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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10화 (110/180)

# 110

110

목 없는 몸뚱이가 줄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바닥에 엎어졌다.

대성은 척추까지 딸려 나온 남자의 목을 헌신짝 버리듯이 내팽개쳤다.

[9계층의 조건을 달성하셨습니다.]

[다음 층으로 향하는 포탈이 생성되었습니다.]

9계층의 클리어 조건은 사냥개를 이끄는 조련사를 죽이는 것이었다.

주인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된 사냥개가 득달같이 달려드는 탓에 성가셨다는 점만 제외하면, 짐승이나 조련사나 한주먹거리에 불과했다.

‘오디의 말로는 인내의 시련이란 게 있다고 했어.’

슬슬 새로운 양상을 마주할 때가 왔다고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포탈을 타고 다음 층으로 나아가니, 아니나 다를까.

[10계층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인내의 시련.]

[다음 층으로 나아가려면 일정 횟수의 고통을 받아들이십시오.]

직감은 정확했다.

하지만 정작 대성의 관심이 향한 곳은 시스템 메시지가 아니라 주위에 펼쳐진 배경이었다.

매캐한 흙먼지가 나부끼는 황야.

그리고 황야를 에워싸는 거대한 산맥들.

아니, 정확히는 ‘산맥으로 보이는 것들’이다.

‘타이탄의 시체.’

둥그런 봉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는 죽은 타이탄의 얼굴이나 수족 따위가 박제되었다.

그리고 몸집이 문자 그대로 산만 한 타이탄의 유해가 널브러진 행성은 우주에 오직 단 하나뿐이다.

‘거신의 고향인가.’

이 또한 라미쉬의 기억에서 본 풍경이기에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부유하는 원반만이 일관되게 나타나다가 하필 10계층에서 다른 행성이 배경으로 펼쳐진 게 그냥 우연은 아닐 터.

‘10층 단위로 차원수의 가지 부분에 도달할 수 있는 건가.’

즉, 봉인된 차원으로의 도착.

이대로 계속 올라가다 보면 언젠간 지옥에도 발을 딛게 되는 걸까?

그런 아무래도 좋을 의문이 머릿속을 채웠으나 이내 모조리 증발해버렸다.

꽈지직-.

뜬금없이 대성의 몸이 종잇장처럼 분해되었기 때문이다.

[그간 시련을 헤쳐 오며 살생한 생명의 무게를 느끼십시오.]

[1계층에서 죽어간 생명의 마지막 고통이 고행자를 덮칩니다.]

[1계층 돌파 경과 시간: 10.39초]

[포기를 선언하시면 인내의 시련은 즉각 종료됩니다.]

울컥!

내장이 올라오는 듯한 핏덩이가 목울대를 타고 뿜어지고 사지가 엉망진창으로 갈가리 찢겼다.

무시무시한 격통이 정수리를 뚫고 뇌를 지나 발가락 하나하나까지 쥐어뜯는 듯했다.

“……!”

평온했던 대성의 얼굴은 온통 울룩불룩한 힘줄로 뒤덮였다.

처음에는 실제로 온몸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는데, 아니다.

알고 보니 고통만 실재할 뿐, 몸은 그대로였다.

말인즉슨, 허상.

‘참아야 한다.’

눈알이 뽑혀 나오는 듯한 아픔이 이어졌으나 대성은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에서 고통이라는 감정마저 숨기기란 불가능하다.

지구로 귀환한 2년 중, 지금이 최고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전신을 난도질하는 고통의 감각이 어딘가 익숙하다.

이건, 방금 1계층에서 목이 뽑히고 뼈가 으스러지며 죽어간 사냥개들이 겪었던 아픔이다.

달리 말해 대성은 지금 목이 뽑히고 뼈가 으스러지는 말도 안 되는 아픔을 견뎌내고 있다는 뜻.

[남은 시간: 7.43초]

체감은 300년이건만 실질적으론 아직 3초도 전부 흐르지 않았다.

영원처럼 느껴지는 10초!

‘처음 겪어보는 것도 아니야.’

아픔을 씹어 넘기기 위해 대성이 한 짓은 기이하게도 아팠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사고할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이 고통이 엄습해 왔으나 불굴의 정신력으로 이겨냈다.

‘행복했던 기억은 도움이 안 돼.’

불이 번져가듯 아픔이 그나마 있던 행복한 기억조차 태워낸다.

차라리 아팠던 기억을 떠올리는 게 훨씬 낫다.

처음이 아니라는 생각이 이성을 붙들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니까.

‘용철 기사의 직검에 맞아 창자를 쏟았을 때. 사주의 독을 맞고 열흘 동안 피를 토하며 고열에 시달렸을 때. 염왕의 영지에서 왼쪽 눈에 용암 불티를 맞았을 때. 게드락의 손아귀에서 어깨가 뽑혀나갔을 뻔했을 때.’

복기하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그때의 기억이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도움이 되었다.

심지어 당시엔 지금처럼 감각만 주입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몸이 잘리고 으스러지고, 불타지 않았는가.

‘그에 비하면 지금이 훨씬 낫다. 이 고통은 허상이야. 나한테서 쫓아내야 한다.’

진짜 지옥에서 80년을 견뎠는데, 고작 이따위 가짜를 못 버틸까.

별거 아니다.

[2계층에서 죽어간 생명의 마지막 고통이 고행자를 덮칩니다.]

[2계층 돌파 경과 시간: 4.99초]

정말 별거 아니다.

***

[인내의 시련을 통과하셨습니다.]

[다음 층으로 향하는 포탈이 생성되었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성은 퍼져있던 몸을 일으켰다.

보편적인 경우라면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해 침을 줄줄 흘리며 미쳐버리리라.

하도 입술을 씹은 탓에 주르륵 떨어지는 핏방울을 손으로 훔쳐냈다.

‘빨리 죽인 게 도움이 됐다.’

5초를 넘기지 않고 재빨리 시련을 돌파한 덕분에 인내해야 하는 시간도 그만큼 짧아졌으니까.

잔악하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죽였던 건 살짝 후회로 다가왔지만.

[완벽한 성적으로 1계층부터 10계층까지의 시련을 완수하셨습니다.]

[뛰어난 고행자께 차원수가 축복을 부여합니다.]

[앞으로 영구적으로 아픔을 받아들이는 통각이 50% 감소합니다.]

영구적이라는 말은 차원수 바깥의 현실에서도 적용되는 말일까.

‘그렇다면 보상으로서 썩 나쁘지 않군.’

정신력이 굳건하고 회복력이 빠른 것과는 별개로, 고통의 정도는 누구나 똑같이 느끼는 법인데 그게 줄어든다는 거니까.

대성은 발을 움직여 11계층으로 통하는 포탈로 진입했다.

[11계층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인내의 시련]

[다음 층으로 나아가려면 시련이 내린 결함을 안고 가십시오.]

시스템에 적힌 글귀를 다 읽기도 전에 공간이 암전했다.

아니, 암전이 아니다.

푸슉-!

양쪽 눈이 묘하게 촉촉이 젖는가 싶더니, 이내 덩어리 같은 뭔가가 발등 위로 떨어졌다.

‘미친놈들.’

대성은 지금 본인의 안구가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인해 적출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발등에 데구루루 구르고 있는 덩어리는 눈동자일 테고.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흘러나오는 피가 얼굴을 적시는 게 느껴졌지만, 차원수의 축복 덕에 고통은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인내의 시련을 통과하셨습니다.]

[다음 층으로 향하는 포탈이 생성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온통 검붉은데 신기하게도 시스템 메시지의 문장만큼은 또렷하게 보인다.

마치 아득한 어둠 속에서 빛의 글씨를 새긴 것처럼.

‘이대로 나머지 시련을 계속 이어가라는 말인가?’

혹시 고행자의 정체가 대성이라는 걸 안 차원수가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난이도였다.

한편으로는 2년 전, 라이선스 시험을 치렀을 때의 기억이 괜히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도 어둠 속에서 움직여야 했지.’

다만 그때는 필드가 어두워진 거고 지금은 눈알이 뽑혔다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점이 있지만.

당시엔 ‘사주의 눈’이 있었기에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악조건도 전혀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지옥의 스킬을 사용하지 못한다.

‘순수한 피지컬로 돌파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어.’

스킬에 의존할 수 없어도 상관없다. 싸워야 할 팔다리가 사라진 것도 아니거늘 뭐가 문제겠는가.

대성은 암흑 사이로 아주 옅고 뿌옇게 일렁이는 포탈의 빛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12계층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격퇴의 시련.]

[다음 층으로 나아가려면 다섯 마리의 ‘하얀 사수’를 격퇴하십시오.]

피잉-!

다짜고짜 사선 방향에서 날아드는 화살을 손으로 잡았다.

승격의 의식인지 뭔지는 몰라도 참 질이 나쁜 놈들이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눈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화살을 날리는 놈들이란 말이지.’

파공성은 위에서 들려왔다.

즉, 12계층의 필드는 이전처럼 평면적인 원반이 아니라는 말.

생각하는 와중에도, 이번엔 다섯 발의 연사가 동시에 들이닥쳤으나 손을 휘젓는 식으로 쳐냈다.

회피하지 않은 이유는 필드의 형태가 원반처럼 하늘에 뜨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몸을 날렸다간 자칫 낙하할 위험이 있었으므로.

‘마력도 봉인되었군.’

마력의 힘을 빌려 전방위로 레이더를 쏘아내는 선택지도 만무한 상황.

‘할 만해.’

하지만 대성은 잔잔한 미소만 머금을 뿐이다.

끼이익……!

백색 사수들은 다음 사격을 위해 있는 힘껏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그들이 전열을 짠 필드는 스무 평 정도 되는 협곡의 특정 구역을 똑 떼어놓은 형태였다.

오브젝트가 놓인 필드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원반과 마찬가지로 아찔하게 높은 하늘에 부유한 상태.

백색 사수는 협곡 곳곳에 솟은 4m가량의 암벽 위에서 화살을 날려대는 중이었다.

백발 남성의 모습을 한 그들은 고요한 살의가 떠오른 눈으로 저 아래 있는 고행자를 노려보았다.

목표물은 확실히 두 눈을 잃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방금 자신들이 날린 연사를 태연하게 막아냈을 땐 정말 놀랐다.

아무래도 이번 고행자는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모양인 터.

녀석은 틀림없이 시위가 튕기는 소리를 듣고 팔을 움직였다.

그래서 페이크를 주기로 했다.

피잉-!

우측 협곡에 있던 사수는 화살을 걸지 않은 채 시위만 튕겼다.

아니나 다를까. 그 소리를 듣고 고행자가 오른팔을 움직였다.

화살을 쳐내고 곧장 회수했어야 할 팔은 무의미한 허공만 휘저었다.

그 탓에 몸의 중심이 미약하게 흔들렸고 바늘구멍처럼 작은 빈틈이 드러나는 건 필연적인 일.

그리고 백색 사수들은 그 미세한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피잉-!

유달리 크게 빈 빗장뼈와 옆구리를 향해 촉이 예리하게 다듬어진 화살이 날아들었다.

10계층의 축복이 고통을 절반으로 줄여준다고 해도 어쨌든 화살이 살갗을 꿰뚫는 고통이다.

필시 화살에 맞은 고행자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을 터!

그때 화살의 융단폭격을 쏟아부어 놈을 고슴도치처럼 만드는 것이다.

팍-! 파바박-!

어둠을 가르고 날아간 화살이 박히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그런데 그게 생물의 피륙을 관통하는 소리와는 명백히 달랐다.

……?

지면에 꽂힌 화살을 쳐다보는 사수들의 얼굴이 의문으로 가득해졌다.

분명 화살을 날리면서 집요하게 목표물만을 쳐다보았을 텐데?

그런데 화살이 시위를 떠나고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사이에 고행자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었다.

“유치한 재롱을 부리더군.”

처음에 페이크를 펼쳤던 사수가 어깨를 흠칫 떨며 뒤를 보았다.

콰드득-!

바로 목이 뽑혔다.

“시력을 앗아갔다고 해서 내가 그 재롱에 멍하니 당해줄 것 같았나?”

나머지 사수들이 시위를 튕겨 대성을 향해 일제사격을 가했다.

그는 불쑥 튀어나온 암벽을 하나씩 뛰어다니며 순식간에 사수들을 척살했다.

‘마력 따윈 필요 없다.’

레이더를 펼칠 수 없다고 해서 탄탄히 다져진 기감과 촉각까지 무뎌진 건 아니니까.

레이더는 좀 더 정확하게 적을 식별할 수 있도록 거들어줄 뿐.

시위가 당겨지는 소리, 사격 직전 사수들이 호흡을 멈추는 소리를 세 번 정도 듣고 나니까 완벽하게 놈들의 위치를 간파해낼 수 있었다.

어김없이 다음 층으로 향하는 포탈이 생성되었다.

일곱 마리의 사수가 그를 반겼다.

일곱 마리 다음엔 아홉 마리.

아홉 마리 다음엔 열. 열 다음엔 열다섯까지.

이내 서른 마리의 사수가 사방을 에워싸고 화살 세례를 퍼부었을 때는 아예 암벽 자체를 깨부숴 필드의 진형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식으로 공략했다.

[19계층의 조건을 달성하셨습니다.]

[다음 층으로 향하는 포탈이 생성되었습니다.]

20계층까지 발을 들이는데 지금까지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

20계층의 시련은 화살을 뭉텅이로 날리는 거대한 발리스타 다섯 기를 없애는 것이었다.

“음?”

그런데 글귀를 읽기도 전에 갑자기 시야가 원상복구 되는 게 아닌가.

스르륵.

핏물만 찼던 텅 빈 눈두덩 속에 상실했던 안구가 다시 생겨났다.

이상함을 느낀 대성이 이맛살을 구기며 눈을 매만지던 그때였다.

“야!”

노기가 잔뜩 서린 고성이 하늘 위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니 한 여자가 잔뜩 뺨을 씰룩거리며 대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은색 갑주를 입고 등 뒤에는 세 쌍의 빛의 날개가 퍼덕거렸다.

투구가 없는 대신 여자는 콧등 근처까지 덮는 금색 나비 가면을 쓰고 있었다.

“사도들의 허락을 받지 않은 녀석이 감히 차원수에 발을 들여?! 대체 뿌리목의 파수꾼은 뭘 하는 거야!”

시력을 되찾은 대성의 눈에는 여성의 머리 위에 뜬 이름표가 보였다.

[제5사도, 오르키엘]

그리고 대성의 눈매가 매섭게 가라앉았다.

‘드디어 만났다.’

천상의 사도(使徒)!

그간 초월자를 심문할 때마다 끈질기게 훼방을 놓았던 놈들.

좋은 감정이 들 리가 없다. 아니, 오히려 말할 것도 없이 찢어 죽이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일단 접어둔다.’

죽이는 것도 죽이는 거지만 일단 반드시 얻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정보.

사도란 게 초월자의 상위에 있는 놈들이라면, 이젠 정보를 캐낼 때마다 원격으로 심문을 방해하는 존재도 없다는 말이리라.

“갑자기 차원수가 왜 열리나 싶더니 이런 불한당이 흘러들어왔을 줄은! 당장 정체를 밝혀라, 이 불한당아! 넌 대체 어디서 굴러들어온 개뼈다귀…… 어?”

그때였다.

죽일 듯이 그를 쏘아보던 오르키엘이 당황했다.

‘나를 알아본 건가?’

초월자를 죽이고 지옥에 가해진 시공간의 봉인을 해제시켜 왔다.

그런 대성의 얼굴을 못 알아보는 게 도리어 말이 안 될 터.

하지만 오르키엘이 당황한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너, 너……! 왜 너한테서 내가 아끼던 영수(靈獸)의 체취가 나는 거야?!”

“체취?”

영수는 또 뭐고.

도통 영문 모를 소리만 들려서 대성은 인상을 구기다가도, 문득 오르키엘이라는 저 이름에서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

‘귀에 익다 싶더니.’

그리고 기적적으로 생각해낼 수 있었다.

업화대검을 얻었을 때, 그는 ‘수호사’라는 거대한 뱀과 싸웠다.

그때 수호사의 주인 노릇을 하는 사도의 이름이 분명 ‘오르키엘’이라고 시스템에 나와 있었다.

“너한테서 수호사의 피 냄새가 나! 틀림없어!”

“…….”

“너, 설마……!”

부정하지 않는 그의 반응을 확인한 오르키엘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럴 리 없다는 듯 사색이 된 그녀를 향해 대성이 말했다.

“수호사라면 그 하얀 뱀을 말하는 건가? 그놈이라면 내가 죽이고 피를 뒤집어썼다.”

“뭐…….”

“그런데 벌써 2년 전의 일이라 아직도 내 몸에서 그놈 피 냄새가 날 리가 없는데? 아끼던 영수라 희미한 냄새도 놓치지 않은 건가?”

말끝에 물음표가 찍히기 무섭게 오르키엘이 빛의 검을 소환해 세차게 휘둘렀다.

붕-!

투박하고 거친 막무가내의 검격이 그녀가 지금 느끼고 있는 분노를 대변해주는 듯했다.

대성이 진각을 뒤로 밟았고 빛의 검은 공기를 갈랐다.

“이 개새끼! 드디어 찾았다! 감히 내 애완동물을!”

“알 바 아니다.”

불가항력이었으니까.

오르키엘이 나비 가면 아래로 울화와 진노가 서린 눈물을 흘리며 빛의 검을 휘둘렀다.

감정에 치우친 무식한 공격이 대성에게 닿을 리는 없다.

쾅-!

“컥……?!”

대성이 가볍게 내뻗은 주먹이 오르키엘의 안면에 적중했다.

그녀는 세 바퀴쯤 땅을 나뒹굴다 날개를 곧게 펴 다시 공중으로 떠올랐다.

매끈했던 입술이 찢어지고 깨진 어금니가 후드득 떨어졌다.

‘가볍게 날렸기는 해도 확실히 힘을 실었을 텐데?’

완전히 얼굴이 함몰되거나 목뼈가 부러져야 정상일 텐데 고작 이빨 몇 개 깨지는 선에서 그쳤다.

‘사도란 명함을 달았으니 허깨비랑은 좀 다르다 이거지.’

“아아아악!”

피범벅이 된 얼굴을 부여잡으며 오르키엘이 분을 쏟아냈다.

드디어 수호사를 죽인 원수를 찾았거늘 도리어 한 방 먹으니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 망할 새끼가!”

오르키엘이 격분을 터뜨린 순간 나비 가면이 빛을 발했다.

머리를 가리는 투구 대신 가면을 쓴 것은 단순한 멋 때문이 아니다.

사도의 기적이 만들어낸 이 가면 모양의 신물은 착용자를 적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존재의 모습으로 둔갑시켜준다.

“어때!”

빛이 꺼지고, 땅에 내려앉은 오르키엘의 얼굴은 놀랍게도 대성의 어머니인 혜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래도 내 소중한 얼굴에 주먹을 날릴 수 있나 보자고!”

심지어 목소리까지 재현했다.

가면의 성능은 절대적이지 않다.

정신력이 굳건한 적들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결국엔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런 놈들이라도 처음엔 무조건 망설일 수밖에 없어!’

소중한 이의 얼굴을 한 적과 싸운다는 사실은 예외 없이 빈틈을 만들었다.

의지가 강철 같다고 한들,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움직임에서 망설임이 드러난다.

혜정의 얼굴을 한 오르키엘이 입가를 비틀며 조소했다.

“사랑하는 자한테서 칼침 맞는 고통을 너도 한 번-.”

오르키엘의 시야가 새카매졌다.

그것이 코앞까지 닥쳐든 대성의 주먹이란 사실은 맞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쾅-!

“끄흑?!”

오르키엘은 바닥을 뒹굴다 말고 갑자기 머리채를 잡혀야만 했다.

이번엔 활짝 편 손바닥이 그녀의 얼굴을 마구 후려쳤다.

짝-! 짝-!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이빨들이 뽑히고 뺨의 살갗이 찢어졌다.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오르키엘이 느낀 건 의문이었다.

사정없이 휘두르는 대성의 손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으니까.

“컥, 잠깐, 컥……!”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다.

엉망진창 걸레짝이 되는 지금 이 얼굴은 분명 놈이 가장 아끼던 이의 얼굴일 텐데!

“우리 엄마 모습을 베낀다고 해서 내가 곤란해할 줄 알았나?”

대성이 차갑게 말했다.

“천만에. 너는 지금 편히 죽을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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