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18화 (118/180)

#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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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에 나온 글귀대로 상점 창에 존재하는 모든 품목이 무료였다.

이로써 공적 포인트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지 부담 없이 상점창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여유분이 점점 줄어들어 찝찝했던 참이었는데 잘됐군.’

공적 포인트 때문에 억지로 판테온에 들어가 퀘스트를 수행할 일이 원천봉쇄된 것이다.

게다가 상점 창에 일어난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상의 상점 창’이 최종 ver 으로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업데이트 내역:

1. ‘최상(最上)’ 등품 아이템 해금.

2. ‘최상(最上)’ 계열 스킬 해금.

3. ‘정보 구매’ 기능 개선.]

상점창을 개선하려면 할수록 ‘천국 상회’는 더 희귀하고 가치 있는 대가를 요구한다.

하지만 시스템이 대성을 상급 계열의 대천사로 인식했으니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할 필요도 사라졌다.

‘그럼 얼마든지 써먹어 줘야지.’

대성은 부담 가지지 않고 곧장 ‘허공록’을 구매했다.

공적 포인트를 지불하고 말고의 차이가 이토록 체감이 큰 줄은.

[정보 구매]

* 구매자에게 도움이 될 정보를 1순위에서 5순위까지 보여 줍니다.

* 제공되는 정보의 유효 범위는, 구매한 시점으로부터 72시간입니다.

* 정보는 1일 1회 구매할 수 있습니다.

[정보를 구매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정보 구매 1회당 공적 포인트가 총 0pt 필요합니다.]

확인 가능한 정보의 개수가 3개에서 5개로 늘어났고 유효 범위 또한 최대 사흘까지 확장되었다.

하루에 한 번밖에 구매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여전했으나 어떻게 보면 무의미한 제약이다.

하루에 한 번을 구매하든 백 번을 구매하든 이미 기록된 미래가 달라지진 않을 테니.

팔랑-.

대성은 참새처럼 손바닥 위에 사뿐하게 내려온 허공록을 펼쳤다.

그리고,

“…….”

그는 지구로 귀환한 뒤로.

지금 이 순간만큼 머릿속이 새하얘진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

허공록에 기록된 정보를 확인하기 무섭게, 대성은 유리창 밖으로 몸을 던져 병원을 빠져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황준영 일행이 있는 오피스텔 본부였다.

“자네 당분간 자리 비울 일이 생겼으니 그동안 우리 보고 한반도를 지키라고 하지 않았나?”

“안 그런 적이 없긴 하지만 유독 지금은 표정이 심각해 보이시는데……. 무슨 일 있으세요?”

“네가 그러면 내가 다 간담이 서늘해진다. 또 뭔데?”

갑자기 소집령을 내리자 의아해진 황준영 일행이 저마다 한 마디씩 물어왔다.

성배가 깨지고 시간이 되돌려진 지금, 그들의 시점에선 대성이 자리를 비우겠다고 선언한 당일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보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일일이 저들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할 겨를이 없다.

“잘 들어.”

대성은 사뭇 진지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

“조금 있으면 세상이 개판이 될 거다. 우린 거기에 대비해야 하고.”

“…….”

그리고 대성의 입에서 다짜고짜 튀어나온 그 첫 마디는 황준영 일행의 말문을 앗아갔다.

인간은 지나친 당혹감에 빠지면 질문할 말도 떠올리지 못하는 법.

벙어리가 된 그들을 향해 대성은 일방적으로 하던 말을 이어갔다.

“자세한 건 나중에 물어라. 나도 방금 막 알게 된 사실이고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니.”

“아니, 자네. 그게 지금 무슨…….”

“쉽게 말해주지. 곧 다른 차원의 세계가 지구와 겹쳐질 것이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줄지어 이어지니 듣는 처지로썬 어안이 벙벙해질 따름일 터.

그렇다고 그들은 결코 저것을 단순한 헛소리로 치부하지는 않았다.

농담의 농 자도 모르는 남자가 웃겨보겠답시고 저런 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

안색이 딱딱해진 신초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겹쳐진다니…… 언제요?”

그리고 생뚱맞게도 그 질문에 대답을 건넨 건 대성이 아니었다.

쿠후우웅-!

“……?!”

인근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굉음과 진동이 그들을 뒤흔들었다.

고막이 먹먹해지는 폭음에 인상을 찡그린 황준영 일행은 헐레벌떡 커튼을 젖히고 창문 밖을 보았다.

“어…….”

“세상에!”

그리고 밖에서 벌어지는 이변을 목격한 그들은 비명을 질렀다.

장엄하리만치 거대한 기둥이 서울 상공에서 내려오고 있었으니까.

거리상으로는 여기서 전철로 여섯 개는 가야 할 만큼 먼 곳.

그런데도 이쪽에서 봐도, 지상에 내리꽂힌 그 하얗고 두꺼운 형체가 확연히 보일 만큼 기둥은 커다랬다.

얼마나 놀랐는지 박동혁의 여섯 눈이 모조리 휘둥그레졌다.

“저 기둥은 뭐야?!”

“잘 보면 알겠지만 저건 기둥이 아니라 나뭇가지다.”

“뭐? 나뭇가지라고?”

그 말을 듣고 황준영 일행은 다시 한번 유심히 하얀 기둥을 주시했다.

자글자글한 주름이 새겨진 표면과 사방으로 뻗은 ‘줄기’ 같은 것들.

나뭇가지라고 인식하고 보니 정말로 그러했다.

‘차원수의 수지(樹枝).’

로드릭의 기억에 따르면 성배의 파손으로 인해 인과가 뒤틀려지며 차원수에 봉합되어 있던 나뭇가지들이 일제히 풀려났다.

나뭇가지 속에는 각기 봉인된 다른 차원의 시공간이 담겨있었고, 봉합으로부터 해방된 그것들은 흐름을 정착시킬 땅을 찾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런 미증유의 사태는 사도인 로드릭조차도 잘 알지 못하였기에, 대성은 <귀안>으로 기억을 엿봐도 그 의미가 별로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직후 허공록에서 기록된 글귀가 의문을 확실케 해주었다.

《1순위 정보》

「1시간 뒤 외차원의 시공간이 지구와 동화될 예정.」

「동화 예정 외차원 목록: ‘캘린 오르하트’」

「동화까지 남은 시간: 0분.」

「동화율: 67%… 68%….」

번쩍-!

우주의 탄생을 방불케 하는 광채가 밤의 도심지를 하얗게 물들였다.

기둥에서 터져 나오는 빛이 명멸(明滅)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연달아 펼쳐지기 시작했다.

“도시가…… 숲이 되고 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들으면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일갈했으리라.

하지만 신초영의 표현은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했다.

번쩍-!

제일 처음 빛이 터지고 사라졌을 땐, 서울의 마천루에 빽빽한 괴석(怪石)들이 돌출되었다.

번쩍-!

두 번째 빛이 터지고 사라졌을 땐, 아스팔트 도로에 청록색 수풀이 피어오르면서 하나의 장대한 수림(樹林)이 형성되었고.

번쩍-!

그리고 세 번째 빛이 터지고 사라졌을 땐, 매연 가득했던 공기에 습기가 차오르며 스산한 안개가 울창한 수림을 뒤덮었다.

[‘캘린 오르하트’의 시공간과 생태계가 지구와 동화되었습니다.]

[‘행성 개조’로 인한 밸런스 조율을 위해 언어가 통합됩니다.]

[통합 차원 정보: 캘린 오르하트]

- 주로 수렵(狩獵)을 생업으로 삼는 ‘캘린 족’이 속한 차원.

- 지구의 문명과 비교하면 중세 시대와 가장 흡사하나 그만큼 윤리적 상식도 크게 퇴화함.

- 남부, 동부, 북부, 서부, 내 개 지역의 대족장이 대륙을 통치 중.

골치를 앓는 대성의 눈앞에 방대한 정보가 담긴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개 같은 사도 새끼들. 나중에 다시 만나면 사지를 비틀어 오장육부를 쥐어 짜낼 테다.’

대성의 마음속에서 살심(殺心)이 활화산 같이 치솟았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하면 수습할 수 있을지 막연해하던 찰나.

띠링-.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시야를 드리웠다.

“…….”

그리고 UI에 적힌 텍스트를 읽어내려가는 대성의 눈에 차가운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

프렉쳐가 터지고 게이트 밖으로 뛰쳐나오는 괴물들이라면 익숙하다.

게이트 안쪽에 펼쳐진 이세계 또한, 직업이 사냥꾼이라면 질리도록 보게 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뭐, 뭐야 이게…….”

“꿈인가? 이거 꿈이겠지?”

“서, 서울이 왜 이래……?”

그 이세계가 아예 통째로 지구에 나타나는 경험만큼은, 그 누구도 아직 겪어보지 못했다.

이제 막 침대에 누워 내일 아침을 맞이할 준비를 하던 사람들은.

돌연 세상을 아득하게 집어삼킨 거대한 빛과 조우했다.

그리고 공황에 빠졌던 정신을 다시 추슬렀을 땐, 어느덧 온 사방이 초목이 우거진 숲으로 돌변한 것이다.

“여긴 어디야? 우리 뭐, 어디로 납치된 건가?”

“아, 아니. 납치된 게 아니라 서울이 이상하게 변한 것 같은데…….”

이세계로 전이한 게 아니라 서울이 변이한 것임을 알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수림 주변을 잘 둘러보면 군데군데 지하철역이나 빌딩 따위를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거리로 몰려나온 사람들이 아연한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던 찰나.

피잉-!

콰직!

문득 이상한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소음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꺼, 꺼억…….”

관자놀이가 화살 같은 것으로 꿰뚫린 한 남자가 눈구멍에서 피를 쏟아내며 경련하고 있었다.

털썩.

그리고 창백해져 바닥에 쓰러져 절명했다.

“꺄아악-!”

“으아아악-!?”

비명이 튀어나오는 건 당연지사.

이후 주변에 드리워진 수풀 밖으로 화살 세례가 쏟아졌다.

사람 목숨이 참으로 쉽게도 픽픽 스러져갔다.

“이놈들 약한데?”

“제법 똑똑한 것들인가 싶었는데 별거 아니군.”

“가만히 있어, 이것들아! 표적이 움직이면 맞추기 어렵잖아!”

부스럭!

수림 곳곳에 활을 쥔 지성체들이 킬킬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겉보기엔 이족보행을 하는 것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생김새.

하지만 두 갈래로 갈라진 동공이나 생선의 아가미 같은 스크래치가 목덜미에 있다는 사실 등이, 그들의 정체가 이종(異種)임을 증명했다.

캘린 족.

차원통합이 이루어지면서 제일 먼저 지구에 발을 들인 자들이었다.

“확실해! 이놈들은 약하다! 모조리 죽여서 여길 우리 땅으로 만들자!”

“쓸만한 것들은 노예로 삼아!”

신이 난 캘린 족들이 마구잡이로 날뛰며 길가의 사람들을 죽였다.

여자, 노인, 어린애 등……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화살에 심장을 관통당하며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계에서 온 그들에겐 인간의 윤리적 잣대도, 상식도 존재하지 않았다.

캘린 족의 눈에는 인간들이 그저 눈에 거슬리니 박멸해야 할 벌레로 보일 뿐.

“씨X!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순 없어!”

“주변에 무기가 될만한 게 있으면 아무거나 집어요!”

“이 개새끼들아! 우리가 머저리 호구로 보이…… 끅?!”

물론 사람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속수무책으로 당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길가에 널브러진 벽돌이나 돌멩이 등을 주워들며 반격을 시도했으나,

콱-!

콰직-!

목숨 걸고 싸워본 적이 일평생 단 한 번도 없던 사람들이, 수렵을 생업으로 삼는 캘린 족의 상대가 될 리는 만무했다.

캘린 족은 하나하나가 명사수였다. 활시위가 튕기고 날아간 화살은 어김없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으, 흐윽, 흑…….”

“잘 자고 있다가 이게 뭐야!”

“도망쳐-!”

길거리는 삽시간에 비릿한 혈향(血香)으로 가득해졌다.

용기를 짜내어 달려든 이들마저 허무하게 죽어갔다.

완벽히 전의를 상실한 남은 생존자들이 몸을 웅크리면서 울거나 도주를 시도했다.

학살의 쾌감에 흠뻑 취한 캘린 족들이 박장대소하며 살육을 이어가려던 그때.

최악-!

사각에서 날아온 빛의 창날이 캘린 족 중 한 마리의 목을 꿰뚫었다.

두려울 것 없이 날뛰던 캘린 족들이 표정을 굳히고 투창(投槍)이 쇄도했던 방향을 보았다.

거기엔,

그으으-.

가아악-.

기암괴석에 둘러싸인 건물 모퉁이에서 검은 좀비 같은 것들이 차례차례 나타나고 있었다.

창날 대신 번갯불이 타오르는 장창을 움켜쥔 좀비들이.

“뭐야, 이것들?”

“원래 이 행성에서 살던 놈들인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상관이야! 동포를 죽인 놈들이다! 적이야! 가서 죽여!”

캘린 족들이 격분했다.

파공성을 아로새기며 대기를 가로지른 화살이 좀비들의 머리나 가슴에 콱콱 박혔다.

하지만…….

그으으-!

어째서인지 좀비들은 급소가 꿰뚫렸음에도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더욱더 살기등등해져서 달려드는 게 아닌가.

“이것들 왜 안 죽어?!”

“이 거머리 같은 놈들! 저리 떨어지지 못해!”

“끄아아악-!!”

불사(不死)의 괴물들이 일사불란하게 진격하며 캘린 족을 단숨에 압도하기 시작했다.

캘린 족이 신나게 인간들을 학살했던 몇 초 전과 정확히 대척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어, 어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사람들이 그 피비린내 가득한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던 가운데.

쿠구구구-! 쩌저적-.

갑자기 빙하가 갈라지듯 지면이 거미줄 같은 선을 그리며 쪼개졌다.

“……?!”

안 그래도 좀비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캘린 족들은 혼비백산했다.

균열은 그 자체만으로도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듯, 신기하게도 캘린 족이 발을 디딘 땅만 으스러뜨렸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으드득-!

반듯하게 갈라진 땅들이 이젠 풍선처럼 서서히 하늘로 떠올랐다.

“이런 젠장! 어쩐지 쉽다 했더니! 역시 이것들 뭔가 숨기고 있었군!”

“꽉 잡아-!”

“지탱할 게 없어! 우리 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영문 모를 현상에 휘말린 캘린 족들은 연신 비명을 질렀고.

멀쩡한 땅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절망감을 잊고 입을 쩍 벌리며 부유하는 대지를 응시했다.

종족을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혼란에 휩싸였다.

[필드, ‘천공왕 디오그마의 공중 요새’를 구현합니다.]

무수한 다원 우주를 통틀어.

유일하게 ‘시스템’의 가호를 받는 한 남자를 제외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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