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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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끼이익-!
고무 타이어가 아스팔트에 미끄러지는 날카로운 소음이 일대를 할퀴고 지나갔다.
약간 초조함이 감도는 얼굴로 텔레비전을 감상하던 성찬호가 그 소리를 듣고는 말했다.
“대성아?”
“어.”
“밖에 손님이 온 것 같은데.”
“…….”
최근 독서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했던 대성은 책을 덮고는 오피스텔의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열 대가 넘는 군용 지프.
‘연맹’의 마크가 위풍당당하게 새겨진 깃발을 흩날리며 지프 사이를 통과하는 고급세단 한 대.
그리고 군(軍)과 적정거리를 유지한 채 우후죽순 몰려오는 국내외 방송국 차량 수십 대까지.
장관이었다.
누가 보면 서울 한복판에 전쟁이 터지나 착각할 정도로.
“정말 집념이 대단한 놈들이야.”
이쯤 되니 유쾌할 지경이라 대성은 피식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성찬호도 어색하게 웃었다. 다만 대성처럼 여유가 흘러넘치는 실소는 아니었다.
“나도 모르겠다, 하하. 대성아, 네가 알아서 수습해라.”
오히려 정반대.
인간이 도무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으레 흘리는 자포자기의 웃음이었다.
그런 성찬호의 앞에 놓인 벽걸이 TV에선 앵커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뉴스가 흘러나왔다.
<네, 지금 막 군부대가 한대성 사냥꾼이 있는 오피스텔 건물 앞에 도착했습니다!>
<어…… 아직 한대성 사냥꾼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데요,>
현장의 상황을 생생히 전달하는 카메라 화면에는 대성과 성찬호가 있는 이곳 오피스텔 건물의 자태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 하단을 장식한 헤드라인이 이 모든 사태를 깔끔하게 한 줄로 요약했다.
<‘연이은 청문회 불응… 결국 헌터 연맹 대변인이 직접 나서.’>
서은미를 위시하여 KHA에서 파견한 감시과를 몰아낸 지 정확히 사흘이 지난 오늘.
기어코 뉴욕에서 이 머나먼 타국까지 군대와 대변인을 보내는 연맹의 집념에 대성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래.’
막장도 이 정도까지 치달아줘야 할 마음이 나지.
드르륵-!
대성이 유리창을 열고 오피스텔 난간에 가까이 다가서기 무섭게.
텔레비전 속 앵커의 목소리가 한층 더 데시벨을 높였다.
<아, 한대성 사냥꾼이 지금 막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직까지는 별다른- 어어?!>
거의 고함을 지르던 앵커가 급기야 비명까지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했다.
수많은 카메라 포커스가 본인에게 집중된 가운데, 대성이 호쾌하게 난간 밖으로 몸을 내던졌으니까.
기자도 일순 당황했는지, 카메라 화면이 난잡하게 흔들리기도 잠시.
재빨리 수직으로 내려간 앵글은 땅에 착지한 대성의 모습을 정상적으로 비췄다.
덜컥. 덜컥. 덜컥.
이내 군용 지프의 문이 하나둘씩 열리더니 총화기를 지참한 군 병력이 일사불란하게 차량에서 내렸다.
‘주한미군이라.’
흥미로움을 표하는 대성의 고개가 본인도 모르게 기울여졌다.
-덜컥.
마지막으로, 제일 앞에 주차된 고급세단에서 머리가 허옇게 센 늙은 남성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국제 헌터 연맹의 대변인인 ‘실비오 스튜어트’였다.
“후우…….”
실비오의 주름진 얼굴이 식은땀으로 번들거렸다.
직접 대성과 마주하니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지금, 사람과 대화하러 온 게 아니라 맹수의 우리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을.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끝낸 실비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영어를 하실 줄 안다고 들었으니, 통역은 생략하겠습니다.”
“…….”
“Mr. 한. 인제 그만 연맹의 부름에 응하십시오.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이십니까?”
“그게 군대를 이끌고 떼로 몰려온 그쪽들이 할 말인가?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이지?”
재는 것 없이 화끈하게 들이닥치니 오히려 답답하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하는 한편으로도.
대성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청문회 소환에 불응했다는 이유만으로 저들이 미군까지 동원할 필요가 있었는지.
하지만 이내 실비오가 밝힌 그 이유는 생각보다 꽤 합리성을 띠었다.
“당신을 강제로 데려가게 될 경우를 대비해, 최소한 군대는 이끌고 오는 게 마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Mr. 한. 전 세계의 국민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초대형 게이트로부터 세계를 지킨 영웅이 아닙니까. 부디 스스로 명예를 깎아내리는 어리석은 짓은-.”
“영웅이라고?”
나직하게 흘러나온 대성의 한 마디가 실비오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조는 무덤덤했으나 거기엔 뼛속까지 스며드는 오싹한 한기(寒氣)가 서려 있었다.
“그쪽들 눈에는 내가 몬스터와 내통하는 건 아닌지 미심쩍은 인간으로 보일 텐데 잘도 ‘영웅’이라는 평가를 해주는군.”
“아니, Mr. 한, 그건…….”
“이미 그쪽에서 멋대로 결론을 지은 마당에 내가 거기 가서 무슨 말을 할까?”
실비오는 이번 청문회에 대해 사람들의 여론이 좋지 않다는 걸 안다.
그래서 예리하게 연맹의 속내를 꼬집는 대성의 저 질문 아닌 질문을 듣고선 곤혹할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 방송국의 카메라가 생중계로 돌아가는 이런 상황에서, 분위기의 주도권이 대성한테 넘어가는 건 치명적인 일이다.
“어, 억울한 게 있으시면 청문회에서 성실히 답변해 주시면 됩니다. 계속 이러시는 건 오히려 제 얼굴에 침 뱉기에요!”
“대화가 평행선을 달리는군.”
애당초 지리멸렬한 말싸움을 하자고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니다.
-슥.
대성이 앞으로 손을 내민 순간.
철컥! 철컥! 철컥!
실비오의 뒤에 쭉 늘어선 군 병력이 일제히 총구를 세웠다.
‘이런 멍청한!’
실비오가 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그들의 지휘관이 어떤 작자인지는 몰라도 참 멍청하기 짝이 없다. 이런 분위기에서 먼저 총을 들어버리면 대체 어쩌잔 말인가.
안 그래도 여론이 험악한 판국에, 이건 대놓고 연맹이 국민의 영웅을 적대한다는 퍼포먼스나 다름없다.
“강제적으로 날 데려갈 경우를 대비해 끌고 왔다고 했지?”
활짝 펼쳐진 손바닥 위로 문신처럼 새겨진 인(印)이 불타올랐다.
“어디 한번 데려가 봐.”
화르륵-!
[<한대성의 섬멸룡>이 구현의 인에서 소환됩니다.]
갑자기 그의 손바닥에서 방사되는 검은 불꽃 앞에서, 실비오와 군 병력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상황을 중계하던 앵커와 특파원도 잠시 입을 다물고 얼어버렸다.
현장에 있는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던 시청자들까지 한꺼번에 숨을 멈췄다.
크오오오오-!!
무시무시한 위세가 담긴 섬멸룡의 포효가 전파를 타고 지구 전역을 뒤흔들었다.
여차하면 당길 기세로 방아쇠에 손을 걸치던 군인들이 자기들도 모르게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사위에 드리운 검은 드래곤의 등장 앞에서 모두가 넋을 잃은 채 압도당했다.
“……신이시여.”
아연실색한 실비오의 입에서 신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대성은 안다.
연맹은 진심이라는 걸. 무려 ‘군대’씩이나 끌고 오지 않았는가.
그들이 진심으로 나오겠다면.
‘나도 진심으로 나와야지.’
저들에게 해줄 대답은 하나뿐.
[폴리모프(polymorph): 비룡(飛龍)이 취소됩니다.]
[<한대성의 섬멸룡>이 원래 모습을 드러냅니다.]
안 그래도 음영이 졌던 그들의 얼굴에 한층 더 짙은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어두컴컴한 색으로 물들어가는 그들의 얼굴이 차츰 위로 들어 올려졌다.
이 이상 커지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눈이 휘둥그레 뜨이고, 위로 올라가던 목은 뒤통수가 목덜미에 닿은 그제야 겨우 멈췄다.
쿠구구구-.
그런데도 이들을 경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확장’은 아직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성의 눈에만 보이는 메시지에 적힌 글귀 그대로의 일이 벌어졌다.
쿠구구구-.
비룡의 레벨에서 벗어나 본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섬멸룡이 끝도 없이 몸집을 키워간 것이다.
와이드 비율로 설정된 카메라조차 ‘앞다리’의 ‘절반’만을 겨우 담을 수 있는 정도.
“아…….”
섬멸룡의 검은 몸뚱이가 푸른 하늘을 모조리 가렸다.
밤이 찾아온 것처럼 온 사방이 새카매졌다.
“아, 아아…….”
이제는 신의 이름을 부를 여력마저 남지 않았던 실비오가 전율했다.
그런 그의 지척까지 다가온 대성이 목을 앞으로 쭉 내밀며 말했다.
“자, 데려가 봐.”
***
<연맹의 대변인이란 자가 이렇게 무능한 인간이었습니까!>
“……죄송합니다, 총장님.”
전화기를 붙든 채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연신 숙이면서도, 실비오는 억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눈앞에 대뜸 몸집이 빌딩만 한 드래곤이 나타났는데 거기서 물러서지 않을 인간이 세상천지 어디 있단 말인가.
<전 세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게 무슨 망신인지! 실비오 당신, 본인이 연맹의 대변인이라는 자각이 있기는 합니까?>
“하, 하지만 그때 저희가 물러서지 않았으면 걷잡을 수 없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을 겁니다.”
<벌어지고 난 뒤에 그딴 변명을 하세요! 어쨌든 결과적으로 연맹이 고작 사냥꾼 한 명한테 져버린 꼴이 되지 않았습니까!>
사카이 총장의 문책이 하염없이 이어지는 와중, 실비오는 크게 한숨을 쉬려다 말았다.
고작이라니!
뻔히 TV로 보고 있었으면서 ‘고작’이라는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그 심보가 신기했다.
<잘 들으세요.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멈출 수는 없습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한대성 사냥꾼을 이곳 연맹 본부로 데려오세요.>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실비오는 무심코 휴대폰을 차창 밖으로 내던지려다, 가까스로 충동을 억눌렀다.
그가 탄 세단은 군용 지프의 호위를 받으며 이제 막 동작대교를 건너는 중이었다.
일단은 대책이고 뭐고 숙소로 들어가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사카이 총장, 그 인간도 솔직히 지금 후회 중이겠지.’
이번 일로 인해 지지도는 급전직하 중이고 임기 동안 먹을 욕을 불과 일주일 만에 몰아서 먹고 있다.
청문회고 뭐고 그냥 다 취소해 버리고 대국민 사과를 하는 것이 상책이겠지만,
‘능력은 없는 양반이 자존심만 강하니 브레이크 밟을 타이밍을 놓쳐버린 거지.’
그냥 본인 신세가 더럽게 꼬였다고 생각하는 편이 심신을 안정시키는 지름길일 터.
잠깐 눈이라도 붙이기로 한 실비오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던 그때였다.
쾅-!
“……?!”
굉음은 세단을 등지고 앞서나가던 지프 차량으로부터 들려왔다.
실비오는 정신이 너무 피폐한 나머지 꿈을 꾸는 건가 생각했다.
갑자기 거대한 촉수가 동작대교 아래에서 솟아오르더니 앞에 있던 지프 차량을 내리찍었으니까.
끼이익-!
세단의 운전기사가 화들짝 질겁하며 브레이크를 밟기 무섭게.
쿵-!
후방에서 뒤따라오던 지프가 급정지한 세단과 충돌했다.
“윽……?!”
차체가 크게 들썩이며 실비오의 이마가 조수석 시트 모서리에 찍혔다.
“갑자기 뭐야!”
실비오가 찢어진 이맛살에서 흐르는 피를 틀어막으며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오, 신이시여.”
그는 오늘, 하루에 두 번씩이나 신을 찾아야만 했다.
구우우우-.
뱃고동 같은 웅장한 소리와 함께.
방금 지프를 내리찍었던 것과 똑같은 촉수가 이제는 다발로 한강에서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웅!
이내 촉수 다발이 동작대교 위로 세차게 떨어졌다.
신은 결국 끝까지 실비오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
운전대를 잡은 한 남자가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뒷좌석에 앉은 올해 막 7살이 된 아들이 목청껏 울음을 터뜨렸고, 조수석에 앉은 그의 젊은 아내는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여, 여보.”
“으, 응?”
“우, 우리 어떡해?”
같은 시각, 같은 동작대교.
쿵-. 쿵-.
저 멀리서, 건물 높이만 한 촉수 다발이 교량을 내려찍고 그곳에 있는 차량을 휩쓸었다.
어뢰가 폭발한 듯이 물살이 솟구치며 선명한 굉음이 뇌리를 파고든다.
“내려-!”
그제야 현실 감각이 돌아온 남자가 운전대에서 손을 놓은 뒤 다급히 차에서 내렸다.
그의 아내 또한 뒤에 앉은 아들을 안고 헐레벌떡 조수석에서 내렸다.
“으아아아악-!!”
“꺄아아아악-!!”
그들뿐만 아니라, 이미 그곳에 있던 수많은 운전자가 과감하게 차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동작대교에 몬스터가 나타났다. 그것도 커다란 다리 하나를 모조리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녀석이.
아마 교각 부근, 혹은 한강 수면 아래에 있던 게이트가 프렉쳐를 일으킨 것일 터.
하지만 재해에 휩쓸린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일단은 어떻게든 여기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펑-! 펑-!
“……!”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던 세 가족의 얼굴에 순간 낙담이 떠올랐다.
구우우-.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멀찌감치 보였던 촉수들이, 이번엔 바로 근처의 강물을 뚫고 솟구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귓바퀴를 찌르르 울리는 고래와 같은 울음소리와 함께.
“뒤로 가-!”
번잡한 인파 중 어딘가에서 그런 외침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경로를 정반대로 바꿨다.
쏴아아-.
기름을 끼얹은 듯 번들거리는 촉수의 표면에서 물살이 폭포처럼 떨어지며 사람들을 휩쓸었다.
옆에서 해일이 치는 듯한 그 박력에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갑작스러운 수압에 못 이겨 정신을 잃는 이들도 있었다.
“여보!”
그리고 남자의 아내는 수압에 못 견뎌 정신을 잃는 축에 속했다.
문제는 그녀가 품에 아들을 안고 있었다는 점이다.
앞만 보고 달리던 남자가 뒤로 방향을 틀었다.
기절한 아내의 품속에선 어린 아들이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아……!”
그녀가 크게 몸을 틀어 물살을 막아준 덕에 아들은 별다른 피해를 볼 수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 다행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황.
“여보! 여보!”
남자가 기절한 아내의 몸을 잡고 흔들며 외쳤다.
옆에선 아들이 울음을 터뜨리고, 사방에선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남자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이, 이게 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가 혼이 빠진 얼굴로 아내의 기절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때였다.
쿵-!
“으, 끄아아아악-!!”
50m쯤 떨어졌을까.
교량 측면에 우뚝 섰던 촉수들이 하나둘씩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한 번의 강타에 차들이 십수 대가 넘게 우그러지고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압사(壓死)당했다.
교통사고만 봐도 심장이 벌렁대는 남자의 눈엔, 그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지옥 같은 광경이었다.
“서, 성철아, 보, 보지 마!”
그런데도 남자는 어떻게든 이성의 끈을 붙잡더니, 제일 먼저 아들의 눈부터 가렸다.
‘내가! 내가 정신 차려야 해!’
남자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가장으로서의 책무가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에겐 가족을 데리고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는 의무가 존재했다.
“성철아, 아빠 손 꼭 잡아!”
정신을 차린 남자가 기절한 아내를 등에 업은 뒤, 아들에게 손을 뻗으며 그리 외친 순간.
펑-!
“…….”
근처가 아닌.
이제는 바로 눈앞에서 포말(泡沫) 가득한 물살이 기둥처럼 솟구쳤다.
구우우-.
물살이 사라지고, 심연 밑바닥을 두드리는 듯한 그 울음소리를 내뱉는 것은 촉수가 아니었다.
끝없는 어둠.
그리고 그 어둠에 촘촘히 박힌 수천 개의 날카로운 이빨.
“아, 아…….”
해저(海底)의 게이트에서만 나타난다고 전해지는 3등급 위험종 몬스터, 크라켄(Kraken).
이빨 가득한 어둠 사이로 분홍빛 살덩이가 징그럽게 꿈틀거렸다.
“흑, 흐윽. 아, 아빠?”
어린 아들은 눈이 가려져 있기에 지금 앞에 뭐가 나타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크라켄의 본체와 마주한 남자가 이를 딱, 딱, 하고 부딪쳤다.
겨우 붙잡았던 이성과 정신도 이제는 흐릿해져만 갔다.
구우우-.
크라켄이 교량을 통째로 씹어 먹기 위해 몸뚱이를 기울였다.
먹구름이 끼는 듯한 어둠이 남자와 그의 가족을 뒤덮었다.
“아, 안 돼!”
남자가 아들과 아내를 꼭 끌어안으며 눈을 질끈 감은 그때.
구우……?!
길쭉한 혀를 날름거리며 먹이를 집어삼키려던 크라켄의 입에서 조금 다른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아……!”
그리고 놀라움에 찬 탄성인지, 아니면 경악에 찬 비명인지 모를 이상한 소리를 터뜨렸다.
파바바박-!
키이익-!!
이게 무슨 일일까.
전혀 처음 보는 은색 비늘의 물고기가 떼를 지으며 한강에서 튀어 올라 크라켄을 덮치고 있었다.
물고기는 고작해야 성인 남성의 절반 정도 되는 크기였으나,
그런 놈들이 수십 마리씩 무리를 지어 패악을 부리니 크라켄도 어찌할 줄 모르며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건 대체?”
일단 당장 죽지는 않았지만 안도할 수는 없었다. 남자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저 물고기가 똑같은 몬스터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일단 도망부터!”
남자가 바들대는 다리를 억지로 세워가며 가족을 데리고 도망치려던 그때였다.
“어?”
그는 문득, 갑자기 온 사방이 핏빛 같은 적갈색으로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너무 놀라서 지진 난 듯 흔들리던 남자의 동공이 이내 교량 밑 강물 쪽을 향했다.
“헉……!”
그리고 기절초풍할 뻔했다.
고작해야 물고기 몇 마리, 오리 몇 마리가 둥둥 떠다니고 있어야 할 투명한 한강 강물이, 피바다처럼 모조리 붉게 물들어 있었으니까.
그뿐만이 아니다.
거대한 혈류(血流)로 돌변한 수면 아래서, 지금 크라켄을 공격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은색 어류들이 무수한 행렬을 자아내며 헤엄치기까지.
뜻 모를 사태의 연속이 이어졌다.
“뭐, 뭐야?”
“왜, 왜 이래, 갑자기?”
“뭔가, 뭔가 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교량 위의 사람들도 도망을 치다 말고, 이 급변한 세계 속에서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문득 하늘로 솟은 그들의 시야에.
“헉!”
둥-.
태양을 깔아뭉개고 등장한 검은 만월(滿月)이 가득히 채워졌다.
느닷없이 게이트가 터졌다는 사실보다 하늘의 색깔이 바뀌고 거기에 검은 달이 떠올랐다는 사실이 사람들은 더 충격적이었다.
경악에 휩싸인 이들이 모두가 잠시 뜀박질을 멈추고 얼어붙은 순간.
크오오오오-!!
검은 용이.
어두컴컴한 달을 등지고 쩌렁쩌렁한 포효를 터뜨리며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