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133
“춥다……. 아직 가을인데 왜 이렇게 날씨가 쌀쌀하냐.”
“10월이면 뭐 거의 겨울이지. 핫팩이라도 하나 줄까?”
“엄마, 나 배고파.”
“조금만 참으렴. 나중에 아저씨들이 먹을 거 나눠줄 거야.”
“아, 한밤에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또…….”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어.”
“대피소에서 나온 지 하루도 안 됐다, 썩을.”
“진짜 올해 안에 종말 같은 거 오는 거 아냐?”
“아, 재수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여보세요, 엄마? 어. 어, 나도 지금 사람들이랑 대피소로 가고 있어. 거기 동네는 좀 어때요?”
“앞에 빨리빨리 좀 갑시다!”
“아, 밀지 마요. 아줌마만 급해?”
“와, 진짜 이렇게 일 벌여놓고도 방송에서 구라친 거면 진짜…….”
“자정이라 그랬나? 지금 몇 시야?”
“11시 59분.”
“1분 남았네.”
“…….”
“…….”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썅, 뭐야. 진짜 구라친-.”
팟-!
천지가 점멸했다.
***
방송을 믿고 대피소로 향하던 사람들도, 성명문을 거짓말로 치부하고 피난 행렬에 끼는 것을 거부한 사람들도.
그 순간만큼은, 신기하게도 모든 이가 동시에 고개를 들어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히 높은 창천에서 선명하리만치 새하얀 빛살이 쏟아졌다.
인지를 초월한 현상에 사람들은 그 어떤 반응도 없이 그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넋을 잃고 말문을 잃었다.
곧 하얀빛이 만물을 모조리 감쌌을 땐 구름도, 태양도, 달도, 별도,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자연이라는 개념이 소멸했다.
오직 순백의 세계만이 이 땅에서 저 땅까지 하염없이 이어졌다.
그곳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감각을 잃은 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먼지 같은 상태가 되어 그저 떠다닐 뿐이었다.
시간의 흐름조차 모호하게 되어 누구는 이 순간이 몇 초, 누구는 며칠, 누구는 몇 년, 누구는 몇 세기처럼 느껴졌겠지만-.
평등하게도 빛이 허물어졌을 땐 이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하얀 풍경’은 사라지고 난 뒤였다.
[시스템의 지각(知覺)을 초월한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차원의 시공간이 지구와 동화되었습니다.]
[모든 차원 종족의 언어 체계가 하나로 통일됩니다.]
***
풍경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대피소로 향하던 사람들은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 신음을 흘렸다.
“으, 으으…….”
“방금 무슨 일 있었나?”
꿈이란 게 간혹 그렇듯,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한 내용을 전부 기억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저 꿈을 꾸었다는 사실만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오를 뿐.
지금 사람들의 상태가 그러했다.
그들은 가슴 한편이 뻥 뚫린 듯한 감각을 느끼며 하나둘씩 눈을 떴다.
“으악!”
곧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스팔트가 쨍쨍한 태양 아래 오랫동안 달궈진 것처럼 무척 뜨거웠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살이 아릿해질 만큼 차가웠던 바람이, 지금은 열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게 아닌가.
땅과 바람의 이변에 느꼈던 충격이 다 가시기도 전에, 사람들은 몸을 부르르 떨며 전율해야만 했다.
“맙소사…….”
“여, 여기는 어디야?”
시야에 들어차는 모든 광경이 낯설고 새로웠다.
눈에 익었던 빌딩 숲이 사라지고, 작고 허름한 건축물이 군데군데 세워진 모래사막이 펼쳐진 것이다.
이것이 대성이 경고한 ‘2차 대격변’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곧장 떠올린 이는 거의 없었다.
이성적으로 상황을 따질 만한 겨를이 그들에겐 없었으므로.
“벌레처럼 작고 하찮구나!”
그 순간, 고막이 고통스러워질 만큼 쩌렁쩌렁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이번엔 또 뭐냐고 따지는 듯한 눈으로 하늘을 보았다.
후웅-!
위압적인 거체(巨體)가 날개를 휘저으며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으나, 하늘에 뜬 실루엣을 눈에 담고도 저것의 정체를 모르지는 않았다.
“드, 드래곤……?”
인간의 상상 속에나 존재하던 전설의 신수(神獸)!
그것이 맹풍을 일으키는 날개를 펄럭이며 지상에 당도했다.
사람들이 현실에서 그나마 보았던 드래곤이라면, 대성이 거느린 섬멸룡만이 유일무이하다.
그런데도 누구도 저것을 섬멸룡으로 착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혼란스런 와중이라지만 붉은 용을 보고도 섬멸룡이라고 혼동할 만큼 사람들은 멍청하지 않았으니까.
“낯짝들을 보아하니 확실히 알겠군! 단언컨대 너희는 절대로 우리 용족(龍族)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쿵!
바닥에 완전히 내려앉은 붉은 용이 콧김을 뿜으며 그리 소리쳤다.
바로 눈앞에서 천둥이 휘몰아치는 듯한 기세에 짓눌린 사람들은 몸을 덜덜 떨며 경련했다.
“히, 히익…….”
그것은 지척에서 사람들을 안내하던 군인들도 마찬가지.
군인들은 두 손에 뻔히 소총을 쥐고 있었음에도 감히 방아쇠를 당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드래곤. 드래곤이란 말이다.
트롤에게 겨우 자상 입히는 정도가 한계인 총알이, 저 괴물 중의 괴물한테 먹힐 리가 없잖은가.
붉은 용은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들을 둘러보고는 실소를 지었다.
“노예로 써먹지도 못하겠군. 그럼 그냥 얌전히 고깃덩어리나 되어라.”
쩌-억!
붉은 용이 입을 벌리고 시커먼 목구멍을 드러낸 순간.
사람들은 실성한 것처럼 미친 듯이 절규하며 울부짖거나 눈을 감았다.
그리고… 콰직-!!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소리가 섬뜩하게 일대를 집어삼켰다.
“…….”
눈을 질끈 감은 채 바들바들 떨던 사람들이 의아함을 느끼고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일반인이라면 평생 한 번 구경할까 싶을 정도로 막대한 피 분수가 솟구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선혈을 쏟아내는 게 인간들은 아니었다.
“뭐, 뭐냐…….”
붉은 용보다 몇 곱절은 더 커다란 검은 용이 녀석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넣은 것이다.
하아!
검은 용, 섬멸룡의 웅장한 자태를 본 사람들이 질식하기 직전에 물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숨을 뱉었다.
환호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모두가, 나지막한 감탄을 터뜨리며 가슴 깊이 안도할 따름이다.
한편.
같은 용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긴 붉은 용은 핏발이 선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렸다.
“너, 너는… 우리와 같은 드래곤……. 그것도 흑룡(黑龍)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이런 배반을-.”
“아군이었던 적이 없는 상대에게 배반이란 말은 쓰지 않는다.”
그 섬찟하리만치 낮고 차가운 목소리는 섬멸룡이 아닌, 녀석의 등판에서 들려왔다.
붉은 용은 섬멸룡의 등에 탑승한 대성의 모습을 발견하고 충격에 사로잡혔다.
“이 별의 미물이 드래곤의 등에 올라타다니! 이럴 순 없는 법이다!”
“그건 너희 세계 법도겠지. 우리 땅에서까지 강요하진 마라.”
“이놈-!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드래곤의 위상을 모욕하다니!”
본디 드래곤은 그 어떤 차원의 종족도 자신들의 위에 두지 않는다.
거신(巨神) 족도, 해신(海神) 족도 상관치 않는다. 온 우주를 통틀어 오직 용족만이 지고지순하며 최상위에 군림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한낱 인간이 흑룡의 등에 탄다? 환장할 노릇이다.
화르르륵-!!
격노한 붉은 용의 동체가 강렬한 화염에 둘러싸였다.
이내 붉은 갑주를 전신에 걸친 용 머리의 기사(Knight)가 불길을 뚫고 섬멸룡의 등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폴리모프.
놈은 용인(龍人)으로 변하여 대성과 맞부딪치기로 작정한 것이다.
“흑룡이라고 해도 미물에게 굴복한 이상 나는 이 자를 동포로 인정할 수 없다! 너를 죽인 다음 이 흑룡도 내 손으로 숨통을 끊어버릴 테다!”
“유언 잘 들었다.”
“뭐라?”
파지지지직-!!
느닷없이 붉은 용의 발아래서부터 시커먼 전격이 가시처럼 솟구쳤다.
“헉……?!”
검은 벼락이 놈을 휘감은 순간 철제 갑주가 사정없이 으스러지고 온몸이 불길로 타올랐다.
염(炎)과 가장 친밀한 붉은 용마저도 견뎌낼 수 없는 열기!
[허락하지 않은 존재와의 접촉에 섬멸룡이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섬멸룡이 <디펜스(Defense)>를 발동합니다.]
진정으로 섬멸룡을 적으로 두면 안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섬멸룡은 방공호보다 단단한 가죽과 더불어 또 하나의 갑옷이라 칭할 수 있는 <디펜스>를 지녔으니까.
‘서슴없이 달려든 걸 보니, 녀석도 <디펜스>의 존재를 몰랐나 보군.’
용들의 섭리는 대성도 잘 알지 못하는 영역이나, <디펜스>가 섬멸룡만이 지닌 고유한 권능이란 점은 얼추 짐작이 갔다.
서걱-!
대성은 불에 타며 괴로워하는 붉은 용의 몸통을 업화대검으로 절반으로 갈라냈다.
사아악-.
그러자 붉은 용의 시신이 발끝부터 갑옷째로 소멸하기 시작했다.
하나 온몸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놈의 유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자리에 뼈다귀 하나가 굴러다녔다.
[적룡(赤龍)의 ‘드래곤 본(Dragon bone’)을 발견했습니다.]
[용의 뼈는 한시적인 능력치 상승 및 용아병의 제작을 위한 매개물로 사용됩니다.]
애당초 용의 뼈를 얻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기에 대성은 의외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필요한 걸 찾았다고 말하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뼈를 집어 들었다.
‘능력치 상승엔 관심 없다.’
지속 시간이 영구적이라면 모를까, 일시적인 효과에 혹하여 아까운 뼈를 낭비할 이유가 없다.
그는 용의 뼈를 더 적절한 용도로 써먹을 방안을 알고 있었다.
아공간 포켓 너머로 심드렁하게 뼈를 휙 던져넣던 그때.
“가지 마세요!”
“그냥 저희 곁에 계속 있어 주시면 안 될까요? 흐어엉…….”
“제발…… 제발 떠나지 말고 저희를 지켜주세요. 너무 무섭습니다.”
아래 있던 사람들이 그리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손을 뻗어오고 있었다.
분명 대성이 똑똑히 ‘2차 대격변’의 발발을 예고했음에도 그들은 작금의 사태에 맥을 못 추었다.
지금 그들에게 있어서 대성은 참된 의미로 구세주요, 목숨을 맡기고 붙들 수밖에 없는 동아줄인 것이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계속 있어 달라는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지.’
당장 우선순위에 놓인 일을 처리하러 움직여야 하므로.
그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들 진정하십시오. 조금 있으면 사정이 나아질 것입니다.”
“예? 나아지다니요?”
대답하지 않았다.
펄럭-!
대성은 짤막한 한마디만 남기고는 섬멸룡을 타고 어딘가로 훌쩍 날아가 버렸다.
아아……. 사람들이 절망에 빠진 얼굴로 탄식했다.
***
“아, 아저씨…….”
“이봐요…….”
유리창 바깥을 내려다보는 지수와 혜정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아까부터 연신 이성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불가사의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진 탓이다.
하얀빛이 세상에 내려앉고 지구가 이계로 돌변한 거야, 사실 대성이 누누이 경고해왔던 사항이라 의외로 놀라지 않았다.
아니, 놀랍긴 했으나 그보다 충격적인 현상은 따로 있었다.
“우, 우리 집이 왜 이렇게 됐어요? 아, 아니 여기 집이 맞긴 한 건가? 아저씨들은 뭐 아는 거 없어요?”
지수가 앞을 가로막은 발라르크와 센티넬의 등을 바라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얀빛이 사라지자 집이 사라지고 웬 어둑한 고성의 내부가 펼쳐졌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2차 대격변은 지구의 건축물을 시공간에서 삭제하고 그 위로 이계의 생리를 덧씌워 버렸다.
그 여파로 타워팰리스가 통째로 사라짐과 동시에 ‘발라르크의 철성’의 로드가 풀려버린 것이다.
“…….”
발라르크와 센티넬은 지수의 말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차, 창밖에 저건 또 뭐고요?”
무시한 게 아니다. 대답 같은 걸 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께에엑-.”
“크르르-.”
“푸르릉-!”
유리창 너머로 괴기스러운 울음소리가 난무했다.
와이번(Wyvern).
녀석들이 한여름 밤의 모기처럼 떼를 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까 붉은 용의 괴성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이 근방은 놈이 지배하는 서식지가 되었나 보군.’
발라르크가 뇌창(雷槍)을 꾹 쥐며 생각했다.
면적이 크든 작든, 종족 내에서 서열이 어찌 되든, 용들은 저마다 하나씩 영토를 지닌다. 그럼 그곳이 곧 용의 ‘둥지’로 불리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성채, 그리고 마을이 붉은 용의 둥지가 된 모양이다.
덧붙여 여기서 유감스럽다는 건-.
“센티넬, 너는 여기서 주군의 가족분들을 모시고 있어라.”
“……우.”
“밖의 저놈들은 내가 전부 격멸하도록 하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발라르크가 단언컨대, 한 마리도 남김없이 해치우겠습니다.”
하필 둥지를 튼 곳이 용살(龍殺)의 사냥꾼이 기거하는 곳이라는 점.
저 파충류들은 이제부터 그 점을 심히 유감스럽게 여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