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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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위로 찍힌 좌표를 본 대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본디 좌표란, 한 차원당 커다란 붉은 점이 4개에서 5개, 많게는 10개 정도 분포되어 표시된다.
한반도로 비유하자면 여러 개의 광역시가 하나의 땅에 몰려있는 게 아니라 지구 곳곳에 마구잡이로 분산된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대성이 현재 보고 있는 ‘헥카르’ 차원의 위치는 명백히 이상했다.
‘너무 많아.’
많았다. 거의 지도 절반 이상이 붉은 점으로 뒤덮일 정도로.
지역을 나타내는 좌표라기보다는 인구 밀집도에 가까울 수준이다.
이 말인즉슨 지구의 반절이 헥카르 차원과 동화되었다는 의미다.
‘그럴 리가 없지.’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대성은 고개를 저었다.
당장 지금 대성이 섬멸룡을 타고 활공 중인 지역도 지도상으론 헥카르의 땅에 속해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직접 부딪쳐봐야겠군.’
설마하니 ‘통찰안’이 거짓된 정보를 제공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어떠한 의미가 있을 터.
대성은 섬멸룡을 몰아 제일 가까운 곳에 찍힌 붉은 점으로 향했다.
***
역시 부딪쳐보니 무슨 의미인지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좌표를 따라 대성이 도착한 곳은 산세가 험준한 산자락 어딘가였다.
그곳에 전신이 기이한 문신으로 뒤덮인 이종(異種)의 남자가 널찍한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헥카르족.’
온몸에 문신이 가득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남자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대성이 저 남자를 이종이라 단언한 것은, 그에게 ‘라미쉬’와 똑같은 기운이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바위 위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평범한 인간은 아니로군.”
“나를 아는가?”
“눈을 보니 알 수 있다. 많은 살생을 담아왔던 눈이야. 죽음이 우물 속 구정물처럼 일렁이는군.”
그제야 남자가 감았던 눈을 떠 대성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남자는 흰자가 온통 새카맣게 물들어 감정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헥카르족은 영적인 영역에서 궤를 달리한다던 자들. 관상을 읽어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리라.
“너 같은 자가 희희낙락 등산하다 우연히 나와 마주쳤을 리는 없고……. 무슨 볼일이 있기에 나를 찾아온 것이겠지.”
“너희 종족이 거주하는 땅이 이곳에 있다고 들었다.”
“우리가 있는 곳 말이냐? 안 됐지만, 그곳은 네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현계(現界)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무슨 말이지?”
“우리는 얼어붙은 시간으로부터 이제 막 해방되었으나, 불행히도 중심을 잃고 방황 중이다. 바로 잡기 전까진 신중해져야만 하지.”
중심을 잃고 방황 중이라니, 저건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잡소리가 많아서 인내심의 한계가 왔으나, 일단 대성은 짜증을 삭혔다.
뭔지는 몰라도 저 남자에게 진정한 ‘헥카르’의 땅을 밟을 수 있는 열쇠가 있으리라고 짐작했으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이면의 땅, 유계(幽界)에 잠적하여 당분간 힘을 기르기로 했다. 나와 몇몇 헥카르족은 인간으로 위장하여 유계와 현계의 다리 역할을 하는 ‘안내자’의 직을 맡고 있지.”
“그렇다면 그 유계로 도달하는 방법을 내게 말해라.”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영혼이 된 채 유계로 향하는 길을 걷는 것이고…….”
“…….”
“남은 하나는 이 산중 어딘가에 내가 숨긴 ‘유계의 문’을 품은 영물을 찾는 것이다. 그 영물의 등을 가르면 우리가 있는 곳과 이어진 문이 나타나지.”
첫 번째 방법은 말할 필요도 없으니, 이 경우엔 그 문을 품었다는 영물을 통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도 위에 무수히 찍힌 붉은 점도, 헥카르의 땅이 아닌 눈앞의 남자와 같은 ‘안내자’를 표시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영물을 어디에 숨겼는지 말해라.”
“멍청하기는. 말하라고 해서 순순히 대답할 거면 애당초 내가 영물을 숨기지도 않았겠지. 녀석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으면 우선 내가 제시하는 ‘다섯 가지 난관’을 전부-.”
이때, 남자가 하던 말을 멈췄다.
대성이 두꺼운 손으로 남자의 목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바위 위의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당혹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짓이냐?”
“말하라고 했을 때 순순히 대답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다.”
우득-!
그대로 호두알을 으깨듯 남자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꺽! 하는 짧은 신음과 함께 남자의 몸이 축 늘어졌다.
영물의 위치를 알고 싶으면 다섯 가지 난관을 돌파하라고?
‘한가롭게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대성은 <귀안>을 열었다.
보랏빛 안구가 죽은 남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다.
영적 세계를 탐구하는 자라서 그럴까.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영상도 마약을 흡입하고 환각을 보는 것처럼 괴기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기억을 들여다보는 쪽이 오히려 속이 메스꺼워지고 현기증이 일었다.
‘이거다.’
하지만 대성은 꿋꿋하게 불쾌함을 참아내고 놈이 숨긴 영물의 위치를 알아냈다.
어지간히 숨기고 싶었는지,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면 찾으려고 해도 절대 찾을 수 없는 은밀한 장소다.
‘땅속 깊숙이 묻은 나무의 옹이구멍 안쪽이라니.’
불가피하게 땅을 파게 생겼다.
물론 직접 할 생각은 없었다. 나무가 묻힌 지점에 도착하면 사령 병사를 불러낼 생각이었다.
5분쯤 걸었을까.
대성은 번거롭게 사령 병사를 불러낼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부 차원의 존재를 인식함.>
<경고한다. 채굴 작업을 방해하지 마라. 거기서 다섯 보 이상 다가오면 제거하겠다.>
검회색 철갑을 전신에 두른 이족보행의 존재들.
평탄하고 냉엄한 기계 목소리. 사각진 얼굴에 번뜩이는 붉은 점.
‘기신족(機身族)이로군.’
모든 개체가 기계로 구성되었다 하여 기신족으로 불린다.
기계라고는 하나, 인간의 손아귀 아래 철저히 지배당하는 ‘기계’와는 태생 자체가 다른 자들이다.
스스로 사고하고, 자아의식을 갖춘 시점에서 저들은 하나의 어엿한 ‘생물’이었다.
‘채굴 작업이라면…….’
대성은 저들이 하고 있던 작업이란 것을 바라보며 턱을 쓸었다.
두 마리 모두가 양손을 드릴처럼 변형해 땅에 구멍을 파고 있었다.
분명 ‘유계의 문’을 품은 영물을 찾으려 함이 틀림없다.
<땅속에 나무 한 그루가 매장된 것을 발견했다.>
<‘지구’의 자연 섭리로는 발생할 수 없는 현상이다.>
영물의 존재는 아직 모르고 지저(地低)에 나무가 묻혀 있다는 사실에 이상함을 느껴서 행동에 착수한 듯싶었다.
‘잘됐군.’
마침 땅을 파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던 참이다.
그냥 이대로 저들이 하던 일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상책이리라.
두두두-!
드릴이 격렬하게 회전하며 재빠르게 지면을 파고들었다.
그동안 대성은 저들이 경고한 대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땅속에 묻힌 나무가 모습을 드러내는 건 금방이었다.
<찾았다. 역시 나무가 여기 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매장했군. 조사가 필요함. 스캐닝을 시행-.>
쾅-!
묵직한 주먹질 한 방이 스캐닝 운운하던 기신족의 머리를 박살 냈다.
갖은 부품이 얽히고설킨 복잡한 단면이 드러나며 놈이 침묵했다.
놈들이 삽질(?)을 끝마치기 무섭게 대성이 진각을 밟은 것이다.
<제거함.>
철컥-!
남은 기신족 한 마리가 당황하지 않고 드릴이었던 양손을 ‘포(砲)’와 같은 형태로 변환시켰다.
물론 그것이 온전히 불을 뿜도록 내버려 둘 대성이 아니다.
그는 방금 박살 낸 기신족의 머리를 투포환처럼 던졌다.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며 날아간 머리가 남은 기신족에 직격했다.
<치직-. 칙-.>
놈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뱉더니 얼마 안 가 불빛을 꺼뜨리며 마찬가지로 침묵했다.
대성이 손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어내며 땅속에 묻힌 나무로 다가가려던 찰나.
[허수 공간 ‘오브’의 원석, 오리할콘(Orichalcon)을 발견했습니다.]
[‘발견’ 단계를 거친 오리할콘이 ‘저장’ 단계로 넘어갑니다.]
[현재 오리할콘 보유량: 250]
찌그러진 철판처럼 쓰러져 있던 기신족의 잔해가 서서히 소멸하며 메시지가 떠올랐다.
글귀를 읽은 대성은 눈을 깜빡였다.
‘이런 수확은 예상치 못했는데.’
오리할콘은 혼세를 무너뜨린 후 게이트에서 출몰하는 몬스터를 죽이면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기신족들은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것이 아님에도 오리할콘을 뱉어냈다.
아마 신체 어딘가에 오리할콘을 지닌 존재라면 출처가 게이트인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시스템이 모조리 흡수하는 듯싶었다.
‘써먹을 데가 많은 자원이다. 나쁜 수확은 아니지.’
언젠간 유용하게 써먹을 때가 올 것이다. 분명히.
그런 생각과 함께, 대성은 땅 아래에 쓰러져 있는 나무 한 그루를 향해 몸을 던졌다.
옹이구멍에 팔을 푹 담그니, 과연 보슬보슬한 털 뭉치의 감촉이 느껴졌다.
영물이리라.
찍찍-!
꺼내어보니 영물의 정체는 털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다람쥐였다.
‘이놈의 등을 가르면 문이 나타난다고 했지.’
영물이 촉촉이 젖은 눈망울로 대성을 올려다보았다.
콰지직-!
괘념치 않고 대성은 죽은 닭에서 깃털을 뽑아내듯이 영물의 등을 맨손으로 잡아 뜯었다.
화아악-!
피와 내장이 쏟아지는 대신 무저갱처럼 시커먼 소용돌이가 갈라진 등의 단면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유계로 향하는 문을 발견했습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의 신형이 자취를 감췄다.
***
끼익- 쿵.
다람쥐 등가죽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도 잠시,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목재 문이 뒤에서 닫히고 있었다.
‘여기가 유계인가.’
목재 문에서 시선을 떨어뜨린 대성은 앞에 펼쳐진 경치를 바라보았다.
새빨간 별이 촘촘히 놓인 밤 풍경 사이로 거대한 지면들이 둥실둥실 부유하고 있었다.
흐릿한 안개가 뱀 꼬리처럼 흐느적대며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잘 보니 그건 안개가 아니라 영체(影體)로 변이한 헥카르족이었다.
대성 또한 생명석을 모아 영체가 된 바가 있었기에 잘 알 수 있었다.
‘기이하군.’
진정한 의미로 ‘저승’이었다.
지옥처럼 난잡하기 이를 데 없는 불의 땅이 아니라 정말로 죽은 영혼이 모일 법한, 그야말로 산 자가 발을 들여선 안 될 것만 같은 풍경.
현계(顯界)의 뒤에 숨겨진 세계를 처음 본 그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네놈은 영체가 아니로군!”
그러나 감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물질계의 육신을 한 대성을 보고 헥카르족 한 명이 노성을 터뜨리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괘념치 않고 대성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헥카르족 모두가 근원으로 도달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가능성이 클 것 같았으나 그래도 일단은 물어보기로 하였다.
마침 방금 성을 냈던 헥카르족이 콧김을 씩씩 뿜으며 대성의 앞에 멈춰 섰다.
바위 위의 남자와 비교하면 풍채가 몹시 우락부락한 헥카르족이었다.
“영체도 아닌 것이 살아있는 몸으로 유계에 들어오다니! 대체 네놈은 정체가 뭐냐!”
“질문은 내가.”
“뭐, 뭐?”
“너는 ‘차원의 근원’에 도달하는 방법을 알고 있나?”
“얼토당토않은 헛소리 집어치우고 썩 꺼져라! 자비는 한 번뿐이니!”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고 있는데 단순히 목소리를 높이는 건지 종잡기 어려운 반응이다.
확실한 건, 이자에게서 바라는 대답을 얻어내기는 요원하다는 사실.
그렇다면 괜한 신경전은 집어치우고 고분고분하게 묻는 말에 대답해줄 자를 찾으면 그만이다.
“꺼지는 건 네놈이다.”
대성은 눈앞에 있는 헥카르족의 머리통을 깨부수려고 팔을 내뻗었다.
그러나 팔은 연기를 건드린 것처럼 그대로 녀석을 통과했다.
대성이 지금 무얼 하려다 실패한 건지 깨달은 헥카르족이 실소했다.
“자비는 한 번뿐이라고 분명 방금 말했을 텐데?”
녀석이 우악스럽게 핏대를 세운 양손으로 대성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열 손가락 전부가 살갗을 통과하더니 더 깊숙한 내부를 파고들었다.
두개골과 뇌를 넘어 대성의 영혼 그 자체를 붙잡은 것이다.
“영혼이 가루처럼 부서지면 어떻게 되는 줄 아나? 죽어서도 의식을 지니지 못한 채 끝없는 무(無)의 세계를 방황하게 될 것이다!”
“네가 죽은 뒤에 겪을 일이군.”
“하! 태연한 척 허세 부려봤자- 으아악!”
곧 녀석이 화들짝 놀라며 대성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한껏 달궈진 불판에 실수로 손을 갖다 댄 사람의 반응이다.
[절대자의 의식과 연결된 판데모니움의 마수들이 역정을 냅니다.]
[판데모니움의 마수들이 더러운 손으로 위대하신 존체(尊體)를 건드리지 말라고 합니다.]
대성의 영혼은 우주의 이면 어딘가에 잠재된 세계, 판데모니움과 그곳에 서식하는 망혼들과 이어져 있다.
아무래도 그의 영혼에 문제를 감지하자 판데모니움의 마수들이 격한 반응을 보인 듯했다.
물론 그걸 모르는 눈앞의 헥카르족은 그저 혼란스러울 따름이겠지만.
“네, 네놈은! 평소에 영혼 속에 뭘 담아두는…!”
“아까부터 질문뿐이로군.”
대성은 판데모니움을 열어 망혼들을 해방했다.
귀곡성을 토해내며 우르르 쏟아지는 망혼들이 헥카르족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크아아아악!!”
고통 어린 비명이 유계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여기엔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던 다른 헥카르 영체들도 흠칫 놀라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저놈 저거! 우리와 같은 동족이 아니다! 하물며 산 자조차 아니야!”
“망혼…… 저건 망혼이다! 어쩌다 저런 놈이 유계에 들어왔지?”
“침입자는 죽여야 한다!”
영체들이 광분하며 몰려왔다.
이목이 이곳에 집중되었음을 눈치챈 대성은 목소리를 높여 질문했다.
“너희 중에 근원으로 도달하는 방법을 아는 자가 있나?”
그러나 눈이 뒤집힌 영체들은 가볍게 그 말을 뭉개버리곤 대성이 있는 곳을 향해 들이닥쳤다.
대성은 심드렁한 얼굴로 조용히 턱을 쓸어내렸다.
‘망혼들은 영체를 공격할 수 있다.’
이건 지금 눈앞에서 걸레짝이 되어 무의 세계로 떠난 헥카르족의 시체를 통해 입증되었다.
휘이잉!
대성의 후위에 어둠의 소용돌이가 매섭게 굽이쳤다.
햐아아아!
그리고 지금 저 위에서 쏟아지는 영체만큼 수많은 망혼 떼거리가 소용돌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망혼과 영체의 정면대결!
누가 우세일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되리라.
“너희 중에 한 놈이라도 내 질문에 대답할 수 있기를 바라야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