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140
봄이 만약 정상적인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 지금쯤 혼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곧이어 삼십의 인원 전부가 바닥에 놓인 용살포에서 관심을 껐다.
아니, 전부는 아니었다.
그래도 조금은 미련이 남아 보이는 듯한 남자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 그럼 용살포인가 뭔가 이것만 챙기고 오르던 거 계속 올라도 되나요?”
<당연히 안 되지, 이 병신아! 아, 돌겠네! 이거 알아? 너희는 다 병신이야! 고작 인간 하나가 무서워서 오줌이나 질질 싸는 호구 쪼다-.>
그 순간.
화가 치밀어 욕지거리를 마구 퍼붓던 봄은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섬찟함이 스쳤기 때문이다.
“멜카논 세뇌. 어떻게 푸냐.”
<…….>
소름이 돋았다.
인간으로 따지면 목덜미가 서늘해지고 털이 쭈뼛쭈뼛 곤두서는 감각이라고 할까.
이 괴물에겐 ‘종(種)’이란 경계마저 초월하는 기백이 뿜어져 나온다.
“세뇌를 푸는 방법을 말해라. 그러고 나서는 너를 죽이겠다.”
<…….>
“설마 이따위 개수작을 부리고도 살 거라는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자승자박.
완전히 낭떠러지에 내몰린 꼴이다.
<세, 세뇌는 그러니까…….>
바싹 얼어붙은 채 봄이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 짜내기 시작했다.
세뇌를 푸는 건 어렵지 않다.
그냥 머리와 사지에 부착된 촉수 같은 장치를 떼버리면 그만이니.
물론 누군가 억지로 떼어내려고 하는 순간, 필드에 숨겨진 세 마리의 키메라가 등장하여 불순한 행동을 하려던 자를 처참하게 찢어 죽인다.
참고로 세 마리 다 100층의 거신룡과 똑같은 키메라다.
즉, 정상적으로 탑을 오른 자라면 항거조차 못 하고 죽는 것이다.
그러나 거신룡 한 마리를 1분 30초 만에 죽인 이 괴물은 다를 터.
세뇌를 푸는 방법을 알려주는 순간 모든 게 끝나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도, 그리고 이 탑도.
<세, 세뇌를…… 그, 그러니까 세뇌는 말이지…….>
궁지에 몰린 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거렸다.
대성은 일부러 질질 끄는 게 훤히 보이는 그 모습에 짜증이 나서 재차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주먹 끄트머리가 녀석의 동체에 닿기 바로 직전,
둥-.
갑자기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 흑백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맹렬한 속도로 뻗어 나가던 대성의 주먹이 허공에서 멈췄다.
좀 더 정확히는 ‘느려졌다’.
고속촬영을 돌린 카메라처럼.
“……?”
영문 모를 사태에 닥친 대성의 눈썹이 위로 휘어졌다.
그런데 눈썹이 올라가는 그마저도 느릿느릿한 속도다.
피처럼 붉은 대성의 눈동자가 천천히 옆으로 굴러 삼십 명의 사람이 있는 방향을 주시했다.
“어….”
“뭐….”
“이….”
정체 모를 사태에 휘말린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경악에 빠진 사람들이 뭐라 말을 하려고 했으나, 느려진 시간 속에서는 목소리조차 느리게 나왔다.
입술이 열렸다가 닫히고, 눈꺼풀이 한번 깜빡이는 찰나가 5초씩 늘어나는 작금의 순간.
<관리자로 앉혔더니, 공들여 만든 탑을 아주 난장판으로 만들었구나.>
느려진 시간 속에서 혼자서만 정상 속도로 움직이는 유령이 나타났다.
유령.
낡은 모포를 뒤집어쓰고 칠흑에 잠긴 얼굴 위로 푸른 안광을 번뜩이는 그 모습은 유령이란 표현이 적절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감도 안 잡혔다.
기계 부품이 어지러이 뒤엉킨 유령의 오른손에는, 투박한 은장도(銀長刀)가 쥐어져 있었다.
<억……!>
봄이 경악성을 내뱉으려고 했다.
모두가 무중력 상태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대는 와중, 유령의 귀기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이놈들은 전부 실패작이다.>
서걱-!
검광(劍光)이 섬뜩하게 퍼졌다.
한 줄기 은색의 선이 허공에 그어지기 무섭게 다섯의 인간이 반 토막이 나서 죽었다.
공중으로 솟구친 살구색 내장과 새빨간 핏물이 느리게 춤을 춘다.
“……!”
참극을 본 다른 25명의 사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뺨이 경련하고 입술이 벌어졌다.
<비명을 지르려고? 미안하지만 난 시끄러운 게 제일 싫다.>
하나 느려진 시간은 절규마저도 하락하지 않는다.
유령이 재차 은장도를 휘둘렀다.
서걱-!
빗질에 먼지가 쓸려나가는 것처럼 사람 목숨이 쉽게 꺼져간다.
“끅…!”
“꺽…!”
“악…!”
그래도 혈색이 파래지거나 창백해지는 속도는 빨랐다.
아직 목숨이 붙은 자들 처지에선 기절해버릴 지경인 공포였다.
지척에서는 죽음이 다가오는데 몸은 안에 물이라도 찬 것처럼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이게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백정에게 죽임당하는 도살장의 소와 뭐가 다르단 말인가.
<항상 궁금했다.>
서걱-! 서걱-! 서걱-!
유령이 쉬지 않고 은장도를 휘둘렀다. 끊임없이 선혈이 난무했다.
아직도 바닥에 떨어지지 못한 내장이 수족관 속을 떠도는 미꾸라지처럼 허공 위로 흐느적댔다.
고통과 절망의 표정이 고스란히 남은 사람들의 얼굴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래로 낙하한다.
<시간이 느려지면 죽음도 천천히 다가오는지.>
그리하여.
삼십의 사람이 전부 유령이 휘두른 은장도에 의해 불귀를 객이 되었다.
‘순식간’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실제로는 5초도 안 되는 시간.
그러나 ‘느려진 시간’은 그것을 3분까지 늘렸다.
<힘들군.>
유령이 은장도의 칼날에 벌겋게 들러붙은 핏물과 살점을 털어냈다.
그리고 안광이 희푸르게 빛났다.
후두둑!
허공을 날고 있던 피, 얼굴, 살점, 내장이 동시에 바닥에 떨어졌다.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다.
“…….”
대성의 눈이 냉엄히 번들거렸다.
저 유령이 ‘시간의 흐름을 늘리는’ 힘을 가졌다는 사실은 얼간이가 아닌 이상에야 모를 수가 없다.
‘헥카르족이 말했던 게 저놈이었던 모양이군.’
모든 것이 느려진 세상 속에서 홀로 멀쩡하게 움직이는 기신족.
그렇다면 바로 저 유령이 멜카논을 납치한 장본인일 터였다.
<사, ‘3호기’께서 발아의 탑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죽다 살아난 봄이 후다닥 ‘3호기’라 불린 유령을 향해 날아갔다.
3호기가 바닥에 흥건히 고인 피 웅덩이를 철벅 밟으며 말했다.
<적적해서 탑을 점검하러 왔더니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는군.>
<저, 그, 그것이 전부 저 하얀 머리를 한 인간 때문에……!>
<종족과 차원을 불문하고, 그야말로 만고불변이라 할 수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예?>
<‘세상은 결과’라는 거다.>
봄의 동그란 동체에 검은 음영이 세로로 길게 드리웠다.
곧이어 은색 칼날이 그 짙은 그림자를 가득히 채워나갔고,
스륵-.
그렇게 봄은 두 갈래로 갈라지며 아래로 허물어졌다.
그리도 하찮다 여겼던 인간들의 시체와 같이 뒹굴게 된 것이다.
<저놈 한 명 죽이겠다고 이미 앞서 오르던 자들을 전부 집결시켜? 사소한 변수를 없애겠다고 더 큰 변수를 불러일으킨 셈이다.>
3호기가 높낮이가 없는 기계음으로 덤덤히 말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대성이 일체 감정 없는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제야 이쪽을 봐주는군.”
<네가 그 변수냐.>
“무의미한 질문은 집어치우고 내 말에나 대답해라. 대현자 멜카논의 세뇌는 어떻게 하면 풀 수 있지?”
<인간은 그 어떤 종족들보다 ‘감정’에 좌우되고 휘둘리는 생명체라 들었다. 그런데 넌 이런 상황에서조차 표정 변화 하나 없군. 체온도 그대로야. 어떻게 된 일이지?>
대성은 자꾸만 평행선을 달리는 대화에 계속 어울려줄 생각이 없었다.
화륵-.
그의 오른손에 불꽃이 맺혔다.
마력을 응집시켜 불덩어리를 만드는, 가장 기초적인 응용 스킬.
은은한 주홍빛 불덩어리를 본 3호기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용암을 뒤집어써도 버텨내는 내게 그걸 던질 셈인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시간을 느릿하게 만들 의욕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성은 녀석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덩어리를 던졌다.
3호기 근처의 천장으로.
쿠르릉-!
<위?>
폭음이 한 차례 터져 나옴과 동시에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종유석처럼 날카로운 잔해가 3호기의 머리 위로 거침없이 쏟아졌다.
<얄팍한 수작을 부리는구나.>
3호기는 은장도를 휘둘러 낙석(落石)들을 손쉽게 베어냈다.
널찍한 검날이 닿지 않는 범위의 잔해들은 바닥과 충돌하여 자욱한 먼지를 일으켰다.
안 그래도 어두웠던 공동 내부가 흙먼지에 뒤덮이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됐다.
그걸 본 3호기는 그제야 대성이 진정으로 노렸던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시야를 교란한 틈을 타서 허(虛)를 노리겠다는 건가.>
멍청한 판단은 아니다.
적 또한 자신의 능력이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은 상태일 터.
정공법으로는 힘드니 이런 식으로라도 최대한 공격의 기회를 엿보려는 수작인 듯했다.
<인간도 머리를 쓰면 이 정돈 한다는 거군. 하나 발악에 불과하다.>
흙먼지가 육안을 방해한다는 상황은 3호기에겐 통용되지 않았다.
기계인 그는 생명체의 ‘체온(體溫)’을 추적할 수 있으니까.
체온 추적 기능을 활성화하자 곧바로 생명체의 온기가 감지되었다.
<……음?>
온기가 느껴지긴 했다. 그것도 아주 생생하게 말이다.
문제는 그 온기의 개수가 스무 개쯤 된다는 사실이었지만.
‘50층에는 그놈 하나뿐일 텐데?’
바닥에 즐비한 시체와 내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는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산 자와 죽은 자의 온기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체온 감지 기능이 엉성하지는 않다.
‘어떻게 된 일이지?’
스무 개 전부 37~38도를 넘는 온도. 이는 분명 산 자만이 낼 수 있는 체온이었다.
뭔지는 몰라도 놈이 무언가 묘수를 짜냈음은 명확한 상황.
둥-!
3호기의 푸른 외눈이 발광했다.
그러자 다시 한번 시야가 흑백으로 물들고 시간이 길게 늘어졌다.
‘하나씩 확인하면 그만이지.’
그 어떤 변수가 들이닥쳐도 느려지는 시간 앞에선 속수무책.
마련된 독무대(獨舞臺) 위에서 3호기는 은장도를 그러쥐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우선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온기의 정체부터 확인했다.
‘……언데드?’
흙먼지의 장막을 걷어내자 드러난 모습은 피륙이 썩은 언데드였다.
그러나 녀석의 생김새는 3호기가 알고 있던 언데드와 조금 달랐다.
언데드의 살갗이 화덕처럼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대체 무슨 짓을 하면 살아 움직이는 시체가 이리도 맹렬한 열기를 낼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언데드의 체온을 36도 이상 끌어올려 산 자처럼 위장시켰나 보군.>
이른바 나무를 세워 몸을 숨길 숲을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열아홉의 열기도 태반이 언데드일 터.
그중 하나가 놈이리라.
‘최대 3분.’
모순적인 표현이지만, 3호기가 시간을 느릿하게 만들 수 있는 시간은 최대 3분이었다.
그 안에 이 열아홉의 열기 중 ‘진짜’ 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그가 다음 ‘체온’을 향해 발걸음을 떼려던 그때.
번쩍-.
<……!>
광채가 한순간 휘몰아쳤다.
이윽고 한 줄기의 섬광이 뭉게뭉게 피어오른 흙먼지를 집어삼키며 3호기의 사각지대에서 날아왔다.
먼저 빛이 있었고, 어마어마한 굉음이 그 뒤를 따랐다.
쿠르릉-!
<용살포……!>
3호기는 단박에 그 섬광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99층의 보상, ‘용살포’가 난데없이 들이닥친 것이다.
<빌어먹을 인간 놈!>
욕지거리를 터뜨린 3호기가 거의 날 듯이 몸 전체를 크게 웅크렸다.
아무리 시간을 길게 늘였다 한들 빛은 빛이다. 자각하기 무섭게 광선은 어느덧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후웅-!
용살포의 섬광이 아슬아슬하게 3호기의 머리 위를 스치고 날아갔다.
전신에 뒤집어쓴 모포의 윗부분이 사라지며 3호기의 민낯이 드러났다.
<재밌게 나오는구나……!>
그나마 시간이 느려진 덕에 섬광이 날아온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물론 용을 죽이는 광선이라 하여도, 그걸 맞는다고 바로 죽을 만큼 3호기는 약하지 않았다.
대신 치명상 정돈 입었을 것이고, 그리된다면 외눈처럼 박힌 이 ‘시간석’에도 무슨 문제가 생겼을 터.
시간석이 없다면 시간의 흐름을 늘리는 능력도 사라진다. 가장 큰 무기를 잃게 되는 셈이다.
<지금 건 너의 회심의 일격이었겠지만 이제는 도리어 스스로 발목을 붙잡게 되었구나.>
콱-!
은장도를 바닥에 쑤셔 박아 그걸 지지대 삼으며 3호기가 일어섰다.
그리고 방금 광선이 날아왔던 방향을 쳐다보았다.
저기로 가면 분명 놈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확신은 빗나가지 않았다.
<여기에 있었군.>
3호기는 한 손에 용살포를 장착한 채 팔을 뻗은 대성을 노려보았다.
꼼짝없이 당하게 된 처지였음에도 대성의 표정은 한결같이 무심했다.
<얕잡아봤던 인간의 지성을, 네놈 덕에 조금은 다시 보게 되었다.>
서걱-!
횡선으로 그어진 은장도가 대성의 목을 깔끔하게 절단했다.
3호기는 선혈과 함께 둥실둥실 솟구치는 대성의 얼굴을 직시했다.
<죽어서도 표정 변화 하나 없군. 능멸할 의도는 없다만 시체를 해부해 네놈의 정체를 알고 싶어졌다.>
그는 공중에 뜬 수급을 움켜쥐면서 시간의 흐름을 복구시켰다.
잘린 목의 단면에서 뿜어져 나온 핏물이 3호기의 얼굴을 적신 순간.
콰직!
두꺼운 인간의 팔이 3호기의 가슴팍을 꿰뚫고 튀어나왔다.
<……?!>
경악한 3호기가 자신의 흉부를 관통한 팔을 내려다봤다.
검붉은 피처럼 새카만 기름으로 뒤덮인 인간의 손.
거기엔 3호기의 ‘기계 심장’이 쥐어져 있었다.
“아까 항상 궁금했다고 했지.”
어느샌가 3호기의 뒤에 선 대성이 차가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간이 느려지면 죽음도 천천히 다가오는지 말이야.”
3호기의 시야가 점점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짓쳐오는 암흑 속에서 오로지 대성의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알아볼 기회를 줄까?”
대성은 기계 심장을 으스러뜨렸다.
꽈드득-!
알루미늄이 구겨지는 소리가 나며 심장이 형편없는 모양새가 되었다.
3호기에게서 말이 사라졌다.
그가 고개를 떨어뜨리는 것과 함께, 목이 잘린 대성의 분신이 그림자가 되어 흩어졌다.
‘놈이 계속 시간의 흐름을 늘릴 수 있었다면 내가 졌을지도 모르지.’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다.
능력에는 시간적 제한이 존재했고, 허점을 파고들 여지 또한 있었다.
그 시점에서 대성은 이미 본인이 승리할 것을 의심치 않았다.
스르륵-.
대성은 천장을 무너뜨린 직후 배치해뒀던 사령 병사를 소환 해제시켰다.
‘사령단장의 고유 권능인 <광화>가 큰 도움이 되었군.’
<광화>는 사령 병사들의 몸에 ‘광기의 불’을 두르게 하여 전투력을 상승시키게 하는 능력이다.
최대한 3호기의 혼란을 가중하기 위해 혹시 몰라 배치해뒀는데, 이게 의외의 묘수가 될 줄은 몰랐다.
봄이 50층에 용살포를 무더기로 꺼낸 것 또한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대성은 ‘행운’이 따라서 이겼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주변의 사물을 응용할 뿐인 싸움법은 행운이 아니라 실력이니까.
[부유 공장의 고대 종족, ‘3호기 구세대호’를 격멸했습니다.]
[승리를 쟁취하신 절대자께 구세대호의 이적(異蹟)이 계승됩니다.]
[‘지연(遲延)의 시간석’을 획득하셨습니다.]
이때, 전혀 기대하지 않은 타이밍에 시스템이 그런 글귀를 띄웠다.
그러자 침묵한 3호기의 푸른 외눈이 떠올라 대성의 손에 안착했다.
수정처럼 환하게 빛나는 외눈을 유심히 쳐다보자 정보가 갱신됐다.
[아이템 정보]
이름 : 지연의 시간석
분류 : 장비
‘3호기로 명명 지어진 구세대의 기신족이 기계의 신에게 부여받은 기적의 돌. 그러나 기신족이 아닌 다른 종족이 사용할 경우 돌에 서린 기적의 힘이 격하된다.’
고유 성능 :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하는 반경 10m의 고유 결계를 발동한다. 최대 30초간 지속이 가능하나, 다섯 번밖에 기적을 행하지 못한다.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만드는 돌!
지금까지 받은 보상들과 비교해 각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을 가지고 노는 힘은 마신도 못 했는데 말이지.’
이제는 그 힘이 자신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비록 30초의 짧은 지속 시간과 다섯 번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단점을 지녔으나 상관치 않았다.
‘정말로 필요할 때만 써야겠군.’
대성은 시간석을 아공간에 고이 집어넣는 김에 알리아를 불렀다.
봄과 3호기가 죽었다는 건, 이젠 세뇌된 멜카논을 되돌리는 법을 알려줄 자가 사라졌다는 의미.
둘 다 기계라서 <귀안>으로 정보를 캐낸다는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성은 마지막 희망을 알리아에게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대현자님!”
촉수에 뒤엉킨 멜카논을 본 알리아가 통탄한 목소리로 그리 외쳤다.
헥카르족에 있어서 대현자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는지, 알리아가 왈칵 눈물을 흘렸다.
슬픔에 빠진 마음은 이해하나 위로의 말 따위를 건넬 여유는 없다.
“저놈은 세뇌되었다. 그 세뇌를 푸는 방법을 알고 있나?”
“흑…. 흑……. 세뇌를 푸는 법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 하지만 대현자님을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은 알 것 같아요. 흑…….”
“그게 뭐지?”
“흑……. 대현자님의 진정한 본체는 ‘두뇌(頭腦)’에요. 그분의 뇌에, 그분의 생명과 영혼, 그리고 지금껏 이룩하신 모든 지식이 담겨 있거든요.”
알리아가 손등으로 눈물을 쓱쓱 닦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대현자님의 온전한 ‘두뇌’만 있으면, 세뇌의 해제와 육체 수복은 어른들이 해주실 거예요. 흑…….”
“온전한 뇌만 있다면 말이지…….”
할 것이 정해지기 무섭게 대성은 구속된 멜카논에게 걸어갔다.
불순한 의도를 감지했는지 탑이 허겁지겁 거신룡 세 마리를 소환했다.
5분 뒤.
대성은 걸레짝이 된 거신룡 세 마리의 시체를 밟고 넘어갔다.
참고로.
단순히 세뇌되었을 뿐이지, 멜카논은 의식이 아예 없는 게 아니다.
당연히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광경을 보고, 모든 말들을 들은 상태.
그렇기에 멜카논은 어두운 낯빛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흠, 내 뇌를 적출한다고? 그런 패악질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걸세.”
“그만두기를 바란다면 얌전하게 세뇌를 푸는 방법을 말해라.”
“나는 나 자신이 세뇌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네.”
“그게 바로 네 뇌가 적출당하는 이유다.”
대성은 주먹을 망치처럼 휘둘러 멜카논의 정수리를 으깼다.
그리고는 뇌수가 흘러넘치는 두개골에 손을 푹 담그더니 서슴없이 뇌를 꺼냈다.
“흐어엉…. 불쌍한 대현자님…….”
뒤에서 알리아가 오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