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12화 (112/180)

# 112

112

구현화를 통해 현세에 나타나는 모든 마수는 판데모니움에서 해방된 존재들이다.

어느 날, 대성은 사령단장 돌프에게 그 판데모니움이란 세계에 관해 물었던 적이 있었다.

잊을 만하면 마수들이 내보내 달라고 아우성치는 탓에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돌프의 첫 마디는 이랬다.

-반쪽짜리 영혼만 남은 껍데기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네가 멀쩡한 생명을 망자로 만들 때처럼?

-저는 단지 영혼을 통째로 부식시키고 갈취할 뿐. 나무라도 자르듯 영혼을 절반만 남기는 세심한 기행은 해내지 못합니다.

형체 없는 영혼을 다루는 돌프조차 혀를 내둘렀다.

대성으로선 미지의 영역이기에 명확한 이해는 가지 않았으나, 얼추 맥락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잘린 영혼의 절반은 초월자가 숙주로 삼은 뒤, 과거에 기록된 육체에 주입됩니다.

필드 구현 퀘스트에서 만나는 마수들이 그러한 존재들이었다.

혼이 반 토막 나고 세뇌당한 자들.

-그리고 남은 절반의 영혼을 가진 마수는 판데모니움에서 영원토록 고통받습니다.

-굳이 영혼을 절반씩 남기는 것에 마땅한 이유가 있나?

-그건, 영혼이 남아야…….

돌프는 그 대목에서 잠시 말끝을 흐리기 시작했다.

검은 눈두덩 속에 박힌 보랏빛 안광이 부르르 떨렸다.

치가 떨리고, 화가 난다는 듯이.

-고통을 느끼고 절규를 토해 내지 않겠습니까.

아아아아아-!!

비명이 끊임없이 저 먼 곳에서부터 메아리쳤다.

위태롭게 허공에 붙들렸던 글씨가 칼바람에 휘말려 완전히 부서졌다.

잿빛 파편이 돌풍과 함께 날아와 대성의 뺨을 스쳤다.

‘젠장.’

시스템은 이 황혼이 내려앉은 광야의 정체가 판데모니움이라고 했다.

그리고 판데모니움은 지옥에서마저 숨이 끊어진 생명이 떨어지는, 심연 중의 심연이다.

‘차원수에 혼돈이 차오른다고 했었지, 분명.’

아무래도 강제적인 시련의 중단과 사도의 죽음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무언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가장 깊은 뿌리에 당도했다고도 했었고.’

설마하니 판데모니움이 차원수의 밑에 있는 곳이었을 줄은.

좌우지간 곤란하게 됐다.

한시라도 빨리 시련을 돌파해 천상이 있는 꼭대기까지 올라야 할 마당에, 오히려 지하까지 떨어지다니.

퍼걱-! 퍽-!

“…….”

거기다 이 칼바람.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사방팔방에서 채찍이 휘둘러지는 것처럼 피륙이 난자당했다.

생생한 고통이 전신의 신경을 뒤흔들었다.

<판데모니움에서는 차원수의 축복을 비롯한 그 어떤 버프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몇 번이고 베이고 회복되기를 반복하던 와중에 글귀가 떠올랐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 축복이고 뭐고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새삼스럽다고 생각한 대성은 쉬지 않고 다리를 움직였다.

‘어떻게든 여기를 벗어나야 해.’

아래로 가라앉는 감각과 함께 이곳에 도착했다.

그렇다면 통로가 하늘과 연결되었나 싶어서 위를 쳐다봤으나, 그곳엔 샛노란 빛이 미미하게 섞인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판데모니움을 벗어날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멍하니 있어봤자 칼바람에 몸이 찢기는 고통만 만끽할 뿐이다.

‘한 발짝이라도 더 움직여서 동아줄이 될 만한 것을 찾아야 한다.’

나가겠다는 일념을 독하게 품고 대성은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방황했을까.

아아아아아-!

먼 곳에서 들리던 비탄이 이제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선명하게 귓전을 울렸다.

쿵-. 쿵-!

지면이 엷게 떨리며 발아래를 수놓은 뼛조각들이 들썩였다.

‘왔군.’

이 판데모니움을 가득히 메운 비명이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지, 그리고 이 땅을 울리는 육후한 존재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는 돌프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이내 커다란 무언가가 집어삼키듯이 대성의 앞에 드리웠다.

“…….”

팔꿈치와 무릎을 곧추세운 채 바닥을 기는 검은 거인.

세우면 200m에 육박할 법한 거대한 동체는 온통 쇠사슬로 칭칭 휘감겨 있었다.

아아아아-!!

그리고 처절한 절규는 다름 아닌 쇠사슬 안에서 터져 나왔다.

말라비틀어지고 축 늘어진 거인의 사지엔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들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터무니없고, 기괴한 괴물.

‘망혼 포식자.’

판데모니움에 떨어진 반쪽짜리 영혼을 잡아먹는 맹수.

그렇게 잡아먹힌 영혼은 저렇게 포식자의 살갗에 돌출된 채, 칼바람에 휩쓸리며 눈물을 쏟아내고 비명을 토해낸다.

‘전부 아는 얼굴들이다.’

대성이 죽인 마수들의 얼굴이 포식자의 전신을 수놓고 있었다.

오열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저 낯짝들이 포식자의 살점이 되어주는 셈이다.

그때.

새로이 판데모니움에 발을 들인 자를 발견한 망혼 포식자가 천천히 아가리를 벌렸다.

썩은 진물 같은 체액이 뚝뚝 떨어지며 악취가 진동했다.

‘나까지 잡아먹힐 순 없지.’

쓰레기를 주워 먹는 짐승 따위한테 당할 순 없는 노릇.

쉬지 않고 불어오는 칼바람이 온몸의 심줄을 잘라낸 탓에 제대로 자세를 취하기도 버거웠다.

‘도망치느니 저놈을 쓰러뜨린다.’

어쩌면 눈앞의 망혼 포식자를 죽이면 이곳을 빠져나갈 단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대성의 눈이 깊게 가라앉던 찰나.

……! ……!

우악스럽게 눈앞의 먹잇감을 삼키려던 망혼 포식자가 돌연 동체를 비틀기 시작했다.

영문 모를 상황에, 대성은 잡았던 자세를 도로 풀었다.

‘뭐지?’

망혼 포식자는 몸속에 가시라도 돋친 듯 사지를 뒤틀며 땅을 굴렀다.

그럴 때마다 뼈 무더기들이 난잡하게 사방에 흩날렸다.

대성은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다 문득 인지했다.

‘비명이 그쳤군.’

몸에 들러붙은 반쪽짜리 영혼의 비명이 곧 망혼 포식자가 내지르는 포효와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영혼들이 일제히 입을 다문 탓에, 소리 없는 괴성만이 막연히 이어졌다.

잠시 후, 바닥을 뒹굴던 망혼 포식자가 잠잠해졌다.

그리고,

-아아…….

-주군이시여…….

-그곳에 계시나이까…….

엎어진 포식자의 전신에서 검은 핏물이 쪽, 소리를 내며 솟구쳤다.

녀석의 부푼 살덩어리를 구성하는 망혼들의 얼굴이 눈물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나를 볼 수 있는가.”

포식자가 완전히 침묵한 뒤에야, 대성은 여유롭게 마수들의 면면과 마주할 수 있었다.

마수들이 저마다 입을 열었다. 얼핏 봐서는 구더기가 꿈틀대는 듯한 징그럽고 기이한 광경이다.

-주군을 영접하기 위해 의지를 끌어모아 간신히 포식자를 잠재웠습니다…….

-억지로 의식을 끊었으니 곧 깨어나겠지만…….

-포식자가 잠든 지금만이, 저희가 주군을 영접할 유일한 기회입니다…….

이 또한 돌프로부터 들어본 적이 있었다.

망혼 포식자는 비특이적인 주기마다 수면기에 접어드는데, 그 순간을 틈탄 마수들이 판테온을 매개 삼아 대성에게 메시지를 보낸다고 했다.

‘실이 이어진 감각이라고 했었지.’

오직 고통을 느끼기 위해 남겨졌을 영혼이, 판테온이라는 이면 세계와 이어진 듯한 감각.

‘내 모습은 아르고니악의 수정구를 통해 주시한다고 했었고.’

포식자의 몸 어딘가에 박제되어 있을 아르고니악이란 마수는, 특정한 대상을 주시할 수 있는 보주를 두개골 속에 저장한다.

본래는 아르고니악밖에 보주를 들여다보지 못하겠지만, 저 마수들은 포식자의 살덩어리로써 서로와 일체화된 존재들.

즉, 아르고니악이 보는 풍경을 함께 공유하는 셈이다.

-항상 주군을 시끄럽게 해서 송구합니다…….

-하지만 포식자가 잠들었을 때만이, 저희가 오롯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순간입니다…….

-저희의 절박함을, 그리고 간절함을 부디 넓은 아량으로 헤아려주소서, 위대한 주군이시여…….

느닷없이 마수들이 사과하기 시작했다.

혹시 시스템 메시지로 수차례 아우성친 것이 마음에 걸린 걸까.

‘내가 조용히 하라고 해서 최근 들어 잠잠해진 게 아니었나?’

문득 그런 가설이 스쳤다.

단순히, 포식자가 수면기에 접어들지 않아서 메시지를 보낼 여유가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고.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내가 여기서 나갈 방법이 있나?”

마수 놈들이랑 한가로이 재회를 나누고 싶지는 않다.

이러는 와중에도 칼바람은 끝없이 휘몰아친다. 포식자의 살점이랑 다를 바 없는 마수들의 얼굴이 베어졌다 아물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놈들은 용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주군의 앞이기 때문이다.

-판데모니움을 여닫을 수 있는 존재는 관리자뿐이옵니다…….

-포식자가 잠들었으니 곧 관리자가 이곳을 찾아올지도…….

-대비하소서…….

마수들의 술렁임을 들은 대성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판데모니움은 망혼을 가두는 광활한 감옥과 같다고 돌프는 말했다.

그리고 감옥에 죄수들을 관리하는 간수가 있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다만,

‘찾아온다고?’

직접 찾아가는 걸 예상했는데 이곳에 찾아온다니.

의아함이 스친 순간, 눈앞에 먼지 같은 메시지가 스르륵 나타났다.

<‘뿌리의 접점’이 열렸습니다.>

<판데모니움의 관리자, ‘엔’이 나타났습니다.>

<형벌의 바람이 그칩니다.>

지긋지긋하게 휘몰아치던 돌풍이 언제 그랬냐는 듯 뚝 멎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황혼 색을 띤 빛무리들이 점차 허공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

빛무리의 정체는 관리자일 터.

우선, 대성은 산만큼 커다란 포식자의 동체 뒤로 몸을 숨겼다.

***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바로 얼마 전에 수면기에 접어든 망혼 포식자가 다시 한번 잠에 빠지다니!

‘이토록 주기가 짧았던 적은 없었는데? 이상하군.’

망혼들은 눈에 담지도, 발을 들이지도 못하는 수수께끼의 장소.

뿌리의 접점.

차원수의 줄기와 뿌리가 서로 맞닿을 듯이 가까운 작은 틈새 속에서, ‘엔’은 혼란에 휩싸였다.

비루한 노인의 모습을 한 그는 목덜미까지 길게 헝클어진 회색 수염을 쓰다듬었다.

‘내가 내려가 봐야겠어.’

망혼 포식자는 엔이 직접 신력을 바쳐 창조해낸 정령이다.

녀석이 어디서 뭘 하는지, 오늘은 몇 마리의 죄수를 잡아먹었는지는 눈으로 보지 않아도 피부에 닿을 듯이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엔은 지금, 망혼 포식자가 행동을 멈추고 잠에 빠졌음을 눈치챘다.

쩌저적-.

덩굴로 뒤덮여 주름이 자글자글한 땅이 활짝 열리며 구멍을 생성했다.

‘뿌리의 접점’ 아래 바로 직결된, 판데모니움의 시커먼 심연이 구멍 너머로 보였다.

‘제발 녀석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게 아니어야 할 텐데.’

포식자는 자신의 직무를 대신해줄 존재다. 엔은 어둡고 축축한 심연 속에서 죽치고 있을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이내 구멍 안쪽으로 발을 들인 엔은 빛무리로 갈라지며 판데모니움으로 전이했다.

그리고 보았다.

“정말 잠들었잖아?”

몸을 눕힌 채 호흡만 간헐적으로 내뱉는 포식자의 모습을.

녀석이 잠드는 시기는 정령의 주인인 자신조차 예기치 못한다지만 이건 너무나 이상했다.

완전히 전이를 마친 엔은 원인을 캐내기 위해 포식자를 향해 가까이 접근했다.

“불쌍한 영혼들아.”

-…….

“포식자가 또 곤히 잠들었구나. 내가 없는 사이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니?”

엔이 너그러이 눈웃음 지으며 마수들의 얼굴을 살폈다.

반면, 마수들은 안면 가득히 원한의 감정을 담아 엔을 쏘아보았다.

질문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살벌한 눈총만 꽂히는 것이 엔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희들의 고통을 제어할 수 있는 결정권은 나한테 달렸단다. 아무래도 형벌의 바람만으로는 반성할 마음이 들지 않나 보지?”

-…….

“이미 죽어서 이곳에 온 너희는 다시 죽을 순 없다. 그렇기에 죽지 않고 계속, 영겁의 시간 속에서 고통받는 거지.”

마수들은 표정에서 원망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서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들도 식물이 아닌 이상에야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죽지도 못한 채 고통만을 반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슬픈 일인지, 너무나 잘 안다.

“질문에 대답하렴. 다음엔 상처가 아물 틈도 없이 더 매섭고 가혹한 형벌을 내리기 전에. 이곳에 무슨 일이 없었니? 누가 왔다거나…….”

“내가 왔어.”

나긋하게 신경전을 벌이던 엔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이윽고 백내장에 걸린 듯이 혼탁한 엔의 눈동자가 수축했다.

그만큼 놀랄 만한 존재를 눈에 보았기 때문이다.

“오, 오오……. 이, 이럴 수가……!”

“계속 그렇게 멍하니 넋 놓고만 있을 거야?”

사도, 오르키엘.

그녀가 난데없이 판데모니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엔이 지체 않고 넙죽 엎드렸다.

“지, 지고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이, 이런 미천한 곳에 사도께서 어인 일이신지요……?”

“허락받지 않은 고행자가 멋대로 차원수에 발을 들였어.”

“예, 예……?”

“어지간히 날뛴 모양인지 위에는 완전 개판이야. 그놈은 보이지도 않고. 수색하던 중에 차원수가 뒤집혀서 갑자기 여기로 떨어졌어, 젠장. 이게 무슨 망신이람!”

“아, 부디 노여움을……!”

엔이 초조한 목소리로 오르키엘의 화를 달랬다.

망혼도 아닌, 심지어 사도라는 굴강한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판데모니움의 흐름이 뒤집힐 위험은 충분히 존재했다.

“됐고. 이딴 곳에서 단 1분 1초도 못 있겠어. 얼른 좀 내보내 줄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 몹시 불쾌하시겠지만 잠시 제 손을 잡아주십시오.”

오르키엘은 불쾌하다는 얼굴로 엔의 주름진 손을 붙잡았다.

그 순간, 처음에 엔이 이곳에 나타났을 때처럼 오르키엘의 몸이 빛무리로 갈라졌다.

잠시 후, ‘뿌리의 접점’이 사방에 펼쳐졌다.

“사도께서 판데모니움에 행차하신 건 이번이 처음이지요.”

엔이 느긋한 발걸음으로 황량한 접점 내부를 거닐다 불현듯 말했다.

“흠. 그런데?”

“아, 아뇨. 고독한 노인네가 간만에 대화를 나눠서인지 말이 많아졌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그는 오랜 시간을 외로이, 이 접점과 저 아래의 심연을 오가며 사명에 붙잡혀 왔다.

설령 곁에 있는 자가 대하기 어려운 사도라 한들, 반가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나저나 여기 꽤 흥미로운데?”

“예?”

“궁금하네. 여기는 어떤 원리로 안팎을 드나들 수 있는 거야?”

오르키엘이 뒷짐을 진 채 접점 내부를 쭉 둘러보았다.

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도께서 내 말에 흥미를 보이시다니!’

괜히 신이 난 엔은 급격하게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저희가 향하는 접점의 북쪽 제일 깊은 곳에, 뿌리목과 이어진 길이 놓여 있습니다.”

“응, 그래서?”

“거기서 관리자인 제 피를 떨어뜨리면 길이 열립니다.”

“관리자가 아닌 다른 이의 피는 소용없는 거야?”

“아이고, 판데모니움에 대해선 문외한이시군요.”

하기야 지고한 사도가 이런 미천한 곳에 관심을 둘 리가 없다.

6계위의 고위 천사가 이깟 오물 처리장에 박식한 편이 오히려 더 이상할 터.

“됐고. 대답이나 해.”

“아, 예. ‘뿌리의 접점’은 심연을 관장하는 자의 심장에서 나온 피에만 반응합니다. 제 심장이야말로, 관리자의 증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요.”

그리고 말에 방점이 찍히기 무섭게 엔의 시야가 돌연 뒤집혔다.

울컥!

난데없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무수한 피가 메마른 입술에서 비어져 나왔다.

“허, 허억……?”

창자가 꼬이고, 뼈가 가루가 되고, 살이 녹고…….

존재 그 자체가 허물어지는 듯한 이 느낌.

처음 받아들이는 고통이지만, 출처가 어디인지는 머릿속에서 각인된 정보가 알려주었다.

‘겨, 경배의 맹약이 왜 지금……?’

외부의 존재에게 기밀을 허락받지 않도록 씌워진 주박.

그런데 눈앞에 있는 자는 사도다. 사도는 경배의 맹약이 적용되는 외부의 존재가 절대 아니다.

울컥!

한 차례 더 피를 쏟은 엔의 몸이 가루처럼 바스러져 갔다.

머리가 혼미해지고 검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좋은 정보 고맙다.”

오르키엘의 얼굴 살가죽이 딱딱한 나비 가면으로 일변하고 있었다.

이내 허물을 벗고 본 모습을 드러낸 대성이 먼지가 되어 소멸하는 엔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이걸 눈치 못 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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