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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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 정보]
이름 : 헥카르 비전
분류 : ???
‘오크족과 헥카르족의 1차 분쟁 당시, 불그가 전란 속에서 주운 헥카르족의 비전이 담긴 유물.’
‘영혼을 모아 잠들어 있는 유물을 깨우면 물질계의 근원과 접촉할 수 있다.’
* 의식 개방까지 남은 영혼: 150
왜 오크족이 헥카르족의 물건을 가지고 있나 했더니 전쟁통에서 주운 걸 불그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대성은 목각인형의 정보를 열람해보았으나, 글귀에 적힌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순 없었다.
‘물질계의 근원…….’
인형이 그 ‘근원’이란 곳에 도달하기 위한 매개체임은 알겠다.
그런데 정작 ‘근원’이란 개념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니…….
‘쓰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모른다고 하여 인형으로부터 관심을 끄지는 않았다.
지구가 외차원의 시공간과 끊임없이 겹쳐지는 지금, 실낱처럼 가늘어도 좋으니 사태를 수습할 단서를 잡아야 했으니까.
그리고 이 인형이, 어쩌면 그 단서에 한 발짝 다가갈 기회를 제공해 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사용해보기로 마음먹은 대성은 인형을 물끄러미 살펴보았다.
‘150개의 영혼을 바치라는 건 150명을 죽이라는 건가.’
같은 헥카르족의 물건이라서 그런 걸까. <접속>의 권능을 발현시키기 위해 생명석을 모았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메커니즘이다.
그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생명석을 모으는 건 대단히 번거롭고 귀찮은 작업이었다.
<판데모니움의 마수들이 절대자의 노고를 덜어드리고자 흔쾌히 자원합니다.>
<어떤 마수가 하찮은 망혼이라도 가끔은 약으로 쓸 때도 있다며 절대자께 충언합니다.>
조용히 있던 판데모니움의 마수들이 갑자기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전에 분명, 시스템은 일부 필수적인 메시지만 제외하면 마수들의 자잘한 감정 상태는 일일이 전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건 달리 말해, 지금 눈앞에 보이는 마수들의 말은 귀를 기울일 만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셈.
“자원하겠다는 건 너희들의 영혼을 바치겠다, 이 말인가?”
엄밀히 말해선 망혼(亡魂)이지만 넋 또한 영혼의 한 갈래.
마수들의 망혼을 바쳐 목각인형을 깨우는 게 가능하다면, 직접 발로 뛰어 영혼을 수집하는 것보다 훨씬 일이 간편해지리라.
“그럼 나야 좋지. 그렇게 해라.”
좋은 감정을 품을 필요가 없는 녀석들이나, 이번만큼은 칭찬하고 싶었다.
목각인형을 눈높이로 들어 올린 대성은 지체 않고 망혼을 해방했다.
히야아아아-!!
소용돌이에서 튀어나온 150마리의 망혼들이 목각인형에 몰려들었다.
목각인형은 스펀지가 공기를 빨아들이듯 쭉쭉 망혼들을 흡수했다.
[30마리의 영혼이 헥카르의 비전과 융화합니다. 비전의 의식이 25% 깨어납니다.]
[70마리의 영혼이 헥카르의 비전과 융화합니다. 비전의 의식이 50% 깨어납니다.]
망혼들이 목각인형 속에 빨려 들어가면 갈수록, 인형은 점점 몸집을 커다랗게 키워가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녀석이 의식을 되찾을 때마다 없던 흑발(黑髮)이 정수리에 돋아나고 딱딱했던 원목 피부가 생물의 것과 흡사한 살결을 갖추어갔다.
대성이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인형은 어느덧 150마리의 망혼을 전부 빨아들였다.
[150마리의 영혼이 헥카르의 비전과 융화합니다. 비전의 의식이 100% 깨어납니다.]
[헥카르의 비전이 눈을 뜹니다.]
영혼의 흡수를 완전히 마친 인형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근원으로의 안내자가 당신을 뵙습니다.>
미성이 흘러나왔으나 비전의 입술은 꾹 닫혀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태엽을 돌려 미리 녹음된 목소리를 흘리는 기계를 연상케 했다.
<근원으로 향하는 길은 저의 몸속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 길을 걸으시려면 부디 저의 배를 갈라주세요.>
“그러지.”
서걱-!
대성은 망설임 없이 업화대검으로 비전의 복부를 세로로 그었다.
모래주머니를 가르듯 살결은 부드럽게 좌우로 갈라졌다.
갈라진 살결 너머엔 검푸른 빛을 띤 무저갱이 펼쳐져 있었다.
[C -133번 물질계, ‘지구’의 근원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만 한다.
항상 그랬다. 시스템은 무의미한 보상을 그의 손에 쥐여주지 않았다.
‘이 또한 내가 타야만 할 거대한 흐름 중 하나라면, 기꺼이 몸을 맡기겠다.’
그렇게 생각한 대성은 비전의 몸속에 펼쳐진 무저갱 안으로 몸을 던졌다.
***
여섯 명의 사도가 천상의 성역에 집결했다. 보통 아르마간과 르뮈에를 제외한 나머지 사도는 각지에 흩어져 영민들을 보살피기에, 사도 전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몹시 이례적인 광경이었다.
“…….”
꽃밭 위에 놓인 원탁. 그중 좌측 세 번째 자리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르뮈에가 슬픈 눈으로 그 공석(空席)을 바라보던 사이, 아르마간이 먼저 운을 뗐다.
“천상에 기근이 닥친 것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로드릭의 죽음도 명확한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고.”
로드릭이 죽었다는 말에, 르뮈에는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곧 쓸쓸한 바람이 흐르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사도의 생명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여명이 이제는 여섯이 되었다.
믿고 싶지 않아도 저것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로드릭은 죽었다고.
아르마간이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사도 하나의 죽음만으로 이리도 급격하게 가뭄이 닥치는 것도 이상하다. 다들 짚이는 바가 없지는 않겠지. 하얀 악마, 그놈 탓도 분명 있다는 걸”
사도들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하얀 악마라는 이름만으로도 이미 모든 사도에게 트라우마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말을 꺼내는 아르마간조차, 표정은 무심하나 목소리 끝이 희미하게 떨릴 정도로.
“……지금쯤이면 차원수의 시공간이 하나둘, 그놈이 사는 세계에 똬리를 틀고 있겠지.”
“그놈이 집에 들이닥친 불청객을 그냥 놔둘 리가 없죠. 절대로.”
아르마간의 말을 받은 건 네 번째 사도, 아도니스였다.
그는 성역으로 들어온 대성에게 머리가 쪼개진 기억이 있기에 아주 진절머리를 쳤다.
“그놈은 어떻게든 차원수의 시공간을 통째로 그쪽 세계에서 지워버릴 겁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놈이라면 분명 그럴 만한 힘이 있어요.”
“이미 그러고 있으니까 천상이 이 꼴이 난 거 아니겠나?”
아르마간이 한숨을 뱉었다.
“……다원 우주의 시공간을 양분 삼아 존립하는 천상에, 이만한 재앙이 또 있을는지.”
“…….”
사도들은 엄숙한 기색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천상은 독존(獨存)할 수 없다.
땅이 없는 곳에 하늘만 혼자 존재할 순 없듯이.
모든 다원 우주, 모든 차원의 ‘위’에 존재하는 세계, 천상(天上)은,
얄궂게도 다른 차원의 시공간에 내재한 ‘근원’의 힘을 끌어오지 않으면 존재조차 할 수 없다.
“이대로 그놈이 차원수의 시공간을 지우는 걸 내버려 둔다면, 언젠간 우리의 땅은 존립마저 위태로워지겠지.”
“막아야 해요.”
“전쟁. 전쟁을 벌입시다! 모든 성기사단과 군단을 그놈이 사는 세계로 보내는 겁니다!”
“그놈이 계속 날뛰기 전에……!”
천상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에 사도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이구동성으로 전쟁을 외쳤다.
하지만 아르마간은 냉정했다. 항상 강경한 태도를 보여온 그였으나,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성기사단 전체가 그놈과 맞선다 한들, 승리한다는 보장이 있나?”
“…….”
“그놈은 단신으로 천상을 침공해 성역을 불태우고 우리 일곱 명 모두를 손쉽게 죽였다.”
심지어 접전도 아니었다. 하얀 악마는 압도적으로 자신들을 짓밟았다.
설령 천상의 모든 군대를 동원한다고 해서,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터.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다. 정말로 모든 선택의 여지가 사라졌을 때 우리는 그 길을 택해야겠지.”
“그 말은 아르마간…… 당신께선 전쟁 외에 우리가 선택 가능한 방법을 알고 있다는 건가요?”
아르마간과 시선이 마주치는 자리에 앉은 에인리히가 물었다.
아르마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악마의 동족들을 우리들의 화신(化身)으로 삼는다.”
“……!”
“그들에게 계시를 내리는 거다.”
“우리가 나서기 전에 그들이 먼저 하얀 악마를 죽이도록…….”
“그래. 어차피 피해를 보는 건 우리가 아니니 실패해도 좋다. 아니, 실패하겠지. 그놈은 쉽게 죽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오랜 시간을 들여 거듭 화신을 상대하다 보면, 놈도 언젠간 지칠 터.”
외차원의 존재를 화신으로 삼는 건 사도들로서도 처음이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는 알고 있었으나, 좀처럼 활용할 기회가 오지 않았으므로.
“전쟁은 하얀 악마가 지친 뒤에 벌여도 늦지 않다.”
이제는 때가 왔다.
강수(强手)를 둘 때가.
***
불에 타고, 칼에 찔리고, 뼛속 깊이 차갑게 얼어붙는 고통이라면 셀 수도 없이 겪어보았다.
하지만 존재 자체가 소멸하는 듯한 감각은 대성도 처음이었다.
암흑의 망망대해를 표류하며, 그는 정신을 잃지 않도록 오감에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영혼째로 소멸해버릴 거다.’
대성의 전신이 땀에 흠뻑 젖을 만큼, 무저갱은 터무니없는 공간이었다.
자신이 만약 그림이라 치면, 그림 밖의 누군가가 지우개로 계속 그 그림을 지우려고 시도하는 느낌이랄까.
눈살을 구기며 버티기에 집중하기도 잠시, 곧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내게 닿아도 소멸하지 않을 만큼, 너는 강한 존재로구나.>
남녀 성별이 반반씩 섞인 듯한 음색이었다.
누군가 대성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아니다.
목소리는 망망대해 전역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공간 그 자체가 대성에게 말을 건넨 것이다.
“누구지?”
<네가 지금 어디로 들어왔는지 안다면 정답은 뻔하지 않겠니?>
“근원인가?”
<그렇단다.>
“……어이가 없군. 근원이란 게 원래 말도 할 수 있는 거였나?”
<너희가 한낱 미물(微物)로 여기는 벌레들도 울음소리를 내뱉는데 나라고 못 하겠니? 세상 만물을 구성하는 모든 개념은 저마다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단다. 시간, 공간, 자연…… 다만 서로에게 닿지 않을 뿐.>
“…….”
<하지만 보렴. 우리는 이렇게 보란 듯이 닿았구나. 근원조차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순리(順理)가 우리들의 만남을 주선해준 탓이지.>
“꼭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모든 걸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네가 품은 의문에 대답 정돈 할 수 있을 만큼은 알고 있단다. 왜? 시건방져서 마음에 안 드니?>
“그럴 리가. 난 너처럼 뭔가를 많이 아는 녀석이 절실했거든.”
근원이 유쾌한 농담이라도 들은 듯이 작게 웃었다. 성별을 분간하기 어려웠으나 굳이 따지면 근원은 그나마 ‘여성’에 가까운 듯했다.
그녀는 대성이 다소 고고하게 들리는 어조로 쏘아붙여도, 함부로 질책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마치 그가 그런 성격이라는 것조차 전부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오, 불쌍해라.>
“갑자기 뭐가. 내가?”
<여기 너와 나 말고 누가 있겠니. 지금 너의 내면은 깊은 후회와 죄의식으로 가득 차 있단다.>
“…….”
<내가 틀렸니? 틀렸다면 솔직하게 화를 내도 괜찮단다.>
“맞는 말을 아니라고 잡아뗄 정도로…… 고집불통은 아니다.”
순순히 인정했다. 근원의 말은 모두 옳았다. 부정할 수 없었다.
대성은 지구에 닥친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고 있었으니까.
그래, 어쩌면…… 애당초 내가 천상에서 날뛰지만 않았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텐데, 라며.
<만약 네가 잘못했다면, 이 별의 근원인 내가 먼저 화를 냈겠지. 그런데 내가 지금 화를 내고 있니?>
“아니.”
<그래. 그런 거란다. 모든 걸 네 잘못이라고 할 순 없어. 왜냐하면, 결과적으로는 이건 잘된 일이니까.>
“잘된 일이라고? 이해가 안 가는군. 대체 어디가 말이지?”
<그건 차차 설명해 줄 테니 너무 보채지 말렴. 나는 너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상당히 많단다. 너는 유일하게 나의 파편을 받은 존재니까.>
“파편이라니?”
<‘근원의 파편’ 말이야. 다르게 말해 너의 힘의 ‘근원’이라 할 수 있겠구나.>
“아까부터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나는 처음부터 너한테 뭘 받은 기억이…….”
거기까지 말하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뇌리에서 벼락처럼 번뜩였다.
그가 가진 힘의 근원.
그를 지옥에서 살아남게 돕고, 마신을 쓰러뜨려 지옥의 새로운 군주로 올라서게 해주었던 그 모든 힘의 근원(根源).
대성의 눈이, 그가 떠다니는 망망대해처럼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럼 네가…….”
<그래.>
근원이 속삭였다.
<네게 시스템을 준 건 나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