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125
근원이 느끼고 있는 고통은 고스란히 대성에게도 느껴졌다.
날카로운 칼침이 온몸을 파고든다. 찌르는 수준이 아니라 확실하게 피륙을 뚫고 뼛속까지 헤집는 느낌이었다.
대성은 이를 악물고 버텼으나 근원은 달랐다. 그녀는 아픔엔 익숙하지 않은 모양인지 비명과 신음을 번갈아 뱉었다.
“무슨 일이지?”
<아, 한계…… 이제는 한계야.>
“혹시 나한테 파편을 하나 더 줘서?”
<아니, 그거랑은 상관없…… 지는 않겠구나. 실은 아까부터 간당간당했는데 네게 파편을 건네면서 배리어가 완전히 뚫린 듯하구나.>
“배리어라면…….”
<차원수의 모든 시공간이 이제 이 땅과 동화될 거란다.>
대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모든’ 시공간이라니. 지금처럼 한두 개씩 찔끔찔끔 내려오는 게 아니라 무더기로 쏟아진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경악도 잠시, 대성은 이를 기회로 여겼다.
“나가면 바로 강한 근원을 가진 땅을 찾아가면 되겠군.”
<……그렇게 하라고 할 생각이긴 했지만 네 쪽에서 먼저 말하니 내가 아픈 게 꼭 기회라는 것처럼 들려서 기분이 묘하구나. 여기선 내가 웃으면 되겠니?>
“그건 알아서 하고. 어쨌든 상당히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나?”
말 그대로 뾰족한 나뭇가지가 전신을 사정없이 꿰뚫어 오는 심정일 터.
인간이었다면 즉사했으리라.
<근원인 나는 쉽게 죽지 않는단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끝없이 고통을 느끼겠지만…….>
“…….”
<이곳에 계속 있다간 너마저 꺾여버리고 말아. 얼른 내보내 주마.>
어둠의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나선형 회오리가 환한 백광을 뿌리며 나타났다.
대성은 회오리 너머로 뿌옇게 보이는 남극 땅을 잠시 곁눈질하다,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아직 묻고 싶은 게 더 남아 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지.”
<나도 너와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구나.>
“네가 하라는 대로 하지. 파편을 모으고 성물을 모아…… 이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리겠다.”
<믿고 있단다. 너라면 할 수 있어. 너는 이보다 더한 지옥도 이겨냈잖니.>
“……그래.”
움직이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동체가 근원의 회오리와 가까워졌다.
얼른 가라고, 근원이 그의 등을 살포시 떠미는 것처럼.
<가까운 날에 또 만나자.>
그 작별인사에 무어라 대답을 건네기도 전에, 대성의 발은 이미 새하얀 남극 땅을 밟고 있었다.
휘이잉-!
찬바람이 땀방울로 번들거리는 그의 머리카락을 할퀴고 지나갔다. 대성은 다시 평범한 목각인형으로 되돌아온 헥카르 비전을 집어 들었다.
파스스-.
비전은 먼지처럼 바스러지며 바람에 휩쓸려 날아갔다. 멀리멀리 날아가는 먼지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쿵-. 쿵-.
쩌저적-.
누군가 밖에서 망치로 유리막을 깨뜨리는 것처럼 하늘이 부서지고 있었다.
유심히 보면 대기권 너머에 머문 차원수의 나뭇가지가 뾰족한 끝으로 창공을 쉼 없이 찔러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틀 정도 남았군.’
근원의 품속에 있던 것이 어떠한 영향으로 작용한 탓일까?
저 하늘이 뚫리기까지 ‘이틀’이 남았다는 구체적인 시간이 이미 알고 있는 정보처럼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남은 이틀 동안 무엇부터 해야 할까. 어디부터 향해야 할까. 대성이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하려던 그때였다.
-대성 씨! 대성 씨! 들려요?! 완전 X됐…… 아, 아니, 큰일 났어요!
별안간 신초영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음을 보냈다.
다급할 수밖에 없으리라. 시각에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 지금 하늘에서 생겨나고 있는 균열을 보고 어찌 침착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신초영이 큰일 났다고 하는 부분은 하늘에 생긴 균열이 아니었다.
-한국에 게이트 터졌대요! 아, 미치겠네! 하필 이럴 때!
***
지구가 갑자기 이계의 생태계와 겹쳐진 것도 모자라 게이트까지 터졌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컹-! 컹컹-!
으르르르-!
광화문역 앞.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맹견(猛犬) 무리가 마구잡이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길가의 행인을 급습했다.
코볼트.
4등급으로 책정된 몬스터로, 단일 개체의 경우 건장한 성인 남성이 죽을 각오로 싸우면 이기지 못할 건 없으나…….
“이것들 왜 끝이 없어?!”
“오지 마! 오지 말라고!”
“꺄아아악-!!”
현장에 급파된 사냥꾼과 날벼락에 휘말린 민간인들의 비명이 뒤엉켰다.
아무리 전문 사냥꾼이 팀을 이뤄 밀어붙여도 게이트에서 물밀 듯이 쏟아지는 코볼트의 물량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렇듯, 놈들은 고블린 이상 가는 규모의 군집(群集)으로 똘똘 뭉쳐 전력 차를 메꿔버린다.
퍽-! 퍽-!
암석을 깎아 만든 뭉툭한 쇠도끼가 광화문역의 사냥꾼과 행인들을 패 죽였다.
종로구를 담당하는 중소 규모 클랜의 단장, 이강현은 돌아버리기 직전이었다.
‘씨팔, 아까는 웬 생선 대가리들이랑 오크들이 튀어나오더니!’
이미 캘린족이 지구를 침공했을 때부터 협회는 시군구 전체에 비상령을 내리고 관할 구역에 주둔한 클랜과 사냥꾼들이 전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작금의 사태는 캘린족으로만 끝나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오크족이, 그리고 지금은 게이트 프렉쳐로 인해 코볼트까지 출몰하는 실정이다.
‘나머지 단원들을 광화문역으로 다시 소집시켜야 하나?’
사태의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이강현은 클랜의 단원들을 6개 조로 잘게 쪼개어 세종로 곳곳에 분산시켰다.
이 때문에 현재 광화문역에 남은 인원만으로는 코볼트의 홍수를 막아내기엔 턱없이 역부족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분투하는 이강현의 옆으로 단원 하나가 달려오더니 외쳤다.
“단장님! 이대로 가다간 진짜 다 죽습니다! 나머지 단원에게 역 앞으로 집결하라고 하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젠장! 그러는 편이 좋겠지?”
그들이 계단 앞에 급조한 진지를 세우고 막아선 터미널 안쪽에는 간이 대피소가 형성되어 있었다.
지금처럼 갑작스레 프렉쳐가 발생할 경우, 대피소로 갈 사정이 여의치 못한 피난민들은 임시방편으로나마 가까운 역내에 마련된 대피소로 몸을 숨긴다.
달리 말해 이강현을 위시한 이들이 코볼트 떼에 밀려버리는 순간 터미널 내부엔 피바람이 부는 셈.
게다가 하필 오늘이 무슨 광화문 집회가 있는 날이라며 오백에 육박하는 민간인들이 좁아터진 터미널 피난 구역에 밀집한 게 아닌가.
“빌어먹을, 코볼트 새끼들!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나!”
결국, 이강현은 어금니가 으스러질 기세로 이를 갈며 무전을 꺼냈다.
그리고 6개 조를 향해 당장 광화문역으로 모이라고 고함치려던 순간.
파지직-! 우르릉-!
깨갱-! 깽-!
어디선가 불어닥친 전격(電擊)의 폭풍이, 진지로 쇄도하던 코볼트의 진영 한복판에 작렬했다.
“……뭐, 뭐야?”
이강현과 그의 단원들이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전격은 끊이지 않고 코볼트 무리를 휩쓸었다.
코볼트 무리 또한 갑자기 어디서 천둥이 들이치니 화들짝 놀라며 질겁할 수밖에 없었다.
“놈들은 머릿수만 많을 뿐, 하룻강아지만도 못한 놈들이다! 제군! 쉬지 말고 밀어붙여라!”
“제국에 영광을-!”
우레와 같은 함성이 세종로의 새벽을 격렬하게 뒤흔들었다.
이강현은 벼락이 내다 꽂히는 사선 방향으로 눈길을 움직였다.
거기엔 중세풍 가죽 갑옷과 철 투구로 무장한 대군들이 저마다 손에 쥔 창칼을 휘젓고 있었다.
병기는 코볼트가 있는 지점이 아닌 엉뚱한 허공만을 갈랐으나…….
파지직-!
어째서인지 그것만으로도 날붙이 끄트머리에 벼락이 뿜어져 나오며 유도 미사일처럼 코볼트 무리 위로 작렬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힘내거라, 제군들!”
선두에 나서서 대군에게 명령을 내리는 이는 찬란한 금발에 상쾌한 인상을 지닌 젊은 남자였다.
확성기를 갖다 댄 것도 아니건만, 신기하게도 금발 남자의 외침은 호탕하게 메아리치며 온 사방을 울려댔다.
“다, 단장님. 저, 저게 뭘까요?”
“……사냥꾼들인가?”
“아뇨. 사냥꾼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잘 됐습니다! 저희도 가세하죠!”
저들의 정체가 어찌 됐든지 간에, 공공의 적 앞에서는 모두가 아군인 법.
하지만 가세하자는 단원의 발언이 무색하게도, 중세풍 대군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코볼트 무리를 격멸했다.
치이익-.
까맣게 타죽은 절명한 코볼트 무리의 시체가 광화문역 앞에서 동산을 이뤘다.
그야말로 모래밭에 밀려오는 해일과 같은 기세였다.
“그쪽이 여기 책임잡니까?”
-철커덕. 금발 남자가 갑옷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이강현의 면전에 섰다.
꿀꺽. 남자와 마주한 이강현이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
‘아무리 봐도 사람인데…….’
중세풍 갑옷과 방금의 마법 같은 무위만 제외하면 금발 남자의 행색은 영락없는 인간이었다.
“제 말이 안 들리십니까? 저는 그쪽이 여기 책임자냐고 물었습니다.”
“……네? 어, 어어! 그래요!”
“아, 역시 그랬군요. 반갑습니다.”
금발 남자가 빙그레 웃더니 이강현을 향해 손을 뻗으며 악수를 청했다.
이강현이 고개를 주억이며 얼떨떨하게 그 손을 맞잡았다.
“저는 플로마리아 중앙대륙의 유일 제국 제1 기사단장 아인프리트라고 합니다. 편하게 아인이라고 부르십시오.”
“프, 플로…… 뭐?”
“실례가 안 된다면 귀공의 이름과 직책을 제게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 저는 여기 세종로 담당 클랜 사냥꾼 이강현이라고 하는데…….”
“이, 강……? 발음하기 어렵군요. 그냥 편하게 ‘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하하.”
너희는 뭔데 21세기에 이따위 복식과 말투를 고집하는 겁니까, 라는 질문이 목울대까지 솟았으나 이강현은 참았다.
맞잡은 아인프리트의 손에서 억센 악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 때문이 아니어도 그는 이미 먼지 쓸 듯이 코볼트를 쓸어버리던 아인프리트의 위세에 짓눌릴 대로 짓눌린 상태였지만.
‘역시 이계에서 온 놈들인가 보네.’
아까 플로 뭐라 했으니 자명했다.
천만 다행히도 그 매서운 섬전(閃電)이 인간에게 겨눠지지 않아 망정이지.
“‘이’. 당신들은 저희의 난입에 상당히 놀라셨을 겁니다. 마음 같아선 소상히 저희의 사정을 설명하고 싶지만…… 그 얘기는 이곳 대륙의 왕과 만나 직접 하는 편이 좋겠군요.”
“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요.”
“저와 저의 군세를, ‘이’ 당신이 이곳 대륙의 왕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대륙의 왕……?”
그가 말하는 대륙이 ‘대한민국’을 지칭하는 거라면, 여기서 그나마 왕에 가까운 사람은-
“대,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말이요?”
“대통령? 아, 이곳은 왕좌에 앉은 자를 왕이라 칭하지 않고 대통령이라고 합니까? 그럼 그분께 계신 곳으로 얼른 안내해 주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나라가 이 지경이 났으니 대통령은 지금쯤 청와대 지하 벙커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 이강현이 담당하는 세종로가 바로 청와대가 세워진 곳이다.
“그, 근데 대통령께선 지금 피난처에 계신지라 조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로부터 근방 500섹트 내에 있는 괴물들은 전부 우리 기사단이 정리했습니다. 마을과 왕국은 안전할 겁니다.”
“아니, 근데 좀 이게…….”
물론 거리가 안전하다 하여 일개 사냥꾼이 함부로 외부에서 온 자들을 국가원수가 있는 곳으로 데려갈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눈앞의 이 외계 청년은 그런 현실적인 여건 따윈 전혀 고려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이’, 얼른.”
“……그, 그럼 안내만 해드리리다. 그 뒤론 알아서 하쇼.”
그러나 딱 잘라 거절하기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려워진 이강현이였다.
***
이강현은 철창이 빽빽이 세워진 청와대 정문 앞까지만 아인프리트와 그의 병단을 안내하고는 후다닥 자리를 떴다.
대규모 비상사태가 발생했으니만큼 당연히 완전무장한 101경비단과 수십 대의 지프가 정문에 대기 중이다.
아인프리트는 가슴팍에 무궁화 4송이를 단 강석준 총경(總警)한테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이 세계의 왕을, 아! 아니지. 여기는 왕을 대통령이라고 부른다 했나? 아무튼, 대통령 만나러 왔습니다.”
“…….”
강석준은 대체 어느 장단에 어이가 없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저 패기 넘치는 말도 말이지만…… 아인프리트의 뒤에 쭉 늘어선 저 철갑 대군의 모습은 뒷덜미에 서늘함을 스치게 했다.
적의가 형형한 눈빛을 보이며 강석준이 물었다.
“그쪽들은 누구십니까.”
“하하. 표정이 너무 험악하신 거 아닙니까? 저는-.”
아인프리트는 이강현에게 했던 것과 정확히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자기소개를 펼쳤다.
강석준의 대답은 짧았다.
“대통령을 만나게 해드릴 순 없습니다. 물러나십시오.”
“엥? 없다고요? 왜죠?”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들릴 듯 말 듯 강석준은 조용히 뇌까렸으나 아인프리트는 똑똑히 들었다.
비아냥거리는 태도에 서글서글하던 아인프리트의 눈웃음이 꿈틀거렸다.
강석준 또한 지지 않고 그들의 손에 잡힌 창칼을 노려보며 재차 말했다.
“물러나십시오.”
“어쩌죠? 그러긴 좀 힘들 것 같은데. 싫다면요?”
“지금은 전시(戰時) 중입니다. 경고는 세 번뿐입니다.”
-철컥!
사방에 산재한 경비단과 특수부대의 총구가 짤막한 울음소리를 뱉었다.
“당장 물러나십시오. 이번에도 불응할 시 즉각 발포하겠습니다.”
“당신들 세계를 구한 전사들한테 이래도 되는 겁니까? 무례하네요.”
파지직-! 쾅-!
수직으로 떨어진 노란 섬광이 지프 한 대를 걸레짝처럼 불태웠다.
“참고로 우리 플로마리아에선 경고가 한 번뿐입니다.”
대화의 여지가 모조리 사라졌다는 신호탄이다. 강석준이 냉큼 뒤로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총구가 불을 뿜었다.
투두두두-!
빗발치는 집중포화의 표적은 오직 아인프리트 한 명뿐.
그런데 어깨를 들썩이며 방아쇠를 당기는 경비단과 군인들의 표정이 점점 어둡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소리만 요란하지 실속은 마나 애로우보다 못하군요. 정말 이러고도 당신들은 왕궁기사단을 자처하는 겁니까?”
파스스-.
기가 찬다는 듯이 한숨을 흘리는 아인프리트 앞에는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 아지랑이에 닿은 총탄들은 등불에 말려든 모기처럼 맥없이 녹아내렸다.
투두두-! 투두두두…. 틱, 틱-.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강석준과 그의 부하들이 말문을 잃는 사이 탄창은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다.
당연히 아인프리트는 그들에게 재장전을 할 시간 따위는 주지 않았다.
“저희 ‘폐하’로부터 적대적인 자들에겐 손속을 두지 말라고 명령받았습니다. 그러니 이해해주십시오.”
파지직-!!
30분 전에는 코볼트를 향했던 전격이 이번엔 인간들에게 향했다.
작렬하는 낙뢰(落雷) 앞에서 총이고 지프고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잠시 뒤.
청와대 정문 앞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시커멓게 탄 유해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부디 그 대통령이란 분께선 당신들보다는 융통성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인프리트와 그의 병사들이 시체를 밟고 넘어가 본관으로 향했다.
***
게이트가 터졌다는 신초영의 보고를 듣기 무섭게, 대성은 부리나케 한국으로 귀환했다.
길거리는 한산했다. 어느덧 사람들이 전부 대피소로 피난을 떠났기 때문이다.
‘사냥꾼들이 한 짓이 아니군.’
대성은 광화문 근처에 널브러진 코볼트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한 마리도 빼놓지 않고 전부 전격 같은 것에 당해 거뭇하게 그을린 모습들.
주로 총탄이나 절삭을 위한 무기를 사용하는 사냥꾼들이라면 연출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플로마리아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한 짓이야.’
시스템의 설명에는 놈들이 검과 마법을 쓰는 전투 종족이라고 나와 있었다.
그 특성을 발휘해 코볼트를 휩쓸었다는 점과 도시가 고요하다는 점으로 비추어 봤을 땐…….
‘캘린족이나 오크족처럼 처음부터 적대적으로 나오는 놈들은 아닌가?’
문득 그런 의문을 떠올리며 아스팔트 도로를 가로지르던 그때.
<대통령을 만나러 왔다고 선언한 자들이 방금 막 청와대 정문을 넘고 있습니다! 정문엔…… 어? 헉! 이, 이거 방송에 내보내도 되는…….>
세종로 백화점에 걸린 대형 전광판. 그곳 스크린 너머로 방송국 헬기가 청와대 현장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여성 현장 특파원이 정문 앞에 나뒹구는 인간들의 시체를 보더니 비명과 함께 헛숨을 삼켰다. 카메라맨도 당황했는지 앵글이 산만하게 흔들렸다.
‘적대적이지 않을 리가 없지.’
차라리 잘 됐다.
우호적으로 나왔어도 어차피 대성은 그들을 지구에서 내쫓을 작정이었으니.
잠시 그 자리에서 멈춰선 대성이 팔짱을 끼며 전광판 속 뉴스를 관람했다.
덜컹! 덜컹!
<어어! 다, 당신 뭐야?!>
<아, 안 돼요! 오지 마세요! 이러시면 안 돼요!>
특파원과 카메라맨의 비명이 한 번 더 이어졌다.
하지만 카메라 화면은 바닥에 고정된 탓에, 지금 저 헬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내 앵글이 바로잡히더니 상쾌한 인상의 금발 남자가 화면 가득히 들이찼다.
<오! 이게 이쪽 세계에서 사람들에게 전언을 보내는 마도구(魔道具)입니까? 잠시 빌리겠습니다!>
<아, 안 돼요! 내놓으세요! 이거 방송용 카메라……!>
<안녕하십니까. 이 세계의 영민 여러분. 저는-.>
금발 남자, 아인프리트의 자기소개가 장황하게 이어졌다.
소개를 마친 그는 화면을 정면으로 직시하면서 이렇게 서두(書頭)를 뗐다.
<여러분들의 세계는 앞으로 저희 플로마리아 대륙 유일 제국의 영유권 안에 소속시킬 것을 선언합니다! 위대하신 국왕님의 비호 아래서 다 함께 평화를-.>
그 뒤로도 도통 알아먹지 못할 연설이 이어졌다.
대성은 어린애 재롱잔치라도 구경했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귀여운 새끼군, 저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