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107
“여기는 안전한 게 확실하겠죠?”
“그걸 말이라고. 바로 위에서 핵폭탄이 떨어져도 천장에 먼지 몇 톨 떨어지고 말 거요.”
“젠장, 이게 다 한대성 그놈 때문이요.”
“그놈이 사흘 전에 청문회에 오지를 않아서 애꿎은 우리까지 뉴욕에 남았다가 이런 사달이 나버렸으니.”
연맹 본부의 지하 벙커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이중 민간인은 한 명도 없고, 전부 연맹 관계자나 혹은 16개국 사냥꾼 협회의 고관이었다.
“총장님. 방금 맨해튼의 대피소에 몬스터가 들이닥쳤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
“인근에 있던 사냥꾼과 뉴욕에 주둔했던 클랜은 전부 궤멸당했다고…….”
소식을 전달받은 보좌관의 보고에, 벙커를 가득 채운 웅성거림이 뚝 멈췄다.
안색이 파리해진 사카이 총장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맨해튼의 대피소가 뚫린 건 그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뉴욕을 지키던 사냥꾼이 전부 몬스터한테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유일한 희망은 외부의 사냥꾼들밖에 없는 지금으로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식이 아닐 수가 없다.
“그, 그럼!”
초상집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진 가운데, 누군가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의 눈길이 집중된 그곳엔, 마찬가지로 본토로 귀국하지 못하고 작금의 사태에 휘말린 박정호 협회장이 있었다.
그는 소통이 용이하도록 보편적인 영어를 쓰며 말했다.
“맨해튼의 대피소가 무너졌다면 아직 시내에 낙오된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박정호 협회장.”
사카이 총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박정호가 대답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연락이 가능한 클랜에 지시를 내리십시오. 시내에서 민간인을 발견하는 대로 전부 이곳 지하 벙커로 인도하라고.”
그 말이 무슨 망치로 뒤통수를 후려치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사카이 총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쥐 죽은 듯 조용해졌던 좌중이 다시 한번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민간인을 이곳에?”
“나쁘지 않은 의견 같은데요. 상황이 이러니 그렇게라도 해야죠.”
“아니, 아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입니까!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외부인을 받아들이려면 벙커 입구를 다시 개방해야 하잖아요!”
“맞아요. 그러다 몬스터라도 들어오는 날엔 우린 다 죽는 겁니다!”
초상집이 순식간에 의견이 충돌하는 토론의 장으로 변했다.
입구를 개방해 민간인을 수용하자는 의견은 열세.
‘몬스터가 들어오면 다 죽는다.’라는 누군가의 말이 이곳에 있는 이들의 불안감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박정호 협회장의 의견은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사카이 총장의 담담한 한 마디가 소란을 불식시켰다.
박정호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초, 총장님?”
“많은 분께서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민간인의 구출도 중요하겠지만, 그러자면 저희가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나 큽니다.”
“총장님, 당신이 총장이라면 제발 그런 말씀 마십시오. 연맹이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언제나-.”
“시민들의 생명? 예, 너무나 잘 알죠. 제가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박정호 협회장, 조금만 머리를 식히시고, 냉정하게 생각해보세요.”
“대체 무엇을 냉정하게…….”
“멀리 보시라는 겁니다. 만약 벙커를 개방했다가 저희마저 참변을 당하면, 그건 곧 ‘연맹’ 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사카이 총장이 언급한 ‘연맹의 몰락’이란 말은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섬뜩함을 느끼게 해줬다.
“그리고 주변을 좀 둘러보세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은지, 총장인 제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은지.”
“…….”
“그래요, 소수의 주장도 존중받아야 합니다. 단, 그것이 자칫하면 모두의 죽음으로 직결되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박정호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논리에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다.
총장의 말대로,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로 절대다수가 그의 말에 동조하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옳다고 중얼거리고, 누군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친놈들!’
하지만 이대로 집단 광기에 짓눌릴 순 없다.
박정호가 갈라진 목소리로 끝까지 항변을 이어가려던 그때였다.
“궤변이야!”
참다못해 그리 외친 자는 미국의 사냥꾼 협회장, 조셉 넬슨이였다.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연맹이 살아남아봤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다들 그냥 제 목숨 잃는 게 아까워서 그럴싸한 궤변이나 읊고 있는 거 아닌가요?!”
쉼 없이 목청을 높이던 조셉이 양팔을 활짝 벌렸다.
주변을 좀 보라는 듯이.
“여기는 이렇게 넓은데! 무려 민간인 대피소보다 두 배는 더 넓어! 그런데 정작 이곳에 있는 사람은 50명도 채 안 되지! 그런데 민간인 수용을 못 하겠다고요?!”
“조셉, 당신…….”
사카이 총장은 저 말이 불편했다.
정론을 내세워서 짜증이 난 탓도 있고, 총장인 본인 앞에서 인상을 구겨가며 목소리를 높이는 게 고까운 탓도 있었으니까.
“이봐요, 조셉 협회장. 아무리 미국이 당신 본토라지만-.”
“총장님!”
이때, 불쑥 끼어든 보좌관의 부름이 사카이 총장의 말을 잘라냈다.
안 그래도 열이 뻗쳐있던 사카이 총장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보좌관을 돌아보았다.
잠깐 흠칫한 보좌관이었으나, 그는 지금 기계식 전화기로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될 연락을 받은 참이었다.
“지, 지금 곳곳에서 소식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미주리랑 텍사스, 그리고 시애틀을 탈환했다고…….”
“뭐라?!”
보좌관의 충격적인 보고는 모든 이들의 눈을 화등잔 크기로 만들었다.
심지어 구석에 쪼그려 앉아 현실을 부정하고 있던 이들마저 고개를 번쩍 들 정도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처럼 안달이 난 사카이 총장이 보좌관의 어깨를 붙들며 물었다.
“뉴욕은?! 뉴욕은 뭔가 소식 들어온 게 없나!”
“……예,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젠장, 왜 하필 우리가 있는 뉴욕만……. 그, 탈환 완료했다던 지역의 클랜에 지금 당장 뉴욕으로 이동하라고 연락을 할 순 없는 건가?”
“저, 그게……. 클랜이 탈환한 게 아닙니다.”
“뭐?”
“한대성 사냥꾼의 소환수가 미국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한대성이란 이름이 들려온 순간 사카이 총장의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쳤다.
놀라움, 당황, 의문 등. 하지만 마지막 감정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반가움’이었다.
‘한대성이 미국에 있다면 뉴욕도 곧 소강상태에 접어들 것이다!’
그가 몬스터와 결탁하고 있다는 의혹은 머릿속에서 모조리 날아갔다.
국운이 경각에 달한 지금, 대성이 미국에 날아와 몬스터를 토벌하고 있다는 기쁜 소식만이 남았을 뿐.
시간이 좀 더 흐르고,
“계속 소식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콜로라도, 캔자스, 워싱턴 탈환! 남부 지역 대부분은 몬스터가 소환수에 의해 박멸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지!”
“잘한다!”
희보가 연달아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퀸스 탈환! 맨해튼 대피소의 사람들도 무사하다고 합니다! 한대성 사냥꾼이 직접 나섰답니다! 소식이 조금 늦게 들어왔다고 하네요.”
이곳에 있는 이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던 소식이 보좌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그럼 얼른 연맹 본부까지 오라고 그에게 전하-.”
반색한 사카이 총장의 말이 이어지던 그때.
쾅-!!
“……?!”
“으아아아악-!!”
한순간 몸을 기울게 하는 진동과 비명에, 화들짝 놀란 사카이 총장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앞이 새까매질 듯이 정신이 아찔해졌다.
츠르르르-!!
“어…….”
지네.
이 넓은 대피소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거대한 지네가 그의 근처에서 몸뚱이를 일으켜 세웠다.
콰직-! 콰직-!
아가리 속에 잔뜩 박힌 송곳니로, 러시아 사냥꾼 협회장의 몸을 콱콱 씹으면서.
지저 속에 숨은 게이트에서만 나타난다는 2등급 위험종.
‘이종(異種) 지네.’
“으, 으아아아악-!!”
대피소 내부는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가 되었다.
신변을 보호해줄 사냥꾼도 없는 마당에 몬스터, 그것도 2등급 위험종이라니!
밖에 대성이 있고 말고를 떠나서 다 죽게 생겼다.
츠르르르-!!
이미 넝마가 된 러시아 협회장을 계속 씹어대는 이종 지네의 아가리 아래로 찐득한 핏물이 늘어졌다.
그곳에 있던 이들이 순식간에 대피소 구석으로 흩어져 고양이처럼 벽을 긁어댔다.
“살려줘-!!”
“어머니! 어머니!”
눈물 콧물 쏟아내며 절규하는 그들을 훑어보던 이종 지네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왼쪽? 오른쪽? 어디 있는 놈들부터 먹어치울까, 그런 감정이 묻어나오는 표정이다.
오른쪽부터 먹어치우기로 한 이종 지네가 맹수 같은 아가리를 쩍 벌리던 그때였다.
츠르르-!!
대가리를 쫙 빼며 몸을 구부리던 이종 지네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콰드득-!!
갑자기 천장을 뚫고 솟구치더니 땅을 파며 지상 방향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응?”
“어?”
비명을 지르던 이들이 난데없는 이상 사태에 의문을 표하며 구멍이 뚫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상의 달빛이, 방금 이종 지네가 뚫어놓은 길쭉한 구멍을 타고 대피소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그리고 몇몇 동체 시력이 좋은 이들은 보았다.
“잠깐. 저거 혹시…….”
드래곤 같은 뭔가가 지상의 하늘 아래로 휙, 하고 지나가는걸.
***
[권능, <도발>이 발동됩니다.]
[권능, <도발>이 발동됩니다.]
[권능, <도발>이 발동됩니다.]
[권능, <도발>이 발동됩니다.]
대성은 섬멸룡을 타고 드넓은 뉴욕 시내를 벌써 세 바퀴째 돌며 <도발>의 권능을 남발했다.
최대 500m까지 몬스터를 끌어들이는 그 페로몬은 뉴욕에 잔류한 몬스터를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잘 따라오는군.’
쉬지 않고 <도발>을 사용하던 와중, 대성이 슬쩍 아래를 보았다.
두두두두-!!
키에에엑-!!
츠르르르-!!
뉴욕 시내에 남아 있거나, 혹은 보이지 않은 곳에 숨어 있던 수많은 몬스터가 <도발>에 이끌려 대성을 따라오고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봤다면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광경이다.
대성의 눈에는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지만.
‘외곽까지만 몰고 가자.’
그는 행여 몰이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계속해서 <도발>을 발동시켰다.
도처에 숨어 있던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오직 하늘에 뜬 용만 죽어라 쫓아가는 모습은 어딘가 기괴하기도 했고, 우습기도 했다.
“아!”
“몬스터가……!”
하지만 미처 대피소까지 가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몬스터와 맞닥뜨려 죽을 위기에 처했던 사람들에겐 구원, 그 자체였다.
잠시 뒤.
인적 없는 뉴욕 외곽.
“장관인데.”
섬멸룡의 날개를 접고 땅에 착지한 대성이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폐건물만이 드문드문 늘어선 황량한 대지 위로.
츠르르-!!
카아악-!!
문자 그대로, 뉴욕에 있던 모든 몬스터가 한 마리도 남김없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었으니까.
5등급, 고블린부터 해서.
2등급 위험종, 이종 지네까지.
<도발>에 이끌린 몬스터들도 어쩌다 자신들이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이던 한편.
“시간 끌 것 없이 한꺼번에 보내 버리자고.”
크르르-!
대성이 섬멸룡의 목덜미를 툭툭 건드리자, 녀석이 어금니를 드러냈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유의 여신상과 싸우고 오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섬멸룡은 지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대신 살살해. 도시까지 날려버려선 안 되니까.”
어차피 살살해도 저놈들이 살아남을 확률은 없겠지만.
그런 뒷말은 생각으로만 그친 대성이 팔짱을 끼던 그때.
[섬멸의 기운이 차오릅니다.]
화아아아-.
위아래로 쩍 벌려진 섬멸룡의 입속에서 금빛 기류가 모여들었다.
지금껏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힘의 격류가 몬스터들을 짓누르기 시작한 순간.
[섬멸룡이 광살포(光殺砲)를 쏟아냅니다.]
콰아아아-!!
섬멸룡이 쏘아낸 금빛의 번개가 몬스터 무리를 뒤덮었다.
뉴욕에 내리 앉은 어두컴컴한 밤이, 섬멸룡의 브레스 때문에 낮처럼 환해졌다.
그렇게, 브레스에 휘말린 몬스터들은 새하얀 빛에 잠겨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푸쉬익-.
브레스가 잦아들고, 벼락이 지나간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몬스터의 것으로 추정되는 새카만 재만이 흩어져있을 뿐.
“수고했다.”
그으으…….
대성은 열심히 브레스를 토해내느라 진이 빠진 섬멸룡을 쓰다듬었다.
섬멸룡은 황송하다는 듯 게슴츠레 뜬눈으로 손길을 받아들였다.
브레스가 멈췄음에도 환한 빛은 여전히 밤거리에 남아 있었다. 섬멸룡에게서 눈길을 떨어뜨린 대성은 앞을 보았다.
“이거지.”
푸르게 발광하는 오리할콘의 밭이 무색 황무지를 잔뜩 수놓았다.
마치 보석이 가득한 동굴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황홀한 광경도 잠시.
[‘발견’ 단계를 거친 오리할콘이 ‘저장’ 단계로 넘어갑니다.]
[현재 오리할콘 보유량: 21491]
‘저장’ 단계에 접어든 오리할콘이 파스스, 소리를 내며 먼지로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다시 어둠이 내려앉고, 끝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한 대성의 눈이 문득 저편의 밤하늘을 응시했다.
‘보르크도 잘해주고 있고.’
하늘에 부유한 유령선이 바쁘게 뉴욕을 배회하며 선수에 달린 사슬을 지상으로 발사하고 있었다.
거리에 남은 사람들을 배에 태우라는 대성의 명령 때문이겠지만,
‘이젠 그럴 필요도 없는데 말이지.’
보다시피 뉴욕에 남은 몬스터는 지금 모조리 외곽에서 브레스의 희생양이 된 참이다.
그래도 부상자나 사망자도 있을 테니, 일단은 낙오된 사람들을 배에 태우는 게 좋으리라.
그리 생각한 대성이 탈진한 섬멸룡을 일으켜 세우고 지역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끼이이이-.
바람을 타고 메아리처럼 전해져 온 괴성이 대성을 멈칫하게 했다.
틀림없다, 이건.
“몬스터?”
분명 한 마리도 남김없이 박멸됐어야 할 몬스터의 울음소리였다.
‘<도발>이 미처 잡아내지 못한 녀석인가?’
뉴욕 일대를 세 바퀴나 돌며 <도발>을 남발했기에 확률은 낮았지만, 그래도 유일한 가능성은 그것밖에 없었다.
평소 같으면 성가시다고 욕부터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가볼까.’
몬스터가 많을수록 그만큼 얻을 수 있는 오리할콘도 늘어나니까.
***
상공에 뜬 유령선까지 향하는 도중, 대성은 어째서 몬스터가 시내에 남았는지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웜(Worm)의 알이 있었나.’
웜은 4등급으로 분류된, 보잘것없는 지렁이 형태의 몬스터다.
개체 한 마리당의 위험도는 고블린만도 못하지만, 그 대신 놈들은 필드 곳곳에 알을 까고 무지막지한 물량으로 승부를 본다.
‘알에 있던 놈들이 <도발>에 걸려들 수는 없겠지.’
대성이 외곽에서 몬스터를 정리하자마자 한 발짝 늦게 부화를 끝마친 것이리라.
팍-. 팍-.
엉망진창으로 반파된 건물 안쪽에서 알이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몸체가 갈색인 거대한 지렁이가 꾸물거리며 기어 나왔다.
‘웜은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이상, 어지간해선 먼저 공격해오지 않아. 공격한다고 해도, 둔해 빠졌기 때문에 인간의 속도로 도망치는 것도 어렵지 않고.’
웜은 구더기처럼 뉴욕 시내를 어슬렁거리기만 할 뿐, 멀찍이 떨어진 사람들을 먼저 공격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사람들은 별다른 피해 없이 유령선과 이어진 쇠사슬을 타고 배에 오를 수 있었다.
“자, 자극하지 마.”
“천천히……. 천천히…….”
물론 주위에 드문드문 깔린 웜 무리는 사람들을 극도로 경계하게 만들긴 했지만.
조심스레 쇠사슬을 타고 오르는 사람들의 행렬을 하늘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대성이 시선을 옮겼다.
‘그럼 나머지 처리를-.’
“이분은 연맹 총장님이십니다! 일단 이쪽에 계신 분들부터 배에 태우자고요!”
“아니, 이런 판국에 그딴 걸 왜 따져! 당신들 제정신이야?!”
아래쪽에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려오자, 다시 대성의 눈이 쇠사슬 쪽으로 향했다.
범선에 오르던 도중인 사람들과 정장 무리가 대치 중이었다.
그리고 정장 무리의 면면은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연맹 놈들이군.’
매스컴에 심심찮게 보도되는 사카이 총장의 얼굴은 물론.
일면식이 없지는 않은 각국 사냥꾼 협회장의 얼굴도 섞여 있었다.
“우리는 한 나라의 요직을 맡은 협회장입니다! 우리부터 배에 오르자는 말이 뭐 그리 어렵습니까?”
“협회장이고 지X이고 순번이 있잖아요, 순번이!”
“무례하게 지금 누구 앞에서 목소리를 높입니까! 비키세요!”
“무례? 무례라고? 너희들이 무슨 중세시대 왕이냐?”
위에서 내려다보니 이보다 알기 쉬운 상황이 또 있을까 싶었다.
소식을 듣고 대피소를 빠져나온 연맹 관계자들은 보좌관을 앞세워 막무가내로 사람들을 밀쳤다.
‘저것들 귀엽게 구는군.’
이런 상황에서까지 지위와 권력을 앞세워 타인을 찍어누르다니.
대성은 시시하다는 듯 코웃음을 친 뒤 땅으로 내려갔다.
후-웅!
“어어!”
“물러서!”
돌연 섬멸룡이 중간에 끼어들자, 사람들과 연맹 관계자들이 주춤주춤 거리를 벌렸다.
이내 대성은 섬멸룡의 등에서 내려와 발에 땅을 디뎠다.
그러기를 무섭게, 앞을 막아선 보좌관의 어깨너머에 멀뚱멀뚱 선 사카이 총장과 눈이 마주쳤다.
“하, 한대성 사냥꾼…….”
멋쩍게 웃은 사카이 총장이 첫 마디를 고심했다.
그 전에 대성의 냉엄한 대답이 이어졌지만.
“순번을 지켜.”
“무, 무슨…….”
“사람들부터 태운다. 너희들은 그다음.”
사카이 총장을 비롯한 협회장들이 인상을 팍 구겼다.
그들의 눈치를 살핀 보좌관이 앞으로 불쑥 나서며 외쳤다.
“그건 안 될 소리입니다! 일단 연맹 관계자분들부터-.”
꽈-앙!
철퇴 같은 대성의 주먹이 보좌관의 안면에 작렬했다.
코가 얼굴 깊숙이 함몰된 보좌관은 비명도 없이 그대로 정신을 잃고 바닥에 엎어졌다.
이로써 대성과 사카이 총장을 가로막는 벽은 사라졌다.
“이건 내 배인데 안 되고 말고를 왜 네가 판단해.”
“하, 한대성 사냥꾼, 당신……! 이, 이게 대체!”
“싫으면 타지 마.”
“이, 이런 무례를 저지르고도 무사할 줄 알아요?! 가, 감히 연맹 소속 사람을 폭행해!”
“싫으면 타지 말라고 했다.”
“…….”
“안 탈 거냐?”
“타, 타긴 탈 거지만…….”
“그럼 순번을 지켜.”
얼굴이 붉어진 사카이 총장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시민들이 날카로운 눈총을 보내며 쇠사슬을 타고 배에 올랐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인파가 전부 사라지고, 연맹의 정장 무리만 휑하니 남았다.
먼저 걸음을 뗀 건 사카이 총장이었다. 대성이 갑자기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지만.
“뭐, 뭡니까?”
“순번 지켜.”
“순번은 무슨! 사람들 다 탔으니 이제 우리 차례 아닙니까?!”
“저 사람부터 먼저 태워.”
대성이 검지를 세워 어딘가를 가리켰다. 총장과 협회장들의 시선이 지목한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그곳엔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는 박정호 협회장이 있었다.
이내 박정호는 대성이 지목한 게 자신임을 알고는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저, 저 말입니까?”
“타시죠.”
대성이 엄지를 뒤로 세워 쇠사슬을 가리키며 그리 말한 순간.
귀가 따가울 정도의 불평불만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
“당신! 이게 뭐 하자는 농담이야!”
“사람 목숨이 장난입니까!”
총장과 협회장들이 눈에 불을 켜며 달려들었다.
분노 때문인지, 그들은 배의 주인을 자극하면 안 된다는 지극히 명료한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대성은 일관된 대답만 사카이 총장에게 내놓았다.
“순번 지켜.”
“내가 저 사람보다 훨씬 앞에 있는 게 당신 눈에는 안 보입니까?!”
“저 배는 내 거야.”
“뭐?”
“그러니 순번을 정하는 것도 내 마음이다. 억울하면 미리 대기표라도 끊어놓든가.”
“이, 이……!”
“비켜. 승객이 배에 타신다.”
박정호가 불편한 낯빛으로 틈새를 비집고 쇠사슬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문득 대성을 돌아보더니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성 씨. 가능하다면 저분도 함께 저랑 먼저 배에 타도 되겠습니까?”
“…….”
박정호는 미국의 사냥꾼 협회장, 조셉 넬슨을 가리키고 있었다.
왜냐고 묻기도 전에 박정호가 대답을 내놓았다.
“마지막까지 책무를 다해 본국의 사람들을 우선하셨던 분입니다. 저는 저분이랑 함께 타고 싶습니다.”
“그러시죠.”
일련의 대화를 들은 조셉이 입을 크게 벌렸다. 박정호가 희미하게 웃으면서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조셉은 박정호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의 곁에 서서 함께 쇠사슬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
박정호는 괜찮다.
그는 이 고집불통들과 함께한 자리에서도 끝까지 대성을 지지해준 유일한 아군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가 인정한 사람이 조셉이라면 우선권을 못 줄 이유도 없고.
그렇게 박정호와 조셉까지 전부 배에 올랐다. 이제는 진짜로 연맹 관련자들의 차례였다.
뭐라 한껏 욕을 퍼붓고 싶은 사카이 총장이었지만, 삭혔다. 화를 내봤자 부질없음을 깨달은 거다.
사카이 총장이 발을 움직였다.
턱.
이번에도 대성이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지만.
“……?”
사카이 총장의 동그란 눈이 대성을 향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달싹거리던 그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짤 수 있었다.
“또, 또, 또 뭐요?”
“어쩌지?”
대성이 한숨을 푹 쉬었다.
“자리가 다 찼는데.”
핑-! 핑-! 핑-!
지면에 견고히 박혀 있던 쇠사슬이 유령선의 선수로 회수되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총장과 협회장들이 입을 떡하니 벌리며 굳었다.
박정호의 말에 따르면 이들 모두가 대성을 몬스터와 결탁하고 있음을 의심했던 인간들이다.
“이런 식으로…….”
침묵에 빠진 그들 사이로 유일하게 입을 연 자는 프랑스의 협회장, 클로드 누아레였다.
“이런 식으로 청문회에 대해 복수를 하는군? 내 말 맞지?”
“어.”
대성은 시원하게 인정했다.
클로드는 목에 핏대가 터질 기세로 이를 갈다가…… 심호흡했다.
지금은 어떻게든 저 남자를 회유해야 할 타이밍이니까.
“Mr. 한. 거시적으로 생각하세요.”
“뭘?”
“저희는 한 나라의 운명을 책임지는 협회의 회장입니다. 게다가 이분은 연맹의 총장님이시고요.”
“그래서?”
“저희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는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많은 사냥꾼은 다 누가 책임지고요? 협회는 누가 운영할까요?”
“…….”
“청문회 때문에 화가 나셨던 점, 이해합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클로드가 무거운 얼굴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적당히 눈치가 빨랐던 사카이 총장도 공손히 두 손을 모아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요. 한대성 사냥꾼. 사태가 조금 진정되면, 청문회는 그냥 없던 것으로 할게요. 인류의 영웅을 몰라뵈고 감히 의심했던 점,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총장의 사죄를 시작으로.
급기야 다른 나라의 협회장까지 일제히 허리를 굽히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대성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고맙다. 이제야 믿어주는구나.”
고맙다는 말이 들려오자 그들의 얼굴에 안도와 화색이 감돌았다.
-쿵!
느닷없이 대성이 땅바닥에 발을 찍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권능, <도발>이 발동됩니다.]
[반경 500m 내에, 사용자가 인식한 적들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쿠르륵-. 쿠르륵-.
갑자기 사방에서 짓쳐오는 괴성에, 그들이 굽혔던 허리를 펴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발>에 걸려든 웜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헉!”
“무슨!”
소스라치며 대성을 돌아본 사카이 총장이 경악했다.
그는 이미 섬멸룡의 등에 올라타 비행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한대성 사냥꾼!”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벌은 받아야지. 사과? 됐다. 엿이나 먹어라. 배는 이미 떠났으니까.”
“우, 우리가! 우리가 없으면! 우리가 없으면……!”
“너희들이 없으면 뭐.”
대성은 지옥 불에 빠진 망자처럼 절박하게 팔을 뻗는 그들의 손길을 뿌리치며 말했다.
“너희 하나 죽는다고 망할 세상이었으면 진작 망했겠지.”
그가 하늘로 날아오른 순간.
떼를 지어 몰려온 웜들이 총장과 협회장들에게 달려들었다.
“아아아아악-!!”
“끄흑, 끕, 끄흐으으윽……?!”
“살려줘! 살려줘-!!”
“살려주세요-!!”
식칼 같은 이빨들이 그들의 팔다리와 얼굴을 잡아 뜯고, 물어뜯었다.
웜의 식도에서 올라오는 산성액이 그들의 뼈와 살을 녹였다.
그들은 숨이 멎기 직전까지 고통에 몸부림쳐야만 했다.
핏물이 아스팔트를 적시고 고통의 비명이 천지를 울리는 절경을.
‘조금 쉴까.’
대성은 위에서 느긋이 관람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