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26화 (126/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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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

전광판에 정파(停波) 방송이 나왔다. 그 황당한 라이브가 계속되기 전에 방송국 측에서 신호를 차단한 것이다.

대성은 한산해진 세종로 길거리를 쭉 돌아보았다.

‘여기뿐만이 아니다. 앞으로 이틀 후면 온 지구상의 도시는 원래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겠지.’

네온사인이 빛살을 흩뿌리는 번화가, 전광판이 달린 백화점 건물, 보도블록이 깔린 도로, 드높은 마천루 등.

이 모든 것들이, 이틀 뒤 수를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은 외차원의 시공간과 겹쳐지는 순간 사라지리라.

지금도 그렇다. ‘플로마리아’ 하나만 겹쳐졌을 뿐인데 곳곳에 이형(異形)의 건축물이나 식생(植生) 같은 것이 심심찮게 뒤섞여 있었다.

‘그때가 오면 떼 몰살을 당하겠군.’

설령 대성과 소환수, 그리고 그나마 이계의 적에게 대항할 힘을 갖춘 사냥꾼이나 군대가 있다고 해도.

지구가 이계로 돌변하는 순간 그동안 유지해 왔던 모든 사회⦁안보⦁국방 체제가 무너질 테니 대다수의 힘없는 일반인은 살아남지 못하리라.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도 어느 정도 재량껏 살아남을 힘이 필요해.’

이전 같으면 누가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으리라.

자신과 가족, 그리고 곁에 둔 동료만 무사하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면서.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달라졌다.

자신의 힘이 누군가에겐 구원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으니까.

‘지옥에는 죽어도 싼 놈들밖에 없어서 몰랐지만…… 지구는 다르다.’

죽어도 싼 생명과 죽어선 안 될 생명.

이 둘을 철저히 분별해낼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민간인을 판테온에 들여보내 무기를 쥐여줄 수도 없고…….’

황준영 일행은 초인이니 그나마 지옥에서 버틴 것이지, 일반인들은 어림도 없다.

무언가 뾰족한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봤으나 당장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일단은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했다.

‘아인프리트라고 했나. 우선 그 미친놈부터 어떻게 해야겠군.’

청와대를 습격하고 영토 점령 선언을 한 시점부터 그들은 지구에서 사라져야 할 것들이다.

먼저 청와대로 향하기로 마음먹는 대성이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였다.

[근원과의 접점이 절대자께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스킬, ‘통찰안(洞察眼)’이 발현되었습니다.]

생각도 않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시스템 메시지가 생성되었다.

대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새로운 스킬이 생겼다는 대목을 바라보았다.

곧 스킬 정보가 나타났다.

<스킬 정보>

통찰안 Lv.1

[다원 우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

[현재 접촉 중인 차원이 지닌 ‘근원’의 위계(位階)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스킬 레벨이 상승할수록 새로운 부가 기능이 해금됩니다.]

* 현재 사용 가능한 부가 기능

1. 명령어, ‘지도’ 언급 시 접촉 중인 차원의 주제도 열람.

분명 지구의 근원은 어떤 차원의 근원이 강하고 약한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알기 쉽게 스킬로 줄 줄은 몰랐다.

‘나쁘지 않아.’

다소 모호한 느낌이 있는 ‘직감’보다는 이렇게 직관적으로 볼 수 있는 스킬 쪽이 훨씬 나으니.

대성은 바로 통찰안을 사용해 플로마리아가 지닌 근원의 위계를 확인했다.

-중하(中下)

한 줄로 딱 짤막하게 떠올랐다.

수준이 ‘중하’밖에 안 된다면 근원의 파편을 얻어도 성물을 만들 정도의 가치는 지니지 못할 듯싶었다.

아니, 설령 수준이 높아 파편을 취한다고는 해도-

‘근원에 어떻게 도달하지?’

그게 문제였다. 근원이란 것이 하염없이 땅을 파다 보면 나오는 것도 아닐 텐데 이런 식으로 언제 도달한단 말인가.

지구의 근원과 만나게 해줬던 헥카르 비전도 먼지가 되어 사라졌고.

이걸 물었어야 했는데 지구의 근원이 고통스러워하며 얼른 가라고 재촉한 탓에 질문할 겨를이 없었다.

‘……고민할 게 한두 개가 아니군.’

답답한 나머지 마음 같아선 허공록이라도 펴들고 싶으나 마지막 ‘정보 구매’로부터 아직 24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플로마리아’는 근원의 파편을 모은다는 목적과는 동떨어진 외차원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내버려 둘 순 없겠지.’

외차원의 시공간이 전부 내려오기까지 앞으로 이틀이다. 모레면 머리 아픈 일이 발생하는데 불청객들을 방치해서는 안 되는 노릇.

대성은 시스템을 열어 위업 달성 조건을 확인했다.

[위업 달성 조건: ‘유일 제국’의 여왕 ‘엔베트 로젠’을 폐위(廢位)하십시오.]

캘린족 때도 그렇고 오크족 때도 그렇고, 위업 달성 조건은 항상 획일적이다.

최고 통수권자를 격퇴하는 것.

‘그럼 굳이 청와대로 갈 필요 없이 바로 여왕을 찾아가면 되겠군.’

여왕만 죽이면 나머지 자질구레한 것들은 알아서 소멸할 터.

마지막으로 확인한 허공록에는 지금의 상황이 기록되지 않았다.

그래서 엔베트 로젠이란 자의 주둔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오리무중이었으나 알아낼 길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지도에 표시되었을지도 모르지.’

통찰안을 개안하면서 얻은 ‘지도’ 열람 기능. 이거면 혹시 그 유일 제국이란 것의 좌표를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대성은 잠시 한숨을 푹 쉬더니 명령어가 아닌 다른 말을 꺼냈다.

“안 그래도 생각이 많아져서 힘든데 너희까지 성가시게 하면 안 되지.”

“놀라운걸. 어떻게 알아챘지? 감이 꽤 좋나 놈인가 봐.”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골목 안쪽에서부터 스무 명가량의 남자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

전부 가죽 갑옷을 걸쳤다. 플로마리아에서 건너온 ‘란도족’이라는 의미다.

소수로 꾸린 집단을 이끄는 지휘관은 아인프리트와 같은 연령대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대신 눈매라거나 턱선이 아인프리트와 비교해 좀 더 날카로운 느낌이다. 인상에서부터 벌써 족제비처럼 표독스러운 기색이 물씬 풍겼다.

남자가 킬킬 조소했다.

“다른 것들은 전부 쥐새끼처럼 숨었는데 왜 너만 여기서 이러고 있어? 왜, 길을 잃었니?”

“…….”

남자가 조롱해 왔으나 대성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보다 다른 것들이 그의 시선을 빼앗았다.

눈에 익은 병장기(兵仗器)와 ‘목’이 남자와 갑옷 병사의 손에 들려 있었다.

한국 곳곳에 배치해둔 사령 병사였다.

대성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 병사들을 죽였군.”

“어, 뭐야. 얘들 네 부하였어? 난 또 괴물들인 줄 알고 죽였지.”

자신의 병사를 건드린 시점에서 저들을 살려둘 이유는 없었다.

쿵-!

중력장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바닥처럼 휘둘러져 저들 머리 위를 내려찍었다. <중력>의 권능이었다.

쨍그랑-!

하지만 노도와 같은 기세로 내려오던 반고리 형태의 장막은 어느 지점을 지나는 순간 유리처럼 산산이 깨졌다.

“와, 씨. 깜짝이야. 너, 이 세계에 살면서 마법도 쓸 줄 아는 놈이었냐?”

남자와 병사들의 몸 주변에는 흐릿한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대성은 저것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물리적 피해를 상쇄시키는 방어막 같은 것이란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위력 보니까 꽤 쓸만한 놈인 것 같은데. 너 우리 동료로 들어올 생각 없어?”

쿠르릉-!

정말 진지하게 반응해주길 바라고 꺼낸 건지 미심쩍은 헛소리는 건물이 반파되는 굉음에 묻혀버렸다.

대성이 <염사>의 권능으로 골목 양편에 세워진 상가 건물을 잘게 쪼갠 것이다. 두부처럼 네모나게 반듯이 잘린 파편들이 저들 위로 쏟아져 내렸다.

“너 진짜 여기 사는 놈 맞아?!”

하지만 건물 두 채가 붕괴하며 떨어져도 아지랑이 방어막은 깨지지 않았다.

단숨에 바닥에 쌓인 파편을 걷어내고 골목을 빠져나온 남자는 얼굴에서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이쯤 되면 대성도 순순히 인정했다. 저 방어막은 보기보다 튼튼하다고.

업화대검을 꺼낸다면 방어막이고 뭐고 전부 무시해버릴 수 있겠지만…….

지금은 좀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여신 강림.”

“아니, 근데 이 자식이 아까부터 은근슬쩍 내가 하는 말을 무시-.”

짜증이 치민 남자가 욱해서 덤벼들려다 말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화아악-.

대성의 목에 걸린 ‘대륙 왕의 증표’가 빛을 토해내더니, 이내 ‘룬 퀴엘라’를 소환했기 때문이다.

거의 건널목 면적 하나를 차지할 만큼 커다란 동체를 지닌 여신이 모습을 드러내자 남자와 병사들이 경악했다.

‘아끼면 먼지만 쌓일 뿐이지.’

기껏 얻은 보상이다. 하물며 얻고 나서도 손해 봤다는 생각이 들 만큼 성가신 일까지 겪어야 했다.

그러니 이번 기회를 통해 과연 얼마나 쓸모 있을지 확인해두고 싶었다.

대성은 등 뒤에 잡귀(雜鬼)처럼 둥둥 떠오른 룬 퀴엘라를 향해 말했다.

“난 내 손 더럽히기 싫다. 네 불꽃이라면 저놈들 방어막도 태워낼 수 있겠지.”

[물론이죠.]

“그럼 가서 태워.”

[여부가 있을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룬 퀴엘라는 음험한 흑심(黑心)을 품은 상태였다.

그녀는 대성이 말한 대로 불꽃을 뿜기 위해 뺨을 도톰하게 부풀렸다. 하지만 목표물은 남자와 병사들이 아니었다.

이 망할 인간! 복수해주마!

그녀는 대성이 한눈을 파는 틈을 타서 그의 등 뒤에서 불꽃을 뿜어낼 작정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지 않는 지금이라면 틀림없이 이 시건방진 인간을 태워죽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샘솟았다!

<판데모니움의 마수들이 룬 퀴엘라를 향해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분개합니다.>

<판데모니움의 마수들이 절대자께 뒤를 돌아보시라고 간청합니다!>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이 성격 파탄 난 여신이 뒤통수를 때릴 거라는 건 진즉에 예상하였으니까.

대성은 여전히 시선은 눈앞의 남자와 병사들에게 고정한 채 입술만 움직였다.

“망혼 해방.”

히야아아악-!

[꺄아아악-!]

룬 퀴엘라 입장에선 돌연 하반신 부근에 시커먼 벌집이 휘몰아치는 광경으로 보였으리라. 그녀는 판데모니움의 문이 열리는 대성의 뒤축과 똑같은 위치에 있었으므로.

그리고 서른 마리의 망혼이 튀어나오는 광경도 벌집에서 벌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보였을 테고.

콕콕콕-!

[저, 저리 꺼지지 못해, 이것들아! 그만둬! 아아악-!]

“이제 알겠지? 네년이 백날 꿍꿍이를 꾸며봤자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아, 알겠습니다! 죄, 죄송, 죄송합니다! 그러니 제발……!]

“알겠으면 하라는 대로 해.”

온몸에 벌떼를 두른 룬 퀴엘라가 울며 겨자 먹기로 뺨을 부풀리며 불길을 쏟아냈다.

화아악-!!

태양이 지상으로 내려앉는 듯한 화마(火魔)가 분출했다. 기세등등하게 아지랑이 방어막을 전개하던 남자와 병사들도 이 순간만큼은 안색이 창백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맙소사!”

“대장님, 이건 도무지-!”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라고 외치려던 어느 병사의 말은 열풍에 휩쓸려 날아갔다.

방어막은 룬 퀴엘라가 뿜어낸 불길과 격돌한 순간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방어막 한 겹에만 의존하던 남자와 병사들의 최후는 말할 것도 없으리라.

‘뭐 하는 놈들이었지?’

가공할 만한 룬 퀴엘라의 화력에 만족하면서도 그런 의문이 솟았다. 생각해 보니 아직 남자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흥미를 느낀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저 남자는 오리할콘으로 무장하기까지 한 사령 병사를 압도했으니까.

플로마리아의 모든 란도족이 남자만큼 강한지, 아니면 남자만 특출난 면이 있는 것인지는 확인이 필요했다.

“수고했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네, 네…… 물론이죠.]

“들어가라.”

[다음에 또 불러주세요…….]

대성은 초췌해진 인상을 하며 허리를 꾸벅 숙이는 룬 퀴엘라를 목걸이 안으로 돌려보냈다.

이 정도로 교육을 했으면 그녀도 학습능력이 없지 않은 이상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리라.

“어디 그럼…….”

남자의 시체 쪽으로 눈길을 이동했다.

잿더미가 된 몸은 밤바람에 나부껴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으나, 다행히 백골 한 덩이는 남아 있었다.

대성은 저걸 <귀안>으로 기억을 들여다볼 매개물로 써먹기로 했다.

‘엔베트 로젠에 대한 정보도 이걸로 캐내면 되겠군.’

아니나 다를까. 티끌만큼 사소한 기억까지 샅샅이 캐낸 끝에 대성은 남자의 정체 및 플로마리아라는 세계의 대략적인 섭리, 그리고 유일 제국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대성이 주목한 건 위업 달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여왕에 대한 부분이 아니었다.

좀 더 은밀하고 깊은,

유일 제국의 금역(禁域).

죽은 남자의 이름은 시제프였다.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한 건 시제프가 기사단장인 아인프리트의 최측근이자 동료이며, 그만큼 제국의 요직(要職)을 담당했던 남자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일부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금역에 대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잘하면 이걸로……?’

고민 하나가 해결되는 순간.

대성은 근원의 수준이 중하 격밖에 안 되는 플로마리아는 쓸모없다… 라는 인식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

“…….”

“대통령, 표정 푸십시오. 누가 보면 우리가 당신을 죽이러 온 줄 알겠습니다.”

청와대 본관 집무실에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대통령과 아인프리트가 대면하고 있었다.

어이없는 광경이지만, 실제로 아인프리트와 그의 병단은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인 게 맞았다.

정문이 뚫려도 그들을 막아설 경비단의 인력은 차고 넘쳤다. 전부 전격 마법에 쓸려나갔다는 게 문제지만.

아인은 그 과정에서 일부러 남겨둔 생존자 한 명을 협박해 지하 벙커에 숨은 대통령을 지상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이후로도 숱한 인명 피해가 벌어진 끝에야, 그만하고 대화로 풀자는 대통령의 제안과 함께 지금의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잔뜩 움츠러든 대통령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목소리를 뱉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아까 제가 선포한 전언은 들으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이 나라, 아니, 이 세계 전역을 저희 유일 제국의 종속국(從屬國)으로 지정할까 합니다.”

“그런 허무맹랑한 짓을 벌이고도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종속국이라뇨. 거절하겠습니다.”

“당신께 의견을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다. 통보죠. 그 정도 절차와 예의는 있어야 하니까요.”

아인프리트는 숨죽이며 웃었다.

“그리고 가만히 있을 것 같냐고요?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쩔 겁니까? 여기, 당신의 왕궁 아닙니까? 왕궁이라면 아까 저희를 막아선 기사단들도 전부 수석급이었겠네요? 그런데 보세요. 다 죽었군요. 저희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고요.”

“…….”

“항복도 후세엔 간혹 미덕으로 전해질 때도 있습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사는 세계는 외적에게 위협받고 있어요.”

게이트의 몬스터. 그리고 몇 시간 전부터 갑자기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상 사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당신네 밑으로 들어가면 그 외적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역시! 정상에 군림하시는 분이라 그런지 현명하시군요.”

“유감스럽게도 인류도 스스로 지킬 힘 정도는 있습니다.”

“엥? 설마 저것들을 그 ‘힘’이라고 말씀하실 생각은 아니겠죠?”

아인이 노골적으로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집무실 문을 가리켰다.

메마른 침을 삼키는 대통령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저 굳게 닫힌 문 너머 이어진 복도엔 참혹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걱정을 담아 말씀드립니다, 대통령. 저런 피라미들에게 국방을 책임져 봤자 왕국의 수명은 10년도 채 가지 못할 겁니다.”

“…….”

“저희의 비호를 받아들이세요. 예, 지도자이신 당신으로서는 자존심은 좀 상하겠죠. 하지만 그깟 자존심 좀 굽힘으로써 만민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면,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딱! 아인프리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옅은 연기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두루마리 한 장이 허공에서 팔랑였다.

아인프리트는 그걸 책상 위로 낚아채더니 대통령을 향해 들이밀었다.

“저희 플로마리아 대륙이 당신들 나라의 종주국이 되겠다는 내용이 적힌 문서입니다. 맨 아래쪽 공란에 서명하시든 국새(國璽)를 찍으시든 좋을 대로 하시면 되겠습니다.”

“…….”

대통령은 텅 빈 눈으로 두루마리를 쳐다보다가…… 이내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외계어가 적힌 내용을 훑어보며 말을 꺼냈다.

“부정 않겠습니다. 당신들의 종족은 우리 인류보다 강합니다.”

찌익-.

종이라기보다는 화장지에 가까운 재질의 두루마리가 대통령의 손아귀 아래서 유연하게 반으로 찢겨나갔다.

두 갈래로 나뉘는 두루마리 너머엔 어느덧 험악하게 찌푸려진 아인프리트의 표정이 보였다.

“그런데 인류에겐, 당신들보다 훨씬 강한 남자가 한 명 있습니다.”

대통령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억지로 웃음을 입가에 그리며 말했다.

그러자 험상궂게 구겨진 아인프리트의 인상이 안타까움으로 변질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당신은 성군(聖君)일 줄 알았는데 실망입니다.”

스릉-!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인프리트의 검집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그 짧은 순간에 죽음을 결심한 대통령은 의연히 두 눈을 감았다.

콰-앙!

난데없이 집무실 문이 박살 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

대통령은 물론, 검을 휘두르려던 아인프리트도 깜짝 놀라 그곳을 보았다.

불에 타죽은 갑옷 병사 두 명이 집무실 안쪽으로 굴러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5초 전까지만 해도 입구에서 보초를 섰던 자들이다.

“그냥 들어가서 얘기만 하겠다는데 더럽게 깐깐하게 구는군.”

대통령은 집무실로 난입한 남자의 얼굴과 목소리를 확인한 순간 눈물이 울컥 치솟을 뻔했다.

그가 방금 두루마리를 찢으며 말했던 강한 남자.

그 남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

반면, 아인프리트는 절명한 부하를 잠시 쳐다보다가 곧 난입한 남자, 대성을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정예병 두 명을 상대했음에도 저 남자는 힘들어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다.

아인프리트가 안면에 음영을 드리운 채 입을 열었다.

“누구냐.”

“그건 알 필요 없고. 너는 그 대신 내 선물이나 알아줬으면 좋겠군.”

휙.

대성이 ‘뭔가’를 아인프리트를 향해 가뿐한 동작으로 던졌다.

기습이 아니라는 걸 빠르게 파악한 아인프리트가 그것을 받았다.

“……?”

백골.

불에 그을린 흔적이 역력하게 남은 누군가의 백골이었다.

아인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이게 뭐지?”

“선물.”

“그러니까 뭐냐고 물었다.”

“네 친구 시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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