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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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
지상에 내리꽂힌 나뭇가지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광채를 발했다.
‘매번 저딴 걸 봐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계속 보고 있다가는 시력에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밝기가 장난이 아니다.
쳐다도 보기 싫었던 대성이 팔을 비스듬히 세워 시야를 가리던 그때.
[‘플로마리아’의 시공간과 생태계가 지구와 동화되었습니다.]
[‘오크 랜드’의 시공간과 생태계가 지구와 동화되었습니다.]
[‘행성 개조’로 인한 밸런스 조율을 위해 언어가 통합됩니다.]
[통합 차원 정보: 플로마리아]
- 검과 마법의 종족이라 불리는 ‘란도족’이 거주 중.
- 지구의 문명과 비교하면 중세 시대와 가장 흡사함.
- 플로마리아 왕국의 3대 국왕, ‘키엘란 도르고프’가 대륙 통치 중.
[통합 차원 정보: 오크 랜드]
- 플로마리아의 남부대륙에서 분파(分破)하여 개척된 신대륙. 모든 영민이 ‘오크족’으로 구성됨.
- 지구의 문명과 비교하면 원시 시대와 가장 흡사하며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체제를 유지함.
- 샤먼 오크, ‘불그’가 종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 중. 그와 별개로 드래곤을 신처럼 숭배한다.
시스템 메시지에 적힌 글귀를 전부 읽기도 전이다.
화아악-.
대성의 발밑에 복잡한 형태의 술진(術陳)이 바닥을 긁으며 형성되기 시작했다.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그의 몸이 위로 붕 뜨기도 잠시.
어느덧 별다른 광원 없이 빛이 깜빡이는 동굴 안이었다.
“으으…… 여긴 또 뭐야.”
“빌어먹을! 대체 뭔 아까부터 계속 개 같은 일만 벌어지잖아!”
“어, 당신?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 여기 한국 아니었나?”
사방에서 짙은 당혹감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와 욕설이 난무했다.
주위를 차분히 돌아보니 대략 서른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B급에서 S급까지의 사냥꾼들.’
바로 지구에서 내로라하는 국내외 고위 등급의 사냥꾼들이었다.
이미 매스컴으로 보아 낯이 익은 자들도 있는가 하면 아예 처음 보는 얼굴도 적지 않았다.
“제이크, 자네도 여기에 왔나!”
“캘리포니아에서 그 아가미 달린 괴물들과 싸우다가 갑자기 여기로 왔네. 으음, 정신이 하나도 없군.”
이미 면식이 있는 이들끼리는 급격히 밝아진 표정으로 인사를 나눴다.
다짜고짜 불가사의한 공간으로 납치를 당한 판국에 아는 얼굴을 발견하니 반가울 법도 할 터.
‘일본과 중동, 미국에서 온 S급 사냥꾼이 세 명. 나머지는 대부분 B급이나 A급들이군.’
사람이 서른 명씩이나 모여든 것에 비하면 동굴 내부의 면적은 터무니없이 비좁았다.
도떼기시장처럼 북적이는 그곳에서, 대성은 구석에 틀어박힌 채 조용히 구성원들의 전력을 살폈다.
그가 좁은 공간의 구석에서 숨을 죽이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주어진 상황 자체가 너무 당황스러워서 경황이 없었던 탓일까.
이곳에 있는 이들은 아직 대성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작금의 상황 자체는 허공록의 4순위 정보에 기록되어 있었기에 예상 범위 안쪽이었다.
다만,
‘거기 적힌 대로라면 이제 곧…….’
피바람이 몰아치리라.
그 사실이 뇌리에 번뜩이기 무섭게, 웅성거림이 가득했던 동굴에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무작위로 선출했다고는 해도 다들 참 얼빠지게도 생겼군!>
“깜짝이야! 뭐, 뭐야?!”
메아리를 듣고 흠칫 놀란 사람들이 하던 말들을 멈추고 침묵했다.
<오? 멍청한 얼굴이기는 해도 최소한의 집중력은 있나 본데. 아무튼, 길게 말하는 건 질색이니 딱 한 번만 설명해주마. 잘 들어라.>
사람들은 스피커도 없는 동굴에 대체 어디서 소리가 들려오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이 주변을 살폈다.
허공록에는 이것이 흐르는 바람에 녹음된 목소리를 실어 보내는 주술의 일종이라고 나와 있었다.
물론 ‘주술’이나 ‘마법’ 같은 걸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그러려니 하고 온전히 받아들일 리가 없겠지만.
<이건 강자를 솎아내기 위한 테스트다. 여기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놈만 살아서 나갈 수 있지.>
동굴 속 메아리가 폭탄 발언을 내뱉은 순간.
술렁거리던 사람들이 뇌에 퓨즈라도 끊긴 것처럼 얼어붙었다.
<나는 강한 전사를 좋아한다. 여기서 나가고 싶은 놈은 옆에 있는 놈들을 죽이고 역량껏 살아남아라. 그럼 나중에 보자.>
“저게 뭔 개소리야!”
“야! 야 이 새끼야! 누군지는 몰라도 개짓거리 그만두지 못해?!”
사람들이 온갖 폭언을 쏟아부었으나 메아리는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모두가 사전에 합의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어이가 없었던 나머지 헛웃음이 사람들 사이로 터져 나왔다.
“아니 씹…… 이게 뭔…….”
“다들! 설마 저 헛소리를 믿는 건 아니죠? 우리가 바보도 아니고 저딴 말에 속지 맙시다!”
“옆에 있는 사람을 죽이라고? 개소리하네! 다들 합심해서 여길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찾읍시다!”
누군가의 외침을 기점으로 혼돈은 빠르게 질서를 되찾았다.
이들 역시 게이트에서 온갖 사투를 벌이며 그것을 업(業)으로 삼아왔던 실력파 사냥꾼들.
주어진 상황에 휘둘리기보다는 어떻게 행동해야 제일 효율적일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질서는 1분도 안 되어 산산조각으로 깨지고야 말았다.
“허윽?!”
제일 먼저 나갈 길을 찾자고 선언했던 남자가 앞으로 나아가다 말고 갑자기 발라당 넘어졌다.
그제야 사람들은 반투명한 막이 일정 반경을 제외하고 동굴의 앞뒤를 가로막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긴 고유 결계다. 물리적으로 빠져나갈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
결계 속에 가둬 트라우마를 보여 주는 권능인 <침식의 방>과 비슷한 구조다.
고유 결계를 빠져나가려면 술사(術士)가 내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설정된 조건은, 말했듯이 모두를 죽이는 것일 터.
‘참 지랄 맞은 상황에 휘말렸군.’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들 또한 재수에 옴 붙은 건 마찬가지이거늘.
가능하다면 피를 보지 않고 여길 나가는 수단을 찾고 싶었다.
유감스럽게도 허공록은 닥쳐올 상황만 알려줄 뿐, 명쾌한 해결법은 제시해주지 않았다.
“비켜봐요! 제가 한번 저걸 부숴보겠습니다!”
호기롭게 외치며 사람들의 중심에 선 남자는 일본의 S급 사냥꾼, 오카다 슈헤이였다.
그는 넓은 열도를 통틀어 2등급 게이트 최다(最多) 토벌 기록을 지닌 명망 높은 실력자.
휘오오!
동굴을 한층 더 서늘케 하는 오러가 그의 주먹에 모여들었다.
그 방대한 기류를 눈에 담은 사람들이 오오- 하는 소리를 냈다.
‘백날 그러고 있어봐라.’
헛짓거리임을 아는 대성은 조용히 담배를 빼 물며 대책을 강구했다.
아니나 다를까, 혼신이 담긴 오카다의 일격은 ‘막’에 아무런 유효한 타격도 주지 못했다.
오카다가 아릿한 주먹을 부여잡았고 실망한 사람들이 아아- 하는 신음을 흘렸다.
‘진짜 다 죽이는 수밖에 없나?’
쓸데없는 피를 묻히면 뒷맛이 찝찝해져서 싫은데.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우리가 뭔 짓을 해도 저 벽은 도통 깨지질 않는군요.”
“……아까 그놈이 뭐라고 했었죠? 여기서 마지막에 남은 한 놈만 살아서 나갈 수 있다고 했나?”
“…….”
정적.
“다, 당신. 왜 날 봐, 갑자기?”
“힉?! 내, 내 몸에 손대지 마!”
“저, 저 새끼 저거 눈빛이 좀 수상하지 않아?”
어느 순간부터 분위기가 야릇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희망을 품고 단합했던 사람들이 불신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서 부스럭대는 소리만 나도 소스라치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대화는 오가지 않았으나 동굴 속에 흐르는 공기가 모두의 속내를 대신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가려면 나 빼고 다 죽이는 수밖에 없어!
……라고.
휘이잉-.
골반 부근에 맴도는 오카다의 주먹에 다시금 오러가 응집되었다.
그는 S급 사냥꾼.
같은 S급인 미국의 제이크 그리핀과 중동의 칼리드를 제외하면 적수가 없다. 여차하면 전부 몰살하는 것도 허황한 망상은 아니리라.
‘제이크랑 칼리드부터 노려야 하나? 아니지. 처음부터 너무 힘을 빼놓으면 오히려 나중 가서-.’
슈헤이의 눈알이 바쁘게 굴러갔다.
일촉즉발의 순간.
“어?”
그제야 슈헤이, 아니 이곳에 있는 대다수가 주변을 훑다가 알아챘다.
“뭘 봐.”
구석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뻑뻑 펴 대는 하얀 머리 남자의 존재를.
“생각하는 중이니까 방해하지 마. 경솔한 짓은 하지 말고.”
“하, 한대성? 당신 한대성 맞지? 그쪽이 왜 여기에…….”
“난들 알겠나?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 다시 강조하지만 경솔한 짓들은 하지 말고. 나처럼 담배를 피우든 아는 얼굴끼리 수다를 떨던가 해.”
대성은 이 순간에도 이들을 죽이지 않고 여길 나갈 방법을 고민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안일하다 표현해도 좋을 만큼 두터운 대성의 인류애(人類愛)는 이곳에 있는 이들의 마음에 닿지 못했다.
‘이런 썅, 한대성……. 한대성이 있으면 곤란한데…….’
‘잴 것도 없이 여기선 저놈이 제일 골칫거리야!’
‘빌어먹을 이건 뭐, 불 보듯 뻔하지. 아무리 나 혼자 발악해도 저 새끼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여기서 혼자 살아남는다는 건 달리 말해 제일 강하다는 의미.
그리고 여기서 제일가는 강자는 보나 마나 대성이라는 사실을, 감히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
누가 먼저 입을 뻥긋한 것도 아닌데 S급 3명의 시선이 교차했다.
무언(無言)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리고 고개가 동시에 끄덕여졌다.
저벅.
모종의 합의를 마친 S급 셋은 무리를 대표하여 앞으로 나섰다.
후미에 선 나머지 이들도 그들의 뒤를 따라 소심하게 발을 내디뎠다.
“생각하는 꼬락서니하곤. 무슨 사고방식이 아메바만도 못하군.”
아무리 바보 멍청이라도 침을 꿀꺽 삼키며 표정을 굳힌 저들의 상판을 보고도 모르진 않으리라.
그들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단합한 것이다. 매우 나쁜 쪽으로.
“너희끼리 똘똘 뭉쳐서 나를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이겠지? 여기선 내가 제일 세니까, 일단 나부터 족친 다음에 생각하려고.”
“네가 강하다는 건 우리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씨X……! 설마 사냥꾼이 서른 명이나 있는데 너 한 놈을 어떻게 못 할까!”
작정한 듯이 목에 핏대를 세운 슈헤이가 그리 외쳤다.
대성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손가락으로 담배를 튕겼다.
“어떻게든 너희를 살리는 쪽으로 여길 나갈 순 없을까 고민한 내가 호구 병신이었다.”
“나 말고 다 뒈지기 전까지는 아무도 여기를 못 나가!”
“아예 틀린 말은 아닌 듯하지만 하나만 고쳐라.”
쪼그려 앉은 자세였던 대성이 드디어 바닥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것만으로도 일동 전체가 사색이 되어 반 발짝 뒤로 물러선 순간.
픽-.
슈헤이와 함께 선봉에 선 제이크는 문득 왼뺨이 축축해지는 걸 느꼈다.
눈썹을 비틀며 손가락으로 왼뺨을 훑어보니,
선연한 혈흔(血痕)이 짧은 마디 위로 묻어나오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뒤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으나 제이크는 거기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옆에서 어느덧 슈헤이가 목 없는 시체가 되어 피 분수를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빼고 다 뒈지기 전까지는 아무도 여기를 못 나간다.”
대성은 본인이 죽은 줄도 모르고 생전(生前)의 표정을 간직한 슈헤이의 머리통을 흔들어 보였다.
이제는 유언이 된 그의 마지막 한 마디를 뉘앙스만 다르게 수정하며.
대체 어떻게?
그 자리에서 꿈쩍도 안 했잖아?
그냥 가만히 서 있었는데?
언제부터?
……따위의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히익?! 히이이익-!!”
“으아아아악-!!”
한 톨의 전의마저 전부 상실한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흩어졌다.
물론 아무리 도망쳐봤자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가로막힌 벽뿐.
“이, 이 병신들이……! 이럴수록 더 뭉쳐야-.”
뿔뿔이 산개하는 사람들을 본 제이크가 허둥지둥하던 찰나.
우지끈-.
그의 시야가 180도로 돌아갔다.
“꺼, 헉…….”
목이 기형적으로 꺾인 제이크가 용케도 단말마를 흘리며 허물어졌다.
스릉-!
중동의 S급 사냥꾼, 칼리드는 슈헤이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부터 이미 모든 준비를 끝냈는지 오러가 휘감긴 두 자루의 단검을 휘둘렀다.
“크아아아-!”
악명 높은 테러 집단의 수장도 단신으로 잠입해서 암살한 그였다.
총알같이 쾌속한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목표물이 있는 방으로 파고든 뒤 목을 벤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보다도 더 민첩한 속도로 움직여 대성의 목덜미를 사선으로 그었다.
확실히 속도만큼은, 일순간 대성의 동체 시력이 놓칠 만큼 재빨랐다.
팅-!
하지만 정작 무기가 적의 급소를 베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헉……!”
허공 위로 튕겨 날아가는 쇠붙이를 망연자실하게 쳐다보는 칼리드의 동공이 단숨에 위로 솟구쳤다.
푸후욱-!
대성은 그의 목젖 깊숙이 찔러 넣은 오른손을 도로 빼내며 말했다.
“이러는 편이 차라리 마음 편해서 좋은걸. 뒷맛도 안 찝찝하고.”
이들을 죽일지 말지 망설였던 이유는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대성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는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아니었다.
[첫 번째 위업 달성 조건: ‘하이오크 챔피언’을 쓰러뜨리십시오.]
[위업을 달성할 시, 다음 위업 달성 조건이 해금됩니다.]
정확히는 여기를 빠져나가 하이오크 챔피언을 죽이는 것.
진짜 잡아야 할 놈은 따로 있는데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건 대성으로써도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무의미한 살생을 줄일 타개책을 고민한 것이다. 이제는 무의미하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때.
“사, 살려주세요!”
“저, 저희는 당신을 어떻게 해볼 생각이 없었어요! 어, 어디까지나 저 새끼들이 억지로 선동해서……!”
“믿어주십시오! 정말입니다!”
뒤늦게 현실을 직시한 사람들이 허겁지겁 바닥에 고개를 처박으며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S급 3명이 풍전등화처럼 죽은 마당에 남은 잔챙이끼리 힘을 합쳐봤자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대성이 싸늘히 내뱉었다.
“거짓말하지 마.”
“거, 거짓말 아닙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 맹세코-.”
서걱-!
간만에 ‘심판의 단검’을 구현한 대성이 죽은 부모를 들먹이는 남자의 정수리를 반으로 갈랐다.
“거짓말이 아니긴. 개수작 부리려고 했던 게 뻔히 눈에 보였는데.”
지레짐작이 아니다.
사실 그들이 흑심을 품고 몰려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대성은 ‘사주의 눈’을 발동시키고 있었다.
당연히 서른 명 전원,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낙인’이 떠올랐고.
“또 남길 유언이 있는 놈은 나와라. 들어주마.”
“히이이익-?!”
“흐아아아악-?!”
아무리 빌어봤자 소용없다는 걸 인지한 사람들이 엎드렸던 몸을 세워 다시 도망쳤다.
그래 봤자 독 안에 든 쥐였지만.
푹-! 푹-! 푹-!
대성은 혼비백산하는 그들 곁으로 조용히 걸어가 손수 저승길로 인도해줬다.
지옥도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
1분 뒤.
“…….”
피비린내 자욱한 시체 밭 한가운데서, 대성은 핏물로 흠뻑 젖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스으으-.
미적지근한 여운에 사로잡히던 와중, 동굴 전역이 흐늘흐늘 일렁이며 서서히 사라져 갔다.
조건을 충족해서 고유 결계가 해제되는 것이다.
그리고 드러난 장소는 거센 바람이 불고 바닥에는 모래가 깔린 장엄한 원형 투기장이었다.
“오오! 동지들이여! 저기를 봐라! 용맹한 전사가 모습을 드러냈구나!”
“오훔! 오훔! 오훔!”
“테스트에 통과한 것을 축하한다, 인간! 그리고 아레나(Arena)에 선 것을 환영한다, 전사여!”
석탄처럼 거뭇한 피부에 머리를 한쪽으로 묶은 거한이 투기장의 상석(上席)에 앉아 호탕하게 외쳤다.
게이트에서도 희박한 확률로 마주칠 수 있는 위험종, 하이오크.
그리고 지랄 맞은 일에 대성을 끌어들인 장본인이기도 했다.
“오훔! 오훔! 오훔!”
관중석을 채운 수천 마리에 육박하는 오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이오크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상석에서 일어났다.
“나는 위대하신 존재, ‘불그’의 아들이자 하이오크 챔피언, ‘토브’라고 한다! 고통의 시간 속에서 해방되자마자 나를 즐겁게 해줄 새로운 강자를 찾고자 하여-.”
“섬멸룡 소환.”
대뜸 모랫바닥 위로 거칠게 방사된 검은 불꽃이 하이오크 챔피언의 말을 도중에 가로막았다.
발끈한 하이오크 챔피언이 뭐라 따끔하게 한 마디 쏘아주려던 순간.
크오오오오오-!!
광활한 원형 투기장을 절반씩이나 집어삼킬 만큼 커다란 드래곤이 고개를 젖히며 쩌렁쩌렁 포효했다.
“드, 드래곤?”
참고로 드래곤은 종족의 우두머리이자 샤먼 오크인 ‘불그’가 신(神)처럼 숭상하는 존재.
언젠간, ‘소수 종족’으로 취급받는 오크들을 태워 하늘로 데려다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위대한 신!
그런데 그 신께서 왜 지금 저 인간의 손바닥에서 튀어나오신 걸까.
“……뭐, 뭐냐?”
하이오크 챔피언은 하려던 말도 깜빡 잊고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뭔가…….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