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90화 (90/180)

#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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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썩.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목이 꺾인 라미쉬가 땅에 쓰러졌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의 침묵이 일대를 지배했다.

“주, 죽었나?”

“……저거 죽은 거 맞지?”

“하, 한대성 사냥꾼이야. 틀림없어. 저 남자, 한대성 사냥꾼이야!”

하늘을 뒤덮은 초대형 게이트와 날개 달린 미라는 언제 나타났냐는 듯이 완벽하게 소멸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검은 번개의 뇌신 또한, 누가 봐도 죽은 상태.

안전한 곳에 숨어 있던 이들이 그제야 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반파된 건물과 난잡하게 쩍쩍 갈라진 아스팔트 도로.

물빛을 되찾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부신 광채가 그 모든 파괴의 현장을 따스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우.”

그 한 가운데에, 당당히 승리를 거머쥔 대성이 말없이 서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어느덧 에워싸듯이 모여 있는 인파들 사이로 세찬 함성이 터졌다.

사람들은 오늘, 초대형 게이트라는 역대급 재앙을 맞이함과 동시에 최단 기간에 1등급 게이트가 공략되는 진풍경을 보았다.

함성을 내지르는 이들 중 몇몇이 그 진풍경을 선보여준 영웅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내가 뭐라고 했나!”

그리고 연호하는 이들 중 한 명이었던 박정호는 뒤에 있는 이사진들을 돌아보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얼굴로 말이다.

“저분이라면 해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저분이라면……!”

그런 말씀 하신 적 없습니다만, 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분위기상 할 수 없기에 이사진은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이걸 어쩐담. 내가 지금 저분한테 가서 어떻게 이 감사한 마음을!”

안절부절못하며 무심코 딴 곳을 바라보던 박정호의 눈길이 이내 똑바로 대성한테 향한 순간.

박정호는 깜짝 놀랐다.

“어?”

갑자기.

대성이 번개 괴물의 사체를 두 손으로 들더니, 아까 구멍이 뻥 뚫렸던 건물 안으로 도약을 펼치는 것이 아닌가.

“어…….”

그 광경을 지켜본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져서 움직이지 못했다.

***

[복속된 마수, ‘사령단장 돌프’의 고유 권능이 일시적으로 절대자에게 전승되었습니다.]

[‘사령단장 돌프’의 고유 권능: <귀안>이 발동됩니다.]

적의 기억을 엿보는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

<귀안>을 발동하는 틈에 누군가의 방해나 간섭을 받으면 흐름이 끊기고, 형태가 온전하지 못한 기억을 볼 가능성이 크니까.

지잉-.

보랏빛으로 물든 대성의 눈동자가 죽은 라미쉬의 기억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식은땀이 미친 듯이 흘러나오고 보랏빛 눈에는 새하얀 실핏줄이 돋아나왔다.

-투툭. 툭.

터진 쌍코피의 핏방울이 죽은 라미쉬의 얼굴에 떨어졌다.

마력 부족 때문이 아니다.

“너무…….”

지금까지 봤던 것들은 모조리 새 발의 피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많은 정보가.

수많은 차원의 시공간이 실타래처럼 얽힌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한순간에 대성의 머릿속에 흘러들어와, 뇌세포를 갈가리 찢었다.

어마어마한 두통이 엄습했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미 한번 발을 들였는데, 머리가 좀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물러설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대성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라미쉬의 머릿속에서 별처럼 떠오른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 순간.

삐이- 하는 이명이 들려옴과 동시에, 번개처럼 강렬한 심상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

제일 처음 보인 건, 거대한 사슬이 온 세상을 집어삼키는 장면이었다.

녹색 창공을 찢어내고 대지를 갈라내며 뻗어 나오는 거대한 사슬.

그것들이 주변에 있는 이형(異形)의 건축물과 이형의 생물체들을 파괴하고 있었다.

-꿈일 거다.

그 기억 속에서, 라미쉬는 사슬에 집어 삼켜지는 이계(異界)를 보고 있었다.

라미쉬의 종족들이 사는 행성, 헥카르.

그곳이 멸망하고 있었다.

아니, ‘봉인’ 당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터.

-이건 꿈이란 말이다!

망연하게 외친 라미쉬의 시선이 사슬을 뱉어 내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곳엔.

순백의 갑옷을 걸치고, 여섯 장의 날개를 가진 병사들이 쉴 새 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다.

속절없이 죽어가는 동족들, 그리고 사슬에 으스러져 가는 자신의 고향과 세계를 본 라미쉬는, 급기야 눈물을 흘렸다.

사아아-.

시간이 흘러.

물속에 잉크가 퍼지는 것처럼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황천(黃天)에 물들어 모든 게 싯누렇고, 사방팔방이 거대한 산으로 둘러싸인 행성이었다.

아니, 잘 보니 그것들은 산이 아니었다.

죽은 거인.

숨이 멎은 ‘타이탄’들의 사체가 그득하게 쌓여 마치 산처럼 보였다.

그곳에서.

라미쉬를 비롯해 멸망을 피하지 못한 차원의 마지막 생존자들이 도열했다.

-부디…….

그리고 선봉에 서서 전의를 다지는 라미쉬가 문득 옆에 선 존재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부디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불처럼 너울거리는 머리카락.

황금의 갑주를 걸친 시커먼 육신.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이 광대한 저 존재의 정체를, 라미쉬의 시점을 빌린 대성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혼돈의 거신.

살아남은 유일한 타이탄이었다.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차원의 생명체 중에서도 가장 태초(太初)에 가깝고 높은 신격을 가진 종족.

타이탄은 광활한 차원 세계의 왕좌에 당당히 군림해, 우주의 균형과 질서를 책임지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천상(天上)에서 내려온 이들이 거대한 사슬로 행성과 차원을 짓밟으며 질서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혼돈이 타이탄을 물들였고, 혼돈을 버티지 못한 거신족들은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딱 한 명.

타이탄 중에서도 생명력이 가장 고강했던 자가 그 혼돈을 받아들이고, 버텼다.

그렇게 생존한 그는 무너져간 차원의 생존자들을 모아 대전쟁을 준비하였다.

각기 모습과 사상이 다른 그들이 이 황폐한 땅에 한데 뭉친 까닭이 이것이었다.

쿵-. 쿵-.

곧.

타이탄들의 땅마저 점하기 위해, 천상의 병사들이 황천에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혼돈의 거신이 포효를 터뜨리자, 그의 뒤에 선 수많은 종족이 함성을 내질렀다.

대 전쟁이 시작되었다.

혼돈의 거신이 두 손에서 파멸의 섬광을 뿜어냈고, 라미쉬를 포함한 차원의 병사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전력을 퍼부었다.

하늘을 뒤덮은 백색 갑옷의 병사들이 예의 거대한 사슬을 날렸다. 수십 마리의 용처럼 들이닥친 사슬들이 그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메마른 평원은 용암이 솟구치는 불의 대지로 변하고 구름 한 점 없었던 황천엔 끝없는 빛과 어둠이 교차했다.

천지를 뒤흔드는 죽음의 대 전쟁이 하염없이 이어졌다.

-신이시여!

그리고 그 대전쟁의 종국에, 심장이 꿰뚫려 쓰러지는 혼돈의 거신과 절규하는 라미쉬를 마지막으로.

사아아-.

다시 한 번, 풍경이 바뀌었다.

패잔병들은 기신(機身) 종족들이 발명한 대형 수송선을 타고 광대한 우주를 유랑했다.

천계의 적들을 피해 몸을 숨길 장소가 필요했으니까.

-저건…….

그리고 오랜 세월을 방황한 끝에야, 그들은 발견할 수 있었다.

별의 찌꺼기.

애초부터 그 어떤 생명도 살아 숨 쉬지 않은 텅 빈 공터.

암흑 대륙.

바로 혼세(昏世)를.

사아아-.

우주의 현자(賢者)라는 이명을 지닌 ‘워쳐’라는 종족이 있다.

다른 종족과 마찬가지로 천계의 적들로부터 고향을 잃은 워쳐 중 하나가 말했다.

-이 암흑 대륙은 근본 자체가 생명이 태동할 수 없는 죽어 버린 땅. 이곳에서 재기를 노리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라미쉬가 묻자, 워쳐는 대답했다.

-찾아야죠. 영혼과 생명이 있고, 아직 천계의 손이 미치지 않은 행성을.

그들의 생각은 이러했다.

우선, 천상의 존재들에게 침식당하지 않고 멀쩡한 땅을 발견하면.

그 땅에 구획을 잘게 나누어, 각 종족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만든 뒤, 조금이나마 개체 수를 늘리고 전열을 가다듬기로.

그리고.

-부디 그 행성의 존재들이 맑은 영혼과 생명을 지녔기를 바라죠.

-어째서지?

-거신의 재림(再臨)에 사용할 양분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

바로 ‘제물’이었다.

라미쉬가 속한 ‘헥카르’ 종족은 여러 종류의 차원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주술(呪術)에 통달한 자들.

부활의 ‘양분’이 되어줄 영혼만 충분할 경우, 대 전쟁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거신을 되살리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아시겠지만, ‘물질계’를 벗어난 그분을 되살리는 건 당신의 존재력을 바닥까지 긁어모으는 금기. 거신께서 부활하시더라도 당신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상관없다.

-……상관없으십니까?

-그분을 부활시킬 수만 있다면, 내 한 몸 희생하는 거야 무한한 영광으로 받아들이지.

어차피 거신이 없으면, 다시 천계의 적들과 전쟁을 벌인다 한들 패배하는 건 똑같을 테니까.

얼마 안 있어, ‘관측의 눈’을 사용한 워쳐는 재기를 노리기에 적합한 행성을 찾을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인간계.

바로 지구였다.

‘…….’

너무나 눈에 익은 푸른 별이 라미쉬의 시점에서 펼쳐지자, 대성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 어떤 외(外) 차원의 간섭도 받지 않고, 티끌만큼의 신격도 지니지 못한 행성이라 그럴까.

지나치다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의 순결이, 오히려 혼세의 존재들에겐 독이 되었다.

-저 땅에 우리들의 반석을 세워봤자 무너지기만 할 뿐이다.

지구의 생태계는 외계에서 온 이들이 살아가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선 행성을 개조시키기로 했다.

사아아-.

몇 세기나 앞선 기술력을 가진 기신족에겐 ‘오브(Orb)’라는 장치가 있었다.

언뜻 보기엔, 그냥 커다랗고 표면에 빛이 날 뿐인 평범한 옥(玉).

그러나 사실 이 옥 내부엔, 다양한 차원의 환경이 ‘극히 한정된’ 면적으로 조성된 복제 공간이 구현되어 있었다.

원래는 어디까지나 연구 목적으로 만든 장치였으나,

-이것을 저들의 땅에 심읍시다.

벼랑 끝에 몰린 기신 족은, ‘오브’를 재기의 신호탄으로 써먹기로 했다.

한 기신 족이 라미쉬에게 말했다.

-이걸 인간계에 심자고?

-예, 안에 구현된 각 차원 세계의 에너지가 오브의 외부로 흘러나오거든요. 극미량이긴 하지만.

-그럼…….

-그 흘러나오는 에너지들이 조금씩 인간들의 영토와 공기를 갉아 먹고, 뒤바꾸겠죠.

‘오브’를 통해 인간계를 차츰 자신들이 살아가기에 알맞은 환경으로 개조시키는 것.

그 방법만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라미쉬는 이내 ‘오브’ 속에 다양한 차원 세계의 종족을 투입했다.

그렇게 ‘오브’를 통해 인간계에 발을 들인 이들에겐 제물을 모으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인간계의 행성 개조, 그리고 제물 수집이라는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작정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그들은 인간들의 세계에 오브를 전이시켰다.

훗날.

지구에 ‘게이트’라고 불리는 이상 현상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인간은 맑은 생명과 영혼을 지녔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탐욕에 찌든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게이트에서 미지의 에너지원을 발견했다.

인류는 그것을 ‘에테르’라고 불렀고, 시간이 좀 더 지나 에테르의 영향을 받아 초인으로 각성하는 이들이 탄생했다.

그리고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인류는 그 에테르를 신(新) 자원으로 추대하기 시작했다.

에테르를 기반으로 한 산업 혁명이 지구 전역에 불어 닥치고,

-멍청한 놈들.

혼세의 존재들은 그런 인류의 행보를 장려했다.

그들이 ‘게이트’를 왕래하면 왕래할수록, 지구의 생태는 혼세의 존재들이 바라는 형태로 점차 바뀌어 갔으니까.

미개하고 오만한 인간들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자신들이 추앙해 마지않는 그 힘이, 자신들의 멸망을 초래할 계기가 되리란 걸.

그렇게 게이트가 등장한 지 10년이 지난 그때.

-한대성……!

라미쉬조차 놀랄 이변이 발생했다.

그 이변은, 그 어떤 인간도 알아채지 못했던 ‘디멘션 테이커’를 죽이고 급기야 제단까지 무너뜨렸다.

혼세의 존재들이 진행하던 계획에 치명적인 차질이 빚어졌다.

-한대성……!!

엘하임이 죽고 <주시>와 <강신>의 권능을 잃던 날.

라미쉬는 분노했다.

게이트를 통해 인간계의 땅을 완전히 동기화시키기까지 앞으로 ‘2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돌연 등장한 인간에 의해 순조롭게 흘러가던 계획의 흐름이 깨졌다.

-아니. 진정해. 아직은, 아직은 괜찮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대성이 훼방을 놓기 시작한 건, 지구에 게이트가 출몰한 지 10년 후.

그리고 그 10년 동안, 지구의 땅은 이미 충분히 외(外) 차원의 기운에 물든 상태였다.

-2년 뒤, 인간계로 통로를 잇는다. 예정은 변하지 않았어.

혼세로 대피할 때 타고 왔던 대형 수송선도, 연료 고갈로 인해 써먹지 못하게 된 상황.

한두 명 정도야, 라미쉬 자신이 지닌 주술로 공간 전이를 시킬 수 있겠지만.

이 암흑 대륙에 숨어 지내는 수많은 차원 종족 전체를 주술만으로 모두 전이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그들을 지구로 이주시키기 위해선.

‘혈’의 힘을 이용해, 혼세와 이어지는 차원의 통로를 개방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인간계에서 거신의 수육(受肉)을 위한 제물을 모으면…….

그리하면.

모든 게 끝난다.

-우리는 인간계의 땅에서 새롭게 시작해, 천상의 쓰레기들과의 전쟁을 준비할지니!

그것이 라미쉬, 그리고 혼세의 무리가 꾸몄던 원대한 계획.

하지만.

“병신들.”

보다시피.

대성 한 명에 의해 혼세는 멸망했다.

그리고 라미쉬가 말했던 통로 즉, 초대형 게이트마저 닫혔다.

저들이 숱한 세월을 바치며 세웠던 그 원대한 계획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팟.

<귀안>을 해제한 대성은 라미쉬의 머릿속에서 벗어났다.

굳이 뇌세포를 혹사하면서까지 라미쉬의 기억을 확인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꼼꼼해서 나쁠 건 없지.’

혹시 모르는 노릇 아닌가.

아직 대성이 모르는 무언가가 더 남아 있을 확률이.

하지만 라미쉬의 기억을 전부 읽은 지금, 그는 확신했다.

‘없어. 이제 다 끝났다.’

어둠 속에 숨어 인류를 위협했던 존재들은 박멸되었다.

초대형 게이트를 개방하는 열쇠였던 ‘혈’도 이제는 멸망한 혼세와 함께 사라졌다.

‘라미쉬가 죽어도 혈과 혼세가 멀쩡하면 뒤탈이 남았겠지만.’

이젠 그 뒤탈을 신경 쓸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다만.

‘그럼 지금 지구에 아직 남아 있는 게이트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 부분만큼은, 라미쉬의 기억을 엿봤음에도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혼세가 무너짐으로써 지구의 게이트도 소멸하면 좋겠지만.

일단 그런 식으로 일이 형편 좋게 굴러가리라는 기대는 접기로 했다.

우선,

“……피곤하군.”

지금은 조금 쉬고 싶었다.

바닥까지 고갈된 마력 탓에, 탈진해버릴 지경이었으니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대성이 쪼그려 앉았던 몸을 일으키던 그때.

-반짝.

바닥에 널브러진 라미쉬의 몸이 반짝였다.

“…….”

볼 것도 없이, 권능의 획득이 가능하다는 신호일 터.

그러나.

혼세가 완전히 무너진 이 마당에, 굳이 더 힘을 손에 넣을 필요가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안일하게 구는 것보단 낫겠지.’

혼세가 사라졌다고 해서, 지구상의 게이트도 전부 사라지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판국이다.

만약 게이트가 잔류한다면, 그건 즉 대성의 싸움도 아직 100%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다는 의미.

‘생각할 필요도 없다.’

얻을 수 있는 건 얻는다.

언제나 지켜왔던 철칙을 다시금 되새긴 그가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아까 깜빡 잊고 획득하지 못한 볼크스와 카리나의 권능이 떠올랐다.

“쯧. 신경 쓰이게.”

대성은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라미쉬의 사체에서 번뜩이는 권능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이건……?”

대성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신경 쓰였던 미련을 지우고도 남을 만큼.

‘상상외’의 것이 그 작은 광채 속에 깃들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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