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139
붉은 눈의 공, ‘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시간이 끝난 뒤로 총 여섯 차례나 근방의 인간들을 ‘발아의 탑’으로 전이시켰다.
한 차례에 50~70명가량. 즉 지금까지 300~350명의 인간이 이 탑에 발을 들인 것이다.
당연히 갑자기 전이 당한 것에 분노하며 저항한 인간도 적지 않았다.
개중엔 의외라는 생각이 들 만큼 강한 인간도 분명 있었다.
이 푸른 별에선, 평균 개체 이상으로 강한 인간을 ‘사냥꾼’이라고 지칭하는 듯싶었다.
그럼 뭐하나.
전부 이 ‘발아의 탑’의 교관인 자신에게 등불에 떨어진 부나방처럼 허무하게 죽어버렸는데.
아무리 발악해 봤자다. 이 별의 종족들은 자신을 이길 수 없다.
그런데,
<쿠엑!>
이놈은 뭐 하는 인간인가!
봄이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쾅-!
곧이어 철퇴 같은 발길질이 쉴 틈을 주지 않고 녀석을 후려쳤다.
<으아아아! 이 개새끼야!>
둥그런 동체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붉은 눈이 한 지점에 집결했다.
징-!
봄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 출력의 빔(Beam)을 발사했다.
대성은 심드렁하게 손바닥을 활짝 펼쳐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빔이 커튼이 햇볕을 막는 것처럼 그의 손바닥에 가로막혔다.
피할 생각도 없고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맷집으로 때워버리다니!
봄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금 그건 용족의 비늘마저 녹이는 레이저였다고!>
“나는 용이 아니다.”
<너 진짜 인간 맞아?!>
“잡소리 그만해라. 나는 분명 50층까지 안내하라고 했을 텐데?”
쾅-!
무쇠 주먹 한 방이 봄을 갈겼다.
볼링공처럼 매끈했던 동체가 이제는 어린애 손에 구겨진 종이뭉치처럼 보잘것없어졌다.
점박이처럼 빽빽이 박혀 있던 붉은 눈들도 이제는 오히려 멀쩡한 걸 찾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다.
‘이건, 이 힘은…… 100층을 돌파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어!’
하지만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통계에 따르면, 현재 탑에서 제일 앞서나간 인간의 기록이 72층이다.
아니, 설령 이 괴물 같은 인간이 100층을 돌파했다 하여도 이상하다.
100층을 클리어하고 탑을 졸업한 인간도 어쨌든 이길 수 없도록 설계된 게 교관인 자신이니까.
‘이 인간, 이레귤러(Irregular)야!’
막강한 어퍼컷에 얻어맞은 봄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하지만 1층 대기실에는 천장이란 개념이 없었기에 어디 처박히는 일 없이 그대로 중력을 따라 낙하했다.
바닥과 충돌하기 전에 대성의 무릎이 절묘한 타이밍에 휘둘러져 봄을 저 멀리 날려버렸다.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못 이겨!’
결국, 단념했다.
이대로 가다간 꼼짝없이 폐품이 될 것이 분명하다.
찌그러진 모습으로 쓰러진 봄을 대성이 주워들었다.
<아, 치직-. 알았어…. 50층…. 치직-. 50층까지 데려가면 되잖아.>
“하나 더.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밖으로 내보내라.”
<뭐, 뭐……?>
봄이 노골적으로 당혹스러워했다.
대성은 자신이 들어왔던 저 어둠의 갈라진 틈새로 사람들을 내보낼까도 생각해봤으나 고개를 저었다.
저 틈새가 온전한 출구라는 보장도 없고, 또 온전하다 한들 밖은 곧장 마그마와 이어져 있으니까.
제일 안전한 방법은 역시 이 괴상한 공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거, 거짓말하는 게 아니고 그건 불가능해! 다른 층으로 이동시키는 건 가능하지만 아예 탑 밖으로 내보내는 건 못 한다고!>
“이 탑의 100층에 출구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너.>
출구는 100층에밖에 없다고 분명 말하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이 괴물 같은 인간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때 한 얘기다.
하지만 봄은 모르고 있을 터.
지금 막, 대성의 시야에 그만이 볼 수 있는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아의 탑’에 입장하셨습니다.]
[탑의 각 층에는 ‘난관’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난관’을 돌파해 다음 층으로 향하십시오.]
[‘난관’을 돌파하실 때마다 보상을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탑을 나가려면 100층의 난관을 돌파하십시오.]
“다른 층으로 이동시키는 건 가능하다면 그냥 여기 사람들을 100층에 바로 보내버리면 되겠군.”
<그, 그렇기는 한데…….>
봄은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라며 만류하려다 말을 멈췄다.
흑심(黑心)이 회로를 스친다.
이대로 마냥 이 인간의 장단에 놀아나기엔 분하지 않는가.
<음, 역시 그 방법밖에는 없나? 확실히 100층의 출구를 타면 바로 바깥 세계로 나갈 수 있기는 하지.>
“그럼 그렇게 해라.”
<아, 알았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야. 하, 나 이런 씨……. 원래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나도.”
<……뭐?>
“나도 보내라. 100층에.”
예기치 못한 말을 들은 봄의 입에서 말이 사라졌다.
설마 따라올 줄은 몰랐는데.
사람들은 100층으로 보내고, 자기만 혼자 50층에 가는 거 아니었나?
‘젠장, 이렇게 돼버리면 계획이 틀어져 버리는데?’
확실히 100층엔 바깥과 이어진 출구가 있기는 하다.
다만 그 출구를 지키는 파수꾼을 없애지 않으면 바깥이고 뭐고 바로 황천행이라는 거지만.
‘키메라, 거신룡(巨身龍).’
이름 그대로 타이탄과 드래곤을 반반씩 융합한 합성 생명체.
양쪽 모두 가짜에 가까운 인조이기에 진짜와 비교하면 조잡하고 약하긴 하나…… 어쨌든 인간의 힘으론 이겨내기 어려운 녀석이다.
놈을 쓰러뜨리는 것이 100층의 난관이다.
즉, 아직 무기와 ‘탤런트’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에 가봤자 키메라에게 몰살만 당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 인간이 따라가면…….’
이 괴물은 거신룡마저 녹여버리는 적색 광선을 맨몸으로 맞고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그러니 분명 거신룡도 손쉽게 때려잡을 게 뻔하다.
안 된다. 이 인간만큼은 100층으로 보낼 수 없다.
봄은 어떻게 해서든 이 1층의 인간들이 거신룡의 먹잇감이 되어 떼죽음 당하는 꼴을 봐야만 했다.
그것이 소심하게나마 이 괴물에게 한 방 먹이는 유일한 길이니!
“왜 그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 문제라기보다는…… 뭐랄까. 100층에 너랑 쟤들을 보내는 건 어렵지 않아. 껌이지. 근데 아까도 말했지만 100층은 바깥 세계와 이어진 출구라고.>
“그래서?”
<너, 50층의 ‘코어’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100층으로 바로 가버리면 볼일 끝내기도 전에 탑을 나가야 하는데 괜찮아? 참고로 탑은 한번 나가면 다시 들어오지 못-.>
쾅-!
다시금 거대한 발바닥이 천둥처럼 봄을 짓밟았다.
봄이 울먹거렸다.
<왜, 또 왜?!>
“거짓말했으니까.”
<무슨 거짓말! 난 거짓말 같은 거 안 했어!>
“그래, 100층엔 출구가 있겠지. ‘난관’이랑 같이.”
<……!>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여기 사람들이 살아서 이겨낼 만한 난관은 아니겠지. 저들만 보내어 전부 죽이려는 더러운 수작질을 내가 모를 것 같나?”
시스템은 말했다. 탑을 나가려면 100층의 ‘난관’을 돌파하라고.
그러니 100층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바깥 세계로 나갈 수 있다는 봄의 말은 뻔하고 유치한 공갈이다.
봄은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분명 탑에 처음 발을 들였을 인간이 대체 어디까지 아는 걸까.
특히 50층의 ‘코어’, 대현자 멜카논에 관한 사실은 탑의 담당자인 자신과 설계를 지시한 ‘구세대호’밖에 모르는 극비리일 텐데.
“100층으로 간다.”
<……아, 알았어.>
봄은 자신의 본체와 이어진 탑의 시스템에 접속했다.
곧 1층 대기실 한가운데에 워프 게이트가 열렸다.
***
쿠후웅-!
한 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는 전개에 봄은 어이가 없었다.
<…….>
거신룡은 거체(巨體)의 정중앙에 둥그런 구멍이 뻥 뚫린 채 죽었다.
봄은 100층에 도착하고 거신룡이 쓰러지기까지의 시간을 확인했다.
1분 30초.
일부러 그런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칼로 잰 듯한 시간.
참고로 거신룡은 ‘최소’ 보름은 투자해야 공략할 수 있도록 설계된 놈이다.
심지어 저 괴물 같은 인간은 얼굴에 땀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
‘……정신 나갔어. 저놈 저거 진짜 이 행성 거주민 맞아?’
거신룡의 발톱과 꼬리를 요리조리 피하고,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브레스를 당당히 맞아가며 적당히 주먹을 놀렸다.
그런 와중에도 뒤에 멀뚱멀뚱 선 50명의 인간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확실히 거신룡의 관심을 본인에게 유도하는 치밀함까지.
‘……아니면 혹시 인간에 대한 표본 조사가 미흡했던 건가?’
봄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 별에는 ‘사냥꾼’이란 자들보다 더 상위에 군림한 우등 개체들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다만 지금껏 발견하지 못했던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아예 틀린 상상은 아니다.
개체‘들’이 아닐 뿐이지.
거신룡이 쓰러지자 필드 내부에 워프 게이트가 열렸다.
바로 바깥과 이어진 출구다.
50명의 사람이 감격에 찬 얼굴로 워프 게이트에 다가섰다.
“이 은혜를……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은 진정으로 인류의 구세주십니다. 밖에 나가면 여기 있었던 일들을 사람들에게 전할게요!”
“흑, 흑흑…… 사냥꾼님 덕분에 제 하나뿐인 아들놈이 고아로 안 살아도 되게 생겼어요.”
물론 그들은 얼씨구나 하고 바로 워프 게이트를 타지 않았다.
저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대성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것이다.
살아서 여길 나간다는 기쁨만큼이나 은인인 대성에게 당장 아무런 보답도 해줄 수 없다는 죄스러움과 아쉬움 또한 컸다.
‘이, 이 X…… 팔…….’
그리고 그 감동의 장면을 바라보는 봄으로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자신에게 ‘오장육부’란 게 있었다면 지금쯤 막 뒤틀리고 있으리라.
6차 전이로 불려온 인간들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100층을 나서고야 말았다.
1층부터 100층까지 단련시켜 따끈따끈한 상태로 ‘구세대호’에게 갖다 바쳐야 할 인간들이!
‘빌어먹을! 그분들께 이걸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하지?’
사실 탑을 오르는 인간들은 층을 통과할 때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세뇌’를 당한다. 특정 파장의 전파를 탑이 계속 쏴 보내는 것이다.
세뇌 내용은 간단하다.
‘기신족의 편에 붙어, 앞으로 있을 대전쟁에 협력하라.’
그래서 성실하게 한 계단씩 밟아 100층까지 온 인간은 거신룡을 잡고 바깥 세계로 나가도 인류를 등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게 탑을 준비한 이유다.
강력한 전사를 양성하는 것!
지금은 탑이 초기 버전이라 아직 인간밖에 전이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꾸준히 발전시키면 언젠간 더 많은 차원 종족을 데려와 기신족을 위해 목숨마저 기꺼이 바치는 광기의 전사로 만들 수 있으리라.
그런데 설마하니 벌써 이런 이상 사태가 생길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아아……. 아아……!! 곤란하게 됐네. 구세대호 분들께서 분노하시면 진짜 답이 없는데……. 씨, 팔자 한번 더럽게 꼬였구먼.’
이미 50명의 인간이 탑을 나섰다. 엎질러진 물인 것이다.
이 실책을 만회하려면 그분들께 저 인간의 목이라도 갖다 바쳐야 한다.
무슨 수가 없을까, 봄이 부산스레 움직이며 고심하던 그때였다.
“내놔라.”
<……?>
난데없이 대성이 오른손을 까딱거리며 그리 말했다.
<내, 내놓으라니, 뭘……?>
“100층 난관 돌파했다. 보상 내놓으라고. 모르는 척 그만해라.”
<아, 아니, 야 너 진짜…….>
“나는 난관을 돌파할 때마다 보상을 준다고 알고 있다.”
<아니, 그렇긴 한데……. 너 50층에 볼일 있다고 하지 않았냐?>
“볼일은 볼일이고 받을 건 받아야지. 아니면 내가 뭐하러 힘들게 저놈을 때려잡을 필요가 있었나?”
<…….>
별로 힘들이지도 않았구먼.
진짜 지독한 인간이다.
아직 아무도 가져가지 못한 100층 보상을 이 괴물에게 주게 생겼다.
하나 여기서 안 주겠다고 잡아떼다간 또 죽지 않을 만큼 구타당할 터.
선택의 여지 따위는 없었다.
<젠장……. 알았어, 줄게! 주면 되잖아! 가져가, 썩을!>
봄이 울분에 찬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탑의 한쪽 벽면에 다가갔다.
징-.
그리고 벽면에 달린 어느 장치에 희멀건 빛을 쏘아내자, 대성의 앞에 푸른색 팔찌가 나타났다.
팔찌.
거창한 걸 기대했던 대성의 눈썹이 위로 휘어졌다.
“이게 100층 보상이라고?”
<뭐, 뭐야. 그 눈빛은. 설마 나 의심하는 거야? 억울하네!>
“기계라서 양심도 없는 건가? 이따위 팔찌 하나 던져줘 놓고 억울하다고 하지 마라.”
<뭐? 이따위 팔찌 하나? 이따위 팔찌 하나아아~?>
봄이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갑자기 몸을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답답해서 미치겠다는 감정 상태를 시사하기라도 하는 걸까.
<잘 들어, 이 인간아! 그건 말이지,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고 우리 기신족의 제1 연구진들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최강 병기야! 진짜 목숨 걸고 100층 올라와서 거신룡 때려잡은 인간들만이 쟁취할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고!>
“…….”
<우린 있지, 뭘 만들 때는 ‘오리할콘’이라고 너희가 모르는 금속을 주요 자원으로 사용해. 너희 별 땅에 파묻힌 온갖 광물, 온갖 재원을 들이밀어봤자 오리할콘 가루 한 움큼만도 못하지. 그런데 너한테 주어진 저 만병지왕은 그 오리할콘을 무려 정확히 9백7십5만 개나 갈아 넣어야 겨우 하나를 만들 수 있는 물건이야!>
“그런가.”
저 터무니없는 숫자를 들으니 조금 감이 잡히는 듯했다.
천만에 가까운 오리할콘을 갈아 넣어야 만들 수 있는 무기.
덧붙여 섬멸룡에 ‘플라스마 캐논’을 장착하는 데 쓰인 오리할콘은 4000개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천상을 거의 불바다로 만들 만큼 막강한 파괴력을 보였는데, 하물며 9백만의 오리할콘이 모여서 만들어진 병기라.
과연 어떤 가공할 만한 힘을 선보일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철컥-!
오른 손목에 팔찌를 가까이 대자, 마치 살아있는 듯이 팔찌가 뱀처럼 휘감겨 왔다.
[‘발아의 탑’ 100층 보상, ‘만병지왕’을 획득하셨습니다.]
[절대자께서 해제를 원하시지 않는 한, 만병지왕은 영원토록 전쟁의 동반자가 되어 주인을 승리로 이끌 것입니다.]
[아이템 정보]
이름 : 만병지왕
분류 : 장비
‘기신족 내에서도 내로라하는 연구진들이 열정을 쏟아부어 만든 모든 병기의 왕. 탑을 졸업하고 잠재력을 꽃피운 위대한 전사에게만 왕의 힘을 다룰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고유 성능 : 사용자가 원하는 형태의 무구로 유동적인 변형 가능. 무구엔 창, 칼, 활, 건틀릿, 방패뿐만 아니라 총과 포도 포함된다. 단 폭탄이나 미사일 같은 일회성 병기나 특정 질량 이상의 무구로는 변형되지 못한다.
요컨대 장착하기 쉽게 일시적으로 팔찌의 형태를 하고 있을 뿐,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자유로이 모습을 바꾸는 아이템이었다.
‘나쁘지 않군.’
아니, 오히려 좋다.
업화대검 말고도 싸울 때 요긴하게 써먹을 무기를 획득했으므로.
대성은 곧장 만병지왕의 성능을 확인해보려고 했다.
‘창’을 쥐고 싶다고 생각하자.
촤르륵-!!
팔찌가 입자처럼 잘게 쪼개어지며 질량을 늘려가더니 곧 대성의 손에 이중 창날이 달린 2m 길이의 장창이 쥐어졌다.
어디까지나 확인 용도로 창을 선택한 거지, 별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물건이라는 직감이 퍼뜩 스쳤다.
창은 창인데, 단순히 찌르고 휘두르는 것 이상의 용도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50층으로 가지.”
<으으…….>
한편, 어딘가 흡족한 기색의 대성을 본 봄은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호랑이에게, 아니, 이래 가지곤 완전히 용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놈을 50층에서 죽여버려야 해……!’
50층은 ‘코어’가 있는 장소다.
방대한 지식과 기억이 담긴 대현자 멜카논의 ‘뇌’가 이 탑의 근간을 형성케 해준단 말이다.
사실상 이 탑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확히 중앙인 50층에 배치한 것이다.
‘저 괴물이 무슨 용건으로 코어를 찾는지는 몰라도, 멜카논을 건드리게 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봄은 생각을 멈추지 않으며 50층과 이어진 워프 게이트를 열었다.
***
[50층에 도착했습니다.]
50층의 돌파 조건은 탑의 중축(中軸)인 멜카논이 내는 수수께끼에 답하는 것이었다.
그간 탑을 헤쳐오면서 겪었던 경험과 보아왔던 것들에 기인해 문제가 출제되는 형식이다.
물론 대성이 그 퀴즈쇼에 어울려줄 필요는 없다.
‘저기 있군.’
대성은 토굴처럼 생긴 공동의 제일 안쪽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젊은 청년 헥카르족을 보았다.
이 탑에서 헥카르족이라고 하면 물을 필요도 없이 멜카논이다.
대현자라기에 백발과 수염이 성성한 노인을 상상했건만 의외다.
‘머리와 사지에 이어진 촉수.’
멜카논은 불의 거인과 똑같은 꼬락서니를 하고 있었다.
틀림없다.
멜카논 또한 세뇌당하여 탑의 문지기 노릇을 하는 것이다.
‘일단 죽은 건 아니다. 살아있기만 하면 돼.’
첫 번째 최악의 상황, 즉 멜카논이 이미 사망한 경우는 피했다.
비록 세뇌당하긴 했으나, 그런 건 도로 해제해버리면 그만이다.
대성은 봄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멜카논을 제정신으로 되돌릴 수-.”
휘이잉! 휘이잉!
부지불식 간에 필드 중앙에 워프 게이트가 연달아 빛을 터뜨렸다.
이윽고 삼십 가량의 인간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 뭐야? 여기 50층 아니야?”
“이런 우라질! 50층이라고? 난 60층에 오르고 있었단 말이야!”
“나 방금 50층 돌파했는데? 이게 뭔 개뼈다귀 같은 경우야?”
저들 또한 예기치 못한 사태였는지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대충 얘기를 들어보니 이미 옛적에 50층을 돌파한 자들 같았다.
<이 탑의 각 층은 시간이 무작위의 배율로 돌아간다.>
이때 갑자기 봄이 말을 꺼냈다.
<어떤 층은 현실의 1초가 1시간으로, 어떤 층은 현실의 1초가 1년으로 계산되는 곳도 있지. 50층을 돌파한 저들은 최소 100년을 탑의 전장에서 굴렀다 온 자들인 거야.>
“네가 불렀나?”
<그래. 50층 이상의 층계에 있는 인간들을 전부 여기로 소집시켰다.>
“왜지?”
<너를 죽이게 하려고!>
봄의 눈이 붉게 번뜩였다.
녀석의 외침을 들은 삼십의 사람들이 대성과 봄이 있는 쪽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너희에게 힘을 주마!>
휘이잉!
그때 사람들의 앞에 팔뚝 길이의 휴대용 대포가 하나씩 놓였다.
<99층의 보상, ‘용살포(龍殺砲)’다! 흑룡의 비늘마저 뚫어버릴 수 있는 병기지! 난관을 돌파할 필요는 없다! 공짜로 주마!>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대성의 인상이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봄이 킬킬 웃었다.
<너희는 그걸로 지금 내 옆에 있는 인간을 죽여라! 100층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이놈을 죽이면 내가 바로 너희를 탑에서 내보내 주지!>
이 인간은 강하다. 100층의 난관 거신룡을 1분 30초 만에 쓰러뜨릴 정도로.
하지만…… 하지만 과연 50층 이상을 돌파한 초인 삼십 명, 그것도 전원 99층의 보상 용살포를 장착한 이들에게도 당해낼 수 있을까?
게다가 저들에게만 맡길 생각도 없다. 봄, 자신도 가세하기로 이미 마음먹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저놈이라도 이 조합을 이겨낼 순 없겠지!’
탑의 질서를 혼돈으로 물들이는 말도 안 되는 금기다.
본래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지만, 봄은 방금 멜카논의 세뇌를 풀겠다는 대성의 말을 듣고 확신했다.
그는 멜카논을 데려갈 작정이라고.
한 마디로, ‘탑’의 존재 근간 그 자체를 무너뜨릴 셈이라는 거다.
그걸 막을 수만 있다면야, 이 정도 행위는 금기도 아니다.
구세대호께서도 이해해줄 터!
<자! 뭘 망설이지? 거짓말이 아니다. 동족에 맹세코 너희가 이 인간을 죽이기만 한다면 나는 너희를 바깥 세계로 내보내겠다!>
“…….”
<용살포를 집어! 그리고 싸우는 거다! 적은 고작 한 명이야!>
“…….”
<……응?>
봄이 당황했다.
그럴 만도 하다. 분위기가 어째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대성이지?”
“응, 그 한대성이야……. 동양의 구세주…….”
“저분도 탑에 계셨네.”
“50층에 있다는 건 보상도 여러 개 챙겼다는 거 아냐.”
사람들이 저마다 옆 사람의 표정을 쳐다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봄 또한 땀샘이란 게 있다면 식은땀을 흘리고픈 심정이었다.
<너, 너희들……. 왜 가만히 있어? 용살포 집으라니까? 그거 99층 보상이라고. 아니면 혹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거야?>
“…….”
<이 머저리 인간 새끼들아! 금붕어처럼 눈만 끔뻑대지 말고 뭐라 말 좀 해보란 말이야! 왜 가만히 있는 건데! 한 명이야, 한 명! 얘만 죽이면 바로 졸업시켜 준다니까!?>
“……그게 더 어려워.”
<뭐?>
이때 젊은 여성 한 명이 무리를 대표하여 먼저 말을 꺼냈다.
그녀는 72층을 오르던, 즉 이 탑에서 제일 앞서간 자였다.
“우리가 아무리 용살포니 뭐니 써봤자, 저분은 못 이긴다고.”
<뭐, 뭐라는 거야, 이 X년이……. 야, 너 그게 제정신으로 하는-.>
“제정신이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야.”
그녀가 바닥에 놓인 용살포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람들도 그녀의 의견에 동조하듯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우린 그냥 100층까지 올라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