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11화 (111/180)

# 111

111

곰 발바닥 같은 손이 얼굴을 후려칠 때마다 눈앞에서 벼락이 휘몰아치는 듯했다.

짝-! 짝-!

가시덩굴을 엮어 만든 채찍으로 얻어맞아도 이만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으리라.

“커헉, 컥……!”

혜정의 모습을 한 오르키엘의 얼굴은 어느덧 칼날에 난자당한 것처럼 상처로 가득했다.

사실 때리는 대성도 내심 가슴이 아팠다. 어찌 됐든 그가 후려치고 있는 얼굴은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이었으니까.

그래서 한탄과 동시에 분노가 차올랐다. 이런 알량한 수작을 부린 눈앞의 사도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서 손바닥에 막대한 힘이 실렸다.

‘이젠 정보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듣고 싶은 정보를 듣고 난 뒤에 천천히 죽일 생각이었던 원래의 계획이 증발했다.

감정에 휘둘려 실리를 놓치는 건 대단히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데 그깟 정보 좀 얻겠다고 어머니가 모욕당했다는 사실을 쉬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 망할 새끼가!”

제 모습으로 돌아온 오르키엘이 거친 욕설을 뱉으며 여섯 장의 날개를 펼쳤다.

촤-앙!

찬란하게 터진 금빛 광채에 대성이 무심코 눈을 좁혔다.

머리채를 붙든 손아귀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오르키엘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거리를 벌렸다.

쫘아악-!

“큭, 끄흐으읍, 이 망할……!”

억지로 손아귀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머리칼이 사정없이 뜯겨나갔다.

비단처럼 곱게 흘러내렸던 금발이 지금은 짓밟힌 잡초처럼 엉망진창이 되었다.

하도 억세게 뜯긴 탓인지 두피의 살갗도 일부분 떨어져 나가 관자놀이 부근이 피로 축축했다.

‘저놈한테 가면은 통하지 않아!’

빈틈을 만들려고 했는데 설마하니 혈육의 얼굴도 망설임 없이 갈길 수 있는 냉혈한이었을 줄은.

오르키엘은 피가 흐르는 관자놀이를 틀어막으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저놈 저거, 외부 차원에서 왔다는 건 확실한데 대체 어떻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눈앞에 있는 적의 정체를 종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죽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머리를 굴릴 여유도 없을 터.

‘정공법으로 맞서야 해!’

빛의 검을 고쳐 쥔 오르키엘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쇄도했다.

섬광처럼 번뜩인 검격이 대성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까처럼 분노에 사로잡혀 마구잡이식으로 움직이는 검로(劍路)가 아니다. 빛의 검은 확실하고도 치명적으로 대성의 급소를 노렸다.

슥!

정수리로 떨어지는 검격을 막기 위해 대성이 오른팔을 세웠다.

‘멍청한 놈!’

세피라의 조각으로 가공한 빛의 검은 그 무엇으로도 막아낼 수 없다.

단단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아예 물리적인 상식이 통용되지 않으니까.

사도의 무구는 영체의 육신조차 무 자르듯이 가볍게 절삭하리라.

서걱!

“하하!”

선혈이 벚꽃처럼 흩날렸다.

바라던 대로 대성의 오른팔이 통째로 잘리는 광경을 본 오르키엘이 폭소를 터뜨렸다.

“아파 뒈지겠지?!”

빠-악!

조롱이 끝나기 무섭게 무쇠 같은 오른 무릎이 오르키엘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푸헉……!?”

폐부가 터지는 격통에 숨을 크게 토한 그녀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아픈 것보다도 어이가 없었다.

‘팔이 잘렸잖아.’

근데 왜 눈도 깜짝 안 할 수가 있는 거지?

꼭 옷에 묻은 먼지가 떨어지는 걸 봤다는 듯이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이때,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솟구치는 오르키엘의 신형 앞에 시커먼 게 휙, 하고 지나갔다.

크게 도약을 펼친 대성이 그녀를 앞지르며 더 높은 하늘에 당도한 것이다.

그런 그의 왼손에는 경악스럽게도 방금 잘렸던 오른팔이 들려 있었다.

콱-!

대성은 돌멩이에 정(釘)을 찌르듯 오른팔을 오르키엘의 등에 찍었다.

“크헉……!?”

잘린 오른팔이 등허리를 관통해 상체를 뚫고 튀어나왔다.

철퍽-!

‘뭐지?’

어마어마한 격통이 엄습한 것도 잠시, 오르키엘은 땅에 엎어져 있었다.

바닥이 축축했다.

20계층의 배경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어느 메마른 행성일 텐데.

하지만 오르키엘은 곧 대지를 적신 이것이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온 핏물임을 자각했다.

‘이건 꿈인가?’

쑤욱!

오르키엘의 몸이 한차례 들썩였다. 대성이 그녀의 등줄기에 깊이 꽂힌 오른팔을 빼냈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시야 너머로, 대성이 땅에 떨어진 빛의 검을 향해 걸어가는 광경이 보였다. 잘린 오른팔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대성이 빛의 검을 집어 들려고 했으나 이내 입자로 잘게 쪼개졌다.

주신의 증표를 받지 않은 고위 천족이 아닌 이상, 빛의 검은 파지조차 불가능하니까.

‘가면도 안 통해. 검도 안 통해. 자기 잘린 신체 부위를 무기 삼아 휘두르는 미친 작자야. 그럼 대체 어떻게 뭘…….’

본래라면 신성한 무구에 함부로 눈독을 들이지 말라고 역정을 냈을 테지만.

지금은 역정이고 뭐고 어떻게 하면 이겨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같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방법이 없지는 않아.’

콱-! 콱-!

어느덧 투박한 발이 오르키엘의 얼굴을 거칠게 짓밟기 시작했다.

고고한 사도로서의 위신이 바닥까지 추락하는 순간이었지만 오르키엘은 냉정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경각심이 심신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것이다.

‘자존심을 챙길 상황도 아니고!’

그 순간.

화-악!

아까 가면을 발동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광휘가 터져 나왔다.

똑바로 마주했다간 망막이 모조리 타버릴 듯한 빛!

대성은 눈을 찡그리며 왼팔로 얼굴을 잠시 가렸다가…… 다시 내렸다.

그리고,

“…….”

황야였던 배경이 일변했다.

천장과 벽, 그리고 기둥까지 전부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어느 신전의 내부로.

-모든 걸 내려놓겠다.

“…….”

신전의 한복판.

츠르르-!

대성은 머리가 셋 달린 거대한 백사(白蛇)와 마주했다.

놀랍게도 이전에 보았던 수호사보다 두 배는 더 덩치가 커다랬다.

-나는 지금부터 네놈을 죽이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짐승이 될 것이다.

백사의 머리에선 오르키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도화(使徒化).

주신의 인정을 받은 이들만이 지닌 심상 세계로 악(惡)을 불러들이고, 악을 멸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이로써 그녀는 모든 잠재력과 굴레에서 해방되어, 천상마저 휘감을 수 있는 거대한 뱀이 되었다.

위대한 모습을 갖췄으니, 가벼운 언행도 이젠 삼갔다.

-너는 내가 쌓아 올린 세계에 갇혔다. 나를 포함하여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오직 너만을 찢어발기는 단두대가 될 것이다.

“…….”

-야만적인 부외자를 이곳에 들여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구역질이 난다. 하지만…… 말했듯이 지금의 나는 모든 걸 내려놓았다.

이로써 다른 사도들의 손가락질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성전(聖戰)도 아닌, 그저 차원수의 침입자를 죽이는 간단한 임무에 심상 세계를 열었냐며 질책하리라.

우둔한 것들.

과연 같은 입장이 되고도 그 말이 나오나 두고 보자!

-카아아악!

쩍 벌린 오르키엘의 아가리에서 불길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나만 해도 파멸적인 위력을 자아내는 단죄의 불꽃이 무려 세 갈래씩이나 세찬 열기를 방출한 순간.

콰아아아-!!

화염 줄기가 사납게 뿜어져 나와 하얀 신전을 주홍색으로 물들였다.

신력의 불길은 적의 영혼까지 샅샅이 태워버리리라!

-‘10계층의 시련을 돌파했다면 차원수의 축복을 받았겠지.’

고통을 줄여주는 축복. 오르키엘 또한 한때는 승격의 의식을 치른 고행자였기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는 차원수가 아닌 오르키엘의 심상 세계.

차원수가 주는 모든 기적과 축복조차 이곳에선 무용지물이다.

-‘영혼까지 잿더미로 만들어 망령이 될 기회조차 앗아 주마!’

불길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대리석으로 이뤄진 사방이 그을리고 녹아내렸다.

화륵-. 스으으-.

한 방울의 신력까지 모조리 쥐어 짜낸 끝에야 오르키엘은 활짝 벌렸던 아가리를 닫았다.

-훅……. 훅…….

탈진했다. 불을 쏜 당사자마저 목구멍이 바싹 마를 정도로.

하지만 이것으로 놈은 죽었다. 상당한 신력을 소모했지만 어쨌든 이겼으니 된 것 아니겠는가.

저벅.

그 순간.

지쳐서 푹 숙이고 있던 세 개의 머리가 흠칫했다.

넘실거리는 화염 소리만이 신전을 가득 채웠음에도 발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온다.

-설마…….

그런 말과 함께 오르키엘이 고개를 들어 정면을 주시했다.

저벅.

“…….”

악(惡)이 신력의 불길을 뚫고 유유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신력이 아닌 업화의 불길에 휘감긴 커다란 대검을 쥔 채.

-왜, 왜……?

“…….”

-어, 어째, 어째서?

뱀의 얼굴이 마치 사람이 짓는 표정처럼 생생하게 겁에 질려갔다.

여기는 오르키엘이 그려낸 심상 세계다. 이곳에서 그녀는 절대적인 존재. 꼿꼿이 군림할 수 있는 자는 만물을 뒤져봐도 천상의 주신밖에 없을 텐데.

적의 모습이 조금 다르다.

저 대검은 뭐고, 나신이었던 몸을 감싸 안은 저 검은 갑옷은 또 뭐란 말인가!

심지어 잘렸던 오른팔도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돋아 있었다.

“…….”

대성은 공포와 의문으로 얼룩진 오르키엘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심상 세계로 끌고 와준 덕에 지옥의 무구를 억제했던 차원수의 주박(呪縛)이 사라졌다.

-아, 안 돼. 오지 마!

식은땀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오르키엘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목을 한껏 움츠렸다.

신력은 소진되었고, 적은 그 모든 신력이 담긴 공격을 버텨냈다. 그을음을 제외하면 상처 하나 없이.

결론은 하나.

-‘주, 주신과 버금가는 존재……!’

그게 아니고선 이 불가사의한 현상을 해명할 수가 없었다.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그녀의 눈에 비친 대성의 모습은 점점 거대해지고 있었다.

자신감이 꺾이며 맑았던 마음이 탁하고 어두운 공포로 얼룩져갔다. 그녀가 그린 가장 온전한 모양의 심상 세계가 왜곡되고, 왜소해졌다.

심상에 늪이 드리운다.

깊은 늪이.

-아…….

지척까지 다가온 대성의 모습은 거대한 뱀이었던 오르키엘을 어느샌가 내려다보고 있을 정도로 광대해진 상태였다.

아니, 그가 거대해진 게 아니다.

그를 제외한 만상(萬象)이 작아진 것이다.

스릉-.

대검이 올라감과 동시에.

어둠에 잠식당한 신전에 겨우 남은 한 줄기 빛이 대성을 비췄다.

칠흑을 마주 앞두고 이상하게 눈이 부셨던 오르키엘이 중얼거렸다.

-마…….

왜 지금.

그 이름이 입에서 나오는 걸까.

-마신(魔神)……?

서걱!

업화대검이 심상 세계를 불태우고 사도의 목을 잘랐다.

***

“…….”

오르키엘은 지금 사지가 잘린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성스러운 사도의 좌를 점했던 그녀가 지금은 가까스로 심장이 뛸 뿐인 고깃덩어리로 전락한 것이다.

세 개 있던 목 중 일부러 두 개만 잘랐더니 이 모양 이 꼴이다.

심상 세계를 벗어나자 차원수의 속박이 다시 씌워지며 대성에게서 갑옷과 대검이 사라졌다. 대신 한 번 복구된 팔은 그대로였다.

“혀는 남겨두었다. 질문에 대답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어째서… 또 새로운 마신이….”

“이제야 날 알아보나.”

긴가민가하던 참이었는데 이로써 명확해졌다. 오르키엘은 대성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너희들이 지옥에 씌운 멍에를 걷어낸 게 나다. 초월자를 통해 원하는 답을 얻으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너희 사도란 것들이 원격으로 훼방을 놓더군. 그랬으면서 지금 와서 내 얼굴을 처음 본다고?”

“…우리가… 한 게, 아니야…. 우리는 태생적으로… 경배의 맹약을 맺고… 태어나거든….”

“경배의 맹약?”

“천상과 관련한… 기밀을… 허락받지 않은… 존재에게, 발설하지… 못하도록….”

오르키엘의 눈에서 점점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바탕 난리가… 났지…. 기껏 시공간을… 봉인해둔 지옥… 어비스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으니까….”

“…….”

“몇 차례나… 시도했어…. 천사들이… 그리고 몇몇 사도들이… 어비스로 직접, 강림하면서까지…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려고 했지만….”

불순한 존재가 멋대로 지옥에 난입했음을 깨닫자마자 사도들은 병사를 이끌고 내려갔다.

“하지만… 우리는 어비스를 둘러싼… 수수께끼의 방벽에… 가로막혀… 강림조차 오롯이… 해낼 수 없었어…. 방벽이… 어비스를 관측하는 것조차… 못 하게 했거든….”

“…….”

“아주 하찮고… 작은 병사들은… 방벽의 틈을 비집고… 너에게 닿을 수 있었겠지만…. 높은… 신위(神位)를 지닌 자들은… 그 쥐구멍에… 들어갈 수가 없었지….”

귀왕의 영지를 구현하는 퀘스트에서 처음으로 플라이와 만났을 때, 대성은 형벌을 집행하러 온 천상의 병사와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오르키엘의 종자들.

그녀가 말한 하찮고 작은 병사들이 그 종자를 뜻함이 틀림없다.

“…알 수 없는, 힘이…. 거대한 시스템이… 어비스를 보호하고, 너에게 길을… 내주고 있어….”

오르키엘이 힘을 쥐어 짜내며 눈알을 굴려 대성을 노려보았다.

“대체 무엇이… 너를 어비스로 인도하는… 거야?”

“질문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하는 거다. 너희들이야말로 무슨 개수작을 부리는 있는 거지?”

“…….”

“그래. 경배의 맹약이라 이거지.”

방금 건 기밀이라고 할 만한 레벨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거고.

맹약이 입을 채우는 마개라면 이런 문답을 나누는 것도 부질없다.

불능이 된 적한테 뭘 바라겠는가.

‘직접 천상으로 올라가 해답과 마주하겠다.’

선택지가 좁혀지니 오히려 상쾌해졌다.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상황이 이래서 좋은 거다.

휘이이잉!

팔다리가 잘린 고통과 짙은 자괴감 속에서 통곡한 끝에, 오르키엘은 신기루처럼 덧없이 사라졌다.

땡그랑.

나비 가면 하나만을 남긴 채.

“…….”

대성은 천천히 가면을 집었다.

《오르키엘의 가면》

* 천상의 제5사도, 오르키엘이 승격의 의식을 완수하며 얻은 보상품.

* 상대방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자의 모습으로 변합니다.

* 상대방을 특정하지 않을시, 최초로 가면을 쓴 자의 모습을 모방할 수 있습니다.

* 모방한 대상이 사용자의 격(格)보다 높지 않은 이상, 모방한 대상의 능력을 완벽히 재현합니다.

대성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마지막에 적힌 부분이었다.

단순히 다른 존재의 모습을 베끼는 능력이라면 <더 북>에 기재된 권능 중에도 비슷한 게 하나 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형태를 베낄 뿐, 베낀 대상의 능력까지 가져오지는 못한다.

‘어떻게 써먹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녔겠군.’

일단 지니기로 했다.

차원수 때문에 아공간에 넣을 수 없다는 게 좀 불편하긴 하지만.

가면을 대충 한 손에 쥔 대성이 다음 층으로 향하는 포탈이 열리길 기다리던 그때였다.

[죽어간 사도의 신력이 이곳을 맴돌고 있습니다.]

[6계위 치품천사(熾品天使)의 신력을 흡수합니다. 사도가 지닌 고강한 신위를 일부 계승합니다.]

[오류 발생. 물질계의 육신이 아니기에 신력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영체에서 벗어나는 순간 신력이 재흡수됩니다.]

‘신력의 흡수라고?’

글귀를 본 대성이 잠깐 멈칫하며 몸을 살폈다.

겉모습은 달라진 게 없었다.

아니, 어쩌면.

‘시스템이 말한 것처럼 영체라서 변화가 없는 건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뭔지 모를 무언가가 굴러들어온 기분이다.

문제는 신력이란 것이 독인지 득인지 파악할 길이 없다는 거지만.

‘사도의 힘인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이 어떤 결과물을 가져다줄지는 지금으로선 미지수다.

일단은 차원수의 시련을 마치고 영체에서 벗어나야 그 정체를 알 수 있을 터.

묘하게 찝찝하긴 했으나, 일단은 시련에 집중할 때다.

‘안 나오는군.’

잡념을 지워낸 대성은 필드의 정중앙을 말없이 주시했다.

근데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이건만 포탈이 생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년이 강제적으로 시련을 중단시킨 게 문제가 된 건가?’

멀쩡히 작동하던 기계도 강제적으로 전원 스위치를 내리면 어딘가 탈이 나는 법이다.

이미 죽은 오르키엘에 다시 짜증이 돋치려던 찰나.

<위대한 사도의 죽음.>

<강제적인 시련의 중단.>

<혼돈이 차원수에 차오릅니다.>

시스템이 메시지를 내보냈다.

그것도, 전혀 처음 보는 형태의 텍스트 창.

지옥의 시스템처럼 활활 타지도, 천상의 시스템처럼 금색 띠를 둘러 입은 것도 아니다.

검은 재가 모이고 모여 겨우겨우 글씨를 만들어낸 듯, 음침한 형태.

‘뭐지?’

지옥 불이 타고 남은 시스템 창이 이런 모습일까.

문득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기 무섭게,

스륵!

대성의 몸은 돌연 깊은 나락으로 가라앉았다.

***

휘이이잉!

서걱!

불어오는 거친 돌풍이 영체의 살갗마저 잘라냈다.

실시간으로 바람을 빙자한 칼날이 몰아치는데 뛰어난 회복력이 무슨 소용이랴.

“…….”

제대로 눈을 뜰 여유도 없다.

수렁으로 빠지는 감각이 한동안 이어지나 싶더니 갑자기 칼바람이 몸을 찢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후…….”

대성은 한숨으로 고통을 털어낸 뒤, 일어서려고 땅에 손을 짚었다.

떨그럭.

그러다 손에 뭔가가 채였다.

시선을 움직여서 보니까, 그것은 어느 짐승의 뼈였다.

직후, 그는 이 정체 모를 공간의 땅바닥 전체가 어떤 생물의 뼈와 해골에 매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

휘이이잉! 서걱!

돌풍이 끊임없이 불어온다.

넝마처럼 갈가리 찢기는 몸을 이끌며 앞을 보았다.

황혼이 뒤섞인 암흑 공간이 지평선 저편까지 이어져 있었다.

아아아아아-!!

청각을 긁어대는 날카로운 소음의 정체가 칼바람인 줄 알았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알고 봤더니 소음의 정체는 저 먼 곳에서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비명이고, 절규였다.

사아악-.

재의 글귀가 허공을 수놓았다.

<차원수의 가장 깊은 뿌리에 당도했습니다.>

<판데모니움에 발을 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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