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138
월(Wall)이 녹아내리자 산봉우리에 뻥 뚫린 분화구가 드러났다.
알리아는 저 너머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 눈을 빛내다가도 입맛을 쩝 다시며 아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가자.”
대성은 섬멸룡을 이끌고 분화구를 향해 강하했다.
구멍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대기의 온도가 급격히 달아올랐다.
곧이어 그는 이 열기의 정체가 후지산 지표 아래에 흐르던 마그마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뭘 숨기기에는 마땅찮은 장소 같은데.’
이런 분화구 깊숙한 곳에 뭘 숨기려 했다간 용암과 열기에 녹아버릴 것이다.
아니면 혹시, 기신족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의 정체가 오리할콘으로 만든 기계 장치인 걸까?
어쩌면 오리할콘은 용암의 뜨거움에도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러나 머지않아, 대성은 자신이 했던 예상이 모조리 빗나갔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잔해… 위에서 잔해가 떨어졌다……. 네놈이 천장을 부수고 여기까지 들어왔느냐…….”
수직의 터널을 1분쯤 내려갔을까.
시뻘건 마그마가 흡사 호수처럼 고인 분화구의 제일 깊은 곳.
그곳에 한 마리의 거인(巨人)이 용암 밖으로 상반신만 겨우 빼낸 채 가쁜 호흡을 토해내고 있었다.
‘타이탄.’
대성은 거인의 정체가 타이탄 종족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이 또한 라미쉬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적이 있는 외관이기 때문이다.
머리엔 뿔이 달리고, 석탄처럼 새카만 피부 위로 돌출된 혈관엔 핏물 대신 용암이 흘렀다.
불의 거인. 과연 그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외형이 아닐 수가 없다.
‘크군.’
대성은 눈앞에 있는 타이탄의 크기에 가볍게 경탄했다.
마신보다는 작아도 섬멸룡과 비교하면 반절 정도 더 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마치 산맥 지하에서 또 다른 산맥을 마주한 듯한 기분이다.
“나를 좀… 살려다오……. 꼼짝도 못 하겠구나……. 너무 고통스러워…….”
불의 거인이 당장이라도 숨이 꺼질 듯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막대한 음량인지라 듣는 처지로선 뇌 속에 시시각각 벽력이 울리는 듯했다.
대성은 녀석의 형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가슴에 커다랗고 푸른 보석이 하나. 그리고 머리와 사지에 기계 촉수가 하나씩 이어져 있군.’
꼭 전기 고문이라도 당하는 듯한 꼬락서니였다.
그제야 대성이 입을 열어 불의 거인이 처한 사정을 들어보려던 그때.
번쩍-!
“……!”
돌연 불의 거인의 가슴에 박힌 보석에서 막대한 빛이 번뜩였다.
쿠르릉-!
“크아아악-!!”
불의 거인이 온몸을 뒤틀며 격통에 찬 비명을 터뜨렸다.
어찌나 쩌렁쩌렁했는지 섬멸룡이 눈살을 찌푸렸고 대성은 무심코 귀를 막아야만 했다.
불의 거인이 몸부림을 칠 때마다 아래쪽에 흐르는 용암이 부글부글 들끓어 올랐다. 당장이라도 하늘로 솟구칠 듯한 기세다.
“이 망할 고철 덩어리 놈들……!! 두고 봐라! 내가 여기서 나가면 모조리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어 먹어버릴 테니까!”
방금 그 번뜩임 현상이 어지간히도 고통스럽게 다가왔던 걸까. 불의 거인은 발악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와 사지에 이어진 촉수가 족쇄 역할을 하는지, 녀석은 옴짝달싹도 못 했다.
시간이 지나 조금 잠잠해진 끝에야 대성은 질문할 수 있었다.
“어쩌다 이런 꼴이 됐지?”
“허억… 헉……. 동포들과 홀로 동떨어져 있을 때…… 분하게도 기신족, 그 고철 덩어리 놈들에게 당하고 여기에 갇혀버리고야 말았다.”
“가슴에 박힌 것과 사지에 이어진 촉수들은 뭐지?”
“이런 젠장……. 그건 나도 잘 모른다! 다만 내 가슴에 있는 이 빌어먹을 것이 가끔 번쩍거릴 때마다 기절해버릴 듯이 아프다!”
대성은 턱을 쓰다듬으며 거인의 가슴에 박힌 보석을 주시했다.
1초도 안 되는 찰나의 점멸이었으나 그는 확신했다.
‘아까 사람들을 무작위로 사라지게 했던 그 빛이 틀림없다.’
그것과 똑같은 빛이 저 거인의 가슴에 박힌 보석에서 터져 나왔다.
의문의 실종 사태의 원인이 저 보석임은 자명한 상황.
어쩌면 저것이 대현자 멜카논이 납치된 장소에 닿을 수 있는 주요한 실마리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퍼뜩 스쳤다.
무엇보다 지금은 작은 지푸라기라도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
‘녀석이라면 저 보석의 정체를 알고 있을까.’
녀석이란 알리아를 말하는 것이었다. 대성이 아공간을 개방하자 알리아가 끙끙거리며 쏙 튀어나왔다.
“힉…….”
알리아는 바로 지척에 태양이 일렁이는 듯한 열기에 한 번,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거인의 웅대한 모습에 두 번 놀랐다.
대성이 손가락을 들어 가슴에 박힌 보석을 가리켰다. 이제는 저게 뭐냐고 구태여 말로 묻지 않아도 알리아가 알아서 대답했다.
“저건 ‘오브’예요.”
“저게 오브라고?”
“네, 오브가 뭐냐면-.”
“아니. 말 안 해줘도 된다. 나도 저것이 뭔지 아니까.”
머쓱했는지 알리아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게이트의 다른 표현이 오브다. 아니, ‘게이트’는 어디까지나 인간들이 정한 명칭에 불과할 뿐이다.
설마하니 거인의 가슴에 박힌 것이 오브였을 줄은. 통상의 아지랑이 같은 형상과는 달리 보석처럼 굳어 있었기에 전혀 몰랐다.
‘하기야.’
기신족은 인간의 지식과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 초고도 문명을 이룩한 자들이다. 그러니 지구에 열린 것과는 다른 형질의 오브가 존재한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을 터.
‘저 안에도 게이트처럼 가상의 필드가 구현되었을 가능성이 크겠군.’
흩어져 있던 얼개가 조금씩 짜 맞춰지는 듯했다.
부지불식 간에 사람들을 실종케 했던 빛은 저 오브에서 터져 나왔다.
그렇다면 실종된 사람들의 종착지가 저 오브 속에 구현된 필드일 확률이 대단히 높았다.
더 나아가, 대현자 멜카논 또한 저 안에 갇혀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
확신은 못 하나 용의 선상에 올리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일단 들어가 본다.’
오브 안에 들어가고자 하는 대성의 의지는 소환수인 섬멸룡에게도 또렷하게 전달되었다.
녀석이 거인의 가슴에 박힌 오브를 향해 목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대성은 섬멸룡의 정수리까지 걸어가 오브에 가까이 다가섰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얼추 눈치챈 알리아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오, 오브 안에 들어가시게요?”
“그래.”
“하, 하지만 오브엔 ‘방화벽’이란 게 있대요. 억지로 들어가려고 했다간 방화벽이 침입자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고 책에 나와 있었단 말이에요.”
“안다. 하지만 나에겐 상관없는 이야기지.”
지구의 게이트도 마찬가지다. 이미 사냥꾼이 투입되고 닫힌 게이트에는 무수한 톱날이 회전하는 듯한 ‘방화벽’이 가동되었다. 더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러나 대성은 이미 이전에 한번, 업화대검으로 그 방화벽을 억지로 뚫어낸 적이 있었다.
‘그때와 지금이 뭐가 다른가.’
당시에도 성공했으니, 지금도 똑같은 방식으로 밀어붙이면 그만이다.
아공간이 도로 열리자, 알리아가 눈치 좋게 그 안으로 들어간 뒤.
콱-!
대성은 힘차게 오브의 표면에 대검을 쑤셔 박았다.
“끄아아악-! 이 개자식! 나 좀 살려달라니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불의 거인이 원성에 찬 절규를 터뜨리며 발버둥 쳤다.
물론 놈이 아프든 말든 대성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지만.
그는 손목에 힘을 실어 더 격렬하게 대검을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곧 작은 울림 같은 것이 칼날을 타고 대성에게 전달되었다.
‘걸렸군.’
틀림없다. 이 울림의 정체는 방화벽에 돌아가는 톱날이다. 2년 전 딱 한 번 느껴봤으나 그때의 감각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당시엔 단단히 박힌 돌을 빼내듯 이를 악물고 힘을 줬어야만 했다.
하나 지금의 업화대검은 2년 전과 비교하면 수준이 다르다.
근원을 잘라내는 검이다. 이까짓 톱날을 뚫어버리는 것쯤이야, 얇은 비닐을 단도로 관통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했다.
뚝-!
‘됐다.’
막혔던 벽이 허물어지는 감각이 느껴지자, 대성의 입가가 올라갔다.
벽이 무너졌으니 이젠 당당히 입성할 일만 남은 것이다.
하지만,
“……!”
대성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쥐고 있던 칼자루를 손에서 놓쳤다. 느닷없이 섬멸룡이 고개를 위로 쳐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돌발행동엔 이유가 있었기에 대성은 섬멸룡을 나무라지 않았다.
콱-!
섬멸룡이 입을 널찍하게 벌려 위에서 떨어지고 있던 거인의 팔을 억세게 물었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것에 분노를 느껴 대성을 죽이려고 든 걸까?
‘아냐.’
죽이려고 팔을 내리친 것은 맞으나 원인이 다르다.
본래라면 노발대발했어야 할 불의 거인은 말이 없었다. 또한, 두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진 상태다.
마치 세뇌라도 당한 듯이.
‘기존에 심어둔 명령 같은 것이 발동된 모양이군.’
대성은 거인의 머리와 사지에 이어진 저 촉수들이 모종의 명령을 발동하는 장치가 아닐까 짐작했다.
왜 거인의 가슴에 오브를 박고 용암이 흐르는 지표면 아래에 처박아둔 건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가 오브에 함부로 접근을 시도하려 하면, 세뇌가 발동된 불의 거인이 침입자를 죽이는 형식이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만큼 중요한 뭔가가 저 안에 있다는 말이겠지.’
더더욱 들어가 볼 가치가 있었다.
쿠후웅-!
불의 거인이 왼손으로 가슴에 박힌 오브를 가렸다. 절대로 틈을 내주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 표명이다.
동시에 섬멸룡이 막강한 치악력(齒握力)으로 놈의 오른손을 잘라냈다.
“크아아아!”
거인이 고개를 쳐들며 울부짖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절대로 가슴을 가린 왼손은 내리지 않는다.
내리게 하면 그만이다.
“어검술.”
대성이 손을 앞으로 내뻗자.
푹-!
오브에 고정되어 있던 업화대검이 거인의 손등을 뚫고 그의 손아귀에 회수되었다.
오른팔이 잘린 것도 모자라 이제는 왼쪽 손등에 구멍이 뚫렸다. 안 아플 수가 없을 터. 불의 거인이 재차 절규하며 왼손을 떨어뜨렸다.
대성은 그 틈에 얼른 오브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불의 거인이 이번엔 무식하게 몸을 흔들며 발악했다.
세뇌가 만들어낸 집념!
저래 가지곤 오롯하게 오브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
‘확 죽여버릴 수도 없고.’
만약 함부로 죽여서 오브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간 낭패다. 어디까지나 상책은 불의 거인이 아예 꼼짝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대성은 업화대검에 깃든 영령, 마그누스를 향해 말했다.
“마그누스.”
-예.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저놈 붙들고 있어라.”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할 수 있냐 없냐는 무의미한 문답이었다.
마그누스의 대답을 받아내기 무섭게 대성은 힘차게 업화대검을 앞으로 내던졌다.
콰아아앙-!
무시무시한 굉음을 자아내며 업화대검이 정면으로 쏘아졌다. 발악을 멈춘 불의 거인이 날아오는 야구공을 잡으려 듯이 왼손을 휘둘러 업화대검을 낚아채려고 했다.
이때 어검술이 한 번 더 발동됐다.
업화대검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움직임을 보이며 허공에서 궤적을 틀었다. 거인의 손짓을 가뿐히 피한 칼이 위쪽으로 잠시 솟구치더니 곧이어 급강하했다.
거인의 어깨 쪽으로.
콰지직-!
“크아아아악!”
칼자루만이 겨우 보일 만큼 칼날의 대부분이 어깻죽지를 파고들었다.
거인이 부들부들 경련하는 왼손으로 어깨에 쑤셔박힌 업화대검을 빼내려는 순간.
화르륵-. 퍼버벙-!!
우렁찬 폭음과 함께 칼자루가 박힌 어깻죽지 단면에서 걸쭉한 용암이 사정없이 흘러넘쳤다.
업화대검이 내부에서 한차례 불벼락을 터뜨린 것이다.
“끄헉……! 컥……!”
눈앞의 타이탄은 몸체의 절반을 마그마에 담가도 끄떡없을 만큼 불에 대한 내성이 높다.
하지만 업화대검의 불에는 통용되지 않는 사항이다. 염왕이 그려내는 화염은 불조차 태우는 불이니까.
“이제야 얌전해졌군.”
어깨가 뚫린 건 꽤 치명타였는지, 녀석은 벽면에 등을 기댄 채 흠칫흠칫 경련만 해댔다.
대성은 여유로운 걸음을 옮겨 훤히 드러난 오브에 다가갔다.
어쩌다 보니 칼도 없이 이 너머로 몸을 던지게 생겼지만-.
‘없어도 된다.’
사지만 멀쩡하면 안에 무엇이 도사리든 간에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탁-.
섬멸룡의 정수리를 가볍게 박찬 대성의 신형이 오브 속으로 들어갔다.
***
“이런 씨X! 여기가 대체 어디냐고! 우리 좀 내보내 줘! 바깥에 아들이 있다고!”
“흑, 흑흑……. 흐어엉…….”
“댁도 가만히 있다가 여기로 끌려온 거요?”
“예. 갑자기 눈앞이 빛으로 가득해지더니 여기에…….”
오십 가량의 남녀가 한 장소에 모여 있었다.
전부 의미불명의 점멸 현상에 휘말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곳에 당도한 자들이다.
사방이 새카만, 하늘도 땅도 벽도 없이 오직 어둠만이 끊임없이 펼쳐진 괴기한 장소.
울거나 화내거나,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반응을 내비치며 혼란에 사로잡혔던 그때였다.
<히히히! 표정들이 참 볼 만하네요! 아주 그냥 똥줄이 타서 미쳐버리겠죠? 히히히!>
느닷없이 귀를 불쾌하게 만드는 간사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웅!
그리고 동그란 공 같은 것이 사람들 사이를 날아다니며 배회했다.
검회색 장갑을 덧대어 입은 공에는 붉은 눈들이 점박이처럼 빽빽하게 박혀 있었는데 꽤 보기 흉측한 외관이 아닐 수가 없다.
“저, 저게 뭐야!”
<‘저게’라니요! 이것 참 말씀을 너무 섭섭하게 하시네요! 초면에 삿대질도 아웃이에요, 아웃!>
꽈아앙-!
공이 손가락을 치켜들었던 남자의 정수리에 힘차게 박치기를 가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남자의 안면이 찌그러지며 안쪽으로 움푹 파였다.
“끄, 끄으윽…….”
트럭 바퀴에라도 깔린 듯한 모습으로 남자가 절명했다.
“히, 히이익!”
“꺄아아악-!!”
당연히 소란이 일고 질서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은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징-.
붉은 점이 한차례 번뜩이더니 곧 적색 광선이 쏘아지며 비명을 지르던 여자의 얼굴을 꿰뚫었다.
털썩!
단숨에 목 위가 전부 사라진 여자는 아까의 남자처럼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음! 다들 잘 보셨죠? 우리 그럼 약속 하나 할까요? 지금부터 데시벨이 제일 큰 연놈들부터 저한테 죽는 거로!>
“…….”
온갖 고성방가를 지르던 사람들이 마법처럼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얼굴을 파르르 경련하며 소리 없이 끅끅 오열했다.
<히히히! 이제야 다들 좀 조용해지셨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제 이름은 아실 필요 없고요, 앞으로는 저를 그냥 ‘교관님’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아시겠죠? 알겠으면 끄덕끄덕!>
사람들이 목뼈가 부러질 기세로 미친 듯이 고개를 주억였다.
<네, 좋아요. 여러분들은 행운아예요! 어디 보자……. 지금이 ‘6차 전이’니까 대략 300……? 350……? 아무튼 여러분들은 70억 분의 350이라는 말도 안 되게 엄청난 확률에 당첨되셨으니 이게 행운아가 아니면 뭐예요?>
공이 쪼르르 날아다니며 사람들의 면면을 하나씩 지나쳐 갔다.
바로 코앞에 붉은 점이 주렁주렁 달린 공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마구 흐르고 눈알이 뒤집힐 만큼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걸 느꼈다.
<행운아이신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이 ‘발아(發芽)의 탑’을 2층부터 100층까지 오르실 거예요! 왜 ‘발아의 탑’이냐? 그건 여러분이 층을 밟고 올라갈 때마다 숨어 있던 잠재력이 싹트니까! 왜 2층부터냐? 그건 여기 1층에서 제 설명 듣고 무기 고르고 ‘탤런트’를 고르고…… 뭐, 아무튼 이것저것 할 게 많으니까! ……응?>
그때였다.
쪼르르 날아다니며 사람들의 모습을 쭉 살피던 공이 문득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그리고 그걸 본 사람들이 무심코 헛숨을 크게 삼켰다.
“흑…. 흑……! 엄마아……. 아빠아…….”
<아이고, 이런 염병할?>
어린 여자애였다.
그냥 어린 것도 아니고,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갔을 유아.
<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가 여기에 있는 거지? 아, 또 전이 과정에서 오류 떴나 보네……. 이래서 미완성품은 안 된다니까.>
“어, 어린애는 건들지 마요!”
<네,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하지만 우리 약속은 약속이죠?>
징-.
용기를 낸 남자는 붉은 광선에 머리가 꿰뚫려 즉사했다.
공이 눈물을 쏟아내는 여자애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직 탑을 오를 만한 그릇이 아니라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하, 근데 이걸 어쩐담? 여긴 출구가 100층에 있는데. 아가야, 내가 널 어쩌면 좋겠니?>
“흐윽… 흑……!”
<에라, 모르겠다. 귀찮으니까 그냥 죽으렴. 너 같은 핏덩이를 데려온 이 불량품 잘못이지, 내 잘못이야?>
붉은 눈이 번뜩였다.
소스라치며 질겁한 사람들이 황급히 두 손으로 눈을 가리던 순간.
콰과각-!
누군가는 이것이 여자애가 목숨을 잃는 소리인 줄 알고 신음하며 귀를 막았고, 누군가는 의아해하며 얼빠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공은 후자의 경우였다.
<……에, 에엥?>
공이 안광을 번뜩이다 말고 동체를 들어 올려 여자애의 어깨 뒤쪽을 응시했다.
거기엔 어둠이 갈라지고 있었다.
세로로.
쫘악-.
<저, 저게 왜 열려?>
공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발아의 탑’에는 진짜로 100층의 출구만 있지, 입구 따위는 없었다.
굳이 입구 비슷한 걸 꼽자면 전이된 인간들을 꿀렁대며 뱉어내는 1층의 소환진 뿐이었다.
그런데 저건 뭔가.
1층, ‘대기실’의 공간 자체가 갈라지고 있다니. 아무리 지금의 탑이 결함 많은 미완성품이라지만 1차 전이 때도 없었던 일이 지금에 와서야 벌어질 리도 없을 터였다.
곧 어둠 사이의 틈새가 넓게 벌어지더니 한 남자가 갈라진 공간을 비집고 나타났다.
“흐, 흐으……. 흐으……?”
공황 상태에 처해있던 사람들이 남자의 모습을 보더니 숨넘어갈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눈물이 핑 돌며 입가가 떨려왔다.
‘한대성!’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내면 죽여버리겠다는 공의 협박이 아직도 머릿속을 맴돌았기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대성이 성큼성큼 나아갔다.
공이 물었다.
<넌 뭡니까?>
“대현자 멜카논이 여기에 있나?”
<와, 나…… 아주 자연스럽게 무시하시네? 됐어요, 됐어! 너 같이 싹수없는 놈 따윈 전혀 안 궁금해요!>
쐐애액-!
처음 삿대질한 남자에게 했던 것처럼, 공이 쏜살같이 대성을 향해 쇄도했다.
대성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오른발을 휘둘렀다.
꽈아앙-!
남자 때와 똑같은 굉음.
하나 결과는 천차만별이었다.
<……어, 어억?>
움푹 파인 채 뒤로 밀려난 쪽은 공이였다.
녀석은 어안이 벙벙했는지 한동안 허공에서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 그래! 너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좀 튼튼한 편에 속하나 보지? 그럼 어디 이걸 맞고도……!>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곤 눈에서 붉은 광선을 발사했다.
징-! 징-!
대성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광선을 일일이 전부 맞아주며 공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멀쩡하… 왜 멀쩡한 거야?! -쿱?!>
직후 두껍고 커다란 손아귀가 공을 움켜잡았다.
놈이 대성의 손바닥 안에서 발버둥 치며 소리 질렀다.
<‘발아의 탑’이 부른 놈은 아닌 것 같은데 너 대체 정체가 뭐야?!>
“탑이라고? 난 탑이 싫다.”
그는 이미 ‘차원수’라는 탑 같지도 않은 탑을 오른 전적이 있었다.
그때는 도중에 프리패스권을 얻긴 했지만.
물론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다.
아마 손에 잡힌 이 괴상한 공이 프리패스권 역할을 하지 않을까.
꾸우욱-.
대성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공이 밑창에 짓밟히는 깡통 캔처럼 으스러지기 시작했다. 외관에 박힌 붉은 눈들이 픽픽 터져나갔다.
<끄, 끄아아아악-?!>
“대현자 멜카논이 여기에 있나?”
<네, 네놈이 50층의 ‘코어’를 어떻게 알고 있는-.>
“있나 보군.”
역시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대성은 손에서 공을 놓아준 뒤, 한 번 더 발로 녀석을 후려쳤다.
꽈앙-!
<꺼억……!>
놈이 찌그러진 모습으로 볼품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사람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펼쳐진 전세 역전의 현장을 넋 놓고 구경했다. 서럽게 울던 여자애도 지금은 눈물을 뚝 그쳤다.
<이 씹……! 뭘 봐?! 이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 새끼들- 쿠헉?!>
콱-!
직각으로 떨어진 발바닥이 바닥에 널브러진 공을 내리찍었다.
무뚝뚝한 대성의 음성이 이어졌다.
“50층까지 안내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