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31화 (131/180)

#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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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미친X아!”

성채 앞에 몰려든 군중 속에서 우렁찬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그는 젊은 청년 란도족이었는데, 옆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파가 표정으로 통탄을 금치 못했다.

아마 청년의 노모(老母)이리라.

땅 밑에 백성들의 수명을 빨아들이는 술진이 있었다는 진실이 까발려진 작금, 참으로 사정이 알기 쉬운 조합이 아닐 수가 없다.

“이 씨X!”

“죽여버려!”

“거짓말일 거야…….”

“흡혈귀? 폐하가 흡혈귀였다고?”

“평생 잔병치레 하나 없었던 아버지가 갑자기 작년에 돌아가셨어! 왜 그런가 했더니 다 저 악마 같은 년 때문이었네!”

청년의 고함이 어떤 스위치로 작용했는지, 막힌 둑이 뚫린 것처럼 좌중들의 욕설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다물어라.”

이때, 대성이 처음으로 입을 뗐다.

낮은 음성이었으나 마력이 담겨있어서 사람들의 귓가에 쏙쏙 박혔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지르던 영민들이 일제히 침묵에 빠졌다.

“저 인간이…….”

“쉿. 위험한 인간이야……. 일단 조용히 하고 들어보자…….”

그들은 이미 블랙 드래곤을 애완동물처럼 다루고 제국의 병사들을 개미처럼 짓밟는 대성의 맹위를 몇 분 전에 목격했던 참이다.

함부로 넘볼 상대가 아니라는 건 본능이 경고해주고 있었다.

정적 속에서 대성이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모시던 통치자의 추악한 진실을 아직 깨닫지 못한 놈은 없겠지. 이 엔베트 로젠이란 여자는 너희들의 피와 수명을 대가로 자기 혼자만 불멸의 삶을 추구했다.”

그 대목을 언급하는 대성의 눈은 영민들 위를 참새처럼 쫄쫄 날아다니는 ‘곤’을 쳐다보고 있었다.

녀석은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은 대상이 하는 말을 녹음기처럼 흘리고 다닌다. 덕분에 더 쉽게 엔베트 로젠의 진실을 저들에게 전파할 수 있었다.

대성이 백날 떠들어봤자 그녀가 직접 실토하지 않는 이상 영민들은 그가 하는 말을 절대로 믿지 않았을 테니.

“이 여자가 저지른 죄로 인하여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너희들이다. 고로, 난 이 여자를 직접 벌하는 건 너희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물라고 했기에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내는 자는 없었으나 표정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스산했다.

그래, 지금부터 고깃덩어리를 던져줄 테니 알아서 나눠 먹으라는 사육사의 말을 들은 사자들처럼.

“그러나 오늘 엄벌을 받아야 할 죄인은 이 여자뿐만이 아니다.”

대성은 그리 말하더니 옆에 멀뚱멀뚱 선 아인프리트를 테라스 난간 앞으로 끌어당겼다.

좌중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방금 대성과 가담하여 제국의 병사를 학살했던 장면이 뇌리에 선명했기에, 영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눈치였다.

“너는 엔베트 로젠의 꿍꿍이를 알면서도 일부러 묵인했다. 진실을 눈에 담고서도 그것을 대중에 숨겼다.”

대성의 충격적인 발언이 좌중 사이로 내려앉기 무섭게.

퍽-!

대성은 아인프리트의 오금을 발로 걷어찼다. 아인프리트는 절로 무릎을 굽혀야 했다.

술렁이는 소리가 더 커졌다.

대성의 질문이 이어졌다.

“내 말이 맞나?”

“맞습니다.”

헛숨을 삼키고, 신음을 흘리는 소리가 수만 개 겹치면 그건 이미 비명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묵인한 게 맞느냐는 질문에 그가 스스로 긍정하자 영민들은 사색이 되었다.

“아아…….”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거짓말이라고 해주세요…….”

역사서에도, 교과서에도 기록되어 길이길이 그 위명이 이어질 영웅의 이면(異面)을 저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받아들이든 말든 대성이 알 바는 아니었지만.

“다들 들었겠지. 이놈은 공범이다.”

콱-!

대성은 허리 부근에 자리한 아인프리트의 금발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손목에 조금 힘을 주자 아인프리트의 얼굴이 위로 들렸다. 하얀 목과, 그리고 볼록한 목울대가 강조되었다.

스릉-. 치이익-.

흉악하리만치 거대한 불의 칼이 가로로 눕힌 채 목과 맞닿았다.

설마……?

영민들이 눈과 입이 한계까지 커다래진 그 순간.

“그리고 이게 내 처벌 방식이다. 지금이라도 눈에 잘 담아두도록.”

스아악-!

툭.

데굴데굴…….

몸뚱이에서 떨어진 아인프리트의 머리가 지상으로 추락했다.

땅과 충돌한 두개골은 볼품없이 으스러지면서 허연 뇌수를 팍 터뜨렸다.

“히익……!”

“꺄아아악-!”

다양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창백해져서 뒷걸음질을 치는 자, 비명을 지르는 자, 고개를 홱 돌리며 오들오들 경련하는 자,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혼절하는 자 등등…….

술진을 해제했으니 이제 아인프리트를 더는 살려둘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죽였을 뿐이다.

물론 <지배>의 권능이 성공적으로 먹혀들었으니, 이대로 살려두면 언젠간 써먹을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건,

‘본보기가 필요해.’

이제는 저 영민들도 똑똑히 알았을 터이다. 한대성이란 인간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잔혹한 자인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자신은 저들에게 선망이나 동경의 대상이 아닌, 두려운 존재로 군림해야만 한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엔베트 로젠.

그녀의 처분은 아까 말했듯이 저들의 손에 맡길 생각이다.

그녀의 차례가 왔다는 것을 안 군중도 충격을 잠시 미뤄두고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내기 시작했다.

대성은 아예 실금까지 하며 몸부림치는 엔베트 로젠을 집어 들더니 테라스 아래로 휙 내던졌다.

왕궁 테라스에서 지상까지는 높이가 꽤 됐으나 흡혈귀인 그녀가 고작 이 정도로 낙사(落死)할 수는 없었다.

우당탕-!

지척에서 알몸으로 흙바닥을 뒹구는 엔베트 로젠을 내려다보는 좌중들이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지금부터는 저들의 독무대겠지만 한 가지 사실은 당부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5분 준다. 분풀이로 하고 싶은 짓이 있으면 다 해라. 그 대신 죽이려고 들지는 마라. 혹시 의도적으로 심장을 찌르거나 목을 자르려는 놈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범인 색출 작업은 건너뛰고 그냥 모조리 몰살시킬 테니.”

살벌한 말이 이어지자 영민들이 잠시 흠칫했으나 곧 안색을 바꿨다.

죽이지는 말라.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그건 환영할 만한 주문 아닌가.

만민의 수명을 무단으로 갈취해 영생을 꿈꿨던 엔베트 로젠에게, ‘죽음’이란 너무나 자비로운 처사였으니.

“이 개X이…….”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앞으로 30년은 더 정정할 분이셨는데!”

“우리가 뺏긴 수명은 누구한테 돌려받냐고! 누구한테!”

햇빛에 꺼멓게 그을린 엔베트 로젠의 피부가 한층 더 새카매졌다.

전부, 분노를 터뜨리며 그녀의 곁에 몰려든 영민들의 그림자였다.

“끄흑, 끄윽…….”

충혈된 엔베트 로젠의 눈망울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5분의 타이머가 울리고,

영민들이 막사 건설을 위해 쥐고 있던 삽자루를 그녀의 몸에 마구 내려찍었다.

아파하는 비명이, 분노가 담긴 고함이, 낙담이 서린 절규가 엉망진창 뒤엉켰다.

숨을 헐떡이며 팔을 휘두르는 좌중의 얼굴에 선연한 핏물이 튀고, 엔베트 로젠의 팔다리가 기형적으로 꿈틀거렸다. 아이를 끌고 온 부모는 자식의 눈과 귀를 막으며 헐레벌떡 그 자리를 떴다.

지옥도.

칙-.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대성은 난간에 몸을 기댄 채 그것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

“그만.”

5분이 지났다. 대성이 마력을 담은 목소리로 제지를 가했으나 이성이 끊어진 사람들은 그걸 듣지 못했다.

생을 앗아간 원수에게 설욕을 푸는 데 5분은 너무 짧을 터.

그 마음은 이해하나 규칙은 규칙이다.

대성은 난간 아래로 몸을 날려 옹기종기 모인 집단 한가운데를 파고들었다.

무아지경으로 무기를 휘두르던 자들이 그때야 정신을 퍼뜩 차리더니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섰다.

“그만하라고 했다.”

“…….”

영민들이 무기를 내리며 거친 숨을 씩씩 내뱉었다.

상황 진압을 마친 대성이 고개를 돌려 엔베트 로젠의 상태를 살폈다.

넝마. 걸레짝.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법을 찾아볼 수 있을까?

휘황찬란한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온갖 고고한 척은 다 떨던 여제는 이제 옛 모습이 되었다. 지금은 그냥 피떡이 된 채 뼈와 내장이 훤히 드러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살아있군.’

사정없이 뜯겨나간 유방이 위아래로 왕복했다. 어찌어찌, 죽이지는 말라는 대성의 명령을 저들은 착실히 지킨 셈이다.

영민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대성을 응시했다. 자신들에게 5분을 양보해줬으니, 이제 목숨을 취하는 건 대성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얼굴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너희는 여기에 꼼짝 말고 있어라.”

그리 말한 대성의 손에서 검은 안개가 뭉클뭉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여러 갈래로 분사된 안개가 사령 병사로 돌변하더니 영민들의 전후좌우를 에워쌌다.

“어, 언데드……?!”

“서, 설마 우리를 다 죽일 셈인가?”

혹여 거친 짓을 당할까 긴장했으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꼼짝 말고 있으라는 대성의 명령을 저들이 어기지만 않는다면.

“너는 나와 할 얘기가 있다.”

대성은 엔베트 로젠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다시 성채 내부로 진입했다.

최종적으로 향한 곳은 이중 공간을 해제하면서 훤히 개방된 지하 공동.

햇볕 아래에서 벗어나니 엔베트 로젠도 차츰차츰 의식을 되찾았다.

그녀를 향해 대성이 말했다.

“네 피를 굳혀서 만든 혈류석은 힘이 없는 자들에게 힘을 준다고 했지. 그럼 그건 네가 직접 만드는 건가?”

“…….”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하니 여기까지 와서 반항하는 건 아닐 테고.

대성은 한숨을 쉰 뒤 엔베트 로젠의 턱을 잡아 얼굴을 살폈다.

찢어진 입술에서 침이 줄줄 흘러나왔다. 동공에는 초점이 사라져서 어디를 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신이 나간 거로군.’

산송장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구태여 입 아프게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으리라.

대성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어 <지배>의 권능을 발동했다.

“아…. 아아…….”

허공의 한 점만을 주시하던 핏빛 동공이 대성과 시선을 마주쳤다.

“네가 그토록 바랐던 영생의 꿈을 내가 이뤄주도록 하겠다.”

“아…….”

“단, 너는 지금 이 순간부터 영원히 피를 뽑아 혈류석을 생산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보는 앞에서 혈류석 하나를 만들어봐라.”

엔베트 로젠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몸을 야릇한 손길로 더듬었다.

그러고는 피로 흠뻑 젖은 손바닥을 맞대어 합장(合掌)했다.

적색 섬광이 잠깐 번뜩이더니, 그녀의 손바닥 위로 붉은 돌멩이가 나타났다.

‘생김새 자체는 에테르 코어랑 별반 다르지 않군.’

엔베트 로젠이 경건하게 팔을 뻗어 돌멩이를 건네자 대성이 그걸 가져갔다.

직후 시스템이 정보를 보여줬다.

[상급 혈류석을 획득하셨습니다.]

[혈류석 사용법: 섭취]

[아이템 정보]

이름 : 상급 혈류석

분류 : 소비

‘상급 흡혈귀의 피를 응고시켜 제작한 혈류석. 낮은 확률로 혈류석이 반응하는 대신 성공할 시엔 그만큼 높은 등급의 마법을 획득할 수 있다.’

섭취 시 마법을 획득하게 해주는 돌!

이것이 ‘플로마리아’가 지닌 근원의 격이 ‘중하(中下)’밖에 되지 않음에도 대성이 시간을 할애한 이유였다.

‘이거면 각성하지 못한 사람들도, 등급이 낮은 사냥꾼들도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어.’

하루만 지나면 수를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은 차원이 지구로 내려온다.

그렇게 되면 이제 피바람이 불 것이다.

‘하지만 혈류석이 보급된다면 분명 달라지는 게 있을 것이다. 분명.’

자신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지구가 지옥으로 변모하는 꼴만큼은 결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성 혼자서 모두를 지킬 수는 없다. 나 혼자서 모두를 지키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건 알량한 영웅 의식이고 어리석은 오만에 불과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겠다.’

대성은 확인차 혈류석을 삼켜보았다.

돌이 기도를 지나자 모종의 힘이 체내에서 태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혈류석이 성공적으로 반응합니다. 고등급의 마법을 무작위로 획득합니다.]

[획득 결과: 어검술(馭劍術)]

<마법 정보>

어검술

[‘날’이 존재하는 무기라면 종류 불문하고 원격으로 조종할 수 있습니다.]

[장시간 다룬 무기일수록 유지 시간 증가 및 궤적이 세밀해집니다.]

[원격 조종 반경은 최대 300m입니다.]

상급 혈류석을 섭취해도 마법을 획득할 확률이 낮다고 했으나 재수 좋게도 최초의 시도에 성공했다.

어검술.

주로 무협지에 등장하는 무공이지만 혈류석은 이걸 마법의 영역으로 분류했다.

물론 대성은 무협지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만.

‘시험은 나중에.’

어검술의 운용은 나중으로 미뤘다.

지금은 혈류석을 먹으면 힘을 얻는다는 걸 검증했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으니까.

‘이미 옛적부터 배우고 연마한 것 같은 느낌이군.’

딱히 시스템이 알려주지 않아도 마법이 제대로 적용됐는지, 또 어떤 마법이 생성됐는지 직감으로 느껴진다.

시스템을 보지 못하는 자들은 이 직감으로 말미암아 힘을 자각하는 듯싶었다.

확인을 마친 대성은 다시 엔베트 로젠을 주목했다.

“너는 지금부터 쉬지 말고 계속 피를 쥐어짜 혈류석을 만들어라.”

“네…….”

“목숨이 위태로워지거나 피가 부족해지는 사태는 걱정하지 마라. 필요하면 언제든지 네게 먹이를 던져줄 테니.”

“감사, 감사합니다…….”

엔베트 로젠이 입가를 끌어올리며 머리를 바닥에 처박아 절을 올렸다.

휙-.

대성은 그녀의 머리맡에 심판의 단검을 던졌다. 앞으로 이걸로 자해(自害)하여 피를 내라는 의미였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단검을 조심스레 움켜쥐는 엔베트 로젠을 향해,

대성이 넌지시 말했다.

“축하한다. 영생의 꿈을 이뤘군.”

***

왕성의 지하에는 이중 공간으로 가려진 공동 외에도 포로들을 가두는 대형 감금실이 있었다.

엔베트 로젠에게 감금실의 위치를 캐물은 대성은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음머어어어-!!”

이족보행의 황소 머리 괴수가 감금실의 석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미노타우로스.

놈은 침입자를 발견하자마자 노도와 같은 기세로 돌진했다.

“시험해볼까.”

대성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리 중얼대며 업화대검을 내던졌다.

쐐애액-!!

파공성을 터뜨리며 날아가는 불의 칼이 미노타우로스의 미간을 노렸다.

“음머어-?!”

흠칫한 미노타우로스가 황급히 도끼를 사선으로 휘둘러 칼을 쳐냈다. 허공에서 칼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갔다.

하나, 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움직임으로 궤적을 틀더니 녀석의 두개골을 세차게 관통했다.

콰직-!

“푸르륵……!”

녀석이 콧김을 뿜으며 절명했다.

드득-!! 드드득-!!

죽은 미노타우로스의 정수리에 박힌 업화대검이 저절로 뽑혀 나와 대성의 손에 도로 회수되었다.

“쓸 만하군.”

어검술의 위력을 확인한 대성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거리에서 자유자재로 검을 다루니 더러운 피를 뒤집어쓸 필요도 없다.

운용 자체도 수십 년을 이미 거듭했던 것처럼 손쉽기 그지없었다.

쾅-!

대성은 다리를 휘둘러 거대한 석문을 사정없이 박살 냈다.

파편을 쏟아내며 무너지는 석문 너머엔 흙먼지와 피를 잔뜩 뒤집어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뉴멕시코주의 거주민들.

무려 50만에 육박하는 인파가 춥고 어두운 공간에 한데 갇혀 있던 것이다.

“아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살았어! 우린 살았다고……!”

대성을 알아본 사람들이 서로 부둥켜안으며 기쁨의 눈물을 쏟아냈다.

축축한 감금실 내부에는 오물이 바닥에 흐르고 병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들이 이 하루 새 어떤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영웅의 등장에 이제는 짙은 절망에서 헤어나올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감금실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은 대성의 곁을 지나갈 때마다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손을 꼭 쥐는 노인과 허리를 숙이는 남녀, 그리고 동경 어린 눈빛을 보내는 아이들까지…….

그들의 면면을 지켜보던 대성의 곁으로 문득 한 사냥꾼 무리가 접근했다.

“저희는 앨버커키(Albuquerque)를 관할 지역으로 두고 있는 클랜입니다.”

“단장님과 정예 단원들은 놈들과 맞서 싸우다 죽었습니다. 힘이 없는 저희는 부끄럽게도 민간인들을 지키지 못하고 여기에 갇힌 것이고요…….”

“만회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함께 싸우게 해주십시오. 그간 저희가 존경해온 영웅과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만한 영광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이 절박한 표정으로 부탁했으나 대성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사냥꾼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역시 우리는 필요 없는 건가, 라고 자조하는 듯한 분위기.

그러나 대성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들의 예상을 웃돌았다.

“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다.”

“예?”

“싸움은 이미 끝났으니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사냥꾼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대성은 그들 몰래 조용히 입가를 끌어 올려 미소만 지을 뿐이고.

***

플로마리아에는 제국이 있는 중앙대륙 말고도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대륙이 존재한다.

엔베트 로젠을 죽이면 남은 대륙들도 모조리 인과에서 말소되겠지만 그럴 수는 없는 상황.

그래서 대성은 일일이 쳐부수기로 했다.

[섬멸룡이 광살포를 쏩니다.]

동쪽 대륙은 섬멸룡의 브레스 한 방으로 해결했다.

[천공의 군단장 ‘디오그마’의 천마병이 절대자의 명령을 따릅니다.]

서쪽 대륙은 디오그마의 천마병이 내려와 공작령을 멸망시켰고,

[필드, ‘천공왕 디오그마의 공중요새’를 구현합니다.]

남쪽 대륙에는 불타는 공중요새가 운석처럼 떨어져 영지 주변만 불바다로 뒤덮었으며,

[죽음의 군단이 절대자의 명령을 따릅니다.]

북쪽 대륙은 최신형 오리할콘 병기로 중무장한 사령 병사가 잔당을 척살했다.

통찰안의 ‘지도’ 기능 덕분에 주요 지점에만 소환수를 파병할 수 있었다.

“맙소사…….”

란도족은 자신들의 터전이 불길에 잠기는 참사를 바라보며 깊이 탄식했다.

지옥의 대군주에게 걸린 이상,

하나의 세계가 지구의 땅 위에서 지워지기까지는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

제국의 성채 앞.

사령 병사들로 둘러싸인 영민들이 심각한 얼굴로 웅성거리던 가운데.

“어! 나왔다!”

“응? 근데 뒤에 뭘 주렁주렁…… 헉?”

성채를 빠져나오는 대성의 모습을 발견한 영민들이 이내 헛숨을 삼켰다.

그의 뒤로 왕성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던 수만 명의 인간이 우르르 뒤따라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일처럼 인파가 쏟아져 나오자 영민들은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귀기 어린 모습으로 동족을 이끄는 대성의 모습에 모두가 전율한 것이다.

대성이 걸음을 멈추자 따라오던 사람들도 일제히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직후 그가 첫 마디를 꺼냈다.

“무릎 꿇어.”

“…….”

대관절 튀어나온 발언에 영민들이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소리를 꼭 질러야 하나?”

대성이 혀를 차며 머리칼을 헝클었다.

목소리를 높이는 건 그로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내키지 않아도 해야만 할 때가 있는 법.

쿵-!

그는 세로로 올곧게 세운 업화대검을 지면에 내리찍으며 외쳤다.

“무릎 꿇어-!!”

“……!!”

대기에 파문이 일어났다. 고함에 담긴 충격파가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고막이 터질 것처럼 쩌렁쩌렁한 외침에 대성을 제외한 모두가 귀를 틀어막으며 안색을 창백하게 물들였다.

하지만 인상을 찡그리기도 잠시, 영민들은 곧 피가 거꾸로 솟는 감각을 느꼈다. 뒷덜미가 오싹했다. 당장이라도 실례할 것처럼 오금이 덜덜 경련했다.

압도당한 영민들이 잔뜩 몸을 굳힌 채 허겁지겁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중앙에 선 대성을 기점으로,

왼쪽에는 꼿꼿이 두 다리로 선 인간이,

오른쪽에는 무릎을 꿇은 이종족의 행렬이 아득히 먼 곳까지 늘어졌다.

“이제 누가 위고 아래인지 똑바로 알았겠지! 목숨을 부지하고 싶은 놈은 개수작 부리지 말고 이 땅에서 쥐죽은 듯이 닥치고 살아가는 게 좋을 거다!”

뼛속까지 깊이 뒤흔드는 외침에, 몇몇 영민들의 눈가에는 눈물까지 고였다.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자는 앞으로 이 땅에 일어날 모든 전투에 무조건 협력하라! 그리고 사리 분별 못 하는 놈들은 차라리 죽음을 구걸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좋을 것이다!”

본보기로 아인프리트의 목을 자르고, 엔베트 로젠을 끌어내린 괴물 같은 남자의 고성(高聲)이 그들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인류는 나의 동일 선상에 선 자들이지만 너희는 아니다! 이 땅에 계속 발붙이고 싶나? 그렇다면 똑똑히 깨달아라!”

스릉!

업화대검이 지면에서 뽑혀 나왔다.

불타는 칼날이 하늘을 향했다.

“이제는 우리 70억 인류가 너희들의 새로운 지배자라는 걸!”

그리고 서광(曙光)이 칼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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