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30화 (130/180)

#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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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폐허가 된 뉴멕시코 도심지에는 허름한 막사가 가득했다.

전부 지구로 전이한 란도족이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급히 세운 거주지이다.

플로마리아 대륙이 지구에 동화되었다 해서, 모든 건축물 하나하나까지 정착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동화된 건 왕궁과 영지 등 대륙에서 핵심적인 지형뿐.

영민들이 살던 주택은 대개 지구로 전이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휴! 이 정도면 뭐, 비바람을 피하는 데는 문제 없겠는걸?”

“바닥이 좀 딱딱하긴 하지만 그래도 잘 곳을 마련했다는 게 어디야.”

“곧 폐하께서 제대로 된 집을 나눠주시겠지. 그때까지만 참자고.”

“난 당분간 절대 안 자. 한 번 잠들었다가 또 영원히 못 깨면 어떡해.”

영민들 사이에서 불평불만의 목소리는 오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기뻐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은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한 번 죽었다가 얼마 전 살아난 자들이니까.

도로 목숨을 건졌는데 그까짓 집 좀 잃으면 어떤가. 목숨이 우선인 건 어떤 차원에서나 마찬가지다.

영민들이 화창하게 웃으며 재출발을 꿈꾸기를 한창일 때-.

크오오오-!!

갑자기 저 멀리서 괴성이 들려왔다.

그 괴성이 드래곤의 포효와 매우 흡사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란도족은 없었다.

“……?!”

“이, 이게 뭔 소리야?!”

갑자기 들려온 드래곤의 포효가 단번에 영민들의 얼굴에서 웃음을 지워냈다.

소스라쳐서 주변을 둘러보던 영민 중 하나가 하늘 저편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좀 봐!”

“오, 세상에!”

“힐드 신이시여-!”

아니나 다를까. 진짜로 드래곤이 왕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도 용족(龍族) 중에서 최상위 포식자로 알려진 블랙 드래곤!

많은 이가 그리던 꽃잎 날리던 미래가 순식간에 불에 타서 사라졌다.

드래곤의 난입에 경악한 영민들이 막사 건설 작업을 내팽개치고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이런 빌어먹을! 이 세계에도 드래곤이 있었나?!”

“아인프리트 단장님의 부대가 외곽으로 출정하시지 않았나?! 근데 드래곤이 왕도까지 쳐들어온다고?”

“전후 사정은 나중에 파악해! 영민들의 안전이 우선이다! 가서 막아-!”

왕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주둔 병력이 소란을 듣고 황급히 뛰쳐 나왔다.

하지만 하늘 높이 활공(滑空)하는 블랙 드래곤을 멀뚱멀뚱 올려다보며 난색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보다 못한 중앙구역의 사령관, ‘호버룬’이 성곽을 돌아보며 고함쳤다.

“발리스타랑 불화살로 저것을-.”

그러나 호버룬은 명령을 마칠 수 없었다.

블랙 드래곤에서 두 개의 인영이 뛰어내렸기 때문이다.

한 명은 처음 보는, 지구인으로 추정되는 백발의 남자였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아, 아인프리트 단장님?”

당황한 호버룬이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주 잠깐은, 드래곤을 끌고 나타난 것이 아인프리트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라는 건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눈이 풀리셨어…….’

신경 회로 어딘가가 끊긴 것만 같은 저 흐리멍덩한 동공.

그리고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심상찮은 분위기까지.

어떡하지? 막아야 하나? 호버룬이 판단을 망설이던 그때.

스릉-.

마검이 검집을 스치는 소리가 아인프리트의 허리에서 울려 퍼졌다.

호버룬의 망설임도 거기서 끝났다.

“가서 막아라!”

“예, 예……? 하지만…….”

사령관의 지시를 들은 병사들이 난감해하는 반응을 보였다.

철벅!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딘 아인프리트의 발이 바닥에 고인 흙탕물을 밟았다.

섬뜩하게 빛나는 검광(劍光)을 본 호버룬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멍청한 놈들! 저걸 보고도 모르겠느냐! 저건 너희들이 아는 기사단장이 아니다! 가서 막아!”

“예, 예!”

그제야 병사들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후다닥 뛰쳐나갔다.

그 순간, 혼탁한 기운이 서렸던 아인프리트의 두 눈이 요사스레 발광했다.

-가는 도중 방해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죽여라.-

<지배>의 권능으로 입력한 명령이 침잠된 그의 의식에서 발동했다.

마검 힐드를 치켜든 아인프리트의 입술 사이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명에, 따릅니다.”

서걱-!

마검이 허공에 아름다운 횡선을 그리자, 병사들의 끔찍한 절규와 선혈이 뒤따른다.

“끄아아아악-!!”

“기, 기사단장님이 미치셨다!”

상황이 이쯤 되니 병사들도 아인프리트를 완벽히 적으로 인식했다.

그들은 무너진 전열을 빠르게 가다듬고 곧바로 아인프리트를 에워쌌다.

“우아아아-!!”

그리고 함성과 함께 창칼을 내지르며 쇄도했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쇠꼬챙이를 만들 작정으로.

물론 가만히 당해줄 아인프리트는 아니었다.

“명에, 따릅니다.”

기계적으로 같은 말만 반복하며 마검 힐드를 커다란 반경으로 휘둘렀다.

캉-!

사방에서 쏟아지던 창칼의 세례 중 일부는 쳐냈지만, 일부는 그러지 못했다.

푹, 푸푹-!

예기를 잔뜩 머금은 날이 아인프리트의 사지에 깊숙이 박혔다.

급소는 아슬아슬하게 피했으나 상식적으로는 몸을 가누지 못할 중상이다.

상식적으로는.

서걱-!

“끄, 끄으으…….”

하지만 아인프리트의 현 상태는 명백히 비상식적이었다.

목에 실선이 그어지고 안면이 절삭 당한 병사들이 피거품을 물며 고꾸라졌다.

명령은 ‘죽어도’ 수행한다. 설령 칼을 휘두를 두 팔이 날붙이에 관통당해도.

그것이 <지배>의 권능이 가진 힘.

아인프리트는 옷깃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것처럼 고통을 가볍게 무시하며 학살을 이어나갔다.

“히, 힉…….”

온몸에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폭주하는 기사단장을 본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야 말았다.

그건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영민들도 마찬가지.

‘대륙의 영웅’이라는 별호와 함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만민의 존경을 샀던 그가 제국의 병사를 척살하는 모습은 악몽이 따로 없었다.

“힐드 신이시여.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호버룬마저 망연자실하여 검을 쥔 손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푹-!

동시에 거대한 불꽃의 대검이 수직으로 떨어져 그의 몸을 반 토막 냈다.

호버룬이 얼이 빠져있는 사이 대성이 냉큼 그의 목숨을 취한 것이다.

‘왕성은 최고등급의 방어막이 삼중으로 설치되어 있다고 했지.’

대성은 검신에 묻은 피와 살점을 털어내며 전방에 세워진 거성을 주시했다.

그의 신경을 거스르던 아지랑이 방어막이 이제는 성채를 감싸고 있었다.

‘업화대검으로 일일이 잘라낼 시간이 아깝다. 룬 퀴엘라의 불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 그렇다고 섬멸룡의 광살포로 뚫으려고 했다가는 성 자체가 날아가. 그러면 엔베트 로젠도 죽고 만다.’

목적을 달성하려면 엔베트 로젠은 반드시 생존해야 했다.

대성은 어제 <귀안>으로 살폈던 시제프의 기억을 더듬었다.

‘왕성 내부 어딘가에 방어막을 가동하는 마법 장치가 있다고 했지. 아인프리트를 그곳으로 들여보내면 되겠군.’

기사단장인 아인프리트는 방어막을 무시하고 왕성 내부로 진입할 수 있다.

대성은 시체 더미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선 아인프리트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마법 장치를 통해 방어막을 해제하라는 추가 명령을 내렸다.

“명에, 따릅니다.”

역시나 같은 말을 되풀이한 뒤, 아인프리트는 서슴없이 성문을 돌파했다.

유유히 멀어지는 그 뒷모습에서 시선을 뗀 대성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으아아악-?!

기, 기사단장님, 왜 이러십니까!

막아! 막아! 가서 죽여-!!

무심코 귀를 쫑긋거려 보니 안쪽에서 벌어지는 참사가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대성이 연기를 훅- 뱉었다. 칙칙한 담뱃재가 필터까지 이어지기도 전이었다.

스르륵-.

성채를 뒤덮고 있던 아지랑이 방어막이 안개가 걷히듯 빠르게 소멸했다.

‘잘해줬군.’

대성은 꽁초를 튕긴 후 걸음을 옮겼다.

활짝 개방된 왕성이 그를 반겼다.

***

왕궁의 병사들이 쉴 새 없이 덤벼들었으나 대성과 아인프리트의 협공 앞에선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쓸려나갈 뿐이었다.

둘은 순식간에 거성의 꼭대기에 자리한 알현실까지 도착했다.

쾅-!

“폐하를 지켜라!”

대성이 입구를 발로 걷어차 깨부수기 무섭게 근위병들이 덤벼들었다.

그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하였는지는 구태여 표현할 필요도 없으리라.

“네놈…….”

엔베트 로젠은 초주검이 된 근위병을 밟고 넘어가는 아인프리트를 보며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녀는 옥좌에서 궁둥이를 떼지 않았다.

“꼴 보기 싫다. 일어나.”

그 고고한 모습이 퍽 눈꼴시었던 대성은 주변에 즐비한 창 한 자루를 집어 들어 옥좌의 윗부분에 투척했다.

마력이 실린 피투성이 창날은 금색 옥좌를 형편없이 무너뜨렸다.

“윽……!”

몸을 기댈 곳이 사라진 엔베트 로젠은 자연스레 바닥에 엎어져야만 했다.

-툭.

대성이 재촉하는 손길로 아인프리트의 어깨를 건드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계단을 밟고 올라가 서슴없이 엔베트 로젠의 머리채를 거칠게 휘어잡았다.

“흐윽-!! 아인프리트 네놈……!”

서슬 퍼런 원망과 질책의 시선이 아인프리트에게 꽂혔다. 어떻게 네가 적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냐는 의미가 담긴 눈빛.

하나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한 자를 백날 노려봤자 부질없는 감정 소모다.

“이 죄는 죽음으로 갚거라, 반역자!”

우레와 같은 엔베트 로젠의 고함이 알현실 내부를 쩌렁쩌렁 울린 순간.

우드득!

하얗고 매끄러웠던 그녀의 살결 위로 비단뱀 같은 핏줄이 한가득 돋아났다.

푸슉-!

곧 한계까지 팽창한 핏줄이 폭발했다. 전신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분수처럼 치솟은 피가 아인프리트의 눈가에 튀었다.

그가 주춤거리는 동안, 어지러이 흩뿌려진 선혈이 응고되더니 채찍으로 변해 엔베트 로젠의 손에 쥐어졌다.

저토록 과다한 선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종족은 하나밖에 없다.

‘흡혈귀였군.’

여러 차원의 종족이 서식하는 지옥에서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엔베트 로젠의 정체가 흡혈귀였다는 건 대성도 지금 처음 안 사실이다.

플로마리아를 통치하니 당연히 란도족인 줄 알았건만.

‘시제프의 기억에선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플로마리아 대륙으로 건너왔다고 했었지.’

상처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말이다.

흡혈귀는 박쥐로 변하거나 흡혈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일부러 티를 내지 않고서야 외관만으로 쉬이 정체를 간파하기 어렵다.

외부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대륙의 영역을 침범했으니 란도족도 처음엔 그녀를 적대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모든 란도족이 그녀를 통치자로 떠받들게 된다.

‘그녀의 피가 대중에 막강한 힘을 주었으니까.’

휘리릭!

피로 만든 채찍이 아인프리트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그의 몸이 허공을 붕 날아 대성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벽면과 충돌하면서 굉음이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내 피에 닿은 자는 모든 능력을 잃게 되지. 힘을 다뤄야 한다는 사고 회로를 꼼짝없이 마비시키거든.”

짝-!

엔베트 로젠이 양손으로 채찍을 팽팽하게 펴며 그리 말했다.

“내가 피 냄새를 맡은 적 있는 자라면, 설령 신이라도 예외 없이 자동으로 추적할 수 있고.”

“쓸데없이 친절하군. 왜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해주지?”

“발악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아두라는 말이었다!”

일갈과 동시에 채찍이 정확히 일직선으로 곧게 뻗쳤다. 채찍이 끈 형태의 무기라는 걸 생각하면 물리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방금 실토한 것처럼, 채찍은 피 냄새를 한 번이라도 맡은 자들은 자동으로 추적하는 것이다.

‘상관없다.’

채찍이 오든 유도 미사일이 날아오든, 그냥 무시하고 접근하면 그만이니.

대성이 보란 듯이 가뿐하게 채찍의 추적을 피하며 그녀에게 쇄도하던 찰나.

“어딜 오려고.”

엔베트 로젠이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팔다리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던 피가 계단 아래에 흥건한 웅덩이를 만들었다.

이윽고 웅덩이의 표면에서 무수한 붉은 손들이 우후죽순으로 솟아났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귀와 입에서 시뻘건 수증기가 펌프질하듯 뿜어져 나왔다.

“올 테면 와보거라. 네놈이 과연 어떤 꼴로 죽을지, 나도 궁금해지는구나.”

“…….”

손은 적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피의 안개는 독가스처럼 말려든 자의 목숨을 앗아가는 용도일 터.

막무가내로 들이닥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저까짓 손과 안개 따위가 대성의 목숨을 쉬이 취할 순 없다.

그러나 께름칙했다.

성가시다는 걸 알면서도 구태여 몸을 내던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보다 더 좋은 수가 있거늘.

“망혼 해방.”

히야아아아-!!

소용돌이에서 튀어나온 망령들이 엔베트 로젠을 향해 쏟아졌다.

“……?!”

예기치 못한 상황에 그녀가 뭐라 소리치기도 전에 망혼들에 둘러싸였다.

쫘아악-!

박쥐 떼처럼 몰려든 망혼들이 사납게 그녀의 드레스를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이, 이놈들……! 안 돼! 드레스만큼은 안 된다고!”

피의 안개는 이미 지옥에서도 한 번 죽은 망자들에겐 통하지 않았다.

엔베트 로젠이 한껏 울부짖었으나 망혼들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고혹적인 이브닝드레스가 넝마가 되어 찢겨나가고 그녀는 곧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되어 널브러졌다.

상황과는 별개로 선정적으로 비칠 수도 있는 광경이었으나,

치이익-!

“끄흑?! 끄으윽-!”

커튼을 비집고 알현실 내부로 쏟아지는 햇빛에 그녀의 고운 피부가 끔찍하게 타들어 갔다.

전라의 미녀 대신, 부식되는 살갗을 부여잡으며 몸부림치는 괴물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그 드레스가 흡혈귀인 너를 햇빛으로부터 지켜주고 있었나 보군.”

딱히 알고서 의도한 바는 아니고 그냥 운 좋게 얻어걸린 것이다.

아니, 마냥 운이 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 이대로 엔베트 로젠이 죽어버리면 큰 낭패이니.

대성은 바닥을 뒹굴며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엔베트 로젠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사, 살려… 줘…. 너, 너무 아파…….”

“너는 저놈과 함께 나를 금역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네, 네가 그, 그걸 어떻게……?”

“물을 시간에 안내하는 편이 한시라도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 아닌가?”

콱-!

대성은 차갑게 말하더니 엔베트 로젠의 머리채를 난폭하게 움켜쥐었다.

눈살을 찌푸린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이런 상태로는 거동조차 힘들 테니 대성이 친절하게 그녀의 두 다리가 되어주기로 한 것이다.

“방향만 말해라. 끌고 가줄 테니.”

***

시체가 끊이지 않는 길을 지나 다시 왕궁의 1층으로 내려왔다.

햇빛과 가장 가까운 꼭대기에서 멀어지니 그녀의 입에서도 비명이 점차 멎었다. 그렇다 하여 저항 따위를 할 수 있는 기력은 없었지만.

“여, 여기에… 서…….”

“그러지.”

대성이 그녀의 머리채를 손에서 놓지 않은 채 특정 지점에 멈춰 섰다.

“그, 금역에… 가려면…….”

“나도 어떻게 하는지 안다.”

“…….”

대성은 뒤따라온 아인프리트를 향해 옆에 서라고 턱짓했다.

결실을 볼 때가 왔다.

“술진(術陳)이 그려진 이중 공간을 해제해라.”

“명에, 따릅니다.”

술진이 그려진 이중 공간. 그곳이 바로 제국의 금역이었다.

이전에 천상에서 성역으로 가는 길을 숨겼던 것과 같은 원리.

특정한 표식이 새겨진 자만 진입이 가능하거나, 혹은 영창을 외움으로써 입장하는 방법이 공존하는데 지금 같은 경우엔 후자였다.

‘죽은 자의 영창은 통하지 않아.’

일부러 아인프리트를 살려둔 이유다.

망자가 내뱉는 언어엔 힘이 담기지 않았으니까.

“…….”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아인프리트는 바로 영창을 외우지 않고, 엔베트 로젠을 무심히 힐끗거렸다.

대성의 말에 불복하는 게 아니라, 그녀와 함께 영창을 외워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제의 꼴이 말이 아니로군…….”

급기야 엔베트 로젠이 모멸감 어린 눈물을 흘리며 주문을 외웠다.

그렇게 아인프리트와 함께 영창을 이어나가길 잠시.

[영창의 언령(言令)이 이중 공간을 해제합니다.]

[유일 제국의 가장 은밀한 곳이 드러납니다. 금역에 도달했습니다.]

[강제성을 지닌 술진과 접촉합니다.]

사방이 일렁이더니 공간 그 자체가 뒤바뀌었다.

고풍스러웠던 내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썩은 물의 악취가 잔뜩 풍기는 지하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거로군.’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 공동을 유일하게 밝히는 건,

드넓은 내부를 가득히 채운 거대한 붉은 술진이었다.

하물며 그것은 전체가 아닌,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대성의 발이 맞닿은 곳은 어디까지나 술진의 한가운데. 나머지 테두리는 한눈에 전부 담을 수 없을 만큼 저 멀리 뻗어 있었다.

‘여기서 우리끼리 떠들어봤자 소용없겠지.’

대성은 소리의 정령, ‘곤’을 소환했다.

기괴하게 생긴 정령이 다가오자 엔베트 로젠이 흠칫했으나, 곤은 개의치 않고 그녀의 귓가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러고는 천장에 뻥 뚫린 구멍 밖으로 쪼르르 날아갔다. 이중 공간이 해제됨으로써 드러난, 지상과 이어진 길이다.

정령은 소환한 자의 마음과 호응하고, 공명한다.

대성이 뭘 바라고 자신을 소환했는지 녀석은 완벽히 이해하고 움직인 것이다.

5분 정도 대화 한 마디 없는 침묵이 이어졌다. 엔베트 로젠이 왜 아무 말도 없냐는 질문을 하려던 찰나에 대성이 입을 열었다.

“대륙 전역이 통째로 이 술진 위에 놓여 있다고 했었나.”

“…….”

“이것이 영민들의 고혈을 빨아들여 네년의 생명력이 되어줬겠지. 맞나?”

“…….”

스릉-! 치이익-.

뜨겁게 달궈진 업화대검의 칼날이 엔베트 로젠의 목덜미에 겨눠졌다.

안 그래도 햇빛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불’이란 참을 수 없는 공포였다.

“끄, 끄으윽…….”

“삶에 미련이 없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마, 맞아…… 네놈 말이 맞아! 모든 게 다 내 영생(永生)을 위해서였어! 그, 그러니까 이것 좀 치워……!”

영원무궁한 생명을 얻기 위해 만민의 피를 탐했던 그녀가 삶에 미련을 버릴 리는 없을 터.

엔베트 로젠은 아직 묻지도 않은 대목까지 알아서 술술 실토했다.

“하, 하지만 내 피가…… 내 피로 만든 혈류석(血流石)이 영민에게 힘을 주었어! 그들이 내게 피와 생명을 바치는 대신 난 강력한 힘을 베풀어준 거야!”

“집어치워라. 수명이 줄어드는데 힘이고 자시고, 다 무슨 의미가 있지?”

란도족은 검과 마법을 부리는 전투 종족이라고 불리지만, 처음부터 그들이 마법을 다룰 수 있던 건 아니었다.

그들이 힘을 각성한 건 엔베트 로젠이 대륙에 도착한 이후.

그리고 그녀의 핏물을 굳혀서 만든 돌, 혈류석이 대륙 전역에 배포된 이후였다.

흡혈귀는 피를 빨아 살아가고 그 피를 무기로 삼는 종족. 그렇다면 그 피에도 무언가 신비로운 힘이 담겨있음이 당연했다.

“그래, 그들은 좋아했겠지. 부외자라고는 해도 무력한 자신들에게 힘을 줬으니까. 그래서 너를 대륙의 통치자로 추앙했을 거고.”

“황폐한 땅 위에서 법도 없이 살아갔던 야만족들이야! 난 내 피를 바쳐 그들의 문명을, 지식수준을 진화시켰어!”

“하지만 그 대가가 자신들의 ‘수명’이란 걸 알고도 네게 계속 고마워할까.”

냉엄한 눈이 엔베트 로젠을 향했다.

“그리고 피를 바쳤다느니 뭐니, 합리화 그만해라. 영민에게 힘을 준 것도 그들을 더 고등한 생물로 키워내 정순한 생명력을 얻기 위함이 아닌가?”

“…….”

“그들은 네가 행하는 기적이 다 힐드 신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알고 있지. 그런데 진실이 이러면…… 아무래도 그 힐드 신이란 것도 네가 지어낸 허상일 가능성이 크겠군. 내 말이 맞나?”

시제프와 아인프리트는 금역과 술진의 존재도, 그리고 그것들이 영민의 수명을 탐식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다만 엔베트 로젠과 마찬가지인 사상으로 묵인하고 있었을 뿐.

하지만 그들조차 그녀의 정체가 흡혈귀라는 사실은 몰랐을뿐더러,

정말로 힐드 신이란 게 존재하기에 그녀가 기적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거라 믿고 있었다.

“……내가 흡혈귀라는 사실을 숨기려면 미신(迷信)을 지어낼 수밖에 없었어.”

엔베트 로젠이 입술을 깨물며 쐐기를 박았다.

끌어낼 대답은 전부 끌어냈다.

이제 남은 건,

“술진을 해제시켜라.”

“…….”

“네가 영생을 추구하든 미신을 지어내든 내가 알 바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서 말이지.”

딴 차원에서 살아가는 종족이 통치자에게 고혈을 쥐어짜이고 말고는 대성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플로마리아가 지구와 겹쳐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술진의 악영향은 인류에게도 똑같이 미치리라.

“민폐 끼치지 말고 저거 썩 지워. 여긴 나와 내 동족이 사는 땅이다.”

“…….”

칼날이 재차 엔베트 로젠을 겨눴다.

대성은 죽음보다 더 끔찍한 고문을 가할 수도 있는 인간이란 걸, 그녀는 이미 뼈저리게 깨달은 상태.

결국, 엔베트 로젠은 엉금엉금 앞으로 기어가 술진에 손바닥을 짚더니 주문을 외웠다.

[술진이 해제되었습니다.]

[대륙 전역을 뒤덮고 있던 강제성이 사라집니다.]

공동을 빽빽이 채웠던 표식이 사라지고 시스템 메시지가 인증해줬다.

술진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후, 그녀는 고개를 풀썩 숙이며 오열했다.

당연하다. 일생을 바쳤던, 그리고 일생을 책임져 줄 작업물을 자기 손으로 직접 파괴했으니 자괴감이 안 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물론 동정심 같은 걸 베풀기엔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악행(惡行)이지만.

콱-!

“끄, 끄으윽……!”

“따라와.”

“하, 하라는 대로 했잖아! 나를 살려주는 거 아니었어?!”

“맞아. 난 너를 죽일 생각이 없다. 내 손으로 너를 벌할 생각도 없고.”

대성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끌더니 공동을 빠져나갔다.

아인프리트가 그 뒤를 따랐다.

“너를 단죄할 자들은 따로 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질 새도 없었다.

공동을 벗어나 왕궁 테라스와 이어진 복도로 접어들기 무섭게 햇빛이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

“어흑, 끅, 끄으으윽-!”

엔베트 로젠은 떼를 부리는 어린애처럼 발버둥치며 고통스러워했다.

머리채를 붙잡힌 채 알몸으로 불판 위를 질질 끌려다니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끌려가고 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대성의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밑을 내려다 봐라.”

“흑, 흐윽, 흑……?”

그녀는 꺼멓게 타들어 간 사지를 뒤틀면서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대성이 데려온 곳은 성채 아래가 훤히 내다보이는 테라스였다.

그리고 테라스 아래엔-.

“…….”

제국의 영민들이, 왕궁 앞에 모여 그녀를 망연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딱 세 가지 감정이 담긴 눈으로.

분노.

실망.

충격.

확실한 건 거기에 ‘동정심’은 없었다.

한때 자신들이 여제(女帝)로 떠받들었던 통치자가, 지금은 위부터 아래까지 홀라당 벗겨진 채 살이 타들어 가고 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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