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124
82년 전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12년 전이라 해야 할까.
대성은 들뜬 마음을 안고 성찬호와 함께 중학교 졸업식에 가던 중, 난데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지옥이라는 이름의 나락으로.
-엄마, 흑! 지수야……!
하루가 지난 뒤에야, 지옥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눈물을 흘릴 틈도 없었다. 처음 보는 괴물들이, 마수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으니까.
이어지는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마수에게 쫓기고, 차가운 동굴 속에 억지로 잠을 청하고, 썩은 마수의 살점을 물어뜯어서 연명해야만 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서 그는 ‘일기’를 썼다. 문자를 남겼다. 자신은 지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짐승과는 다르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모든 걸 기록했다.
살아남은 날을 하나씩 표시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일기를 적어 내려갔다.
악착같이, 바득바득.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뛰어난 의지와 절실한 생존본능을 감지. 잠재된 근원의 파편이 깨어납니다.]
[UI 시스템 활성화 완료.]
어느 날.
‘기적’이 찾아왔다.
***
시간이 80년쯤 흐르면, 절대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가족의 얼굴조차 결국 망각하게 된다.
근원의 파편이라. 그래, 확실히. 그런 단어를 본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다원 우주의 가장 깊은 곳에서 ‘구멍’이 탄생했단다. 나는 그것을 어비스(Abyss)라 부르지만…… 네게는 ‘지옥’이라는 이름이 가장 익숙하겠구나.>
할머니가 손주에게 들려주듯, 어머니가 자식에게 들려주듯.
근원은 햇볕처럼 따사로운 목소리로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모든 차원이 그렇듯, 지옥에도 나와 같은 ‘근원’이 되어줄 자가 존재했지. 그것은 독특하게도 다른 근원처럼 추상에 가까운 개념이 아닌, 말도 하고 거동도 할 수 있는 생명체에 가까웠단다. 바로…….>
“마신이군.”
<그놈은 좀…… 음, 그래. 너희 말로 표현하자면 또라이 같은 자였단다. 그냥 근원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면 그걸로 만족하면 될 것을 굳이 마신 같이 촌스러운 별호를 붙이고…… 아아, 듣는 이가 다 낯뜨거울 지경-.>
“계속해.”
푸념을 들어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존재 자체를 위태롭게 만드는 이곳에선 1분 1초를 머무는 것조차 고역이었으므로.
<마신은 권태로웠지. 지옥엔 그를 제외하곤 그 어떤 생명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해. 그렇다고 다른 차원에 살아가는 생명을 닥치는 대로 납치하는 패악질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지만.>
“그럼 지옥의 마수들도 나처럼 다른 차원에 있다가 납치된 존재들인가?”
<그래. 그들도 처음부터 마수는 아니었어. 지옥에 오랜 기간 체류한 나머지 자아와 정체성을 상실하고 괴물로 전락했을 뿐.>
일종의 변이(變異)였다.
원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흉측하게 외관이 뒤틀리고, 기억과 이성을 잃어갔다.
그렇다면,
“왜 나는 마수가 되지 않았지?”
<네게 심어놓은 나의 ‘파편’이, 너를 괴물이 되지 않도록 막아주고 있었으니까.>
“…….”
<물론 완벽히 막아주지는 못했지. 뭐 1% 정도는 부족했단다. 네가 인간의 규격을 뛰어넘어 80년이 지나도 청년의 모습을 유지한다던가, 아니면 머리가 하얗게 센다던가.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마수가 되려다 말았다는 흔적들이지.>
“파편 같은 걸 심을 시간에 아예 처음부터 내가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막아줬으면 안 됐나?”
인제 와서 원망해봤자 늦었다고는 해도 대성은 따질 수밖에 없었다.
파편 같은 걸 심어줄 여력이 있었다면, 애당초 그가 지옥으로 납치되는 사태 자체를 막아줄 수도 있었을 텐데.
<미안한데…… 그럴 순 없었단다.>
“…….”
<징조(徵兆)를 느낀 게 다였지. 알아챘을 땐 이미 늦었어. 너는 그때부터 마신의 인력(引力)에 사로잡혔고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미래가 확정된 상태였으니까.>
의외로 무능하다는 폭언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으나, 참았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에 왈가왈부해봤자 부질없지 않겠는가.
<하나 나는 나의 피와 살 위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어. 그래, 그것만큼은 절대 참을 수 없었지.>
“그래서 파편이라도 심어둔 건가.”
<말이 ‘파편’이지, 인간의 관점에서 따지자면 그건 팔이라도 한 짝 내어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너에게 지옥을 헤쳐나갈 수 있는 희망을, 기적을, 그리고…… 힘을 주고 싶었단다.>
말끝에 웃음이 묻어나왔다. 또 웃음 사이엔 처연함이 묻어나왔고.
근원에도 ‘형태’가 있다면 지금 쓸쓸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으리라.
<파편의 발현엔 시간이 좀 걸렸을 테지. 1년 정도? 실제로 그 정도였니?>
“정확히 1년 뒤에 시스템이 나타났다. 왜 하필 온라인 게임 같은 모양새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게임 시스템 같은 형태로 네게 나타난 건, 어디까지나 파편 스스로가 선택한 의지가 아니었을까 싶구나.>
마치 파편이 원해서 선택했다는 뉘앙스였다.
<나에게서 분열된 파편은 독자적인 자의식을 지니고 있단다. 엄밀히 말해선 나의 분신과 같은 존재지.>
“확실히 그놈과 나는 서로 대화 비슷한 걸 나누기는 했다. 지금도 그렇고.”
궁금한 게 있으면 시스템은 대답했다. 미지(未知)를 발견하면 시스템은 설명해줬다. 성장하면 시스템은 통보해줬다.
자연스러운 회화는 아닐지언정 이 또한 무수한 ‘대화’의 형태 중 하나다.
근원이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는 알기 쉬운 모습으로 네게 다가가고 싶었던 모양이구나. 생각해보렴. 그 당시, 아직은 어린 철부지였던 네가 제일 좋아했던 게 뭐겠니?>
“……그 나이 때쯤이면, 한창 게임을 좋아하던 시기였겠군.”
<덕분에 너도 그 아이와 어려움 없이 소통을 나눌 수 있었고.>
“나를 절대자라고 부르던데.”
<어머 그렇니? 그건 아마, 시간이 지나면서 진심으로 네게 존경심을 품은 거겠지. 처음에는 너를 그냥 가르쳐야 할 똥개 정도로만 봤을 텐데.>
“그건 좀 불쾌하군.”
<우스갯소리를 하는 걸 보니 점점 내 품속이 익숙해져 가는 모양이구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싶었으나 대성은 금방 알아챘다.
처음 근원과 접촉했을 땐, 정말로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헥카르족이 근원에 닿을 수 있는 비술을 확립해도 함부로 넘보지 못한 건…… 약하기 때문이었단다. 하지만 넌 아니지. 너는 마신이라는 어비스의 근원을 쓰러뜨린, 강자 중의 강자니까.>
“다행이군. 덕분에 어깨에 힘 좀 풀고 편안하게 얘기 나눌 수 있겠어.”
<궁금한 게 많겠지. 얼마든지 물어보렴. 아는 건 전부 대답해줄 테니.>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알려줘.”
차원수의 시공간을 지구에서 몰아내기 전까진 이 죄의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외차원을 하나씩 상대하는 것도 못 해먹을 노릇이다. 그건 양동이 하나만으로 바닷물을 퍼내는 짓과 마찬가지니까.
그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그 방법을 알기 위해, 대성은 근원과 접촉했다.
<또 스스로 자책하는구나. 그럴 필요 없다고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니?>
“내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면 위로라도 건네던가 해.”
<천상이 수많은 차원을 무단 점거했을 때, 왜 지구만 무사할 수 있었을까?>
“……그러고 보니.”
수많은 차원이 차원수에 봉합되어 천상의 자양분이 되었다.
천상은 그 자양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세계란 사실을, 대성은 이미 전에 죽인 로드릭의 기억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양분 신세가 된 차원 중에서 지구는 없었다. 지구엔 아직 천상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
<어려운 얘기는 아니란다. 단순하지. 그들의 눈에 닿지 않도록, 내가 이 별의 존재감을 최대한 지우고 있었으니까. 뭐…… 라미쉬에겐 들키고 말았지만. 헥카르족이 그런 방면으로는 제일이거든.>
“존재감을 죽인다니. 그런 것도 가능한가? ……아니지. 근원쯤 되는 존재라면 못 할 것도 없겠군.”
<어머, 의외로 납득이 빠르구나.>
“내가 가진 상식으로 너를 이해하려다가는 머리가 터질 것 같거든.”
근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순수하게, 그냥 재밌어서 터진 폭소다.
자신의 분신과 다를 바 없는 파편을 지니고 여기까지 온 남자다. 각별한 총애를 드러내는 건 어쩔 수 없으리라.
그러나 웃음은 금방 멎었다.
<하지만 존재감을 지우는 것도 이제는 한계에 봉착했단다. 어차피 가까운 날에는 결국 들킬 운명이었어.>
“…….”
<그렇게 된다면, 천상의 존재들이 무수한 차원의 시공간을 등에 업고 지구로 들이닥쳤겠지. 그건 참으로 …… 무시무시한 재앙이야.>
천상의 군단에 침공당한 세계의 처참한 말로(末路)를, 대성은 라미쉬의 기억에서 보았던 적이 있었다.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흑백으로 변하고 시공간이 멈추며, 생명이 무자비하게 스러져 갔다.
만약 그 대참극이 벌어지는 배경이 지구가 된다면?
<지금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피해는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죽어간 인간들에겐 미안하고 가혹한 말이지만…… 정말 그렇단다. 그런데 다행히도 네가 새로운 판국을 마련해줬지.>
“내가?”
<네가 천상에 올라가 날뛰었기에, 그곳에 있는 사도가 일단 살고 보기 위해 인과를 거스른다는 악수(惡手)를 둔 게야. 그래서 기회가 생긴 거란다.>
“기회라면…….”
<그들을 존재케 하는 자양분에 우리가 간섭할 기회 말이다.>
차원수에 봉합되어 손쓸 도리가 없던 외차원의 시공간이 지구와 겹쳐졌다.
쉽게 말해, 천상의 생명줄들이 지구와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어졌다는 건,
‘잘라낼 수도 있다는 거다.’
근원이 말한 것처럼 최소한의 항거라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셈이다.
대성의 눈에 형형한 빛이 일렁이는 것과 동시에, 근원이 말을 이었다.
<다가올 파멸의 미래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보단, 지금 당장 피해를 보더라도 적에게 맞설 기회를 쟁취하는 게 훨씬 낫지 않겠니?>
그러니 계속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어. 근원은 그렇게 덧붙였다.
그녀 나름대로 건넨 위로일 터지만 대성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왜 그러니? 나는 지금 너의 그 뒤를 돌아보지 않는 포악한 성정이 운 좋게도 반격의 기회를 마련해줬다고 말하는 거란다. 그런데도 너는 아직도 죄의식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구나.>
“사도가 인과의 성배를 사용한 건 내가 그 녀석을 놓쳤기 때문이다. 이건 내 실책이야.”
반격의 기회고 뭐고, 그때 확실히 천상을 무너뜨렸더라면 처음부터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물론 당시엔 인과의 성배라는 게 있다는 것조차 몰랐고, 아르마간과 로드릭이 제 목숨을 바쳐 덤벼든 탓에 대성은 르뮈에한테 신경을 쓸 겨를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게 변명이 되지는 못한다. 결국엔 그때 르뮈에가 성배를 깨뜨리는 걸 막지 못한 탓에 지구에 이런 사달이 벌어진 거니까.
<차원수가 존재하는 한, 천상도 영원불멸한단다. 그 나무가 핵(核)으로써 끊임없이 천상에 에너지를 공급하거든. 지금의 천상을 멸망시켜도 언젠간 또 다른 형태의 천상이 생기겠지.>
“…….”
<네가 그때 천상을 무너뜨렸으면 모든 게 잘 풀렸을까? 그건 진정한 끝이 아니라, 단순한 유예에 지나지 않아.>
“지긋지긋하군. 대체 차원수가 뭐지?”
이것만큼은 로드릭의 기억을 아무리 엿봐도 알 수 없었다.
차원수란, 사도조차 모르는 아득한 시절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것. 그 정도밖에 짐작하지 못했다.
<차원수. 그것은, 형태는 나무일지언정 사실은 그물에 더 가깝단다.>
“그물?”
바로 그때, 검은 커튼을 친 것 같았던 망망대해의 배경이 급변했다.
허공을 표류하는 대성의 눈앞에 다양한 형태의 구체들이 떠올랐다.
어떤 것은 태양처럼 뜨겁게 달아올랐고, 어떤 것은 바다처럼 푸르렀다. 또 어떤 것은 얇고 가느다란 고리를 두르고 있었고.
우주였다.
<다원 우주는 하나로 이어져 있지 않아. 보다시피 뿔뿔이 흩어져 서로 각자만의 영역에 자리를 지키고 있지. 이는 서로 다른 차원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거대한 불문율이 존재하기 때문이란다.>
새하얀 갈퀴 같은 것들이 뻗쳐왔다.
갈퀴는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가만히 존재하던 차원들을 하나둘씩 옭아맸다.
그물이 수면 아래를 덮쳐 물고기들을 잡아 가두는 것처럼.
<그런데 누군가가 그 불문율을 깨뜨리고야 말았지.>
“주신이로군.”
<그럴 수도 있고. 혹은 어쩌면 그보다 더 위에 있는 존재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니?>
“아는데 떠보려고 물어보는 건가? 아니면 진짜로 모르나?”
<후자란다. 이해해주렴. 저 때의 난 겁먹은 아이처럼 존재감을 지우는 것에만 집중했으니. 휴…… 정말, 다시 봐도 몸서리가 쳐지는구나.>
갈퀴는 우주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새하얀 기둥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다.
처음엔 갈퀴라고 생각했던 것은 인제 보니 나뭇가지였고, 그 뒤로는 대성도 알고 있는 차원수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나뭇가지가 기둥을 휘감은, 차마 나무라고 칭하기엔 너무나 기이한 형태로.
“진정으로 없어져야 할 건 천상이 아니라 저 나무였군.”
<그렇다고 저걸 그냥 도끼로 내려찍으면 넘어가는 평범한 나무로 보지는 말렴.>
“넘어뜨릴 방법은 있는 건가?”
<넘어뜨리는 것과는 다르긴 해도, 어쨌든 방법이 없지는 않지. 원래는 있어도 취할 기회가 없었겠지만, 외차원의 시공간이 겹쳐진 지금은 다르단다.>
“그럼 그 방법을 알려줘.”
<시간을 되돌려, 차원수를 세웠던 자를 죽이렴.>
시간을 되돌린다는 말에 대성의 눈썹 끝이 파르르 떨렸다.
작금에 벌어진 사달의 시초가 인과의 성배로 시간이 조정되었기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면, 대성으로서는 역린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어떻게 시간을 되돌리냐 따지기 이전에 그는 다른 것을 질문했다.
“그냥 지금이라도 저 차원수를 통째로 없앨 방법은 없나?”
<없을뿐더러, 있다고 해도 지금 와서 함부로 저 나무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왜지?”
<저것은 이미 한번 뒤틀렸어. 그런데 거기서 또다시 문제가 발생하다가는…… 글쎄. 그때는 정말 어찌 될지 나로서도 짐작이 가질 않는구나.>
방법이 없다고 하니 단념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가 말한 대로 시간을 되돌려 차원수를 세웠던 자를 없애는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 뭐, 시간 되돌리지.”
<미리 경고하지만, 비디오 감듯이 쉽게 돌릴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내가 뭘 하면 좋을까.”
<인과의 성배처럼 우리도 시간의 흐름에 간섭할 수 있는 성물(聖物)을 만들자꾸나.>
“갑자기 생각난 건데, 그런 짓을 해버리면 차원수에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하는 건 아닌가?”
<회귀의 여파가 차원수에 영향을 미쳤던 건, 인과의 성배가 차원수와 밀접하게 연결된 천상의 성물이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네가 직접 만든 성물이라면 큰 상관은 없지 않을까 싶구나.>
“그렇다면 믿고 안심하겠다. 그 성물이란 건 어떻게 만드는 거지?”
<나와 같은, 차원의 핵을 담당하는 근원들에서 파편을 모으렴. 그것들을 모아 만들어 낸 성물이라면 분명, 시간을 되돌리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테니.>
사위를 가득히 채웠던 우주의 전경, 그리고 차원수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시 새카만 망망대해가 펼쳐졌다.
<모든 차원에는 예외 없이 근원이 존재하나, 그것들이 모두 같은 위계를 지니지는 않았단다. 강한 근원이 있는가 하면, 약한 근원도 있는 법.>
“시간의 흐름을 조정할 정도의 성물을 만들려면 강한 근원의 파편을 모아야겠군. 맞나?”
<얘기가 빨라서 좋구나.>
“너는 강한 근원이 아닌가?”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딱 중간이지. 그러니까 이상한 마음 품지 말렴. 게다가 난 이미 너한테 시스템이라는 훌륭한 파편을 줬잖니?>
살짝 두렵다는 듯 근원의 목소리가 유약하게 흔들렸다.
어차피 그녀에게서 성물을 만들 파편을 얻어낼 수 있다고 해도 그걸 내놓으라 할 생각은 없었다. 다른 녀석이면 모를까, 그녀는 지구를 지탱하는 존재였으므로.
“무엇이 강한 근원을 내재한 차원인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지?”
<너는 근원인 나의 품속에 들어와 있어. 근원이란 개념을 몸으로 체험한 최초의 생명체지. 이 감각을 간직한 채 밖으로 나가면 어떤 근원이 강하고 약한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을 거란다.>
그때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반짝이며 대성의 앞에 내려왔다.
근원이 지금 무언가 선물을 건넸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대성은 손바닥 크기보다 작은 빛을 움켜쥐었다.
<나의 또 다른 파편이란다.>
“…….”
<지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아. 난 지금 너한테 남은 팔 한 짝마저도 내놓은 거지.>
그래서일까. 은은한 온기가 감돌았던 근원의 품이 조금은 서늘해졌다.
목소리 또한 병에 걸린 사람처럼 가파르게 감겨 있었다.
<설령 시간을 되돌려 차원수를 세운 자를 죽인다는 대의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너 같으면 작은 미물이 찾아와서 다짜고짜 팔 한 짝을 내놓으라고 하면 선뜻 내줄 거니?>
“아니.”
<그런 거란다. 모든 차원의 근원들이 네게 적대적일 거야.>
“…….”
<그들의 적의에 조금이라도 더 쉽게 맞서려면 지금보다 강한 힘이 필요해.>
손아귀로 빛을 감싸 안는 순간, 광휘가 사그라지고 불타는 보주가 나타났다.
불에는 익숙한 대성조차 인상을 구기며 눈을 좁힐 만큼 강렬한 열기였다.
<창이든 활이든 검이든 아무거나 상관없단다. 네가 평소에 가장 애용했던 무구에 그 파편을 더해보렴.>
그 말을 듣고 대성은 바로 업화대검을 구현했다.
업화대검의 불길조차 파편이 뿜어내는 열기에 비하면 화톳불 수준이었다.
대성은 희미하게 떨리는 손으로 근원의 파편을 업화대검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파편이 스스로 제자리를 찾듯, 대검의 칼자루 부근과 합쳐졌다.
[‘근원의 파편’이 ‘업화대검’을 받아들였습니다.]
[파편은 만물을 베는 수준을 뛰어넘어, 추상적인 개념인 근원마저 능히 잘라낼 힘을 부여할 것입니다.]
따로 마력을 불어넣은 것도 아닌데 대검에서 검붉은 기류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간의 피부에 혈관이 돋아나는 것처럼 검신(劍身) 전체에 시뻘건 마그마가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다.
뚝…. 뚝….
칼날 끝에서 마그마가 방울져 떨어지는 게 마치 먹잇감을 발견하고 침을 흘리는 맹수를 방불케 했다.
이다지도 광포한 기세를 드러내는 업화대검을 대성은 본 기억이 없다.
‘엄청나군.’
처음에 근원에 더 쉽게 대항하는 힘이라고 했을 땐,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잘 체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가공할 만한 힘을 직접 손에 넣어보니 알겠다.
뭐라 형용키는 어려웠으나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이, 예리하게 번뜩이는 온몸의 감각이 그 의미를 알려주고 있었다.
대성이 전율하던 그때.
쿠르르릉!
<아……!>
고요했던 근원의 품속이 거칠게 요동치며 칼에 고정되었던 대성의 시야가 흔들렸다.
근원의 비명이 심상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