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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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처럼 새카맣게 된 백골을 내려다보는 아인프리트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
이게 시제프라고?
…….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아인프리트는 실소를 금치 못하며 고래를 천천히 저었다.
그는 허리를 살짝 숙이더니 볼링공을 다루듯 백골을 정면으로 굴렸다.
데구르르-. 탁.
백골은 대성의 발 앞에서 멈췄다.
여전히 미소를 풀지 않은 채 아인프리트는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다.
“네놈이 시제프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따위 조잡한 거짓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
“거짓말 아닌데.”
“시제프는 강해. 어쩌면 나보다 강할지도 모르지. 녀석은 우리 기사단의 돌격대장이야. 적어도 마도(魔道)에 한해선 시제프와 견줄 수 있는 자는 없어.”
“시제프의 왼쪽 골반에는 두 갈래의 흉터가 새겨져 있다.”
“……뭐?”
아인프리트의 표정에 떠오른 웃음이 순식간에 싹 지워졌다.
대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남자로 태어나 메이지(Mage)가 아닌 검사가 되고 싶었던 13세의 시제프는 너의 재능을 시기했다. 동부의 시골 촌뜨기 출신인 네놈을 인정할 수 없었지. 그래서 싸움을 걸었다.”
“기, 기다려. 지금 무슨-.”
“시제프는 네게 패배했다. 골반의 흉터는 그때 생긴 거지. 하지만 오히려 그 싸움을 계기로 너희 둘의 사이는 돈독해졌고, 시제프는 아직도 네가 자신의 골반에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긴 것에 미안해한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러나 일부러 내색하지 않을 뿐이지.”
아인프리트의 머릿속에서 혼란이 차올랐다. 그래서 대성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는 너무나 희미하게 들려왔다.
어떻게 저 남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 그건 자신과 시제프, 둘만의 비밀이었다. 함께 전란을 헤치고 등을 맡기는 동료가 아닌 이상, 자존심 높은 시제프는 결코 골반의 상처를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파르르 떨리는 아인프리트의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대성의 눈이 선연한 핏빛으로 번뜩였다. 집무실의 공기가 겨울이 찾아온 것처럼 차가워졌다.
“어떻게 알았을 것 같나?”
“…….”
“내 선물을 거부해서 섭섭하군. 뭐, 싫으면 받지 않아도 돼.”
-탁. 바닥에 놓인 백골 위로 대성의 발이 올라갔다.
눈꺼풀이 찢어질 듯이 아인프리트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리고…….
콰직-!
백골이 사정없이 뭉개지는 것과 동시에, 아인프리트의 눈앞에는 이를 드러내며 웃는 시제프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
그리고 그의 두 다리는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지축을 박차고 있었다.
지옥 밑바닥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듯한 노성(怒聲)이, 절규가, 청와대 집무실을 가득히 채웠다.
이미 검집에서 뽑혀 나온 상태였던 검날이 귀곡성처럼 서슬 퍼런 울음을 흘리며 대성을 향해 내뻗어졌다.
본래 마검(魔劍)을 다루는 아인프리트는 구태여 근접전을 펼치지 않더라도 원거리 전격을 날리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그가 이렇게 거리를 좁히는 이유는, 확실하게 눈앞에 있는 친구의 원수를 찔러 죽이기 위해서였다.
일부러 유도한 반응이다.
“망혼 해방.”
대성의 어깨 넘어 검은 영혼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망혼들은 이전처럼 얼굴만 똑 떼놓은 형태와는 달랐다. 확실하게 상반신과 하반신이 존재하는 모습으로 판데모니움을 뚫고 나와, 아인프리트를 붙들었다.
쿵-!
“으, 극……!”
마검이 바닥을 미끄러지며 나뒹굴었다.
마수들에게 사지가 붙들린 아인프리트는 콧잔등부터 바닥에 처박혔다. 코뼈가 부러지는 고통이 뇌를 찌르르 울렸다.
하지만 분노가 아픔을 지워냈다. 아인프리트는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흘릴 듯한 눈으로 대성을 올려다보았다.
대성은 바닥에 떨어진 아인프리트의 검을 주워 들더니 입을 열었다.
“검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군.”
“죽여버리겠어! 힐드 신께 맹세코 너를 죽여버릴 테다!”
“네 손에 죽어간 자들의 친구와 부모도 너와 같은 말을 하겠지.”
집무실과 이어진 복도에서 발소리가 요란스레 울렸다.
아인프리트가 끌고 온 병사들이 소음을 듣고 급히 달려온 것이다.
집무실 안쪽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본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당황했다.
“마검 힐드. 너희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땄다고 했나? 한번 쓰고 버리기엔 나쁘지 않은 검이야.”
한 손에 힐드를 쥔 대성이 진각(震脚)을 밟으며 포탄처럼 내달렸다.
그러자 병사들이 다급하게 아지랑이 방어막을 전개했지만-.
푸-욱!
앞으로 내질러진 힐드의 칼날은 방어막을 지나가더니 그대로 최전방에 있던 병사의 목을 힘차게 꿰뚫었다.
‘같은 마도 무구끼리는 방어막을 상쇄할 수 있다.’
아지랑이 방어막은 마검 힐드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이 또한 시제프의 기억 속에서 알게 된 정보다.
물론 근원의 파편을 장착한 업화대검이라면 그런 규칙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버리겠지만…….
‘이거면 충분해.’
지금은 별로 전력을 다하고픈 기분이 들지 않았다.
파지직-!
전우의 죽음에 경악한 병사들이 엉겁결에 전격 마법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캐스팅(Casting)을 마치는 데에는 3초가 소요되었고, 대성을 앞에 두고 3초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언뜻 투박하면서도 유려하게 횡선을 그으며 휘둘러지는 칼날이 병사들의 목숨을 우후죽순으로 앗아갔다.
“그만둬! 그만, 그만둬……!”
마수들의 손에 짓눌려 꼼짝도 못 하게 된 아인프리트가 비명을 질렀다.
플로마리아의 영민을 지키는 검이다.
신의 축복을 받고, 제국을 위기로부터 구원할 것을 약속받은 검이다.
그런데 그 검이 지금은 병사들을 몰살하고 있다. 아름다운 은빛의 칼날이 지금은 같은 전우의 피로 얼룩지고 있다.
대성의 무위는 압도적이었다.
그는 플로마리아의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르는 대신 베고 찌르는 용도로만 마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병사들이 지푸라기처럼 허무하게 픽픽 죽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인프리트가 직접 이끈 정예 병단이 남김없이 절명했다.
대성이 피로 흠뻑 젖은 모습으로 아인프리트의 앞에 섰다.
자포자기한 상태였던 아인프리트는 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오열하고 있었다.
“너를 여기서 죽이진 않겠다.”
콱-!
대성은 바닥에 마검 힐드를 세차게 쑤셔 박더니 그리 말했다.
“복수하고 싶겠지. 복수해라. 말리진 않으마. 나도 이대로 허무하게 너를 죽일 마음은 없으니.”
“…….”
“미국이란 나라의 남서부에 황무지가 하나 있다. 어딘지 모르지는 않을 거다. 마침 네놈들이 모시는 여왕, 엔베트 로젠이 사는 왕궁이 그곳 근처에 있더군.”
플로마리아의 핵심 지역은 주로 서양에 많이 밀집되어 있었다.
그중 제국을 통치하는 여왕, 엔베트 로젠의 왕궁은 뉴멕시코주에 위치한다.
통찰안의 ‘지도’ 열람 기능 덕분에,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대략적인 지리는 파악이 가능했다.
“내일 그곳에서 제대로 된 결전을 치르자. 군대를 준비해라. 할 수 있는 모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어라. 우리가 거기로 갈 테니.”
정신없이 우는 와중에도 아인프리트는 똑똑히 대성의 말을 경청했다.
여기서 의식을 놔버렸다가는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나 아까 말한 대로, 대성은 당장은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팍-!
두꺼운 손날이 아인프리트의 목덜미를 강타했다. 아인프리트는 그대로 의식이 새카맣게 물들어 기절했다.
***
쏴아아-.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폭우가 대지를 흙탕물로 만들었다.
의식을 잃은 아인프리트는 질척한 땅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뉴멕시코주 어딘가의 외딴곳.
“어! 저기!”
“기사단장님!”
인근을 돌아다니던 제국의 정찰병들이 아인프리트를 발견하곤 급히 달려왔다.
그들은 몸이 싸늘하게 식은 기사단장을 서둘러 부축하고는 도심지로 향했다.
고풍스러운 성채 하나가 뉴멕시코의 마천루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현실과 환상, 그 어딘가에 끼인 듯한 기괴하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
의식이 점점 돌아오기 시작한 아인프리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천장에 안개가 흐르는 것처럼 시야가 흐릿흐릿하다.
“아인!”
애처로운 기색을 띤 가녀린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팔을 매만졌다.
아인프리트는 신음성을 흘리며 목소리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아인! 정신이 좀 들어?! 뭐라 말 좀 해봐!”
“소, 소니아……?”
“아! 힐드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아인프리트와 똑같이 진한 금발을 생머리로 내린 여인이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이가 봤다면 둘이 남매라고 오인할 정도로 비슷하다.
하지만 둘은 연인이었다. 그것도 이미 약혼까지 한.
“소, 소니아, 여, 여기는…….”
“제국 의무실이야. 정찰병들이 근처에 쓰러진 널 발견하고 여기로 데려왔어.”
“……그렇구나.”
“아인, 몸은 좀 어때? 피멍이 좀 든 것 말고는 심각한 상처는 없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일…….”
그 순간 아인프리트가 가늘었던 눈을 부릅떴다.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소니아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기억났다.
모든 게 기억났다.
대통령을 만난 것부터 해서 시제프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일 놈이 했던 말까지 전부!
“아……!”
“아, 아인?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시…… 시제프가…….”
“시제프? 시제프가 왜-.”
하지만 소니아는 그 이상 뭐라 물을 수도, 하던 말을 이어갈 수도 없었다.
굵은 눈물 줄기가 아인프리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시제프의 이름. 그리고 아인프리트의 눈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소니아는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그, 그럴 리가 없어. 시제프가……. 정말로 시제프가……?”
부고를 전해 들은 소니아마저 급기야 입을 틀어막으며 눈물을 흘렸다.
아인프리트, 소니아, 시제프. 이 셋은 약관을 맞이하기 이전부터 관계를 쭉 이어온 소꿉친구다. 그것은 그들이 신탁(神託)을 받아 제국으로 들어간 뒤에도 변치 않는 관계였다.
그렇기에 시제프의 죽음은 소니아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
아인프리트는 통곡하는 그녀의 얼굴을 눈물 젖은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어느 날 갑자기, 천상의 침공을 받은 플로마리아 대륙은 멸망했다.
그렇게 아인프리트는 소니아와 영원히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차가운 얼음 속에 갇혀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연인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소니아밖에 없다.
시제프도 죽은 지금, 내 곁에는 정말로 그녀밖에 남지 않았다.
와락.
아인프리트가 눈물을 흘리며 소니아를 품에 끌어안았다. 소니아 또한 자연스레 아인프리트의 등허리를 감쌌다.
많은 의미가 담긴 포옹이었다.
***
“처음에 제국이 이곳에서 태동(胎動)했을 때는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어.”
“그건 나랑 시제프도 마찬가지야. 눈을 뜨니 웬 모르는 풍경이 펼쳐져 있더라.”
“엔베트 폐하께서도 많이 당황하셨지. 그래도 그분이 얼른 상황을 파악해주신 덕에 제국도 그만큼 빨리 안정을 되찾았던 것 같아.”
“먼 타지에 떨어진 나에게 의념(意念)을 보내셨더라. 어디에 있든, 그 땅의 지도자를 굴복시키라고.”
“……그분답지 않은 강경책이네. 뭐,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만.”
유일 제국의 왕궁.
아인프리트와 소니아는 금색 융단이 깔린 넓은 복도를 걸으며, 밀린 이야기를 나눴다.
소니아는 아인프리트가 이 짧은 몇 시간 동안 한국에서 겪었던 일들을 전부 알게 되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결전을 치르겠다는 말이지.”
그리고 결정적인 대성의 선언을 들은 소니아는 표정을 굳혔다.
곧 복도의 끝자락까지 걸어가자 바깥과 이어진 왕궁 테라스에 도달했다.
“이것 좀 봐, 아인.”
“텅텅 비었네. 공기도 혼탁하고.”
“우리들의 새로운 터전을 꾸려나갈 곳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말끝을 살짝 흐린 소니아가 애써 우울함을 떨치며 기지개를 쭉 켰다.
햇볕 아래서 산책하는 소녀처럼.
“정말 아름답지 않아?”
플로마리아 중앙대륙과 겹쳐진 뉴멕시코주는 그야말로 반세기는 후퇴한 것처럼 황폐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수림이 뒤섞인 빌딩은 철골이 그대로 드러나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했고,
아스팔트가 뒤엎어진 거리 위엔 불에 타죽은 시체가 그득그득 쌓였다.
“앞으로 이 땅은 우리 관할 아래 두겠다고 하니까 죽일 듯이 달려들더라.”
“여기도 그래? 내가 있던 곳도 똑같던데. 다들 납득 못 하는 눈치더군.”
“왜 이 세계 영민들은 우리 뜻을 이해해주지 못할까? 약하니까 우리가 지켜주겠다는 건데.”
“약해서 그래. 약한 놈들은 보통 머리가 나쁘잖아. 그런 놈들까지 우리가 이끌어줄 필요는 없다고.”
이들은 모르고 있겠지만…….
뉴멕시코주가 속한 미국은 이미 최근에 대대적인 게이트 프렉쳐 사태를 겪고 심각한 피해를 맞이한 상태였다.
그렇게 모든 국방 시스템이 마비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유일 제국까지 들이닥쳤으니 어쩌겠는가.
제아무리 사냥꾼 협회와 정부가 고군분투해도, 마법을 다루는 전투 종족인 란도족에게서 버텨낼 재간은 없었다.
결국, 불과 두 시간 만에 뉴멕시코주는 유일 제국에게 점령당하고 만 것이다.
소니아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잘 되겠지? 내일 결전, 우리가 무사히 승리할 수 있겠지?”
“…….”
아인프리트는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의아한 눈빛으로 소니아가 그의 옆얼굴을 돌아봄과 동시에, 아인프리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말했다.
“소니아, 내 말 잘 들어.”
***
-다른 놈들이라면 모를까, 그놈은 달라. 그놈은…… 시제프와 내 병사들을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죽일 정도로 강해. 그놈이 직접 이끄는 군대라면 우리도 아마 승리를 장담 못 할 거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여기서 북쪽으로 쭉 가면 하토크 백작령이 나와. 내일 새벽, 너만 몰래 그곳으로 떠나. 제국도 아직 어수선할 테니 들킬 염려는 없을 거야.
-뭐? 지금 나보고 도망치라고?
-도망치라는 게 아니야. 만약 우리가 실패하면…一 너라도 살아남아서 하토크 백작을 설득해. 그리고 우리들의 설욕을 갚아줘.
-아직 전쟁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그런 말 하기야? 너답지 않아, 아인.
-너는 폐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힐드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란도족이야. 그런데 너마저 어떻게 돼버리면, 그때는 영민들은 누굴 믿고 의지하겠어?
-…….
-제국을 넘어, 플로마리아 대륙 전체를 위해 내린 결정이야. 제발 이해해줘, 소니아.
-……알았어.
그 뒤로는,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인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잡담이 이어졌다.
대성은 어깨 부근을 흘겨보았다. 거기엔 정령 한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입만 존재하는 동그란 동체에 날개가 달린 해괴망측한 외양을 지닌 이 정령의 정체는 소리의 정령, ‘곤’.
다름 아닌, 빙결의 정령 아쿠 때와 마찬가지로 대성이 상점 창에서 무료로 소환권을 구매한 정령이었다.
《정령 소환: 음파(音波)의 곤》
* 소리의 정령, ‘곤’을 한시적으로 소환합니다.
* 소환된 ‘곤’은 종족과 거리에 상관없이 원하는 대상의 목소리를 구매자께 들려드립니다.
* 소리를 듣길 원하는 대상에게 ‘곤’의 숨결을 불어넣으십시오.
* 대상이 사망하거나 5일의 시간이 지날 경우, 소리는 사라집니다.
* 한번 구매한 ‘정령 소환’ 아이템은 재구매하실 수 없습니다.
아인프리트가 청와대 집무실에서 의식을 잃었을 때, 대성은 그의 귓가에 곤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덕분에 아인프리트가 어디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전부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기 위해 심어둔 장치인데, 꽤 나쁘지 않은 정보가 수중에 들어왔다.
“하토크 백작령이라…….”
백작령의 위치는 통찰안으로 ‘지도’만 열람하면 바로 알아낼 수 있다.
그녀가 백작령으로 떠나는 건 내일 새벽이라고 했으니 몇 시간 남지 않았다.
‘지금부터 슬슬 준비해야겠군.’
대성은 충분히 아인프리트를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적을 살려 보낸다는, 평소의 그라면 절대로 내리지 않았을 판단.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틀 뒤를 대비하려면 아인프리트는 살려놔야 해.’
아인프리트, 그는 인류의 힘이 되어줄 중요한 열쇠니까.
여러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