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13화 (113/180)

#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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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능력으로 모습을 위장시키고 관리자를 속이는 건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다행히 먹혔지만.

자신이 속았다는 걸 깨달은 엔은 먼지로 소멸하기 직전까지 핏발이 가득한 눈으로 대성을 노려보았다.

대성은 무심히 뜨인 눈으로 느긋하게 감상해준 뒤, 엔이 죽었던 자리로 가까이 다가갔다.

‘방금 놈이 말했던 관리자의 증표가 이건가.’

주름이 한가득 진 바닥에는 숯처럼 새까만 심장이 떨어져 있었다.

엔의 심장.

본체가 완전히 소멸했는데도 심장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심지어 세차게 힘줄을 내보이며 펄떡펄떡 뛰기까지 했다.

<성물(聖物), ‘두 번째 심장’을 획득하셨습니다.>

<‘두 번째 심장’을 섭취하실시, 판데모니움을 관리하실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합니다.>

글귀에 나온 정보를 확인한 대성은 짧게 고심했다.

판데모니움을 관리할 수 있는 자격. 과연 이것이 이득이 되어줄지 직관적으로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지. 얻지 않는 쪽보다는 얻는 편이 훨씬 낫겠군.’

알지 못하는 영역을 지배하는 힘을 얻는다는데 상식적으로 손해가 될 리가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판데모니움은 죽은 마수들이 모인 곳이고, 그들은 대성에게 한없고 맹목적인 충성을 보인다.

그들을 가둔 세계를 관리하는 힘이 손에 들어온다면, 그건 곧 전력 증진으로 이어질 터.

‘먹는다.’

짧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굳이 이 징그러운 심장을 섭취해야 한다는 방식에 눈살이 찌푸려졌으나 시원하게 참아주기로 했다.

와그작!

대성은 입을 크게 벌려 과실을 먹듯이 대범하게 심장을 베어 물었다.

석탄 씹는 식감이 적잖이 불쾌했으나 다행히도 무미무취(無味無臭).

꿀떡!

남김없이 ‘두 번째 심장’을 집어삼킨 목울대가 흔들림과 동시에,

두근-!

돌연 열병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지고 맥박이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두 번째 심장’이 성공적으로 이식되었습니다.>

<판데모니움의 관리자가 ‘한대성’으로 설정됐습니다.>

<이제부터 실시간으로 판데모니움에 수용된 죄수들의 상태를 점검 및 영향력을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죄수들 또한 원할 경우, 관리자에게 공물을 바치거나 망혼의 형태로 불려 나오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판데모니움을 활성화하려면 명령어, ‘판데모니움 연결’ 언급.>

몸속을 가득 채운 달뜬 감각이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거의 가격하듯이 격렬히 가슴을 두드리던 맥박도 점차 템포를 늦췄다.

대성은 조용히 심장이 위치한 곳에 손을 올리고 고동을 느꼈다.

‘난리군.’

아까처럼 거의 터질 듯이 뛰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평소와 비교해 맥동의 속도가 2배가량은 상승한 듯했다.

마치 시스템으로 보였던 마수들의 아우성이 심장으로 옮겨간 것처럼.

그들의 목소리, 그들을 가둔 세계, 심연 중의 심연이 자신의 몸에 잠든 것처럼.

“판데모니움 연결.”

<판데모니움-직위: 관리자>

망혼의 감정 상태: 흥분 S, 환희 S, 희열 S, 기쁨 S, 존경 S

정복률: 100%

「마수들이 지나칠 정도로 관리자에게 호의의 감정을 가집니다. 일심동체라 일컬어도 무방할 정도로 혼의 결속력이 견고해집니다.」

「한 번에 소환할 수 있는 망혼의 최대 숫자가 200마리로 상승합니다. 생전에 지녔던 전투력을 최대 33.3%로 재현합니다.」

「100%의 정복률을 달성하여 판데모니움의 마수들이 직접 공물을 바칠 수 있습니다.」

허공에 떠오른 먼지 글씨를 차근차근 읽어내려가던 중이었다.

돌연 우수수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가 고요한 집중을 깨뜨렸다.

<판데모니움의 마수들이 절대자께 환호합니다!>

<판데모니움의 마수들이 망혼 포식자로부터 해방된 것에 대해 미친 듯한 기쁨을 보입니다!>

<판데모니움의 마수들이-.>

엔이 죽고 판데모니움의 관리자 직을 대성이 계승함으로써, 마수들을 잡아먹던 망혼 포식자도 덩달아 소멸한 모양이다.

마수들은 그야말로 주체하기 힘든 희열을 메시지로 표현했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쳐서 대성은 식은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제발 닥쳐.”

기분이 불쾌해서 던진 말이다. 그밖에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런데,

<마수들이 보내는 메시지를 표시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마수들의 감정 상태와 관련한 메시지를 읽으실 수 없습니다.>

<최소한의 기본적인 시스템 메시지만 표시합니다.>

뚝.

정신없이 빗발치던 메시지의 홍수가 언제 그랬냐는 듯 그쳤다.

보아하니 대성이 원하지 않으면 메시지는 언제든지 차단할 수 있는 듯했다. 정신만 사납고 꼴 보기 싫었는데 잘 된 거다.

‘공물이라…….’

시스템이 언급한 공물이라는 게 무얼 의미하는 걸까.

아이템이라도 바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심연에 갇혀 옴짝달싹도 못 하는 녀석들이 거기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조만간 알게 되겠지.’

의문에는 시간이 대답해주리라. 조급해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지금은 새로 얻은 힘에 취할 때가 아니다. 대성은 아까 엔이 죽기 전에 말했던 지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녀석이 했던 말대로 북쪽 방향 제일 깊은 곳에 다다르니, 나선형으로 뒤엉킨 덩굴줄기가 평평하게 닫힌 천장과 이어진 것이 보였다.

‘관리자의 피가 아니면 열리지 않는다고 했지.’

콰득!

살을 벨 날붙이가 없으니 이빨로라도 손가락을 씹어 피를 냈다.

선혈이 슬며시 배어 나오는 엄지 마디를 덩굴줄기에 갖다 댔다.

둥글게 고인 핏방울이 아래로 떨어져 덩굴줄기를 적신 순간.

스르륵-!

건조한 갈색을 띠던 덩굴줄기가 차츰 허옇게 세더니 이내 폐쇄되어 있던 천장에 구멍이 뻥 뚫렸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오고 갈 수 있는 작고 좁은 구덩이.

대성은 비스듬하게 놓인 덩굴줄기를 타고 올라 구덩이를 빠져나갔다.

‘빌어먹을.’

그리고 대뜸 화부터 치밀었다.

‘뿌리의 접점’을 빠져나가니, 제일 처음 파수꾼 오디와 마주쳤던 뿌리목 부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차원수 내부로 통하는 입구는 여전히 개방된 상태.

‘설마 1계층부터 다시 올라가야 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치가 떨렸던 10계층의 시련도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는 뒤통수가 스산해지는 불안감을 안은 채 차원수 내부로 진입했다.

“…….”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 달라졌다.

공중에 뜬 원반 형태의 필드는 그대로다. 하지만 깔끔했던 외관이 지금은 한바탕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엉망진창 금이 갔다.

필드를 둘러싸던 화창했던 하늘도 폭풍이 한차례 지나간 것처럼 먹이 잔뜩 꼈다.

다만 다음 층으로 향하는 푸른 광채의 포탈만이 필드의 중앙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을 뿐.

‘혼돈의 여파인가?’

혼돈이라는 게 정확히 뭘 말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로 인해 차원수가 심히 뒤틀렸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혹시?

문득 어떤 생각이 스친 대성은 포탈 위에 발을 디뎠다.

<차원수에 차오른 혼돈이 ‘승격의 의식’을 방해합니다. 모든 시련이 일체 중단됩니다.>

<1계층~100계층 중 원하시는 층계를 선택하십시오.>

프리패스!

이만큼 기쁜 소식이 또 있을까? 절로 입가가 씰룩거렸다.

지리멸렬하게 한 계단씩 밟으며 세월아 네월아 100층까지 올라갈 필요가 모조리 사라졌다.

차원수를 가득히 채운 혼돈이 대성에게 든든한 아군이 되어준 셈이다.

“100층.”

시원하게 질렀다.

포탈의 광휘가 대성의 몸을 휘감았다. 중력을 거꾸로 타는 듯한 부유감과 동시에 풍경이 뒤바뀐다.

그러자 먼지가 응집된 메시지가 아닌, 불길에 휩싸인 지옥의 시스템 UI가 눈앞에 생성됐다.

[100계층 도착. 차원수의 꼭대기에 다다릅니다.]

[‘축복의 대륙’, 엘리시온(Elysium)에 진입합니다.]

화륵!

시야를 가리는 지옥의 팝업 창이 사라지고 그를 반긴 것은,

‘이게 천상.’

고도로 발달 된 황금의 도시였다.

정확히는 절경.

대성은 지상이 아니라 어느 산맥의 정상에 있었다.

그런 그의 시야 너머로, 광활한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 것이다.

‘아름답군.’

흑점이 폭발하듯 사방천지에 용암이 줄줄 흐르던 지옥, 매연이 대기를 뒤덮은 지구의 회색 도시에서만 살다 왔기 때문일까.

때 묻지 않은 순수한 평화와 번영(繁榮)이 저 너머 펼쳐져 있었다.

바로 지척에 포위진을 짠 은색 갑옷의 적들만 아니면 마음을 비우고 느긋이 감상했으리라.

“어디서 온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투항해라. 불복하겠다면 이 자리에서 즉결 처형하겠다.”

그리 말한 여자는 선두에서 대열을 이끄는 지휘관으로 보였다.

얼굴을 가린 투구 때문에 눈매가 드러나지 않는 대신, 목소리엔 날카로운 살기가 가득했다.

“여기가 적의 본진이라는 걸 잊을 뻔했네.”

황홀한 풍경 때문에 마음의 경계심이 잠깐이나마 흐트러졌다.

화륵!

커다란 업화대검의 그의 손에 쥐어졌다. 무저갱처럼 시커먼 발라르크의 갑옷이 흐릿한 영체를 감쌌다.

이제 여기는 차원수가 아니다. 지옥의 시스템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투항하지 않으시겠다?”

촤르륵-!

갑옷 여성의 후위에 선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전투태세를 갖췄다.

언뜻 저 너머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작은 배가 보이는 걸 보니 문명은 상당히 진보된 듯한데, 어째 사용하는 무기는 창칼 따위의 냉병기다.

“아무렴 상관없지.”

눈앞의 적이 핵폭탄을 들이댄다 해도 알 바가 아니다.

그간 차원수의 힘 때문에 억눌린 울분을 토해내듯, 대검에 깃든 마그누스가 불길을 터뜨렸다.

화르륵-!

한바탕 날뛸 시간이다.

***

화륵, 화륵-. 타닥-!

갑옷 여성, 아그네스가 망연자실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불에 타 숯검정이 된 병사들이 처참히 죽어가고 있었다.

불패를 자랑하던 부대의 전멸에 경악을 금치 않을 수가 없다. 맥없이 투구가 갈라지고 상처투성이가 된 가녀린 얼굴이 드러났다.

“네, 네놈 대체 정체가…….”

“알려줄 의리가 있나?”

서걱!

피로 얼룩진 단아한 미모가 반듯하게 절반으로 쪼개졌다. 아그네스는 경악을 간직한 표정 그대로 불귀의 객이 되었다.

싸우던 도중, ‘아보리아를 지켜라!’라는 아그네스의 외침을 듣고 이 산맥의 명칭을 알게 되었다.

대형 화재가 발생한 아보리아 산맥 꼭대기에서, 대성은 그제야 느긋하게 지상의 절경을 구경했다.

“섬멸룡 소환.”

그리고 이제부터 저 아름다운 도시에 재앙을 떨어뜨릴 생각에 대성은 피식피식 웃음을 지었다.

화르륵-!

인(印)이 불꽃을 토하고 섬멸룡의 거체가 아보리아에 내려앉았다.

크오오오-!!

오리할콘으로 가공된 최신식 장비로 덕지덕지 무장한 섬멸룡이 포효를 터뜨렸다.

목표는 그 주신이란 놈을 만나 꿍꿍이와 내막을 전부 듣고 척살하는 것이다.

‘얌전히 기어 나올 리가 없겠지만.’

한 차원의 어엿한 수장(首長)이란 자가 쉽사리 모습을 드러낼 리도 없을뿐더러.

그렇다고 고상하게 이쪽에서 찾아갈 마음도 없다. 지리(地里)도 모르건만 뭣 빠지게 싸우며 헤매는 건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니까.

‘기어 나오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들어주지.’

태양이라도 추락한 것처럼 산맥이 불타오른다.

지상은 당연히 난리가 났고, 저 멀리서 무기를 쥔 병사들이 벌떼처럼 날아오는 게 보였다.

“가자.”

크오오-!

대성이 가뿐하게 섬멸룡의 목덜미에 안착하자마자 기계 갑주로 뒤덮인 날개가 힘차게 펄럭였다.

그 사이에 어느덧 천상의 병사들도 빛의 날개를 활짝 펴며 산맥 근처까지 당도하던 참이었다.

“일단 저 날파리 놈들부터-.”

병사들과 공중전을 펼칠 작정이었던 그가 섬멸룡을 재촉하려던 찰나.

<판데모니움에 갇힌 마수들이 전의와 투지로 불타오릅니다.>

<‘망혼 해방’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이러는 건 처음이다.

꼭 좀 이용해보라고 간청하듯이 타이밍을 노려 메시지를 보내오다니!

‘써볼까.’

인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가면을 쓰고 오르키엘의 말투, 오르키엘의 모습을 연기해야 했을 때는 속이 다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고행 끝에 힘겹게 얻은 힘이니 사용해 보기로 했다.

“망혼 해방. 최대한 많이.”

<판데모니움의 마수들이 관리자의 명에 따릅니다.>

<무작위로 선정된 200마리의 마수들이 망혼으로 현신합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부푸는 감각이 들이닥치기 무섭게.

콰아아-!

느닷없이 대성의 등 뒤에서 어둠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새카맣게 물든 혼세의 게이트가 도래한 듯한 장면!

“뭐야?!”

“멈춰라! 뭔가가 온다!”

하늘을 빽빽이 채운 천상의 대군도 불길함을 느끼곤 급히 정지했다.

적막이 잠깐 흐르고,

그아아아아악-!!

토사물이라도 쏟아내는 것처럼 암흑의 소용돌이에서 비명을 지르는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망혼(亡魂)!

200기의 영혼 덩어리가 미사일처럼 뿜어져 나온 것이다.

영혼 덩어리의 형태는 각 마수의 대가리만 똑 떼 온 듯한 모양새. 그것들이 올챙이처럼 꼬리를 흐느적대며 튀어나와 창공을 날뛰었다.

“히이익-!!”

“당황하지 마라! 전열을 유지해! 각자 위치를 사수하며 응수해라!”

“으아아아악-!!”

질서정연했던 대열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오물처럼 난잡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당황할 수밖에 없겠지.

그들을 압박하는 망혼들은 아무리 창칼을 휘둘러도 타격을 줄 수 없었으니까.

“이놈들! 판데모니움에 갇혀 있던 놈들이다!”

“관리자는 뭘 하기에 이놈들이 여기에-!”

“신성 무구가 통하지 않습니다!”

용케 병사들이 망혼들의 정체를 눈치챘으나 상황은 여전했다.

그들이 느끼는 불가사의함에 대한 해답이 대성의 눈앞에 나타났다.

<망혼들이 관리자와의 높은 결속으로 인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합니다! 신성한 힘으로부터 대단히 높은 면역력을 지닙니다!>

<해방 종료까지 앞으로 5분.>

그아아아아-!!

망혼들은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 아니 족쇄가 풀린 들판 위의 황소처럼 날뛰고 또 날뛰었다.

아귀같이 아가리를 우악스럽게 벌리고 병사들을 산 채로 뜯어먹었다.

망령들의 비명, 뜯어먹히는 병사들의 절규, 살점이 찢기는 소리 등이 하늘을 섬뜩하게 뒤흔들었다.

‘보기 좋군.’

물론 대성의 귀에는 더할 나위 없는 하모니로 들렸지만.

좌우지간 망혼들이 아주 훌륭하게 날파리 떼를 붙들어주고 있었다.

병사들이 물리적 형체도 불분명한 영혼 덩어리들과 씨름을 벌이는 사이, 대성은 그들의 세계에 지옥을 내려주기로 했다.

“진짜 가자.”

크오오오-!!

혼란을 틈타 섬멸룡이 날갯죽지를 쫙 펴며 비상했다.

탁 트인 천상의 땅, 엘리시움이 그림의 조감도(鳥瞰圖)처럼 사위를 들이찼다.

시작부터 광살포를 쏠 마음은 없다. 여기는 적의 본진이니만큼 초장부터 섬멸룡의 필살기를 낭비할 필요는 없으므로.

그 대신, 필살기와 버금가는 흉기가 존재했지만.

-플라스마 캐논의 부가 탑재 기능, ‘스캐닝’을 실시합니다.

-1회의 발사로 최대 5000체의 목표물을 요격할 수 있습니다.

-요격을 원할 시, 명령어 ‘발사’를 언급하십시오.

우우우웅-!

섬멸룡의 등허리에 탑재된 초대형 전차포가 사납게 울부짖었다.

“발사.”

퍼퍼퍼퍼퍼퍼펑-!!

간략한 명령어와 함께 전차포가 쏘아낸 초고열 백색 광선이 천상의 땅에 작렬했다.

싱그러운 풀잎 같았던 지상이 순식간에 폭연과 폭발에 쓸려나가고 황금의 건물이 도미노처럼 차례차례 붕괴했다.

등 뒤에선 망혼에 의해 죽어 나가는 병사들의 비명이.

아래에선 하늘 위까지 여파가 닿을 만치 맹렬한 굉음이.

“이래도 안 나오나 보자.”

크오오오-!!

플라스마 캐논이 쉬지 않고 광선을 쭉쭉 뿜어냈다.

천상이 불지옥으로 화(化)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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