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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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륵!
하늘에 떠올라 대지를 비추던 7개의 태양 중 하나가 빛을 잃었다.
이로써 어느덧 3개의 태양이 개기일식을 맞이한 달처럼 새카매졌다.
맑은 색을 띠었던 하늘은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따스했던 바람이 지금은 스산한 냉기가 되어 불어왔다.
휘이이이!
대지 위로 빽빽이 피어오른 꽃들이 바람을 맞이하고 잎새를 살랑였다.
밤을 앞두고 불그스름한 노을빛이 차분히 내려앉은 꽃밭.
여섯 장 이상의 날개를 소유한 천사들만이 밟도록 허락된 땅, 바로 성전(聖殿)이었다.
“맙소사, 여명(黎明)이 또……!”
“설마 라그마온까지?”
“성전에서 틀어박힐 게 아니라 우리도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러다 천상이 통째로……!”
“조급해하지 마. 사도들이 없으면 성전은 누가 지킨단 말이냐.”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 불리던 성전에 소동이 일어났다.
남은 네 명의 사도들이 쓸쓸한 어둠에 잠긴 태양을 올려다보며 허둥지둥하였다.
사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성전 속의 작은 별, 여명.
그것이 빛을 잃었다는 말은 즉, 또 한 명의 사도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여명이 하나둘씩 저물고 성전은 서서히 어둠으로 물든다.
그때였다. 최초의 사도, 아르마간이 불현듯 어떤 기척을 감지하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잠깐 조용히. 라그마온과 에인리히를 제외하고 또 성전을 빠져나간 사도가 있나?”
성전을 뒤로하고 외부의 침입자와 맞서야 할지 설전을 벌이던 세 명의 사도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아르마간은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사도들의 숫자를 세었다.
자기를 포함해서 넷.
분명히 라그마온 이후로 성전을 빠져나간 사도는 없다.
그런데…….
“……어째서 성전의 입구가 열리고 있는 거지?”
“뭐……?!”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 탓에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마간의 말을 들은 다른 사도들이 동시에 꽃밭의 한 지점으로 고개를 돌렸다.
휘이이!
자아를 가진 생명체처럼 둥글게 휘도는 꽃잎들이 광채를 내뿜었다.
그것은 성전의 입구가 열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해-!”
네 번째 사도, 아도니스가 창날이 눈부시게 빛나는 장창을 내뻗으며 쏜살같이 입구로 날아갔다.
적이 입구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 급소를 꿰뚫어버리겠다고 외치는 듯한 기세!
그렇게 아도니스의 신형이 입구 바로 앞까지 쇄도한 순간.
콰직-!
입구의 빛을 뚫고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적이 아니었다.
거대한 불의 칼.
그것이 다짜고짜 입구를 비집으며 아래로 떨어져 아도니스의 정수리를 깨부순 것이다.
철벅-!
난잡하게 비산하는 핏물이 꽃밭을 뒤덮은 하얀 매화를 빨갛게 적셨다.
“…….”
“헉…….”
허무하기 그지없는 사도의 죽음에, 다른 사도들이 헛숨을 삼키며 말문을 상실했다.
저벅!
이내 칼을 휘두른 장본인이 마침내 입구에서 걸어 나와 천족의 피로 얼룩진 모습을 완전히 내보였다.
대성은 꽃밭을 구르는 아도니스의 망가진 머리를 매화와 함께 사뿐히 지르밟으며 말했다.
“여기에 주신이란 새끼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
***
어째서 허락받지 않은 존재가 저토록 당당하게 성전에 발을 들일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천상의 성기사단을 학살하고 벌레 죽이듯이 사도를 압도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성전을 지켜라, 형제자매들이여! 적에게 신성한 터를 넘본 죄를 톡톡히 치르게 해라!”
“이놈-!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하지만 의문은 접는다.
지금은 저 정체 모를 적을 한시라도 빨리 성전에서 몰아내는 것이 급선무였으니까.
후웅-!
무려 세 명의 사도가 찬란히 빛나는 6장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달려들었다.
검, 둔기, 석장…. 피와 죽음으로써 어둠을 몰아내고 광명을 가져온다는 신성 무구(武具)가 오직 한 명의 적에게만 휘둘러졌다.
“너희들 말고-.”
살기를 품고 날아드는 사도들을 불쾌하게 바라본 대성은 아도니스의 두개골에 깊숙이 박힌 업화대검을 쑥 뽑아냈다.
검신(劍身)에 맺힌 검붉은 불길이 혈흔을 태워냈다.
“그 주신이란 놈 데려오라고.”
[특수 스킬: <격노>]
화아아악-!!
대검에서 터져 나온 어마어마한 섬광이 열풍을 내뿜으며 세 명의 사도를 향해 들이닥쳤다.
“윽……!”
“아, 안 된다! 성전이!”
“어디까지 미쳐 날뛰어야 직성이 풀릴 거냐, 이놈-!”
사도들은 영혼까지 스며오는 듯한 <격노>의 열기보다도 성전이 불탄다는 사실에 더 깊이 분노했다.
제2사도, ‘르뮈에’가 가장 선두로 치고 나오며 금빛 석장을 높이 치켜들었다.
“《은혜로운 주신이시여! 천상을 위협하는 모든 악으로부터 당신의 어린 양을 굽어살피소서!》”
번쩍-!
석장의 끄트머리에 달린 은색 보주로부터 나선 형태의 광휘가 뿜어져 나왔다.
폭풍처럼 굽이치는 그 성스러운 빛은 꽃밭을 집어삼키는 업화의 불길을 감쪽같이 지워버렸다.
빛에 닿는 모든 불꽃이 파도를 끼얹은 듯이 진화(鎭火)되었다. 그것은 <격노>뿐만이 아니라 대성의 손에 들린 업화대검의 불길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방금 대성의 얼굴에 힘줄이 돋았던 것을 아르마간은 놓치지 않았다. 저 희미한 반응은 분명 적이 당황했다는 의미일 터!
팍-!
땅을 밀어내듯이 거친 진각을 밟은 아르마간이 허공에 횡선을 그으며 검격을 펼쳤다. 수천 가닥의 벼락을 두른 뇌검(雷劍)이 쾌속하게 대성의 목을 파고들었다.
캉-!
대성은 검날을 완만하게 세워 일격을 막아냈다. 업화의 불이 사라진 업화대검은 이제 평범한 대검에 불과했다.
반면, 아르마간의 검은 여전히 살벌한 힘이 태동하는 벼락을 휘감은 채였다. 막아냈다 한들, 무구의 성능 차이에서 오는 박력은 어쩔 수가 없으리라. 연이어 날아드는 검격을 무심히 쳐내면서도 대성의 발은 차츰차츰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악의 심장을 꿰뚫는 창이 되어 날아가라!》”
“《자애로운 주신이시여! 부디 저희에게 악을 멸할 힘을!》”
아르마간이 대성을 수세에 몰아넣는 틈을 타, 남은 두 명의 사도가 일제히 영창(詠唱)을 입에 담아 전능을 행사했다.
쿠구구궁-!
제3사도, 로드릭이 아무도 없는 지면에 메이스를 내리찍었다.
그 순간 기이하게도 대성이 있는 지점의 중력만 급격히 무거워졌다. 정신없이 아르마간과 합을 나누던 대성은 모래주머니를 단 것처럼 두 다리가 무거워진 걸 느꼈다.
로드릭의 힘이 그의 발을 묶기 무섭게 나머지 사도들의 전능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짓쳐 들었다.
두두두두-!!
활에서 분사된 여섯 갈래의 화살이 자유롭게 궤적을 틀며 대성에게 날아갔다. 석장에서 발광한 빛이 아르마간의 검술을 조금 더 유연하게 만들었다.
‘이놈을 상대할 때가 아니야.’
저 화살!
총알처럼 빠른 속도였으나 촉각을 세운 대성의 눈에는 화살의 움직임이 느릿하게 보였다.
팍-!
지면을 밀 듯이 차며 거리를 벌리자 평평했던 지면이 움푹 파였다. 지뢰라도 터진 것처럼 자욱하게 터진 먼지에 아르마간이 행동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저럴 수가! 어떻게……!’
가장 크게 경악한 건 메이스로 중력을 무겁게 만든 로드릭이었다.
섬 하나가 짓누르는 듯이 육중한 중력이었을 것이다. 그대로 압사(壓死)당해도 이상하지 않을진대 놈은 거기서 자유롭게 몸을 움직였다.
‘미치겠군.’
한편.
로드릭이 느끼는 허탈함과는 달리, 분주히 몸을 움직여 화살을 피하는 대성은 욕을 삼키는 중이었다.
중력장이 전개된 영역을 억지로 벗어나는 과정에서 종아리의 근육이 찢어지고 다리뼈가 뒤틀렸다.
가만히 서는 것도 위태롭건만 머리 위에선 화살이 유도탄처럼 날아오니 골치가 아플 수밖에.
‘나를 조지기 전까지는 멈출 생각이 없다는 거지.’
끈질기게 뒤따라오는 화살을 노려보는 대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휘오오오-!
판데모니움을 여는 어둠의 소용돌이가 그의 뒷덜미에서 회오리쳤다.
“망혼 해방. 서른 마리.”
햐아아아아아-!
소용돌이에서 터져 나온 서른 마리의 망혼이 하늘로 치솟았다.
콰과과광-!!
여섯 발의 화살이 느닷없이 날아든 망혼과 충돌하며 폭사했다. 쩌렁쩌렁한 폭음이 꽃밭을 뒤흔들었다.
그 광경을 본 사도들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만만치 않군.”
저놈이 판데모니움에 갇힌 망혼들을 호령하는 것에 놀라워해야 할까.
아니면 망혼들을 앞세워 위기를 벗어나는 저 광기 어린 재치에 놀라워해야 할까.
“단언할진대 오늘 안에 저놈을 죽이지 않으면 천상은 멸망한다.”
스릉! 파지직-!
결연하게 표정을 굳힌 아르마간이 뇌검의 전력을 끌어올렸다.
아르마간뿐만 아니라 나머지 사도들 또한 직감했다.
그간 지옥에 가해진 시공간의 봉인을 해제했던 범인이 바로 저 남자임을!
“사도화!”
목에 잔뜩 핏대를 세우며 아르마간이 일갈했다. 그와 동시에, 꽃밭의 풍경이 삽시간에 뒤바뀌었다.
한바탕 폭풍 같은 전란(戰亂)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너른 황야였다. 재와 뒤섞여 검회색이 되어버린 눈밭이 대지 곳곳에 타오르는 불길 사이로 흩날렸다.
“……!”
로드릭과 르뮈에는 돌연 전방에서 나타난 반투명한 구체를 보고는 눈을 치켜떴다.
아르마간이 심상 세계를 열었다. 그것은 최초의 사도라고 불리는 그가 사력을 다해 임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사도로 올라선 뒤로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나만의 심상이다. 너덜너덜한 속내를 보이게 돼서 유감이로군.
사도화를 거친 아르마간의 모습은 냉담함이 묻어나오는 중년 남성에서, 우직하게 두 발로 선 황소의 형체로 바뀌었다.
당연히 뇌검도 그에 맞춰 시야에 전부 담기 버거울 정도로 거대해졌다. 벼락 일부분만을 둘렀던 검이 이제는 진짜 우레가 되어 하늘에서 내려온 듯했다.
-내가 이렇게 심상 세계를 열어도 결국 너는 나를 죽일지도 모르겠지.
“…….”
-하지만 너도 죽는다. 마음이 꺾이고 영혼이 무너져 내리는 한이 있더라도 난, 이 자리에서 어떻게든 너를 죽일 테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뇌검이 대성이 있는 곳을 강타했다. 르뮈에의 석장에서 터져 나오는 빛이 끊임없이 대검의 불길을 앗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대성은 불길 대신 마력을 둘둘 감아 뇌검을 막아냈다.
우르릉-!!
고막을 통째로 쥐고 흔드는 듯한 벽력이 바로 지척에서 들려오자 대성은 인상을 찡그렸다.
놀라움을 느낀 아르마간이 손에 쥔 뇌검을 엷게 떨었다. 사도화 한 자신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막아내다니!
-너는 사도를 초월했군. 이러니 라그마온이랑 에인리히마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너희들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족속들인가? 아까도 뭐 기술 날릴 때마다 이상한 주문을 외치던데 손가락이 말려 올라갈 뻔했다, 이 유치찬란한 새끼들아.”
-이상한 주문? 뭘 모르는 소리. 그것은 영창이다. 영창을 입에 담지 않으면…….
“닥쳐. 안 물었어.”
교착이 한없이 이어졌다.
‘최초의 사도’라는 칭호가 그저 허울뿐인 완장은 아닌지, 조금씩 우세를 점하는 쪽은 아르마간이었다.
요 2년간 맞닥뜨린 놈 중 그나마 ‘적수’라고 불릴 만한 가치가 있을 정도의 기량.
‘지겹다.’
하지만 대성은 팽팽한 싸움에서 희열 따위를 느끼는 호전적인 성격이 아니다.
강한 적을 만날수록 도리어 빨리 끝내고픈 욕구가 샘솟았다.
“너희들이랑 이런 곳에서 푸닥거리하는 것도 신물이 다 올라온다. 이제 슬슬 끝내자.”
-누구 마음대로 끝을…….
대단히 건방진 소리라며 질책하려던 아르마간이 하던 말을 멈췄다.
파스스!
검의 손잡이를 쥔 대성의 손에서 돌연 연기인지 불길인지 알 수 없는 검은 기류가 넘실거렸으니까.
-‘심상치 않다……!’
아르마간이 화들짝 땅을 박차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방금 그가 서 있던 자리로 흘러나온 기류가 빠르게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바로 용의 형상으로.
크오오오오-!!
백색 영지에선 빌빌대던 섬멸룡이 지금은 말끔히 기력을 되찾고는 힘차게 포효했다.
섬멸룡 또한 대성의 마력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마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판데모니움의 마수들이 기계에 주유(注油)를 채우듯 실시간으로 공급해주고 있었다.
-용이라…….
천상의 영수(靈獸) 중에서도 극히 드물다는 용족.
그중에서도 완전무결한 성체(成體)를 본 아르마간이 경탄인지 경악인지 모를 어조로 구시렁댔다.
팍-!
뇌검으로 재빨리 섬멸룡의 심장을 찌르기도 전에, 녀석이 먼저 대성을 태우고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쩌억!
그리고 입을 크게 벌렸다.
[섬멸의 기운이 차오릅니다.]
극악무도한 기운이 고요했던 아르마간의 심상 세계를 흔들었다.
무저갱 같은 섬멸룡의 목구멍 안쪽에서 차오르는 마력이 황야 그 자체를 흐릿하게 만든다.
심상 세계가 흔들린다는 건, 곧 아르마간의 마음이 동요한다는 의미.
압도적인 불길함을 선사하는 힘 앞에서 그는 잠깐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으냐! 아예 아가리째로 꿰뚫어주마!
하지만 끓어오르는 투쟁심으로 마음의 동요를 잠재웠다.
팍-!
등에 날개를 돌출시킨 아르마간이 섬멸룡이 있는 곳으로 솟구쳤다.
-늦었다, 이놈!
그 말대로다. 광살포가 쏘아지는 것보다 뇌검이 섬멸룡의 아가리를 관통하는 게 더 빠르리라.
“망혼 해방. 200마리 전부.”
물론 대성에게는 상정 범위 내였지만 말이다.
그아아아아-!!
한 번 더 포문(砲門)을 활짝 연 회오리에서 망혼들이 쏟아져 나왔다.
박쥐 떼처럼 날아오는 망혼들을 본 아르마간이 뇌검을 거두었다.
-큭……!
망혼들이 정신없이 아르마간을 에워싸며 날뛰었다.
아르마간은 신경질적으로 거두었던 뇌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콰지직-!
짧은 일격에 200마리의 망혼이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처럼 소멸했다.
-……!
아차 싶었던 아르마간이 휘둥그레 뜬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찰나.
[섬멸룡이 광살포를 쏟아냅니다.]
----!!
검은 용의 입에서 싸움의 종말을 고하는 빛줄기가 뻗어 나왔다.
망막을 후끈 태우며 들이닥치는 광살포를 목도한 아르마간이 일순 석상처럼 굳었다.
-‘막아낼 수 있을까?’
회의적인 감정이 전신을 지배했다.
아니.
최초의 사도는 쏟아지는 종말의 광선을 마주하고는 마음을 비웠다.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오직 아르마간만이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막아야 한다!
그는 결심했다. 동귀어진을 불사해서라도 저 남자를 죽이겠다고.
아르마간은 가지고 있는 모든 신력을 끌어모았다. 뇌검이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졌다. 장검이었던 그것이 이제는 우람한 대검이 되었다.
검으로 빛을 벤다.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아르마간은 가능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콰아아아-!!
사고를 한 번 회전시키는 사이, 광살포는 이제 그의 코앞까지 날아들었다. 태양과 마주한 듯한 열기가 그의 살갗을 거멓게 그을렸다.
-으아아아아!!
토혈할 기세로 아르마간이 기합을 터뜨린 순간.
팟!
하얀빛이 그의 시야를 물들었다.
잠시, 아르마간은 광살포가 자신의 몸을 집어삼킨 거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
천천히 시야의 초점을 되찾은 아르마간이 탄식했다.
서릿발처럼 차갑고 무심했던 눈에 광채가 서렸다. 아르마간은 턱이 빠질 듯이 입을 한껏 벌렸다.
-아, 아아……!
아르마간의 얼굴이 희열로 물들기 시작했다.
눈앞에 일렁이는 하얀빛.
아르마간은 그 빛 속에 잠긴 노인을 보았다. 아니, 잠긴 게 아니다. 따사로운 빛은 노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살을 거뭇하게 태웠던 열기의 아픔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주, 주신이시여…….”
미혹(迷惑)에 잠긴 아르마간이 가파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자명하다.
주신이, 광살포를 지워냈다.
당신의 어린 양을 지키기 위해!
“주신이시여……!”
심상 세계가 사라지고 꽃이 가득한 성전이 드러났다. 아르마간은 위대한 존재에게 불바다에 잠긴 황야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
대성은 탈력감에 젖은 섬멸룡을 구현의 인 속으로 되돌려 보냈다.
탁-.
땅에 발을 디딘 그가 성전에 퍼지는 하얀빛을 말없이 응시한 순간.
“너무나 많은 생명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빛이 그리 물어왔다.
성별의 경계가 불분명한 목소리.
빛 속의 실루엣은 머리가 무척 길고 선이 가늘었다. 그것만으로 주신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단정 짓는 건 무리일 터.
“그만합시다. 무의미한 살생은 그만두고, 차근차근 대화하죠.”
“…….”
“당신은 호승심이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이 나의 사도들과 싸웠을 때, 저는 당신의 눈에 서린 공허를 보았습니다. 그건 살육을 쾌락으로 받아들이는 자라면 결코 담을 수 없는 눈빛입니다.”
대성은 잠시 칼을 거두고 가만히 주신의 말을 경청했다.
아르마간을 비롯한 성전의 사도들은 바닥에 양손과 이마를 찍으며 경배를 올리고 있었다.
“아직은 성역(聖域)에서 깨어날 때가 아니라 단정하지 못한 모습을 감춘 점, 이해해 주십시오.”
빛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대성과 거리를 좁혔다. 짓밟히고, 불태워졌던 꽃들이 화사하게 만개했다.
“방금 당신이 성전에 발을 들이면서 말했지요. 주신을 찾으러 왔다고. 예, 제가 당신이 그토록 절실하게 찾았던 자입니다.”
“…….”
“제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겁니다. 묻고 싶은 말도 많을 테고요.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솔직하게.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이내 하얀빛은 대성의 코앞까지 다가오더니, 멈췄다.
그런데도 대성은 빛 속에 있는 주신이란 자가 어떤 낯짝을 했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주신은 침묵했다.
이제는 대성이 입을 열 차례라고 말하는 듯이. 이제는 살기를 거두고 질문을 할 시간이라는 듯이.
정적이 스치고, 산뜻한 바람이 둘 사이를 훑고 지나간 그때.
푹-!
“……?”
감히 고개를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넙죽 엎드려 있던 사도들의 귀에 돌연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모두가 1초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올린 찰나.
털썩.
사도들은 업화대검에 가슴이 꿰뚫리고 허물어지는 주신의 존체(尊體)를 볼 수 있었다.
“…….”
사도들은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얼어붙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빛이 차츰 광원을 잃어가더니, 이내 깨진 호리병처럼 피부가 쩍쩍 갈라진 시신이 꽃밭 사이로 드러났다.
“묻고 싶은 거? 많지.”
드디어 대성은 그토록 갈망했던 주신의 낯짝을 볼 수 있었다.
시신 상태가 이러니, 유감스럽게도 성별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뭐, 아무렴 어떠하랴.
“근데 나한테는 이미 뒈진 놈의 머리통도 들여다볼 수 있는 기술이 하나 있거든.”
볼일 끝.
이제 기억을 캐낼 주신의 모가지를 썰고 지구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