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91화 (91/180)

# 91

091

권능을 손에 넣을 땐 특유의 느낌이 있다.

마치 가슴 속에 또 하나의 심장이 생겨 맥동하는 듯한 두근거림.

“…….”

그런데 지금은 그 두근거림이, 이전보다 50배는 더 격렬하다고 하면 얼추 상상이 가는가.

대성은 터질 듯이 박동하는 심장에 손을 올리며,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알림을 바라보았다.

[‘혈(穴)의 지배자’ 라미쉬를 쓰러뜨렸습니다.]

[‘혼세의 주교(主敎)’인 라미쉬가 평생에 걸쳐 연구하고 개발한 성과가 절대자의 몸에 스며듭니다.]

[주교의 권능: <더 북(The book)>을 획득하셨습니다.]

<권능 정보>

더 북(The book)

[전 우주의 수많은 종족 중에서도, 가장 주술에 능통하다 전해지는 헥카르의 성인이 추구한 흑마도(黑魔道)의 정점.]

[서책에는 그간 혼세의 주교가 창조한 모든 권능의 정보가 적혀 있습니다.]

[페이지마다 적힌 권능을 본인이 직접 사용하거나, 혹은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습니다.]

[해당 페이지에 적힌 권능을 사용하기 위해선 약 30초 이상 페이지에 시선을 맞추어야 합니다.]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는 권능은 총 1개입니다. 일주일이 지나면 양도했던 권능은 자동으로 회수됩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카리나와 볼크스의 권능을 미처 획득하지 못하고 혼세를 빠져나온 게 아쉬웠던 참이다.

그런데 시스템 창에 적힌 글귀는 그런 아쉬움을 단박에 날려 버리고도 남았다.

‘한 마디로 존재하는 모든 권능을 한꺼번에 얻었다는 건가.’

권능은 지옥이나 천상의 시스템에서 비롯된 아이템과 비교해 규모나 위력은 떨어질지언정.

그만큼 희귀한 성능을 지닌 것들이 가끔 존재했다.

이를테면 여러모로 잘 애용하고 있는 <염사>나 <은신>이 그러했다.

그런데 그것들을 한꺼번에 손에 넣을 수 있다니.

“나쁘지 않네.”

갖고 놀기 좋은 장난감이 무더기로 수중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설명에 적힌 대로, 라미쉬의 혼과 열정이 서린 연구물이라 그럴까.

대성은 세세하면서도 장황하게 적힌 시스템의 글귀를 마저 읽어 내려갔다.

[해당 페이지를 열람하여 획득한 권능은 1시간 동안 사용이 가능합니다.]

[한 번 사용했던 권능은 5시간 뒤에 재사용이 가능합니다.]

모든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대신 제약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2년간 얻었던 권능들은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염사>, <은신>, <도발> <침식의 방>, <발검>, <경화>, <분신> 등.

사가트를 제외하면, 디멘션 테이커 한 마리당 하나씩 얻었던 권능은 원할 땐 언제든지, 그리고 지속적인 발현이 가능했다.

하지만 <더 북>은 범용성이 넓은 대신, 명확한 한계를 지녔다.

별로 상관은 없지만.

‘장단점은 뚜렷한데, 그래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커.’

어떻게 응용할지는 어디까지나 본인의 역량에 달린 문제.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대성은 바로 <더 북>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다른 권능이 그러했듯이, <더 북> 또한 어떻게 사용하는지 본능이 알려주고 있었다.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오른손을 가슴 높이로 들어 올린 순간.

-화륵.

검은 연기가 소용돌이처럼 휘돌며 그의 손바닥 위로 모여들었다.

기체는 점점 고체로 굳어지더니, 이내 새카만 가죽 표지로 뒤덮인 고서(古書)가 나타났다.

“흠.”

대성은 고서를 쥔 뒤, 첫 페이지부터 차근차근 훑어보았다.

30초간 페이지에 시선을 마주하면 자동으로 권능이 습득된다고 시스템에 나온 이상, 한 페이지에 오랫동안 머물 수는 없는 노릇.

-촤르륵.

대강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정도만 간략하게 파악하며, 대성은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그 순간.

멈칫.

만화책 넘기듯 재빨리 넘어가던 페이지가 특정 구간에서 멈췄다.

“이건……?”

다름 아닌, 어떤 권능 하나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권능 정보>

접속

[잠금된 정보.]

[차원 종족의 생명석을 획득하여 100%의 수집률을 달성할 시 정보 해금.]

[현재 수집률: 0%]

다른 페이지에 적힌 것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내용.

혹시 몰라 30초 동안 페이지를 응시해 보았으나,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흠…….”

차원 종족의 생명석을 획득하라는 건, 쉽게 말해 몬스터를 죽이라는 말인 걸까.

다른 페이지에도 정보가 잠겨 있는 권능이 있나 마지막까지 종이를 넘겨보았으나.

해금되지 않은 권능은 <접속>만이 유일했다.

‘찝찝하네.’

특정 조건을 만족하기 전까지 굳이 정보를 숨긴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정보를 숨겨야 할 만큼 강력하다는 뜻일까.

하지만 ‘접속’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강력함’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뭔가 있어.’

찜찜하기는 했으나, 명쾌한 정답도 낼 수 없는 상황에서 괜히 고민에 빠질 필요는 없다.

일단은 여기서 말하는 ‘생명석’이란 걸 모으다 보면, 의문을 해소해줄 정답은 자연스레 나올 터.

탁.

대성은 찝찝함을 털어 버리며 책을 덮었다. 책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연기로 다시 변하며 흩어졌다.

‘진짜 쉬자.’

반나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나 많은 격전을 치렀다.

지옥에서 돌아온 뒤로 이만한 강행군이 과연 있었나 싶을 정도로.

슬슬 돌아가서 집에 있는 가족의 얼굴도 보고 싶고.

‘걱정 많이 하고 있을 텐데.’

혜정과 지수에게는 대피소로 가지 말고 그대로 집에 있으라고 일러두었다. 당연히 대피소보다는 ‘발라르크의 철성’이 로드된 집이 훨씬 안전했기 때문이다.

“내 말을 잘 믿어 주니 망정이지.”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피로에 찌든 몸을 일으키던 그때였다.

웅성웅성.

집중하고 있었던 탓에 들리지 않았던 건물 밖 소음이 이제야 그의 귓전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스친 대성이 몸을 돌려 아래쪽 지상을 내려다본 순간.

“아! 저기 나왔다!”

“한대성 사냥꾼!”

“인터뷰 준비해! 빨리!”

그사이에 벌써 수많은 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건물 앞에 모여 대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죽다 살아난 끝에 그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하는 시민들.

이런 날에도 투철한 직업 정신을 발휘하며 귀신같이 달려온 각종 언론사의 기자들까지.

중세시대 때 영웅의 개선 행진을 칭송하던 민중의 모습을 21세기 식으로 옮기면 저런 광경일까.

“…….”

대외적인 이미지도 있기에, 웬만하면 화답하고 싶었으나.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지금의 상태로는 저기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팟.

“어!”

“뭐, 뭐야?”

“어디 갔어?”

대성이 <은신>을 이용해 몸을 숨긴 순간, 사람들이 휘둥그레 뜬 눈으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느긋하게 집까지 산책하듯 걸어갈 수 있었다.

***

<상공에 출몰한 초대형 게이트! 다음에도 재등장할 가능성은?>

<한국의 사냥꾼이 단독으로 미증유의 사태를 해결하다.>

<갑자기 하늘에서 나타난 비행체. 한대성 사냥꾼의 소환수인 것으로 유력.>

<내일 오전 중으로 초대형 게이트 출몰 사태에 대한 정부의 공식 입장 발표 예정.>

심각한 인명 피해 없이 사건은 종결되었으나, 세상은 여전히 떠들썩했다. 아니, 오히려 모든 게 끝난 뒤이기에, 한시름 놓은 사람들은 마음껏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다음에도 초대형 게이트가 다시 등장할지 모른다며 걱정했다.

생방송 패널에서는 열띤 토론이 펼쳐졌다.

<마냥 한대성 사냥꾼 한 명에게만 의지할 순 없지 않습니까. 그럴 거면 클랜과 협회는 왜 있고 사냥꾼들은 또 왜 있겠어요.>

<확실한 건 이번 일을 통해, 우리가 ‘사냥꾼’이란 자들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 알게 됐다는 거죠.>

<이건 한대성 사냥꾼 혼자의 활약인 거지, 클랜과 사냥꾼 전체의 위상이 올라간 게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추락한 거죠.>

<대형 클랜이면 뭐합니까? 그래서 그들이 이번 초대형 게이트 사태 때 뭘 했는데요?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대피소로 도망치고 한대성 사냥꾼이 분투할 때 그들은 어디에 있었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루도 채 안 되어 새로운 의제(議題)가 대두되었다.

사냥꾼과 협회, 그리고 대형 클랜에 대한 대중의 신뢰도가 곤두박질을 치게 된 것이다.

쨍그랑-!

물이 담긴 유리잔이 TV 화면 속 패널의 남자 얼굴에 날아갔다.

“그, 그랜트…….”

미국의 대형 클랜, <컨트리>의 본부 건물.

그곳 팀원들은 동이 트기도 전에 비상소집 연락을 받고 본부 회의실에 모여야만 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기 무섭게, <컨트리>의 단장이자 미국의 S급 사냥꾼, 그랜트 넬슨의 눈치를 살폈다.

“은혜도 모르는 새끼들. 뚫린 주둥이라고 아주 잘도 떠들어, 응?”

삑.

그랜트는 유리잔 파편이 박힌 TV를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리모컨으로 껐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겁쟁이들처럼 벌벌 떨면서 손가락만 빨았나? 말을 해도 아주…….”

“그놈이 나타나지만 않았으면 북미의 안전은 <컨트리>가 책임졌겠죠.”

그랜트의 말을 받은 건, 클랜의 간부 중 하나인 앤드류 노리스였다.

앤드류 또한 같은 S급이었고, 그랜트의 총애를 꾸준히 받아 왔다.

물론 단순히 앤드류가 S급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랜트에게 호의를 산 것은 아니었다.

“동양의 미친개가 저희 밥그릇을 뺏은 겁니다. 저희는 졸지에 무능한 놈들이 됐고요.”

둘은 생각이 잘 맞았다.

앤드류는 그랜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히 짚었다.

“그랜트. 이대로 계속 두고만 보고 계실 겁니까?”

“두고만 볼 거면 내가 이 시간에 비상소집령을 내렸겠나?”

“뭔가 조치가 있어야겠죠.”

서로 눈이 마주친 둘 사이에서 음습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적막한 무언(無言)이 많은 걸 전해 주는 법.

회의실을 지배한 정적의 의미를 파악한 팀원 몇이 질겁하면서 입을 열었다.

“안 됩니다. 절대 안 됩니다!”

“아무래도 두 분께서 많이 흥분하신 듯한데. 잠깐만 화를 가라앉히시고 생각을 다시…….”

“상대는 그냥 사냥꾼도 아니고. 그 한대성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그랜트가 평소 어떤 방식을 고수하는지 잘 알고 있다.

걸림돌이 될 만한 자는 가차 없이 제거하는 것.

그렇게 사냥감을 처리한 뒤엔, 대형 클랜의 권력을 동원해 어떻게든 그 행적을 은폐했다.

자살로 위장하든가, 게이트에서의 사고사로 위장하든가 하는 식으로.

물론 이곳에 있는 자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달리 말해 그들 또한 평소에 그랜트의 방식에 동조하고 있었다는 의미.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방식에 손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역으로 우리가 당할 수도 있습니다. 신중해지십시오, 제발.”

“차라리 언론사에 돈을 쥐여 줍시다. 그나마 우리 <컨트리>는 할 일을 했다고요.”

상대가 너무 나빴으니까.

건드려서는 안 될 미친개를 건드리려고 하니까.

이번만큼은 조용히 넘어가자고 간부들의 성토가 빗발치던 가운데.

쾅-!

테이블에 내리쳐진 그랜트의 주먹이 좌중을 침묵에 휩싸이게 했다.

“그나마 우리는 할 일을 했다고?”

“지, 진정하십시오.”

“비싼 돈 쥐여 주고 겨우 얻는다는 게, 그래. ‘그놈보단 못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노력했어요.’ 정도인가?”

“아니. 제 말은 그게…….”

“너희들은 자존심도 없나?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동양 놈이 우리 입지를 다 잡아먹고 있는데?”

“하지만 한대성 그놈은…….”

“강하니까 건들지 말자고? 뭐, 그럼 우리는 동양인 한 놈도 못 당해내는 허수아비란 말로 받아들여도 되겠군?”

“…….”

반박을 이어가던 간부는 결국 시선을 피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설득하기엔 늦었다.

그랜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성을 처리할 작정인 게 눈에 훤히 보였으니까.

그랜트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미국엔 간섭하지 말았어야지.’

적어도.

<컨트리>가 꽉 쥐고 있었던 홈그라운드가 침범당했다는 사실만큼은 참을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본토의 많은 이들이 클랜을 욕하고, 그랜트에게 분노했다.

‘이 시건방진 새끼.’

대중의 이미지는 곧 클랜의 위상과 직결되는 문제.

무슨 수를 써야만 한다.

무슨 수를…….

***

미국에는 이제 막 해가 떠오를 시각이지만 한국은 새까만 밤이었다.

몸을 씻고 원했던 휴식을 마음껏 취하던 대성은 문득 잊고 있었던 점을 하나 떠올렸다.

‘보고해.’

다름 아닌, 문세걸을 죽이기 위해 마카오로 날아간 황준영 일행 쪽 상황이었다.

마수화가 된 셋에게는 언제 어느 때고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곧바로 황준영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마카오로 가는 도중에 사고가 좀 생긴 탓에 도착이 늦었네.]

‘무슨 사고.’

[미라 놈들한테 습격을 당했어. 그래서 해츨링을 한 마리 잃었는데……. 음.]

‘상관없어. 문세걸은?’

[겨우 몰래 뒤를 밟을 수 있었지. 지금 호텔에서 쉬는 중이네.]

“가급적이면 조용히 처리해. 호텔이면 다른 투숙객도 많을 테니까.”

[알겠네. 지금 맞은편 건물 옥상에서 예의주시…… 어!]

그 순간.

평탄했던 황준영의 목소리에서 짙은 경악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별로 좋은 느낌은 들지 않았던 대성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