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28화 (128/180)

#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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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례 더 치료받은 아인프리트는 말끔한 모습으로 알현실을 향했다.

알현실 입구를 막아선 보초병들이 그를 보더니 예를 갖추고 문을 열어줬다.

무거운 걸음을 몇 발짝 옮기기도 잠시.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위대한 여제(女帝)시여.”

아인프리트는 한쪽 무릎을 꿇은 뒤 옥좌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높다란 곳에 세워진 옥좌 위에는 선홍색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미인이 앉아 있었다.

플로마리아 유일 제국을 통치하는 여제이자 성녀(聖女), 엔베트 로젠.

아인프리트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입술만 움직였다.

“얼어붙은 시간으로부터 생환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모두가 축하할 일이지. 나뿐만이 아닌, 제국 전체가 얼어붙은 시간 속에 갇혀 있었으니 말이야.”

어느 날 갑자기 천상의 침공을 받은 란도족은 의식만 깨어있는 채 억겁 같은 세월 동안 얼음 속에 갇혀야만 했다.

그들은 그 고통의 세월을 ‘얼어붙은 시간’이라고 불렀다.

붉은 보석으로 한껏 장식된 지팡이를 어루만지며 엔베트 로젠이 말했다.

“나의 전언을 받았으나 임무에는 실패했다고 들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설명하거라.”

“그것이…….”

말끝이 늘어지는 아인프리트의 목소리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서려 있었다, 분노, 치욕, 후회 등.

면목이 없다는 듯 더 깊이 고개를 숙인 채, 아인프리트는 한국에서 겪었던 일들을 전부 설명했다.

“결전이라…….”

엔베트 로젠이 솜털 하나 없이 매끄러운 턱을 매만졌다.

“낭패로군. 어찌 된 것인지 원인은 알 수 없어도 좌우지간 대륙이 다시 발돋움할 기회를 얻었거늘, 그것이 도로 물거품이 되는 건 아닐는지.”

“…….”

아인프리트는 무심코 숙이고 있었던 고개를 위로 들뻔했다.

여제가 하는 말의 뉘앙스가 꼭, 자신을 신임하지 못한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여제시여, 제겐 승리를 거머쥘 자신이 있습니다. 제발 믿어주십시오. 내일 이 시간, 여제께 꼭 그놈의 목을 갖다 바치겠나이다.”

“친구의 죽음도 막지 못한 그대 말을 내가 어찌 믿을까. 그것도 단 한 명의 적에게 말이지.”

“이제는 아니게 되었으나, 저는 신탁을 받은 뒤로 500년간 무패(無敗)의 전적을 이어왔습니다.”

“무패의 명장이었기에 더 걱정이 드는 것이지.”

아인프리트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여제를 올려다보았다.

여제, 엔베트 로젠은 권태로운 표정으로 한숨을 후우, 흘리며 턱을 괴었다. 5천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살아왔다고 전해지건만 그녀는 막 성인식을 치른 것처럼 젊고 매혹적이었다.

“그곳에서의 패배는 상당히 쓰라렸겠지. 심지어 그대의 친구인 시제프마저 떠나보내야 했던 완패 중의 완패였다.”

“…….”

“첫 경험이란 언제나 뼛속 깊은 곳까지 각인되는 법. 하물며 그 경험이 전투에서의 패배와 친구의 죽음이니……. 한 번도 진다는 걸 모르고 살아왔던 그대가 과연 그 충격을 뒤로하고 온전히 내일 결전에 임할 수 있을까?”

임할 수 있다고 대답해야 한다. 여기선 그렇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자명하다. 여제의 말이 옳으니까.

아무리 번지르르한 거짓말을 하려 해도,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본인이 먼저 인정해버린 순간 말문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대는 당분간 휴식하거라. 내일 결전에 대해선 다른 영지의 영주들에게 원호를 요청할 것이니.”

이만 물러가 보라고 엔베트 로젠이 손을 휘저으려던 찰나.

스릉-!

아인프리트의 허리춤에 걸린 검집에서 마검 힐드가 뽑혀 나왔다. 칼을 차고 여제를 알현할 수 있는 남자는 제국 내에서 그뿐이었다.

그는 그만한 자격을 가진 남자였고, 그렇기에 자부심도 드높았다.

“……!”

칼날이 검집을 미끄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알현실의 경비병들이 창을 다잡고 그를 겨누려 했다.

서걱-!

아인프리트가 마검으로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자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순백을 기조로 꾸며진 알현실 내부에 핏빛이 살짝 섞였다.

“여제 앞에서 감히 피를 보인 무례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아인프리트가 투레질하는 야생마처럼 육중한 숨을 토해내며 덧붙였다.

“엄지가 없으면 검을 쥐기 어렵기에…… 소지(小指)로 대신하겠나이다.”

“…….”

“내일 있을 결전에서 패배할 시엔, 엄지뿐만 아니라 제 목을 바치겠습니다.”

투구에 가려져 보이진 않으나, 그 광경을 본 경비병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잔뜩 질려 있었다.

오직 손가락을 자른 아인프리트와 그런 그를 은근한 미소를 지은 채 내려다보는 여제만이 당황치 않았다.

“그만한 각오를 보이니 나도 조금은 신뢰가 싹트는군.”

“출전을 허락해주시는 겁니까?”

아인프리트가 그리 묻자, 여제는 옥좌에서 일어나더니 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천천히 내려왔다.

이내 그녀가 아인프리트 앞에 서자, 드레스의 치맛자락 끝이 대리석 바닥을 피로 물들이는 새끼손가락을 덮었다.

결사의 의지를 받아주겠다는 것처럼.

“국운이 그대의 손에 달렸군.”

여제의 부드러운 손길이 아인프리트의 뺨을 적신 식은땀을 훔쳤다.

여제가 웃으면서 말했다.

“따라오거라. 내일 승리하려면 우선 신께 가서 기도부터 드려야지.”

***

그림자로 뒤덮인 왕궁 뒤편은 한 줌의 시린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았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소니아는 손을 비비며 숨을 후, 불었다. 사시사철이 따사로웠던 플로마리아와 달리, 10월의 지구는 가을임에도 겨울처럼 쌀쌀했다.

“소니아.”

곧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추위에 덜덜 떨던 소니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으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아인? 늦었네. 기다리느라-.”

좀처럼 반겨주지 않았던 달빛이 이번만큼은 아스라이 왕궁 뒤편을 스쳤다.

그래서 소니아는 어둠에 가려졌던 아인프리트의 얼굴을 똑똑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아, 아인, 너 얼굴이……?”

“…….”

소니아가 헛숨을 삼키며 어찌 된 일이냐는 눈빛을 보냈으나 아인프리트는 침묵을 지켰다.

자세한 얘기를 해주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으므로.

“소니아, 이제 가야 해.”

“하지만…….”

가벼운 입맞춤이 소니아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아인이 어떤 모습을 하든 사랑스럽게 받아들였다.

입술과 입술이 떨어지고, 촉촉한 눈망울이 아인프리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런 그녀의 뺨을 상냥스레 쓰다듬으며 아인은 말했다.

“새 시대를 맞이하면 결혼식을 올리자. 이 세계는 바다가 참 많은 것 같아. 노을빛으로 물드는 해안가에 집을 장만하면 아주 행복할 거야.”

소니아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움을 삼킨 아인프리트는 품에 지니고 있던 두루마리를 쭉 찢었다.

소환의 서.

작은 초롱불이 두루마리를 전부 태움과 동시에 작은 그리폰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다고는 해도 성인 여성 한 명은 거뜬히 태우고도 남을 덩치였다.

“갈게.”

“나중에 보자.”

두 남녀는 작별의 인사로 재회를 약속했다. 그리폰의 등에 올라타며 소니아가 손을 흔들었다.

아인프리트와 달리 아쉬움을 버틸 자신이 없었던 소니아는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다섯 번쯤 반복하니 그녀는 어느덧 연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창천(蒼天)에 다다랐다.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하토크 백작에게 지원군을 보내라고 말해야 해.’

언제까지고 계속 짧은 이별에 마음 졸이는 여인이 될 순 없는 노릇.

구름을 가로지르며, 소니아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하토크 백작이라면 기꺼이-.’

그러나 생각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쿠르릉-!

키히잉-?!

어디선가 느닷없이 날아온 백색 광선 한 줄기가 그리폰의 정수리를 뚫고 지나갔다.

“꺅……?!”

대가리가 그대로 사라진 그리폰이 빠른 속도로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붙잡을 것이 그리폰밖에 없었던 소니아는 필사적으로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지표면으로부터 불과 100m도 안 남았을 즈음에 그녀는 마법을 펼쳐 급조한 방어막을 온몸에 둘렀다.

쿵-!

“컥……?!”

대지와 충돌한 순간 어마어마한 충격이 짓쳐왔다. 방어막이고 뭐고 없었던 그리폰은 아예 살점이 통째로 터졌다.

갈빗대가 어긋났다. 떨어지면서 무릎이 역방향으로 꺾여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끔찍한 고통에 소니아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바닥을 기었다.

“뭐, 뭐야……?”

벼락은 아니었다. 몇 시간 전에 비가 오기는 했으나 잠깐 지나가는 소낙비였다. 실제로 지금도 밤하늘에선 벼락이 치지 않았다.

몸은 격통에 비명을 지르고 머릿속은 의문과 혼돈으로 차오르던 가운데.

찌걱-. 찌걱-.

까드득-. 까득-.

정체를 유추하기 어려운 소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흠칫 놀란 소니아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소리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같은 찰나에 달이 구름을 벗어났다. 청아한 달빛이 인근을 잠식한 어둠을 걷어냈다.

“…….”

어둠이 사라지고 드러난 광경을 본 소니아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까드득!

지저분하게 돌출된 송곳니가 딱딱한 두개골을 으깼다. 썩어 문드러진 두 손이 뱃속을 뒤적거렸다. 악취 나는 진물이 핏물과 뒤엉켜 바닥에 떨어졌다.

소니아가 목소리를 떨며 중얼거렸다.

“구, 구울…….”

아니.

구울과는 조금 다르다. 구울은 저렇게 신장이 길쭉하지 않다. 구울은 갑옷을 입지 않고 알몸으로 돌아다닌다.

불가사의한 괴물들이 길가에 즐비한 시체를 뜯어먹고 있었다.

뉴멕시코주에 원래 살던 지구인은 전부 제국의 지하 수용소에 가둬놓았다.

말인즉슨, 저 시체는 플로마리아의 영민이라는 의미.

하나부터 열까지 종잡을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친 소니아는 사색이 되었다.

공포가 격통을 압도하기 시작한 그때였다.

“목격자는 제거해야겠지.”

기절할 뻔한 걸 겨우 참아낸 소니아가 소리가 들린 뒤쪽을 보았다.

철그럭-. 철그럭-.

가시 왕관을 쓴 해골 기사.

사령단장, 돌프가 전류가 흐르는 장창을 쥔 채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오리할콘으로 코팅한 무기. 경우에 따라선 광선을 쏘아내는 것도 가능하다.

본래 말단 병사가 사용했으나 아득한 고도에서 비행하는 그리폰을 요격(邀擊)하려면 그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흑……? 흐, 흐윽……?”

“울지 마라. 너는 목격자가 아니니 죽을 필요가 없다.”

암흑 사이로 수십 기의 사령 병사가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딱딱, 딱딱, 이빨을 거칠게 부딪치며 소니아를 노려보았다.

“주군께 바쳐야 할 제물이지.”

창백한 뺨을 타고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소니아는 자신이 땅이 아니라 지옥에 떨어진 게 아닐까 생각했다.

***

뉴멕시코 도시 외곽의 너른 황무지에 2만에 족히 달하는 군단이 집결했다.

가지런히 오와 열을 맞춘 병사들 사이에서 비장한 전운(戰雲)이 감돌았다.

“…….”

선봉에 선 부관은 침을 삼키며 옆에 있는 지휘관, 아인프리트를 흘겨보았다.

타인의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순박한 인상의 금발 청년은 거기에 없었다.

산양의 것을 연상케 하는 뿔이 관자놀이에 돋아있었다. 흰자는 붉게 충혈되었고 푸르렀던 눈동자는 탁한 잿빛으로 변했다.

적당할 만큼 근육이 붙었던 몸도 지금은 바윗돌처럼 크게 부풀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지?’

부관만이 아니라 후위에 늘어선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떠올린 의문이었으나, 그 누구도 함부로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괴물 같은 외양 탓도 있지만, 아인프리트의 전신에서 몰아치는 살기가 보는 이의 성대를 옥죄는 듯했기 때문이다.

대신 부관은 다른 질문을 꺼냈다.

“여기서 왕도(王都)까지는 100섹트밖에 되지 않습니다. 가깝습니다.”

“그게 어쨌단 말이지?”

“위치가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그놈이 직접 선정한 장소 아닙니까. 무슨 꿍꿍이가 있진 않을지 걱정이 들어서…….”

“괜한 걱정이로군, 부관. 오히려 여기가 아니면 안 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곧 알게 될 거다.”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관이 미간을 좁히려던 그때였다.

저 멀리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제일 먼저 발견한 자는 아인프리트였다.

뒤이어 부관이 남자를 눈에 담고는 표정을 굳혔고, 연이어 병사들이 장병기를 다시금 세게 움켜쥐었다.

그 남자는 대성이었다.

‘적의 병력부터 가늠해야 한다.’

기사단에서 추릴 수 있는 모든 병사를 추려냈다. 그 수가 2만이다.

하나, 적은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군세를 끌고 왔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2만보다 더 많든 적든, 저 남자가 직접 이끄는 군단이라면 지금까지 보았던 피라미들과는 질적으로 다를 터.

“응?”

그러나 직후, 아인프리트를 비롯한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입에서 그런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성이 걸음을 옮겨 거리가 좁아지는 데도,

경계하던 ‘군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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