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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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
선두에서 팀을 이끌던 그랜트가 손을 들며 멈춰섰다.
하지만 그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팀원들은 발걸음을 멈출 생각이었다.
데이브가 메마른 침을 삼켰다.
“그랜트, 지금.”
“……그래.”
“뒤쪽입니다. ……앤드류 씨조가 향했던 방향입니다.”
“…….”
숲 속은 대단히 적막했기에, 방금 어렴풋이 울렸던 사람의 비명을 듣지 못한 이들은 없었다.
비명의 목소리는 혼자가 아니다. 명백히 다수였다. 그리고 그들이 노렸어야 할 사냥감은 한 명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나 자명하지 않은가.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어.”
그랜트는 이를 빠득거리며 분노를 표출하면서도, 관자놀이에 흐르는 식은땀을 숨기지 못했다.
척후의 앤드류 조에 문제가 생겼다면 암살은 이미 도루묵이 됐을 터.
“자, 작전 변경이다. 전원, 앤드류 조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가슴속에 차오른 동요가 그랜트의 말끝을 떨리게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런 그랜트를 한심하게 여기지 않았다.
모두가 같은 심정이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쥐덫에 걸린 생쥐 꼴이 됐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암살이 최선이었다면, 정면 돌파는 차선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이 ‘차선’이지, 그것은 한없이 ‘최악’에 가까운 상황이다.
‘이런 빌어먹을!’
최악? 최악이라고?
다수가 한 명을 상대하는 상황인데 그깟 암살 좀 실패했다고 바로 꼬랑지를 말아 내리나?
상처 입은 그랜트의 자존심이 두려움을 지워냈다.
방향을 선회해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그랜트가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들은 위대한 미국이 인정한 실력자들이다. 명예도 품격도 없는 반도의 작은 땅에서 온 놈한테 패배할 리가 없다.”
그랜트의 진중한 다그침이 뒤따라오던 팀원의 가슴에 등불처럼 번지고 지나갔다.
그것은 그랜트가 본인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했다.
그래.
적은 한 명이고, 우린 다수다.
우리는 이 드넓은 영토를 점한 만민(萬民)에게 인정받은 몸!
불꽃처럼 활활 너울거리는 자긍심이 그들의 마음속에 싹을 틔웠다.
잠시 후.
시체 밭이 그들을 반겼다.
“…….”
“…….”
처음엔 ‘뭐지?’ 싶었다.
웬 고기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기에, 트롤 말고 다른 짐승들이 서로를 잡아먹었나 했는데.
“……앤드류?”
그랜트가 금붕어처럼 눈을 깜빡이며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살점이 반쯤 뜯겨나간 얼굴이었지만 못 알아볼 리가 없다. 무려 5년을 함께 한 동료가 아니던가.
그것은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농담을 건네며 웃음을 나눴던 전우의 얼굴이었다.
“웁.”
그랜트의 정신이 아득해지던 가운데, 어느 비위 약한 팀원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우윽……! 그워어억-!”
이내 손으로도 전부 틀어막지 못할 만큼 토사물을 쏟아냈다.
모두가 숨 쉬는 걸 잊었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자욱하게 퍼지는 짙은 피 냄새가 비강을 헤집고 뇌까지 뚫어 버릴 기세다.
그리고 이 모든 참극의 한가운데.
하얀 머리의 남자가 바위에 걸터앉은 채 담배 연기를 뿜고 있었다.
“너희들은 정말 나쁜 놈이다.”
놀랍게도 그리 말한 사람은 학살극의 주범이었다.
대성은 희뿌연 담배 연기를 눈으로 좇으며 이어서 말했다.
“그렇게 생각 안 하나?”
화가 나기 이전에 억울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말이 많아질 정도로.
“난 너희들이 사는 세상을 구했다. 괴물로부터 너희들의 영토를 지켰지. 그런데 너희들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그랜트와 그의 팀원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무는 게 아니라, 아직도 이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은혜를 베풀면, 받은 사람이 고마워할 줄 알았는데.”
“…….”
“난 그래도, 지구가 그 정도 상식은 통하리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알고 봤더니 지옥만큼이나 비상식적인 세계였을 줄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눈으로 텅 빈 허공을 응시하던 그는 2년 전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날,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과 도곡동으로 이사를 하였던 날.
당신 같은 사람들 덕에 우리 가족이 안전하노라고 감사 인사를 전했던 부동산 중개업자의 말이 문득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그 몇 마디가, 오로지 가족의 행복과 돈만 있으면 그만이었던 대성의 마음에 아주 작은 사명감을 꽃피우게 했다.
어쭙잖은 정의심이라 표현해도 좋으리라.
“…….”
‘나’라는 존재가, 나와 내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가족까지 지켰다는 사실이.
그래, 솔직히 뿌듯했다.
그런데 지금.
그 뿌듯함이, 그때부터 쭉 믿고 있었던 상식이.
“이 개새끼들아.”
저놈들 때문에 산산조각이 났다.
너무 화가 나고 억울했다.
-칙.
바위에 담뱃불을 비벼 끈 대성이 그들의 머리 위를 훑어보았다.
그랜트와 데이브를 제외하면, 나머지 이들의 머리 위엔 ‘사주의 낙인’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이 대성을 ‘같은 편’으로 인식했기에 벌어진 현상이 아니었다.
감히 ‘적의’를 품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기에 낙인이 사라진 것이다.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이고 거대한 공포 앞에서 그들은 항거할 의지마저 거세당했다.
“인제 와서?”
물론 그것이 저들이 살아서 여기를 나가도 될 이유가 되지는 못했지만.
꽁초를 튕긴 대성이 천천히 걸터앉았던 바위에서 엉덩이를 뗐다.
“이…….”
그랜트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오도독.
입술에서 터진 피가 그의 메마른 목을 적셨다.
철 맛이 머릿속을 타고 도는 순간, 그랜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외쳤다.
“전원, 저놈을 덮쳐! 가서 죽여라! 죽어간 동료의 원한을 풀어라!”
“…….”
하지만 함부로 발을 떼는 이는 여기서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랜트와 더불어, 아직 ‘낙인’이 남은 데이브 호퍼도 마찬가지였다.
허탈했던 그랜트가 팀원들을 돌아보며 한 번 더 외쳤다.
“뭐해! 이 새끼들아! 뭐하냐고!”
“…….”
“적은 한 명이다! 저 새끼는 지금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거야! 우리 쪽이 지금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당연히 그랜트의 말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인 이들에게 아무런 효과도 주지 못했다.
공포에 질려 바싹 얼어 버린 부하들의 표정을 본 그랜트에게도 표정이 점점 사라져 갔다.
“이, 이 새끼들아. 지, 지금 와서 너희들까지 이러면-.”
“안 되지.”
갑자기 대성이 그랜트가 하려던 말을 대신 해 주었다.
그리고는 오른발을 살짝 들었다.
“명령엔 절대 복종 아니겠어?”
쿵-!
직각으로 땅을 밟는 오른발.
[권능, <도발>이 발동됩니다.]
[반경 500m 내에, 사용자가 인식한 적들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강제성을 띤 언령(言令)과 같았다.
흡사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그의 발끝을 타고 퍼져나가 저들을 끌고 오기 시작했다.
“이…… 이익!”
“내, 내 몸이 왜 이래?”
“머, 멈춰. 멈추라고!”
<도발>의 권능에 사로잡힌 그들이 자석에 이끌리듯이 슬금슬금 대성과 거리를 좁혀나갔다.
본능은 다가가지 말라고 외치는데, 다리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그래. 가라! 용기를 내! 가서 저놈을 죽여라!”
그랜트를 제외하면 말이다.
녀석은 일부러 <도발>이 적용되는 인식 범위에 포함하지 않았다.
권능의 존재 자체를 알 턱이 없었던 그랜트는 좋다고 웃었다.
물론 나머지 이들은 이 영문 모를 노릇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으, 으아아아아-!”
이윽고.
권능에 서린 힘에 완전히 잡아먹힌 그들이 다리를 박차며 대성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알아서 그물망으로 몸을 내던지는 물고기 같은 저들을 노려보며.
-화르륵!
대성은 업화대검을 구현했다.
“자비를 베풀 가치가 없어.”
사지(死地)에 떠밀려 울상이 된 그들이 지척까지 다가온 순간.
대성은 불꽃의 칼을 휘둘렀다.
부-웅!
콰가가가가각-!!
한 번의 휘두름에, 여섯 명의 몸이 한꺼번에 반 토막으로 갈라졌다.
뿜어져 나온 피 보라가 검림지옥을 한가득 적셨다. 선혈을 뒤집어쓴 칼날의 나무들이 거대한 몸뚱이를 뒤틀며 날카로운 줄기를 쏘아냈다.
화르륵-!
하지만 업화대검이 흩뿌리는 업화의 폭풍에 휩쓸려 모조리 불에 타 없어졌다.
야수같이 난폭하게 뻗어나간 검기(劍氣)가 주변에 있던 나무와 수풀까지 파괴했다.
“욱……?!”
데이브 호퍼는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 탓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는 그랜트와 함께, 이 악몽 속에서도 ‘낙인’을 유지할 수 있던 자.
데이브는 이미 <도발>에 이끌렸을 때부터 해머를 치켜든 상태였다.
“죽어도 네놈만큼은 저승길 길동무로 삼고 죽겠다!”
폭발적인 박력과 함께 데이브가 쳐들었던 해머를 내려찍으려던 순간.
콱-!
“거, 억……?!”
한 박자 빨리, 대성의 업화대검이 데이브의 배를 꿰뚫었다.
화르륵-.
“허, 허억……!”
데이브는 내장까지 뜨거워지는 열기를 느끼곤 신음했다.
그리고.
콰-앙!
그의 뱃속에 쑤셔 박힌 업화대검이 불벼락을 터뜨렸다.
데이브는 단말마를 내지를 틈도 없이 안쪽부터 몸이 폭발해서 죽었다.
“이, 이럴 수가…….”
시야를 뒤덮은 불길과 마주한 그랜트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저벅-. 저벅-.
유유히 불길을 뚫고 나오는 대성의 눈은 차갑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사, 살…….”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 짜낸 그랜트가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은, 일평생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있었던 한 마디를 읊조렸다.
“사, 살려줘…….”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사, 살려…… 살려 주세요. 제, 제가 잘못했습-.”
자비를 구걸하던 그랜트가 급기야 눈물을 펑펑 흘렸다.
이성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그는 본인이 지금 얼마나 꼴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절감했기 때문이다.
대성은 흙바닥에서 허우적대는 그랜트의 앞에 서며 물었다.
“왜 이런 짓을 벌인 거지?”
“흑, 흐윽…….”
“대답해.”
무릎을 굽히고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여 그랜트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랜트는 어른한테 혼이 나는 어린애처럼 쉴 새 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했다. 미국인이 이 광경을 봤다며 기가 안 차서 말도 안 나오리라.
“흑……. 그, 그게……. 흑, 흐윽……. 저, 그게 말이죠, 그…….”
“…….”
실토하려고 보니 너무 사소한 이유라 도리어 입이 떨어지지 않을 터.
어쩔 줄을 몰랐던 그랜트가 문장으로서 성립이 안 되는 이상한 소리만 연신 흘려댔다.
대성이 한숨을 푹 쉬었다.
“……됐다.”
“흑, 흐윽……. 흐어엉…….”
“너 같은 놈 의중까지 캐내기엔 내 시간이 너무 아까워.”
“흑, 허윽……. 허어엉……. 죄송, 죄송합니다……. 한번만…… 흑! 살려 주십시오…….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더는 듣고 있기가 고통스러웠다.
[권능, <침식의 방>이 발동됩니다.]
[대상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환상을 보여주는 고유 결계를 생성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지저에서 올라온 검은 구체가 단숨에 그랜트를 잡아먹었다.
“아, 안 돼! 살려-.”
아가리를 완전히 닫은 검은 구체가 그랜트의 처절한 비명을 차단했다.
2년 전, 제롬에게 노획한 권능이었다. 좀처럼 사용할 기회가 없어서 묵혀 뒀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써먹게 됐다.
‘내가 직접 해제하기 전까진 고유 결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상대방의 정신력이 너무나 고강해 억지로 결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이상에야 말이다.
그 말인즉슨, 정신력이 약한 자는 이곳에 갇혀 언제 끝날지 모르는 트라우마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고통받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케륵-
케엑-.
이때, 난데없이 블레이드 트롤 몇 마리가 나타나 대성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도발> 때문인가?’
우연히 제한 반경 내에 있던 트롤이 지금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듯싶었다.
대성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인간들을 죽여도 생명석은 나타나지 않았어.’
그 말대로, 대성의 시야에 비친 처참한 시체들의 위로는 아무것도 생성되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인간은 죽여도 생명석이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융합 앰풀로 인해 좀비가 된 문세걸 패거리한테는 나타났지만.
‘인간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같은 종족에게는 생명석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고.’
확증을 내릴 만한 연결점은 없다. 그보다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생명석 제조기가 눈앞에 있지 않은가.
케엑-!
세 마리의 트롤들이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촤악-!
업화대검을 휘두를 필요도 없이, 대성이 마력을 담은 오른손을 휘젓는 것만으로도 녀석들은 찌꺼기가 되었다.
[‘차원 종족의 생명석(x3)’을 획득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이거라도 얻어간다는 생각과 함께 대성은 생명석을 수거했다.
그리고 바로 수집률을 확인했다.
[현재 수집률: 56.7%]
52.9%에서 56.7%로 뛰었다.
대충 한 마리당 1~2%의 지분을 차지한다고 보면 됐다.
“저번 놈들이랑 비슷하군.”
그렇다고 해서 발 아프게 이 검림지옥을 돌아다닐 생각은 없었다.
게이트의 공략에 필요한 체류 시간이 긴 것 치고는, 트롤의 개체 수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지만 이 어두운 숲 속을 배회하는 건 썩 달갑지 않았고, 무엇보다.
‘내가 멀어지면 <침식의 방>의 결계도 약해진다.’
사실 이게 가장 큰 이유다.
권능의 정보란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직감으로 느껴졌다.
<침식의 방>은 그의 에테르와 단단한 결속을 이뤘다.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결속이 약해지리란 건 불 보듯 뻔한 사실.
‘그럼 안 되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아직은 좀 더 그랜트를 결계에 가둬놔야만 했다.
결국.
대성이 결계를 푼 것은 게이트 클리어까지 10분을 앞뒀을 때였다.
스륵-.
“히, 히히…….”
기나긴 감금 끝에 결계에서 빠져나온 그랜트의 상태는 심상치 않았다.
살짝 벌어진 입에선 침이 줄줄 흐르고 눈두덩이는 몇 날 며칠을 밤샘 것처럼 퀭했다.
그야말로 정신 나간 인간의 표본 같은 모습이었다.
“히, 히헤……. 흐……? 흐흐…….”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진짜로 정신이 나갔다. 그가 무슨 기억을 봤기에 이렇게 된 건지는 권능의 행사자도 모른다.
슥.
대성은 실성한 그랜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방금 막 <더 북>을 통해 습득한 새로운 권능을 발동했다.
[권능, <지배>가 발동됩니다.]
<권능 정보>
지배
[대상의 정신을 장악합니다.]
[장악으로 인한 지배력은, 대상의 정신이 얼마나 피폐하냐에 따라 비례합니다.]
[마찬가지로 대상의 정신이 마모되면 마모된 상태일수록, 권능의 지속 시간 또한 증가합니다.]
일단 먹히면 효과 자체는 사기적이었으나, 전제 조건이 너무 까다로웠다.
아무리 혼란스럽고 공황에 빠져도, 앞뒤 분간할 정도의 이성이 한 톨이라도 남아 있다면 <지배>의 권능은 오롯한 힘을 내지 못한다.
물론 지금의 그랜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다.
“잘 들어라.”
대성이 밀랍인형처럼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그랜트를 향해 말했다.
“여길 나가면 사람들한테 이렇게 발표해. 네놈이 나한테 협력을 요청한 주제에 팀원과 함께 단독 행동을 했다가 팀원은 몰살당했고 너는 혼자서만 살아남았다고.”
“네.”
“그리고 나가고 나서부터 이틀 뒤에 자살해라. 목을 매달아야 해.”
“네.”
“죽기 전에 유언장을 남겨. 사실 너희 클랜은 내게 협력을 요청하는 척, 나를 암살하려고 했다고. 하지만 양심의 가책에 못 이겨 스스로한테 부끄럼을 느껴 이렇게 목숨으로 죄를 갚겠다고.”
“네.”
만약 대형 클랜의 멤버가 모두 죽고 대성 혼자만 게이트를 빠져나온다면 의심을 받을 것이다.
물증은 없겠지만, 심증이 만만치 않기에 분명 일이 피곤해질 터.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지배>였다.
10분 뒤.
바로 근처에, 바깥 세계와 통하는 문이 열렸다.
“나가자.”
“네.”
그랜트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출구에서 쏟아지는 하얀 빛으로 걸어갔다.
***
<충격에 빠진 미국! <컨트리>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소중한 전력을 상실하다!>
<단장, 그랜트의 진술에 들끓는 여론. 세계적인 사냥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에 책임을 물어야…….>
뉴스가 나왔고 여론은 뜨거웠다.
개중엔 <컨트리>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게 된 대성에게 미국 사냥꾼 협회장이 공식적인 사과를 건네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리고.
“…….”
이 모든 질책과 비난 속에서.
그랜트는 무표정하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
너무나 맑고 화창한 날씨였다.
이틀 후면, 그는 경악스러운 내용이 담긴 유언장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겠지만…….
지금 당장 벌어질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