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92화 (92/180)

#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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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나?”

“2607호실. 지금 막 들어와서 옷을 벗는…… 아이 씨. 내가 이 나이 먹어서 사내새끼 알몸까지 봐야 하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대체.”

“동혁이 자네가 나보다 눈이 좋은 걸 어쩌겠나.”

“이따위 시각 테러를 당하느니 차라리 안구를 뽑고 말지.”

5분 전.

마카오 세나도 광장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이 잘 내려다보이는 맞은편 건물 옥상.

황준영과 박동혁은 그곳에서 호텔의 26층 유리창을 주시하고 있었다.

박동혁의 얼굴에 달린 여섯 외눈 중 세 번째 것이 저격총의 스코프와 같은 배율로 확대되며 호텔 내부를 염탐했다.

좌우로 살짝 젖혀진 커튼 사이로, 이제 막 목욕을 하기 위해 옷을 벗는 중인 검은 머리 남자, 문세걸이 보였다.

“…….”

본인의 시력으로는 유리창 너머가 잘 보이지 않았던 황준영은 로비가 있는 입구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야구 모자를 이마 아래까지 깊게 눌러쓰고 온몸을 얇은 후드와 청바지로 꽁꽁 둘러 싸맨 신초영이 입구를 서성이고 있었다.

우연적인 타이밍인지, 문득 건물 옥상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가 눈짓을 보냈다.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겠지.’

만약 암살에 실패해 문세걸이 도주할 시를 대비해, 그녀를 호텔 입구에 배치했다.

물론 가장 최선은 그녀가 행동할 필요도 없이 조용히 암살을 마치는 것이겠지만.

다른 곳이면 모를까, 타깃이 있는 곳은 번화가의 중심지에 세워진 5성급 호화 호텔이 아닌가.

‘문제는 어떻게 문세걸 저놈을 암살하냐는 건데…….’

-화륵.

바로 그때, 황준영의 시커먼 오른팔이 돌연 화로에 빠진 숯불처럼 빨갛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지옥에서 배웠던 스킬, <발화>였다.

“야, 야. 뭐 하려고?”

갑자기 옆에서 열기가 훅, 하고 끼쳐오자 박동혁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황준영은 잠시 대꾸하지 않은 채, 불에 휩싸인 오른팔을 뻗어 손가락 총을 만들었다.

어깻죽지와 팔뚝을 뒤덮인 불길이 이내 날카롭게 펴진 그의 검지에 모여들고, 맺혔다.

그 모습을 보고 설마, 싶었던 박동혁이 깜짝 놀랐다.

“그렇게 할 생각이야?”

“쉿. 나 좀 집중하게 내버려 두게.”

“한대성 개새끼. 이런 일을 시킬 거면 뭐 총이라도 챙겨 주던가 하지. 에이, 쯧.”

“…….”

극도로 집중한 탓인지, 이제는 황준영의 눈에도 잘 보였다.

커튼 틈새로 희미하게 비치는 문세걸의 모습이.

명중률을 올리기 위해, 황준영의 왼쪽 눈이 주름살을 새기며 감겼다.

하지만.

“후우.”

지금은 무리다.

차라리 문세걸이 커튼을 확 열어젖혀, 제 모습을 완전히 보이기 전까지는 힘들 터.

그때.

[보고해.]

머릿속에서 대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와 이런 식으로 통신을 나눈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황준영은 자연스럽게 응답했다.

‘마카오로 가는 도중에 사고가 좀 생긴 탓에 도착이 늦었네.’

[무슨 사고.]

‘미라 놈들한테 습격을 당했어. 그래서 해츨링을 한 마리 잃었는데……. 음.’

[상관없어. 문세걸은?]

‘겨우 몰래 뒤를 밟을 수 있었지. 지금 호텔에서 쉬는 중이네.’

[가급적이면 조용히 처리해. 호텔이면 다른 투숙객도 많을 테니까.]

‘알겠네. 지금 맞은편 건물 옥상에서 예의 주시-.’

그 순간.

문세걸이 있는 26층의 창가에 고정되어 있던 황준영의 시야가 동요로 차올랐다.

그런 황준영보다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시력이 뛰어나 호텔 내부가 훨씬 잘 보였던 박동혁이었다.

“어!”

둘의 입에서 동시에 그런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유리창 너머.

반라 상태였던 문세걸의 피부가 돌연 시체처럼 부패하고, 뒤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푸확-!

이내 문세걸의 입에서 터져 나온 녹색 토사물이 커튼을 물들였다.

***

툭.

바짝 세웠던 긴장을 조금 완화하기 위해 입에 물었던 담배가 땅에 떨어졌다.

회전문 너머 로비를 집요하게 노려보던 신초영 또한 당황한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엉?”

그녀는 자신이 본 광경을, 그리고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호텔엔 일반인 말고도, 문세걸이 이끄는 암흑가의 조직원이 서너 층의 몇몇 방에서 투숙하고 있었다.

20초 전까지만 해도 신초영이 본 것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로비로 내려온 조직원 두 명의 모습.

그런데 갑자기.

그 둘이 난데없이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더니, 이내 온몸에 진물이 철철 흘러내리는 썩은 좀비로 변해 로비에 있던 여직원을 덮쳐 목을 물어뜯는 게 아닌가.

“이게 뭔……! 대체 뭔 상황이야, 이게……?!”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그녀가 공황에 빠진 순간.

일순 예리하게 곤두선 그녀의 기감이 무언가를 잡아냈다.

“설마…….”

신초영이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문세걸 파의 조직원이 투숙한 20층대 지점을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의 비명.

좀비의 괴성.

그리고 피가 튀는 소리.

“그놈들 전체가……?”

뭔지는 몰라도.

저 위쪽에 있는 조직원 전체가 좀비로 변한 듯했다.

변한 건 둘째 치고서라도, 20층대에는 그들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도 투숙하고 있다.

저 비명이 지금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불 보듯 뻔하다.

“캬아아악-!”

그때, 로비에 있던 좀비 두 마리가 신초영을 발견하고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넋을 잃고 위쪽을 바라보던 신초영은 퍼뜩 정신을 차린 뒤, 허리춤에 차고 있었던 두 자루의 쌍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서걱!

X자로 교차한 은빛 횡선이 달려오던 좀비의 목을 잘라냈다.

격하게 칼을 휘두른 탓인지 얼굴을 가리던 야구모자가 떨어졌다.

“B급 영화도 아니고 아닌 밤중에 갑자기 이게 무슨…….”

“아아-! 으아아아!!”

“꺄아아아악-!”

근처에 있던 목격자들의 비명이 신초영의 귀를 따갑게 했다.

대놓고 많은 사람이 지나는 대형 호텔 입구에서 이런 사달이 벌어졌으니, 목격자가 생기는 건 당연지사.

신초영이 목격자들을 돌아보며 혀끝을 찼다.

“……조용히 해결하기엔 글렀네.”

이렇게 된 이상, 소동을 벌여서라도 상황을 진압해야겠다고 그녀가 결심하던 그때였다.

-슥.

갑자기, 너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던 목격자 한 명이 그녀의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그녀의 고개가 돌아갔다.

“끄, 끄으윽…….”

“꺼, 어억…….”

분명.

깔끔하게 목이 잘렸던 좀비들이 검은 체액을 뿜어내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허……?”

답이 안 나오는 상황에 신초영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음 순간.

“카아악-!”

완전히 몸을 일으킨 좀비 두 마리가 휘청거리면서 그녀를 향해 쇄도했다.

탕-! 탕-!

“컥……?!”

우레 같은 두 발의 총성이 마카오의 밤을 흔들었다.

가슴팍에 총알이 박힌 두 마리의 좀비는 지지대가 무너진 허수아비처럼 힘없이 허물어졌다.

“체내에 스며든 앰풀의 약물이 폭주한 거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신초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대성 씨……?”

분명 한국에 있어야 할 대성이 그곳에 있었다.

한 손에는 총신(銃身)이 길쭉한 은색 권총을 든 채.

“대성 씨가 어떻게 여기를?”

“다 방법이 있지.”

그 방법이란, 다름 아닌 2년 전 신초영한테도 사용했던 적이 있던 <그림자 매복>과 <망자 바꿔치기>였다.

물론 한 사람당 한 번만 사용이 가능한 <그림자 매복>은 신초영에게 적용이 안 되는 관계로, 이번 경우엔 황준영에게 설치했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그에게 그림자를 설치한 건 옳은 판단이었다.

황당한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 어안이 벙벙했던 신초영이 먼저 떠오른 질문부터 내뱉었다.

“그 총은요?”

“저놈들 같은 언데드를 죽이는 총. 어디서 구했는지는 묻지 말고.”

상점 창에서 구했다.

천상의 상점 창에는 여러모로 언데드 계열 적들과 상성이 잘 맞아 떨어지는 아이템이 많았다.

《개벽(開闢)의 총》

* 천상계의 이단 심판관들이 타락한 영혼을 구제할 때 사용한 무반동 권총.

* 오직 《심판의 은탄》에만 약실이 돌아갑니다.

* 최대 20발까지 장전할 수 있습니다.

* 언데드와 대적할 시, 명중률이 30% 상승합니다.

《심판의 은탄》x20

* 언데드 계열의 적에 한정하여, 관통력과 파괴력이 50% 추가 상승합니다.

* 해당 아이템은 《개벽(開闢)의 총》에만 장전할 수 있습니다.

* 은탄은 총 100발만 한정 판매합니다. 신중하게 구매하십시오.

아예 놈들이 재생하지 못하도록 업화대검으로 불태워 버리는 것도 방법이었으나…….

지금의 그는 마력 고갈 상태. 되도록 지옥 계열의 스킬과 아이템은 쓰고 싶지 않았다.

‘피곤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내 두 눈으로 직접 봐야 해.’

그리고 문세걸과 그의 조직원이 좀비로 변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얼추 짚이는 게 있었다.

정보에 따르면.

문세걸은 본인뿐만 아니라, 호텔에 따로 방을 잡아줄 정도로 총애하는 정예 조직원들에게도 융합 앰풀을 주입했다.

그런데 체내에 돌고 있던 각성제의 약물이 돌연 폭주해, 그들을 이성도 뭣도 없는 괴물로 만든 것이다.

몇 년 동안 체내의 약물을 잘만 제어하고 통제했던 그들이.

하필, 라미쉬가 죽고 혼세의 존재가 멸족(滅族)한 직후 폭주한 것이 과연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그럴 리가 없지.’

약물의 주요 재료가 되는 가공 코어는 라미쉬의 피와 주술로 만들어진 것이다.

융합 앰풀은 단순한 약제가 아닌, 상식을 거부하는 헥카르 종족 고유의 영(靈)적인 힘이 서린 물건.

그리고 그 힘을 주관하던 라미쉬가 죽음을 맞이하며 놈과 영적으로 이어졌던 약물의 이용자 또한 어떤 돌변에 처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저런, 혼세의 몸도 아니고 인간의 몸도 아닌 돌연변이 같은 모습이 된 거겠지.’

-철컥.

가뜩이나 마력도 부족하고 피곤해 죽겠는데, 더러운 일에 휘말렸다는 생각이 든 대성이 신경질적으로 은탄을 장전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런 그의 짜증과 스트레스를 잠시 지워 버릴 만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음?”

은탄을 맞고 쓰러진 좀비의 시체 위로, 마름모꼴의 붉은 보석 같은 것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갑자기 표정이 달라진 그를 본 신초영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저게 뭐지?”

“네?”

대성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신초영이 붉은 보석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만 갸웃했다.

“저 좀비들 말씀하시는 거예요?”

“…….”

보아하니 저 붉은 보석은 대성의 눈에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떼어 붉은 보석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였다.

[‘차원 종족의 생명석(x2)’을 획득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이름은 너무나 눈에 익었다.

‘이거 분명, <접속>의 권능을 해금하는데 필요했던…….’

<접속>은 ‘차원 종족의 생명석’ 수집률을 100% 달성할 시에 정보가 해금되는 권능이다.

그리고 그 글귀를 처음 읽었을 때 예상했던 대로, ‘차원 종족의 생명석’은 몬스터를 죽이면 나오는 아이템이었다.

<더 북>을 손에 넣은 지금, 평소에는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 그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획득.”

대성은 곧바로 시스템의 제안에 ‘예스’로 화답했다.

허공에 둥둥 떠다니던 붉은 보석이 언제 나타났냐는 듯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더 북>을 꺼내, <접속>의 권능이 적힌 페이지로 넘겼다.

“허어…….”

신초영의 눈에는 느닷없이 대성의 손에 책이 나타난 광경으로 보였기에,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2년이 지난 지금 와서도 놀라는 게 새삼스럽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진짜로 놀라운 걸 어쩌겠는가.

대성은 개의치 않고 <접속>의 정보가 나온 페이지를 읽었다.

<권능 정보>

접속

[잠금 된 정보.]

[차원 종족의 생명석을 획득하여 100%의 수집률을 달성할 시 정보 해금.]

[현재 수집률: 2.6%]

두 개를 얻었으니 2.6%라면, 이놈들 한 마리당 생명석이 대략 1.3%의 지분을 가졌을 거라고 해석했다.

‘확신하기엔 이르지만, 어쨌든 100마리 정도 죽이면 되는 건가.’

혹은, 더 크고 강한 놈의 생명석은 더 많은 지분을 가졌을 수도 있고.

확인해볼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그래도 수확은 얻고 가는군.’

피로와 짜증으로 물들었던 그의 눈에 생기가 맴돌았다.

대성이 고개를 들어 하늘 높이 뻗은 고층 호텔을 올려다보았다.

사냥의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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