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122
섬멸룡이 나타난 순간 원형 경기장이 침묵에 휩싸였다.
두 팔을 치켜들고 열성적으로 환호하던 오크들이 금붕어처럼 멍청하게 두 눈만 끔뻑거렸다.
호기로운 기색으로 강자를 맞이하려고 했던 하이오크 챔피언, ‘토브’도 입을 다물지 못하던 찰나.
“드, 드래곤?!”
“드래곤께서 왜 저기에?!”
“이런 젠장! 뭔지는 몰라도 도망쳐-! 드래곤께서 날뛰시면 우리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좌중이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요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가공할 만한 신화 속 존재와 마주한 오크들이 소스라치며 일어나 투기장을 벗어나려고 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일대를 돌아보며 대성은 입꼬리를 올렸다.
“어딜 도망가려고.”
크오오오-!!
[섬멸룡이 드래곤 피어(Dragon fear)를 사용합니다!]
[피어에 휘말린 대상의 모든 능력치가 30% 감소합니다.]
살기를 머금은 거대한 파문(波紋)이 대기를 타고 퍼져나갔다.
‘드래곤 피어’를 실은 섬멸룡의 포효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사슬이 되어 오크들의 발을 옭아맸다.
“헉……!”
“끄, 끄으윽…….”
멈춰 선 오크들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신음했다.
차가운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쥐덫에라도 걸린 듯이 두 다리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가 너희들을 살려 보내준다고 했나? 꼼짝 말고 거기에 있어라. 곧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몰살시켜 줄 테니까.”
이놈들만큼은 도무지 용서를 베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놈들 때문에 대성은 지저분한 피를 묻혀야만 했으니까.
대성은 상석에 앉아 오들오들 떠는 토브를 향해 검지를 뻗었다.
“너.”
그리고 까딱였다.
“내려와.”
“…….”
당연히 토브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날카로운 가시가 내장을 쿡쿡 찌르는 듯한 피어의 여운이 아직 맴돌았기 때문이다.
한낱 오크 따위와는 비교하는 것조차 실례인 드래곤이 저기에 있다.
게다가 그런 드래곤에 무슨 애완동물 대하듯이 자연스럽게 명령을 내리는 저 인간의 정체는 또 뭐고?
“이런 빌어먹을…….”
수천이 넘는 오크들의 이목이 토브를 향했다.
토브는 그들을 가혹한 철권통치로 다스려왔고, 강자를 존경하는 오크들은 그런 토브를 원망하기보다는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충성했다.
그런데 그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적에게서 꼬리를 내리면? 망신도 그만한 망신이 없다.
분명 실망한 오크족이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반기를 들 게 뻔하다.
“젠장!”
토브는 거친 욕설을 뱉으며 자리 옆에 놔둔 거대한 양손 도끼를 들고 투기장 한복판으로 내려갔다.
먹잇감을 발견한 섬멸룡이 한층 더 소름 끼치는 울음을 흘렸다.
“허, 헉…….”
아무리 부하들이 보고 있다고 해도, 토브는 파리해진 혈색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다.
대성은 그런 토브의 반응을 확인하더니 실소했다.
“왜. 얘보고 너를 어떻게 하라고 할까 봐? 고작 너 따위를 상대로?”
“이, 이놈……!”
“착각하지 마라. 네놈 같은 잔챙이를 상대하는데 내 손을 더럽히는 것도 아까울 지경이니까.”
“이놈이 감히-!”
드래곤이고 뭐고, 면전에서 저런 모욕을 듣고도 어떻게 참겠는가?
그런 건 하이오크 챔피언으로서의 위신이 허락하지 않는다.
토브가 노기를 띤 기합과 함께 도끼를 치켜들며 쇄도하기 무섭게.
쿵-!
“컥……?!”
대성이 <중력>의 권능을 발동하자 어마어마한 중력장이 토브를 개미처럼 찍어눌렀다.
분화구를 연상케 하는 구멍이 뻥 뚫렸다.
중력의 압박에 짓눌린 토브는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엄습했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히, 히익…….”
“챔피언이시여!”
벌레처럼 무력하게 짓밟히는 하이오크 챔피언의 추태는 수많은 오크족에 충격을 선사했다.
그저 발로 땅을 찍었을 뿐인데 저리도 손쉽게 챔피언을 제압하다니!
이제는 드래곤보다 대성의 존재가 두려워지기 시작한 오크들이 공포에 몸을 덜덜 떨었다.
“끄, 끄윽……! 이, 이놈-!”
“말했잖나. 넌 내 손에 피를 묻히기도 아까운 놈이라고. 흠, 그래도 무기는 쓸 만한 걸 가지고 있군.”
대성은 토브의 지척에 널브러진 거대도끼로 걸어가 손에 쥐어보았다.
관리를 소홀히 한 건지 날은 녹슬었고 누군가의 피와 살점이 찐득하게 묻어 있었다.
하지만 돼지 새끼 한 마리를 도살하는 데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섬뜩하게 번뜩이는 대성의 눈빛을 발견한 토브가 눈물을 글썽였다.
“그, 그만…….”
“너 같으면 여기서 그만두겠나?”
도끼날이 위로 솟구쳤다. 오크족 중 심약한 몇 마리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콰직-! 콰직-! 콰직-!
어깻죽지가 갈라지고 선혈이 튀어 오르는 소리가 광활한 원형 투기장을 무자비하게 채워나갔다.
대성은 일부러 두개골 같은 급소만을 피해 도끼를 내려찍었다.
‘이대로 죽어버리면 퀘스트가 완료돼. 그러면 나머지 오크 놈들도 일제히 소멸하고 만다.’
그러면 안 된다.
저놈들이 전부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걸 보기 전까진 직성이 풀리지 않으니까.
콰직-!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넝마가 된 챔피언을 본 오크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토브는 팔다리가 너덜너덜해지고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아직 손가락 끝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자, 그럼…….”
온몸이 피로 얼룩진 대성이 심호흡하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다 죽여버려.”
크오오오-!!
섬멸룡이 기다렸다는 듯이 힘차게 날아올라 관중석으로 돌진했다.
피어 때문에 옴짝달싹도 못 하던 오크들은 폭발적인 기세로 들이닥치는 섬멸룡의 시커먼 아가리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취익-!?”
“크허어억-?!”
콰직-!
섬멸룡은 얼어붙은 먹잇감들을 열 마리씩 아가리 속에 밀어 넣은 뒤 턱을 움직였다.
그야말로 진수성찬!
섬멸룡이 오크 고기로 열심히 포식하는 사이,
“도망쳐!”
“취이이익-!!”
뒤늦게 피어가 풀린 오크들이 투기장 밖으로 몸을 던지며 도주했다.
물론 한 마리도 놓칠 생각이 없었던 대성은 업화대검을 꺼내 들어 녀석들의 멱을 따줬다.
크오오오-!!
“취이이익-!!”
대륙 전체 오크족의 절반가량이 그곳 투기장에서 멸족당했다.
***
강풍이 맹렬히 휘몰아치는 남극.
지구촌 최남단의 극지(極地)에, 수수께끼의 대형 사원(寺院)이 한 채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안쪽에는,
“사, 살려, 살려주세요…….”
“흑, 흑흑…….”
포승줄에 묶인 50명의 젊은 남녀가 오크들에 둘러싸인 채 오열했다.
그들 주변으론 기하학적인 모양의 술진이 흙먼지 가득한 바닥에 그려져 있었다.
“피를 바칠 제물은 이 정도면 충분한 듯하군.”
동족의 백골(白骨)을 깎아 만든 투구를 쓴 오크가 그리 말했다.
오크족 중 유일하게 주술을 다룰 수 있는 샤먼 오크이자 무리의 우두머리, ‘불그’였다.
‘이 땅을 지배하기 위해선 오크족만의 힘으론 무리다.’
드디어 기나긴 고통의 시간 속에서 해방되었으나, 그들이 도착한 곳은 생뚱맞게도 인간들의 땅이었다.
당연히 오크들은 공생(共生)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인간들을 학살하고 지구를 오크들의 새로운 정착지로 삼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생겼다.
지구에 인간만 있으면 모르겠으나, 제3의 종족이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 당도한 것이다.
‘란도 놈들!’
플로마리아의 전투 종족!
그리고 머나먼 과거에 오크족을 핍박하고 소중한 터전을 침공한 원수이기도 했다.
‘이대로 가다간 패색이 짙어지는 쪽은 우리다.’
인간들 하나만으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건만, 란도족까지 가세해버리면 그때는 모든 희망이 사라진다.
그래선 안 된다. 오크족은 어떻게든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지구를 새로운 고향으로 삼아야만 한다.
“시작해라.”
결연하게 마음을 굳힌 불그가 오크들을 향해 턱짓했다.
오크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푸욱-!
그대로 저마다 쥔 창칼을 내뻗어 사람들의 가슴을 꿰뚫었다.
단말마도 지르지 못하고 픽픽 죽어간 사람들의 피가 바닥에 그려진 술진 위로 후두두 쏟아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50명분의 생명이 저세상으로 떠났다.
“죽은 제물들은 대충 구석으로 치워놔라. ‘그분’께서 설 자리를 비워놔야지.”
명을 받은 오크들이 빠르게 시체들을 질질 끌고 가 헌신짝처럼 사원 구석에 내팽개쳤다.
불그는 피의 강물이 흥건하게 흐르는 술진을 내려다보며 음산한 미소를 띠었다.
‘그분께서 우리의 편이 되어주신다면 인간은 물론, 란도족 따위는 상대도 안 되리라!’
바닥을 적신 핏물이 빠르게 술진 속으로 스며들었다. 하얗던 문양들이 선홍빛으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불그는 경건히 무릎을 꿇더니 빛나는 술진을 향해 외쳤다.
“저희에게 힘을 내려주소서! 위대한 존재, 어비스의 드래곤이시여!”
***
[하이오크 챔피언, ‘토브’를 격퇴하셨습니다.]
[위업 달성으로 왜곡된 인과가 일부 수정됩니다.]
[현재 수정률 <오크 랜드>: 50%]
대성은 숨이 끊어진 토브의 기억을 <귀안>으로 확인했다.
두 번째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선 놈들의 우두머리를 죽여야 한다.
다행히 토브의 기억 속엔 그 우두머리가 있는 본거지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었으나…….
‘젠장. 남극이라고?’
장소가 좋지 않았다.
남극이라니. 너무 멀지 않은가.
물론 섬멸룡을 타고 전속력으로 날아가면 반나절 안에 도착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만, 고작 오크 한 마리 잡자고 지구 최남단까지 날아가야 하는 작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
‘별수 없나.’
황준영 일행을 대신 보내는 것보다 자신이 직접 하는 게 일 처리도 더 확실할 터.
귀찮은 일일수록 후딱 끝내는 게 상책이다. 불평할 시간에 얼른 가자고 생각한 그는 죽은 오크들의 살점을 뒤적거리는 섬멸룡의 등에 올라탔다.
바로 그 순간.
화아악-.
“……?”
크르-?
돌연 아래쪽에서 눈부신 광휘가 터져 나왔다. 의아해진 대성과 섬멸룡이 고개를 갸웃거리기 무섭게.
팟-!
시야가 환한 빛으로 채워지고 공간이 빠르게 뒤바뀌었다.
“오오! 드래곤이시여! 깊고 어두운 어비스에서 저희의 부름에 답해주시다니,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
느닷없이 희열에 찬 외침이 들려오자 대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무릎을 꿇으며 경배를 올리는 오크들과 산처럼 쌓인 인간들의 시체.
그리고 건물의 틈새로 미미하게 흘러들어오는 차가운 바람.
‘……남극이군.’
모든 정황을 종합해보니 확실했다.
여기는 틀림없이 오크족의 본거지가 있는 남극이었다.
“드래곤이시여! 당신의 충실한 종이 먼저 인사부터 올리겠…… 응?”
“…….”
“너, 너는 누구냐?”
불그가 머리를 조아리려다 말고 섬멸룡의 등에 올라탄 대성과 눈이 마주쳤다.
보아하니 이 샤먼 오크가 소환진 위로 섬멸룡을 부른 듯싶었다. 자신은 거기에 우연히 딸려 나온 거고.
아무래도 좋지만.
“어느 세월에 도착하나 막막했는데 이거 참, 너무 고마운걸.”
“누, 누구냐고 물었다!”
“너희들 죽이러 온 놈.”
섬멸룡의 포식이 재개되었다.
***
[인과가 수정되었습니다.]
[허락받지 않은 시공간에 체류한 존재를 해당 차원에서 추방합니다.]
오크들의 사원이 소멸하며 널따란 남극 대륙이 펼쳐졌다. 사방을 가로막던 벽이 사라지자마자 세찬 눈보라가 얼굴을 강타했다.
이로써 지구상에서 오크들은 전부 사라졌다. 그러나 대성은 조금도 보람찬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대체 언제까지 이딴 헛짓거리를 반복해야 하는 거지?’
지구를 침공하는 외차원의 존재들을 전부 죽여버리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는 고행이다.
게다가 ‘플레인 게이트’에서 보았던 차원수의 나뭇가지는 못 해도 족히 수백 갈래는 되어 보였다.
그 말인즉슨, 이 짓을 적어도 수백 번은 반복해야 한다는 의미이리라.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무조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구가 외차원과 겹쳐질 때마다 이 짓을 기계적으로 반복해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넌덜머리가 났다.
‘이따위 반복 작업이 아닌, 효율적으로 사태를 수습하고 천상에 닿을 방법이 필요해.’
그렇게 대성이 남극의 찬바람을 맞으며 상념에 접어든 와중.
[인과의 틀을 바로잡으신 절대자께는 보상이 제공됩니다.]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시스템 메시지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청아한 소리를 울리며 눈앞에 떠올랐다.
머리가 복잡한 참이던 대성은 보상이라도 건지자는 생각에 고개만 끄덕였다.
[보상, ‘헥카르 비전’이 지급되었습니다.]
-툭.
메시지의 생성과 동시에, 낡아빠진 목각인형 하나가 발밑에 떨어졌다.
“…….”
이목구비 없는 얼굴과 유선형의 몸통, 그밖에 가느다란 팔다리가 달린 원목 재질의 인형.
그뿐이다. 그 이상으로 묘사할 게 없을 정도로 평범한 인형이었다.
‘헥카르라면…….’
다원 우주에서 가장 주술에 능통하다고 전해지는 종족이다. 혼세의 지배자인 라미쉬도 헥카르족이었다.
그런데 정작 방금 죽였던 불그는 오크족인데 왜 엉뚱하게 헥카르의 이름이 걸린 보상이 튀어나온 걸까.
게다가 이 인형의 용도는 또 뭐고.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길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열람.”
자잘한 의문에 대한 해답은 시스템이 제시해줄 테니까.
대성은 목각인형을 노려보며 보상의 정보를 활성화했다.
그리고 거기엔,
***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던 서녘의 하늘에 짙은 암운(暗雲)이 드리우고,
맑은 빗물을 흘려주었던 동녘의 하늘은 무더운 숨결만 계속 토했다.
“맙소사, 주신이시여…….”
여섯 번째 사도, 에인리히는 성기사단을 호령해 아보리아 산맥을 수호하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탄식했다.
몇백 년 만인가.
풍요와 번영의 낙원, 천상에 기근(飢饉)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건.
“…….”
하얀 악마를 죽이러 떠난 로드릭에게서 연락이 끊겼다. 그냥 죽었다고 보는 편이 좋으리라.
그 뒤로 갑자기 천상이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는데, 이게 과연 단순한 우연일까?
에인리히, 아니, 그녀를 포함한 사도 전원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하얀 악마가 무언가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리 판단 내린 사도들은 모든 직무를 중단하고 비상회의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