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32화 (132/180)

# 132

132

“평소에도 이렇게 피를 일일이 내어 혈류석을 만들었나?”

한시름 돌린 대성은 다시 지하 공동을 향했다.

그는 단검으로 제 살을 쉬지 않고 베는 엔베트 로젠에게 물었다.

살갗을 잘라 피가 흐르면, 합장하고 혈류석을 만든다.

이 일련의 과정에는 대략 10~15초의 시간이 걸렸다.

언뜻 짧아 보이나, 이것이 수천만, 나아가 수억의 인류에 공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아니에요. 평소에는 ‘핏빛 안개’를 이용한답니다.”

“핏빛 안개? 그게 뭐지?”

“제 피를 기화(氣化)시켜 만든 마도구예요. 장치에서 흘러나오는 안개에 피 한 방울만 섞어도 수백 방울의 선혈이 쏟아지죠.”

들어보니 특수한 형질을 지닌 구름을 만드는 장치인 듯싶었다.

확실히 피를 비처럼 떨어뜨리는 장치라면 혈류석의 제작 속도도 폭발적으로 올라가리라.

“잠깐 하던 걸 멈추고, 나를 핏빛 안개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그녀는 단검을 손에서 놓더니 터덜터덜 어딘가로 걸어갔다.

지하 공동은 대단히 넓었다. 하기야, 대륙 전역에 뻗은 술진을 그렸던 장소니 넓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걸어가니 핏빛 안개가 설치된 방과 연결된 철문이 나타났다.

“추방당한 밤하늘의 권속은 어느 달빛 아래 살아가야 하는가.”

그녀가 주문을 읊조림과 동시에 철문의 보안이 해제되었다.

푸슈욱-.

철문이 열리자마자 방의 안에서부터 붉은 수증기가 쏟아져 나왔다.

진한 피비린내에 인상을 찡그린 대성은 곧 안개를 뿜어내는 기계 장치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천장까지 자욱한 안개에선 핏방울들이 가랑비처럼 내렸다.

바닥에 웅덩이를 만드는 저 피들이 전부 엔베트 로젠의 것일까.

“혈류석을 만들어봐라.”

“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 후 손바닥을 맞댔다.

합장을 마치자 홍수처럼 흥건히 흐르는 피 웅덩이들이 발광했다.

이윽고 핏물들이 말끔히 사라지고 그 위로 돌멩이들이 빼곡하게 놓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안개는 연신 피의 비를 흘려댔다.

“앞으로 너는 여기에 처박혀서 혈류석을 만들어라.”

“네.”

“묻기를 잘했군. 하마터면 괜히 지름길을 놔두고 헛짓을-.”

그때, 문득 시야에 뭔가가 잡힌 대성이 말을 하다 말았다.

장치 밑동에 유독 크기가 커다랗고 매끄러운 형태를 지닌 혈류석 하나가 놓여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저게 뭐지?”

“핏빛 안개를 가동하게 코어에요. 저건 유사시를 대비해 하나 더 마련한 여분입니다.”

“더 자세히 설명해라.”

“출혈(出血)을 일으키는 안개를 소환하는 마법이 담겨 있어요.”

“흠.”

요컨대 광역 공격기.

기억대로라면 <더 북>에 담긴 권능 중에서도 안개 같은 것을 소환하는 종류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

머릿속으로 가상의 전투를 그려보니 실전에서도 무궁무진한 응용법을 지녔을 거라 예상되었다.

‘어차피 여분으로 놔둔 거라고 하니 내가 가져도 상관없겠지.’

그간 해온 고생이 있으니 전리품 하나쯤 챙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대성은 뿌연 안개를 헤치며 장치에 다가가 혈류석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서슴없이 돌을 입에 털어 넣으려던 그때, 엔베트 로젠이 허겁지겁 그를 만류했다.

“혈류석은 한 명당 하나밖에 섭취하지 못해요. 그 이상은 내포한 마법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몸이 터져 죽습니다.”

“흠…….”

당연하다면 당연한 제약.

하지만 그까짓 제약 때문에 눈앞의 이득을 포기할 대성이 아니다.

한 명당 하나밖에 섭취하지 못한다면 다른 놈에게 먹이면 그만.

“나와라.”

그으으!

대성은 사령 병사 하나를 소환한 뒤 덜그렁거리는 입에 혈류석을 집어넣었다.

푸슈욱-.

곧 녀석의 시커먼 눈두덩과 콧구멍에서 붉은 안개가 새어 나왔다.

[망자가 혈류석을 섭취했습니다.]

[마법, ‘혈의 장막’이 발현됩니다.]

<마법 정보>

혈의 장막 Lv.1

[피의 안개를 최대 100m 반경까지 소환합니다.]

[안개에 노출된 적들은 10분간 출혈 상태에 빠집니다.]

[지속적인 사용으로 레벨을 높일수록 출혈 지속 시간과 최대 반경이 늘어납니다.]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선 사령 병사를 소환해야 한다는 불편함만 제외한다면 썩 괜찮은 성능이다.

대성은 영문 모를 신체의 변화에 살짝 당황하는 눈치인 사령 병사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앞으로 애용해주지.”

***

대성은 영민들을 모조리 외곽으로 쫓아내 그곳에서 막사를 짓게 했다.

도심지에 이미 건설되고 있던 것들은 당연히 무너뜨렸다.

고향 땅을 되찾은 뉴멕시코의 거주민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황무지가 된 도시를 복구하는 건 이제 저들의 몫이다.

‘혈류석의 보급을 원활하게 진행하려면 성은 놔둬야겠지.’

대성은 흙먼지밖에 불지 않는 너른 황무지 위에서 혼자만 미친 존재감을 발산하는 성채를 올려다봤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땅을 차지하는 면적이 어마어마했으나 별수없다.

함부로 철거해버리면 지하 공동에 있는 엔베트 로젠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으므로.

‘지하 공동을 지킬 관리자가 필요하겠군. 또 언제 변방에 있는 란도족이 쳐들어올지도 모르고.’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고 일러뒀으나 정말로 그럴진 장담 못 한다.

아무리 사람들이 혈류석을 먹어 힘을 깨우친다 한들, 반기를 든 란도족과 충돌하면 적잖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리라.

그리고 그걸 떠나서 지하 공동에도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는 노릇.

그러한 사태를 막아줄 관리자, 즉 가디언을 주둔시킬 필요가 있었다.

‘죽음의 군단 중에 적당한 자를 선별해봐야겠군.’

대성은 성채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고민에 잠겼다.

뒷짐을 지고 걸음을 옮기는 그에게 거주민들이 먹을 것들이나 그나마 멀쩡한 옷가지들을 건넸다.

어떻게든 영웅에게 답례하고픈 마음은 알겠으나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오늘 자정이 지나는 순간 지구엔 전례 없는 아수라장이 벌어진다.’

여기서 오래 지체하기엔 시간이 너무나 촉박했다.

가디언의 선정도 30분 안에 끝내고 한국으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대성은 적당한 가디언 후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인프리트.’

게드락은 성정이 포악하고 치밀하지 못하여 가디언에 알맞지 않고, 사령단장 돌프는 한 지역에만 계속 주둔시키기엔 아까운 마수다.

그렇다고 대다수의 사령 병사를 배치해두는 것도 효율적인 방안이라 볼 수는 없다. 결국엔 유지비로 대성의 마력이 소모되지 않는가.

‘하지만 아인프리트라면 다르다.’

란도족 중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지녔던 그를 사령 병사로 만들면 썩 괜찮은 전력이 될 터이다.

결심을 끝낸 대성은 곧장 그의 시신이 방치된 왕궁 테라스를 향했다.

목만 없이 덩그러니 놓인 시체를 내려다보는 대성의 눈이 차갑게 번들거렸다.

“<죽은 자의 기상>.”

음산한 기운을 품은 안개가 대성의 손에서 흘러나왔다.

곧 안개가 아인프리트의 유해를 감싸면서 시스템이 떠올랐다.

[‘사령단장 돌프’의 고유 권능이 일시적으로 절대자에게 전승되었습니다.]

[절대자에게 권능이 전승된 동안 마수는 해당 권능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사령단장 돌프’의 고유 권능: <죽은 자의 기상>이 발동됩니다.]

사령단장의 능력이 지배자인 대성에게 일시적으로 전승되었다.

‘영혼 수 감소’를 지녔던 시절이었다면 사령 병사를 제작해도 전투력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고기 인형만 튀어나왔을 터.

하지만 사령단장의 권능으로 만들어지는 망자는 차원이 다르다.

‘전투력이 생전과 비교해 곱절은 더 강력해지지.’

<지배>의 권능이 적용된 아인프리트를 살려놨어도, 수만에 달하는 영민을 전부 손쉽게 압도하냐고 물어보면 애매하다.

그를 강력한 가디언으로 거듭나게 하려면 차라리 이렇게 한 번 죽이고 난 뒤 사령 병사로 되살리는 편이 더 확실하다.

[망자가 성공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망자: <아인프리트>가 죽음의 군단에 등록되었습니다.]

[살아있을 적 뛰어난 맹위를 떨쳤던 그릇입니다. ‘죽은 자의 축복’이 적용되어 더욱 강맹한 전투력이 부여됩니다.]

“그으으…….”

안개가 사그라진 직후, 살갗이 흉물스레 썩은 아인프리트가 두 다리로 일어섰다.

살과 뼈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며 없던 머리가 생겨났다. 풍성했던 금발은 듬성듬성 빠져버렸지만.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대성은 입을 열어 명령을 내렸다.

“너는 오늘부터 이곳 주변과 거주민들을 수호해라. 특히 지하 공동에 있는 흡혈귀를 잘 주시하라. 내가 허락한 자들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공동 근처에 다가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알겠, 습니다.”

아인프리트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돌프나 뱃사공 보르크가 그러하듯, 평균선 이상으로 강한 사령 병사는 말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디언도 두었겠다, 이제는 집에 설치한 체크포인트를 이용해 귀국하려던 찰나에-.

“한대성! 그 한대성이란 인간 당장 나오라고 해!”

“이대로는 우리도 못 참아! 감히…… 감히 폐하를 죽이다니!”

“복수해서 그분의 원한을 갚겠다!”

아래쪽에서 웬 소란이 들려왔다.

난간 밑을 내려다보니 백여 명가량의 란도족이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그들은 연신 폐하의 복수 운운하며 고성방가를 질러댔다.

대성은 피식 실소했다.

‘알기 쉽군.’

구태여 사정을 캐묻지 않아도 저들의 의중과 성향이 짐작되었다.

쉽게 말해 힘의 노예들.

수 명이 쥐어짜이고 고혈이 빨려도 마법이라는 힘을 얻었으니 괜찮다는 사상을 지닌 것이다.

달리 말해 저들에게 있어서 엔베트 로젠은 힘을 베풀어준 은인.

그래서 그녀를 몰락시킨 대성에게 뒤늦은 복수를 하러 여기까지 쳐들어온 게 틀림없다.

‘기도 안 차는군.’

대성의 관점에서는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부류.

그는 저들이 원하는 대로 모습을 드러내 주기로 했다.

평소였다면 상대할 가치조차 없었겠으나, 지금은 좀 확인해두고 싶은 게 있었으므로.

난간 아래로 몸을 던진 대성이 땅에 착지하자 그들의 표정에 험악함과 긴장감이 뒤섞였다.

“나왔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 이익…….”

무리에서 중심을 지키던 자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이 불한당아, 잘 들어라! 폐하는 무기력했던 우리에게 힘을 베풀어주신 위대한-.”

“닥쳐라. 그만 지껄여도 된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였군.”

어차피 뻔한 말을 계속 들어봤자 귀만 따가울 뿐이다.

대성은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길로 잠깐 남자를 훑어보더니 물었다.

“그따위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면 어디 삶이 좀 행복해지나?”

“뭐, 뭐…….”

“그 여자는 너희에게 힘을 줬다. 맞다. 대신 너희는 생명력을 제물로 바쳐야 했지. 목숨이 죽음에 가까워지는데 아무리 강한 힘을 손에 넣는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모르는 소리! 약자의 삶은 살아도 산 게 아니야! 차라리 짧고 굵게 사는 게 훨씬 행복하다고!”

“아니. 약자로 살던 똥 밭을 구르던 오래 살아남는 게 최고다.”

실제로 똥 밭보다 더한 지옥에서 80년을 굴러본 그가 하는 말이기에 신빙성이 있었다.

근데 이런 말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대성은 한숨을 뱉었다.

“너희 같은 놈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생각을 고쳐먹지 못한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이, 이……!”

“그리고 고쳐먹을 수 있다손 쳐도, 나는 네놈들 도덕 선생님이 아니다. 내 말만 맞고 너희 말은 틀렸다고 훈수 두고 싶지도 않아. 사상의 자유는 존중해주지. 부디 죽어서도 그 정신머리 변치 않기를 바라마.”

마지막 한마디를 들은 그들이 낯빛을 하얗게 물들이며 경계했다.

저마다 손에서 불과 얼음, 전류 따위가 뿜어져 나왔다.

아무래도 마법을 깨우친 자들만 추려서 집결한 듯싶었다.

신경쓰지 않았다. 흉악한 기운이 영지를 물들이자 곧 인영 하나가 대성의 앞에 내려왔다.

이내 인영의 정체를 본 그들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다래졌다.

“아, 아인프리트……?!”

분명 목이 잘려 죽었던 그가 좀비가 되어 나타나자 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술 더 떠서 외관도 무척 혐오스레 돌변했으니 기가 질릴 수밖에.

대성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너의 실력을 보겠다.”

“그으윽-!!”

스릉!

아인프리트가 검집에서 마검을 뽑아내더니 앞으로 내달렸다.

적들이 어어, 하며 당황하는 사이 거침없이 난무하는 칼날이 숱한 피를 몸에 묻히기 시작했다.

‘합격.’

생전의 절도 있는 동작과는 멀어졌으나 몸짓이 한층 더 난폭해졌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움직임이다.

반격이랍시고 몇몇이 마법을 퍼부었지만, 마검 힐드는 그것들을 모조리 상쇄시켰다.

“흐윽!”

“끄아아악-!!”

“죄송,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이 남자가 따라오라고 해서……!”

패기 좋게 복수를 외치던 자들이 꼴사납게 울부짖으며 줄행랑쳤다.

물론 손속을 두지 않는 아인프리트는 저들의 도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안심하고 떠날 수 있겠어.’

혈류석과 뉴멕시코는 안전하다.

대성은 편안한 얼굴로 체크포인트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

살아있을 적 아인프리트한테 유일하게 고마워해야 할 게 있다면, 그건 한국의 게이트 프렉처를 그가 대신 해결해줬다는 점이다.

덕분에 대성은 조금이나마 질서를 되찾은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하나둘 대피소를 벗어나는 사람들로 인해 한산한 분위기와는 멀어지는 거리에서, 대성은 박정호 협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애타게 대성의 연락을 기다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신호는 세 번도 채 이어지지 않았다.

<아, 대성 씨! 소식 들었습니다. 뉴멕시코 사태를 해결하셨다고……. 아, 아니. 그보다 하늘 위에 저 균열들에 대해 뭔가 아시는 게 있습니까? 아, 또 어제오늘 벌어지고 있는 일들까지 해서……!>

어지간히 패닉 상태였는지 박정호가 횡설수설했다.

대성은 수화기 너머를 향해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설명해드리죠.”

<아, 역시 대성 씨는 이 모든 것의 정체를 알고 계셨군요!>

“대신.”

<…….>

“성명문을 내고 싶습니다.”

<성명문이요……?>

“협회 쪽이든 대통령이든, 아무나 저를 대변해 생중계로 발표해 줬으면 합니다.”

자정이 지나면 지구에 벌어질 일들. 그리고 혈류석에 관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만 했다.

“전 세계가 방송을 지켜보게 만들어야 합니다. 오래 걸려도 12시간 안에 말이죠. 가능하시겠습니까?”

<…….>

박정호가 침묵했다. 고민하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12시간 안에 자리를 마련할 수 있냐 없냐 여부는 둘째치고서라도,

일국의 협회장이나 대통령도 아닌 일개 개인의 성명문을 전 세계에 생중계로 발표한다? 이 얼마나 현실성 없는 이야기란 말인가.

원래 같았으면 그럴 순 없다며 묵살했으리라.

부탁한 게 ‘한대성’이란 남자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대성 씨의 성명문이라면 전 세계 모든 사람이 귀를 기울일 겁니다.>

“가능하다는 말씀이군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대성 씨는 한국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구세주와 같은 존재예요.>

구세주.

들어본 적 없는 말에 대성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지옥에서 돌아오고, 지옥의 괴물들을 거느리는 남자에게 빗대기엔 블랙 코미디 같은 표현이었다.

하지만 박정호는 한없이 진지했다.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도, 아부를 떠는 것도 아닌…….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제가 책임지고 사람들에게 전하겠습니다.>

진심이 묻어있는, 그런 목소리다.

***

결과만 말하자면.

성명문은 전 세계 보도국의 생중계를 통해 무사히 발표될 수 있었다.

요지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혈류석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두 번째는…….

자정이 지나는 순간 지구에 ‘2차 대격변’이 벌어진다는 사실.

발표가 끝남과 동시에 전 세계의 인터넷 커뮤니티가, 그리고 소셜 네트워크에 불이 났다.

-방금 방송 봤는데 저게 진짜면 우리 다 죽은 목숨 아님?

-ㄹㅇ이면 우리가 이렇게 컴터나 핸폰 타자 뚜들기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건데.

└ ㅈㄹ 몬스터가 우리 엄마도 아니고 컴퓨터랑 핸드폰을 뺏겠냐. 세상이 망해도 할 놈들은 한다.

-혈류석인가 뭔가 그게 뉴멕시코에 있다며. 거기로 가야 하나.

└ 보다 졸았냐. 곧 세계 각지에 보급된다고 했잖아. 기다리셈.

-개꿀. 나 마법사 되는 거?

-한대성이 구라쳤다에 손모가지 건다. 아니면 자르는 거 인증함.

└ 캡쳐했다. 뒤져도 니 손모가지 자르는 건 보고 뒤질 거 ㅅㄱ

└ 이놈 유명한 어그로임 다들 먹이 ㄴㄴ해

└ 구라라고 해도 뭐 어쩌겠음. 청문회도 ㅈ깐게 한대성인데 ㅋㅋㅋ

└ 한대성 정도면 심심해서 구라친 거라고 해도 난 용서해줄 거

여론이 어찌 됐든.

인터넷 등지에서 어떻게 돌아가든.

시곗바늘은 움직인다.

그리고.

시침이 ‘12’를 가리킨 순간.

-팟.

빛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