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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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눈에 거슬린다.”
100여 마리에 달하는 와이번이 쉬지 않고 철성 주변을 배회했다.
얼어붙은 시간에서 벗어난 후, 이곳 일대는 그들이 모시는 붉은 용의 둥지로 둔갑하였다.
대변환의 과정에서 둥지의 미관을 해치는 건축물은 전부 사라진 줄 알았건만, 어째선지 저 거성(巨城)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적룡께서 저걸 보신다면 분명 격노하실 거야.”
“그분이 보시기 전에 우리가 치워버려야 하는데…….”
“함부로 다가가지 마. 심상찮은 기운이 풀풀 풍겨 나온다.”
완성형 드래곤조차 되지 못한 게 와이번이라고는 해도 용족은 용족.
성채 하나쯤 무너뜨리는 것쯤이야 그들에겐 일도 아니다.
하지만 저건 다르다.
용살(龍殺)의 기운. 인간으로 따지면 독가스와도 같은 음험한 기운이 거성 전체에서 요동치고 있었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와이번 무리가 초조해하던 그때.
쐐애액-.
콰직-!
“께에엑-!!”
흡사 물살을 가르듯 날아온 한 자루의 창날이 와이번의 동체를 꿰뚫었다.
파지직-!!
거기서 그치지 않고, 창날에서 전류가 흘러나오더니 주변에 있는 다른 와이번들의 몸을 새카맣게 불태웠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와이번들이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주군께서 기거하시는 성인데 날파리가 너무 많이 꼬이는군.”
칼날처럼 뾰족한 성채의 꼭대기.
그곳에 발을 디딘 발라르크가 살기를 발산하며 말했다.
“저, 저놈이다……!”
와이번들이 날개를 움츠리며 겁먹었다.
성채의 분위기를 을씨년스레 만들었던 섬뜩한 기운의 정체가 저 검은 기사임을 직감한 것이다.
“하나뿐인 무기를 던지다니!”
“멍청하긴! 두려워할 필요 없어! 저놈은 지금 아무런 무기도 없다!”
그들은 발라르크가 아무런 무구도 착용하지 않았음을 발견하고는 다시 기세등등해졌다.
“……?”
발라르크는 비스듬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 시커먼 건틀릿에 뒤덮인 오른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뇌창(雷槍)에 꿰뚫려 아래로 떨어지는 와이번의 몸뚱이가 진동했다.
이내 창이 완전히 뽑혀 나오더니 발라르크의 손에 도로 들렸다.
“……!!”
무기 없는 적을 상대할 생각에 충만해졌던 와이번들의 자신감이 팍 식었다.
발라르크는 상관치 않았다. 그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창을 쥔 오른팔이 목덜미 뒤까지 당겨졌다.
파지직-!!
창날을 휘감은 노란 벼락이 이성을 잃은 광견(光犬)처럼 난폭하게 타올랐다.
“뭔가 온다!”
“브레스를 쏴-!”
소스라친 와이번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아가리를 쩍 벌렸다.
주변의 대기가 일렁이며 세찬 불길이 녀석들의 입안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
와이번 한 마리의 브레스는 위력이 보잘것없을지도 모른다.
하나 그것도 백여 개가 겹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완성형 드래곤의 브레스와 버금가는 파괴력을 지니는 것이다.
그런데도 발라르크의 표정은 태연했다. 얼굴은 투구에 가려져 있었으나, 분명 그러했다.
콰아아아-!!
머지않아서 아찔하리만치 무수한 불덩이들이 발라르크와 그의 철성 위로 일제히 쏟아져 내렸다.
‘지금.’
쐐애액-!
동시에 발라르크는 뒤로 당겼던 오른팔을 휘둘렀다. 그의 손에서 떠나간 뇌창이 우렁찬 파공음을 터뜨리며 전방으로 날아갔다.
백 개의 불덩이와 한 자루의 장창. 어느 쪽이 압도적일지는 자명했으나-.
파지지직-!!
사선으로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뇌창이 수십 자루로 분열했다.
잘게 쪼개진 파편은 또 다른 뇌창으로 화(化)하여 불덩이와 충돌했다.
-!!
어마어마한 벽력과 파동이 터져 나오며 아래쪽의 대지까지 으스러뜨렸다.
와이번이 쏜 불덩이는 수십 자루로 분열된 뇌창의 전류에 휩싸여 소멸했다.
그러나 불덩이를 집어삼킨 뇌창은 멈추지 않고 처음 쏘아졌을 때의 기세 그대로 와이번 무리를 향해 쇄도했다.
“……!!”
와이번들이 경악하기도 잠시.
뇌창은 그대로 녀석들의 가슴과 얼굴 등 급소만 정확히 꿰뚫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절명한 녀석들이 비행을 멈추고 낙하했다.
모기향을 맡은 모기처럼 허물어지는 와이번들을 내려다보며, 발라르크는 덤덤히 중얼거렸다.
“박멸 완료.”
***
《1순위 정보》
「외차원과의 동화가 완료된 후, 사용자의 거주지를 비롯한 강남구 전체가 붉은 용의 둥지가 된다.」
날짜가 바뀌고 새로 갱신된 허공록에 이러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대단히 불쾌한 내용이었으나 염려는 하지 않았다. 적어도 용이 상대일 경우, 대성은 발라르크의 실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으니까.
‘용의 뼈를 긁어모을 기회다.’
대성은 오히려 가까운 지점에 용의 둥지가 생겼다는 사실을 형편 좋은 우연이자 기회로 여겼다.
허공록의 글귀를 확인하자마자 그는 곧장 사람들을 위협하는 붉은 용부터 사냥했다. 그리고 녀석의 뼈를 얻었다.
필요한 걸 획득한 대성이 집으로 돌아갔을 땐, 이미 철성 주변에 와이번의 시체가 즐비했다.
“번거롭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서 제가 전부 처리했습니다. 가족분들께도 탈이 가지 않도록 하였나이다.”
“잘했다.”
대성은 발라르크를 가볍게 칭찬한 뒤, 사방에 어지러이 널브러진 와이번들의 시체를 둘러보았다.
그를 향해 발라르크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뒤처리는 저랑 센티넬이 하겠습니다. 주군께서는 편히 쉬고 계시길.”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예?”
“용아병을 만들기 위해선 이놈들을 제물로 바쳐야 해.”
용아병. 용의 이빨로 만들어진 전사.
대성은 그것들을 만들어낼 작정으로 붉은 용의 뼈를 노린 것이다.
이윽고 그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의식을 집중했다.
[필드, ‘섬멸룡의 둥지’를 구현합니다.]
[용의 둥지는 고정된 형태를 지니지 않고 있습니다. 해당 지역을 ‘둥지’로 삼으려면 섬멸룡이 선포하게 하십시오.]
둥지라 하여 까치집 같은 외관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용은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다. 녀석들은 원하는 영토를 발견하고 그곳을 자신이 둥지로 삼겠다고 선언하면, 그때부터 지형지물 불문하고 무조건 ‘둥지’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섬멸룡의 둥지를 구현하는 행위 또한, 지금까지의 필드 구현과는 다른 메커니즘을 거쳐야 한다.
“지금부터 이 동네가 너의 둥지가 트일 곳이다. 선포해라.”
“크르르-.”
대성이 섬멸룡을 향해 명령했다.
주인의 명령을 거슬러서는 안 될 노릇. 녀석은 고분고분하게 그 말을 따랐다.
크오오오오오-!!
막강한 강제성을 지닌 용언(龍言)이 섬멸룡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시스템 메시지가 우후죽순 등장했다.
[섬멸룡이 붉은 용의 둥지를 자신의 새로운 둥지로 삼겠다고 선포합니다.]
[이미 둥지를 점했던 자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섬멸룡의 선포가 오롯한 힘을 발휘합니다.]
[‘지배의 선포’가 완료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섬멸룡은 주인을 제외하고 둥지 내에 발을 들인 모든 존재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높은 격을 지닌 방어막이 둥지를 둘러쌉니다.]
[둥지를 수호할 ‘용아병’을 제작하실 수 있습니다.]
선포가 성공적으로 끝남과 함께, 인근에 서늘하게 흐르던 사이한 기운이 말끔히 사라졌다.
도곡동 전체가 원래는 붉은 용의 둥지였으나 이제는 섬멸룡의 것이 되었다.
즉, 적어도 강남구에 사는 사람들의 생존 확률은 급격하게 올라갔다는 의미.
‘이제 발라르크의 철성만으로는 가족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오늘부터 지구는 ‘지구’라고 표현할 수도 없는 이계 그 자체가 되었다. 비주기적으로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던 시절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그야말로 암흑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런 시대에 지수와 혜정의 안전을 확보하려면 섬멸룡의 둥지를 구현하는 수밖에 없다.
‘둥지를 둘러싼 보호막으로는 부족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용아병도 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안심할 수 있어.’
그리 생각한 대성은 아공간에서 붉은 용의 뼈를 꺼냈다.
본디 블랙 드래곤의 둥지를 능히 지킬 만한 용아병을 만들려면, 적어도 섬멸룡의 송곳니를 두어 개는 뽑아야 한다.
하지만 대성은 앞으로도 소중히 거느리고 다닐 섬멸룡을 이빨 빠진 드래곤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섬멸룡의 송곳니를 대체할 만한 매개물로 붉은 용의 뼈가 필요한 것이다.
콱-!
대성은 씨앗을 심듯이 붉은 용의 뼈를 지면에 견고히 쑤셔 박았다.
[‘적룡의 뼈’가 ‘섬멸룡의 둥지’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지금부터 둥지를 수호할 용아병을 최대 100기까지 제작하실 수 있습니다.]
[둥지의 지배자와 비교해 턱없이 낮은 격을 지닌 제물입니다. 용아병을 제작하여도 둥지를 수월히 수호할지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강력한 용아병을 제작하시려면 지배자의 치아 혹은 그를 대체할 제물을 준비하십시오.]
적룡의 늑골 뼈라 하여도 섬멸룡의 치아 두어 개를 대신하기엔 부족하다. 어떻게 보면 두 녀석 간의 격차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다행히 주변에 널린 게 제물이었다.
“이곳에 있는 와이번 전부의 뼈와 살을 제물로 삼겠다.”
100마리에 달하는 와이번의 피와 살, 뼈라면 어찌어찌 섬멸룡의 송곳니 하나에 버금가는 제물이 되리라.
시스템이 대성의 말을 접수하자, 와이번들의 유해가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적룡의 뼈’, ‘와이번의 시체(x97)’를 제물로 바쳐 용아병을 제작합니다.]
[올바른 전투력을 지닌 용아병 100기가 탄생합니다.]
스르륵-.
바로 그때, 둥지 전역에 드리운 그림자가 마치 일어나는 것처럼 솟아올랐다.
그림자는 어둠의 장막을 걷어낸 후 곧 하얀 갑옷을 걸치고 커다란 장병기를 움켜쥔 기사로 변하였다.
용아병!
갑옷부터 무구까지 전부 섬멸룡의 이빨과 같은 재질로 구성되었다. 이빨이라고는 해도 웬만한 합금은 명함도 못 내미는 경도와 파괴력을 지녔으리라.
사방을 에워싼 용아병을 돌아보며, 발라르크는 진심으로 경탄했다.
“흠잡을 곳이 없군요.”
“너는 지금까지 했던 대로, 용아병들과 함께 내 가족을 목숨 걸고 지켜라.”
“주군께선 언제쯤 돌아오실 예정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글쎄. 짧은 여정은 아니겠지.”
먼 곳을 바라보며 대성은 그리 대답했다. 그가 알고 있는,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의 풍경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근원의 파편을 모아, 시간을 되돌린다.
자신은 지금부터 그 아득한 여정의 길을 걸어가야만 할 것이다.
“…….”
대성은 문득 고개를 돌려 철성을 올려다보았다.
유리창 너머, 만감이 담긴 눈길로 그를 바라보는 혜정과 지수의 얼굴이 보였다.
‘얘기는 하고 떠나야겠지.’
그 정도 늑장은 부리고 싶었다.
***
혜정과 지수는 오랫동안 떠나겠다는 말을 전하는 대성을 말리지 않았다.
많은 걸 묻지도 않았고, 그저 제발 살아서 돌아오라는 부탁만 할 뿐이었다.
가지 말라고 말해봤자 대성이 순순히 따를 성격이 아님을, 그 둘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한국은 당분간 안전하겠지.’
마음 놓은 이유는 단순히 섬멸룡의 둥지를 강남구에 두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대성은 한강을 중심으로 동쪽, 서쪽, 북쪽 방위에 다수의 사령 병사와 황준영 일행을 배치했다.
지옥의 힘을 물려받은 그들이라면 아마 든든한 한반도의 수호자가 되리라.
‘남은 건…….’
근원의 파편을 모으는 것.
대성에겐 ‘통찰안’이 있었기에 이번에야말로 어느 차원들이 고격(高格)의 근원을 지녔는지 헤아릴 수 있었다.
-마해(魔海)
-부유공장(浮遊工場)
-헥카르
-아틀라스
-환상성(幻想星)
이들이 내재한 근원으로부터 파편을 끌어모으면, 시간을 되돌리는 성물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근원까지 도달하는 방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군.’
어느 차원이 격 높은 근원을 지녔는지 알았다 한들, 정작 그 근원에 도달하는 방법을 모르면 말짱 도루묵이다.
혹시나 해서 허공록을 펴들었으나 역시 관련한 글귀는 적혀 있지 않았다.
2순위부터 4순위까지 전부 어느 지역에 어떤 몬스터가 나타났는지 따위의 뜬구름 잡는 내용만 가득했다.
만능인 줄 알았건만, 어째 이용하면 이용할수록 품질에 실망감만 든다.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없겠어.’
알아낸다고는 해도 자력으로 고민해봤자 맨땅에 머리를 처박는 짓이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해답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자들이라면 분명 존재했다.
‘헥카르.’
온 우주를 통틀어 ‘주술’이란 것에 가장 통달하였다고 불리는 종족들!
실제로 그들이 만든 ‘비전’ 덕분에 대성은 천상에 발을 디디거나 지구의 근원과 접촉할 수 있지 않았던가.
‘헥카르족이라면 틀림없이 근원으로 도달하는 비법을 알고 있겠지.’
물론 그들이 우호적으로 나올지 말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중요한 건 첫 목적지가 정해졌다는 사실이었다.
대성은 곧장 ‘지도’를 열람해 헥카르의 차원이 내려앉은 위치를 살펴보았다.
“검색어, ‘헥카르’.”
찾고픈 차원이 있다면 말로 언급만 해도 시스템이 자동으로 좌표를 찍어준다. 덕분에 미련하게 샅샅이 지도를 뒤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검색 완료.]
[‘헥카르’ 차원의 좌표를 지도 위에 표시합니다.]
직후 지도 위로 붉은 점이 찍혔다. 헥카르 차원이 자리한 좌표였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한 대성은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