬는 이내 지상으로 허물어졌다.
-털썩.
검은 번개의 몸을 지닌 뇌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비루한 행색의 노인만이 그곳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을 뿐.
“…….”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음을 직감한 대성이 건물 밖으로 몸을 날려 지상에 착지했다.
대(大)자로 널브러져 움찔거리던 라미쉬가 적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곤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아직……. 아, 아직…….”
처참한 몰골이 된 그가 비척대며 다가와 주먹을 날렸다.
휙.
퍽.
동체 시력이 멀쩡한 일반인도 능히 피할 수 있는 속도.
하지만 대성은 가만히 맞아 주었다.
피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아직……?!”
그때.
단숨에 라미쉬의 뒤를 잡은 대성이 왼팔을 가로로 세워 놈의 목을 짓누르듯이 붙잡았다.
“컥……! 커, 억……!”
“아니. 끝났어.”
“이, 그, 그윽……!”
라미쉬가 눈을 까뒤집으며 있는 힘껏 발악했지만, 당연히 의미 있는 저항은 되지 못했다.
-턱.
대성의 오른손이 놈의 이마에 올라갔다.
“나는 네놈들이 어떤 사정에 처했든 간에 상관 안 해.”
“끅, 끄흐윽……!”
그리고 목울대를 짓누르던 왼손을 조금 위로 움직여 놈의 턱마저 움켜쥔 순간.
“근데, 나랑 내 가족이 있는 곳은 건들지 말았어야지.”
우드득-!
그대로 목이 꺾인 라미쉬의 숨이 곧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