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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43화 (143/180)

# 143

143

“크흠.”

“왜 그러십니까? 샘에 가기 전에 따스한 차라도 드릴까요?”

“아니다. 그냥 갑자기 가래가 끓어올랐을 뿐이다.”

“땅바닥에 뱉으시는 건 조금 참아주십시오, 하하.”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 뒤, 멜카논은 아련한 미소를 머금었다.

“……죽은 제 아들 녀석 얘기를 했더니 기분이 좀 울적했는데 한결 나아진 것 같습니다. 별로 궁금해하실 얘기도 아닌데 저 혼자 우울한 얘기를 떠든 것 같아 죄송하군요.”

“신경 쓰지 마라.”

싱긋거리는 멜카논의 눈웃음으로부터 시선을 뗀 대성은 아카식 레코드를 도로 접었다.

그러자 멜카논이 짐짓 흥미가 어린 눈길을 하며 입을 열었다.

“어째…… 저의 완성작이 좀 도움이 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쓸모가 있었다.”

“그럼 이번엔 제 쪽이 소소한 답례를 받을 겸, 아카식 레코드에 뭐가 적혀 있었는지 알려주실 순 없나요? 하하.”

“시간 낭비 그만하고 얼른 ‘망자의 샘’으로 가지.”

“허허, 네. 그냥 해본 농담이었습니다. 갑시다. 제가 안내해드리죠.”

설령 대현자라 하여도 모든 걸 훤하게 내다보지는 못하는 걸까.

아무래도 멜카논은 하나뿐인 아들을 죽인 원수가 지금 옆에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대성은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 사실관계를 확인했을 땐 본인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와버리긴 했다. 그러나 그뿐이다.

양심의 가책 따위를 느꼈더라면 연기엔 조금의 일가견도 없는 대성은 바로 표정 관리에 실패했으리라.

하지만 현재 그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하고, 무덤덤했다.

놀람 말고는 그 어떤 감정도 스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이 꼬일 위험이 있으니 이 사실은 그냥 숨기고 있는 게 낫겠군.’

대성은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멜카논의 뒤를 따라갔다.

처음엔 황색 대지만 둥둥 떠다녔던 유계는, 심층부로 접어들면 접어들수록 더 짙은 어둠에 사로잡혔다.

평범한 해수면에서 심해(深海)로 빠져드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발이 딛고 있는 땅의 모습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

꿈결 같은 심연 사이를 말없이 거닐던 그때였다.

“여깁니다. 저와 제 아들만이 아는 유계의 가장 깊은 곳, 혈(血)입니다.”

앞장을 섰던 멜카논이 돌연 걸음을 멈추더니 정면 방향을 가리켰다.

거기엔 너무나 선연한 진홍색을 띤 핏방울 하나가 떠올랐다.

크기가 성인 남성 하나는 거뜬히 덮을 만큼 커다란 핏방울이다.

사방팔방이 새카만데, 그 한가운데 핏방울 하나만 덩그러니 떠다니는 광경은 기이하면서도 몽환적이었다.

“이 안쪽에 ‘만상의 샘’이 있습니다.”

“그냥 들어가면 되는 건가?”

“예. 핏방울에 손을 가져다 대시면 자연스레 온몸이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겁니다.”

방법을 알았으니 지체하지 않고 대성은 핏방울을 향해 다가갔다.

손을 뻗으려던 참에 멜카논이 깜짝 놀라 물었다.

“설마 혼자 들어가시려고요? 저도 같이 들어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나 혼자 간다.”

“뭐 그렇게 하시겠다면야……. 대신 샘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그걸 전달받고 해독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달하고 말 것도 없이 대성은 ‘만상의 샘’이 하는 말을 스스로 해석할 작정이었으니까.

그리고 일이 온전하게 해결하려면 절대로 멜카논이 따라와선 안 된다.

대성의 손바닥이 핏방울을 지그시 누른 순간.

[‘만상의 샘’에 입장하셨습니다.

[한 달 최대 입장 가능 횟수 달성. 30일 뒤에 다시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샘의 구절’이 새로 갱신됩니다.]

주변엔 어느덧 찬란한 수정 동굴이 펼쳐져 있었다.

똑-.

천장에서 떨어진 이슬이 수면을 때리고, 파문이 잔잔하게 그려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내려보니 좁은 웅덩이 안에 샘이 고여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만상의 샘’은 언제나 근원으로 향하는 힘을 손님에게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만상의 샘’이 전하는 구절을 그대로 음독(音讀)하십시오. 이는 차원의 근원까지 안내하는 신물(神物)을 소환하는 주문이 됩니다.]

[‘샘의 구절’을 들을 준비가 되셨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시스템의 글귀를 한번 훑은 뒤, 대성은 곧장 <더 북>을 소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멜카논이 방금 말했던 ‘아들이 만든 주술을 총망라한 책’은 이것밖에 없었다.

만일 멜카논이 지금 대성의 손바닥 위에서 둥실둥실 떠오른 고서(古書)를 봤더라면 미친 듯이 격분하며 날뛰었으리라.

‘모든 언어를 해석해주는 주술이라면 역시 이거겠군.’

얼마 전, 문세걸 관련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곳 협회장이랑 통역관 없이도 원활한 대화를 나누게 해줬던 권능.

<권능 정보>

소통

[300m 반경에 있는 존재들의 언어를 통합합니다.]

이걸 다시 써먹을 때가 온 것이다.

대성은 <소통>의 권능을 일시적으로 획득한 다음 말했다.

“준비됐다.”

-나는 외로이 싸웠으나 최후엔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못하였다.

“…….”

준비됐다고 말하기 무섭게 또렷한 메아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지구의 근원이 그러했듯, 여성 쪽도 남성 쪽도 애매한 무성(無性)의 목소리.

더 이어지는 구절이 있나 싶었으나 이 뒤에는 침묵만이 흐를 따름이다.

“나는 외로이 싸웠으나 최후엔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못하였다.”

시스템이 말한 대로 음독하였다.

아무래도 상관없긴 하지만 썩 마음에 드는 구절은 아니다. 문장에 회한이 잔뜩 묻어나왔기 때문이다.

설마 예언일까.

아니,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으니 가능성은 작았다.

[‘샘의 구절’을 완벽하게 음독하였습니다.]

[‘차원의 근원’으로 인도하는 신물이 생성됩니다.]

물살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웅덩이 쪽으로 눈길을 옮기니, 아담한 크기의 목각 인형이 수면 위로 아등바등 헤엄치고 있는 게 보였다.

일전에 보았던 헥카르 비전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생김새다. 차이점이 있다면 어째선지 저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 정도.

대성은 웅덩이에 가까이 다가가 몸을 숙인 뒤 손바닥을 바닥에 댔다.

그러자 동아줄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목각 인형이 허겁지겁 대성의 손바닥 위로 아득바득 기어 올라왔다.

역시나 시스템이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왔다.

[아이템 정보]

이름 : 생명 포식자

분류 : ???

‘차원의 근원과 이어진 외길을 간직한 작은 안내자.’

‘생명 포식자가 근원과 이어진 길을 열게 할 방법은 두 가지다.’

* 생명석을 1000개씩 주는 것. 단, 이 경우엔 무작위로 입장한다.

* 특정한 차원의 근원에 입장하는 것을 원할 시, 해당 차원을 지배하는 자의 생명을 먹이로 줘야 한다.

목각 인형의 골뱅이 같은 검은 눈이 스리슬쩍 대성을 올려다보았다.

얕은 샘조차 혼자 빠져나오지 못한 녀석치고 거창한 이름을 가졌다.

“지배자들의 생명을 네게 먹이로 주면, 나를 근원까지 인도해준단 말이지…….”

목각 인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비싼 먹잇값을 요구하자 대성은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배자들의 생명.

참고로 대성이 파편을 얻어야 하는 근원들의 목록 중 하나엔-.

‘여기도 포함되어 있었지.’

헥카르도 있었다.

그리고 헥카르의 지배자는 대현자 멜카논이었고.

웅-.

동굴의 한쪽 벽면에 바깥 정경이 흐릿하게 비치는 출구가 생성됐다.

그 너머로 우두커니 선 멜카논을 흘겨보며 대성은 턱을 쓸었다.

‘일이 묘하게 돌아가는군.’

***

“서, 설마 손에 그건…….”

대성의 손에 들린 인형을 본 멜카논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샘이 제공하는 신물은 대개 인형에 가까운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즉, 저 인형을 대성이 들고 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자명했다.

“서, 설마 샘의 구절을 바로 해독하신 겁니까?”

“어.”

“말도 안 됩니다! 대체 어떻게-.”

“방법이 없지는 않았지.”

대성은 허리춤 뒤편에 열어둔 아공간 속으로 생명 포식자를 넣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멜카논의 눈길 또한 대성의 허리 쪽으로 향하였다.

그래서 그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검격(劍格)을 보지 못하였다.

쾅-!

일말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을 작정으로 휘두른 일격이었다.

하지만 업화대검은 무의미한 땅바닥만을 내려찍어야만 했다.

이 짧은 사이에 저만치 물러선 멜카논이 싸늘한 목소리를 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유감스러운 얘기를 하나 해주지. 너를 죽여야만 내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 인형이 제 생명을 먹어 치워야만 근원으로의 길을 열 수 있는 겁니까?”

“잘 아는군.”

“한번 떠본 건데 정답이었나 보군요 헥카르 비전도 비슷해서 말이죠. 뭐, 결국 써보진 못했지만…….”

긴말을 나눌 생각이 없었던 대성이 땅에 깊숙이 박힌 칼을 도로 빼내어 진각을 밟으려던 찰나.

멜카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정말 화가 나지만, 나무라지는 않겠습니다. 어쨌든 당신 덕에 제가 헥카르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요.”

슥-.

멜카논이 느닷없이 손을 들어 보이더니 검지와 중지를 맞댔다.

“보이십니까? 제가 이 손가락만 튕겨도 당신은 유계에서 강제로 추방당할 것입니다.”

“그런 마술을 부릴 수 있었으면서도 기신족에게 납치당한 건가?”

“손가락을 튕길 새도 없이 시간을 갖고 놀았으니까요, 그들은.”

“하긴. 당해보니까 과연 꼼짝도 못 하겠더군.”

콱-! 대성은 잠시 땅바닥에 칼을 세로로 꽂아두었다.

“지금 날 추방해봤자 나는 어떻게든 여기로 다시 올 거다.”

“그럼 그때 다시 내보내면 그만입니다.”

“괜한 후환을 남기지 말고 그냥 이 자리에서 날 죽이는 게 어때.”

“세 번까지는 봐 드릴 겁니다. 네 번째부터는 당신을 죽일 겁니다.”

“나는 네놈의 자비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어.”

“제 마음은 변치 않습니다.”

안다. 아무리 이렇게 말해봤자, 멜카논의 마음을 돌리긴 어렵다는 걸.

하지만 대성은 녀석의 스위치를 올릴 물건을 이미 쥐고 있었다.

스르륵-.

하늘 방향으로 뒤집힌 대성의 손바닥에 <더 북>이 생겨났다.

그 순간.

고서의 형태를 똑똑히 눈에 담은 멜카논이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가느다랗게 좁혀졌던 눈이 이마까지 닿을 만큼 크게 뜨였다.

“뭐-.”

“아까 어떻게 샘의 구절을 바로 해독했냐 물었나? 이게 내 대답이다.”

“그, 그건…….”

“듣던 대로 네 아들은 대단했다. 여기에 적힌 주술 중 하나를 사용하니 샘의 구절도 마치 사람이 하는 말처럼 쉽고 또렷하게 들리더군.”

멜카논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아마 저 안은 지금쯤 분노와 경악의 감정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으리라.

초점이 나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두 눈이 대성과 <더 북>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하지만 대성은 괘념치 않고 이렇게 말했다.

“네 아들은 내가 죽였다.”

“…….”

“손가락 튕겨보시지. 아들을 죽인 원수를 눈앞에서 곱게 돌려보내고 싶다면 말이야.”

충혈된 눈에선 급기야 눈물이 주르륵 흘렀는데 그 색깔이 시뻘겋다.

멜카논은 입가를 파르르 떨며, 온 힘을 쥐어 짜내는 듯한 모습으로 짧게 물었다.

“왜, 왜……?”

“그놈이 내가 사는 세계를 침공했다. 됐나?”

쾅-!

옆에 꽂아둔 업화대검을 뽑음과 동시에 땅을 박차 돌진했다.

머저리가 아닌 이상에야 멜카논은 손가락을 튕길 리가 없었다.

그보다 대응 자체를 하지 못 했다.

푸-욱!!

너무나 손쉽게 업화대검이 멜카논의 가슴팍을 꿰뚫은 게 아닌가.

“…….”

짙은 피눈물로 흠뻑 적셔진 멜카논의 얼굴이 대성을 향했다.

녀석은 칼에 가슴을 관통당한 채 아들을 죽인 원수를 노려보았다.

서늘한 원망이 번들거리는 눈초리.

당당히 마주 보며, 대성은 한 차례 더 대검의 불길을 터뜨려 녀석의 전신을 폭사시키려고 했다.

-딱!

부지불식 간에 멜카논이 손가락을 튕기지 않았다면 말이다.

“뭐라고?”

설마 여기서 그렇게 나올 줄은 대성으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다.

살짝 놀라는 것도 잠시.

“…….”

눈 깜짝할 사이에 대성은 어느 소도시의 보행로 위에 서 있었다.

휘이잉!

차갑고 새하얀 눈발이 얼굴을 때리자 안 그래도 불편했던 심기가 더욱더 분노로 이글거렸다.

‘죽는 데 두려워서 손가락을 튕겼을 리가 없어.’

대성은 방금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노려보았던 멜카논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건 아들을 죽인 원수를 쉬쉬하는 머저리의 눈빛이 아니었다.

필시 꿍꿍이를 꾸미고 있기에 대성을 유계 밖으로 추방한 것일 터.

대성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지.’

일단 유계는 아니고 지구이기는 한데 눈발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아니, 여기가 어디든 무슨 상관이랴. 지금 해야 할 건 각지의 도처에 흩어진 ‘안내자’를 찾아 다시 유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대성이 지도를 열람하려던 찰나.

[상황의 변화를 감지! ‘아카식 레코드’의 <하급 정보>가 새로 갱신되었습니다.]

[상황의 변화를 감지! ‘아카식 레코드’의 <중급 정보>가 새로 갱신되었습니다.]

갑자기 시스템 알림이 떠올랐다.

확인해보니 아카식 레코드에 적힌 기존의 내용에 어떤 변화가 생긴 모양이다.

물론 기존의 ‘하급 정보’와 ‘중급 정보’를 읽어보진 않았기에 그 변화가 무엇인지는 봐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허공록 시절엔 겪어보지 못했던 기능이다. 지금 상황에선 좀 뭐 한 말이지만, 멜카논이 대성을 위해 힘을 써준 보람이 있었다.

‘상황의 변화를 감지해 내용이 바뀌었다는 건, 지금의 내게 도움이 될 여지가 적혀 있다는 뜻이겠지.’

지도를 열람하려던 걸 멈추고 대성은 곧장 아카식 레코드를 폈다.

우선 [하급 정보]부터 확인해봤다.

[하급 정보]

「원수를 발견하고 분노한 멜카논이 사용자를 먼저 찾아간다.」

「괴기스러운 형태로 변모한 멜카논은 원래의 모습 때와 달리 대단히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니 주의.」

「대면 즉시 멜카논을 죽이지 않으면 사용자에게 직접적인 큰 피해가 발생할 예정.」

하급이라서 별반 기대 안 했건만 꽤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먼저 찾아온다고 하니 덕분에 번거롭게 안내자를 찾아갈 필요가 사라진 것이다.

‘주변에 인기척도 없어 보이고.’

만일 사람 많은 대도시였다면 망설였겠지만, 아니니까 상관없다.

[하급 정보]가 이 정돈데 [중급 정보]엔 또 얼마나 쓸만한 이야기가 적혀 있을까.

어쩌면 괴기스러운 형태로 변모했다던 멜카논의 약점이 적혀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

곧 대성은 [중급 정보]를 열었다.

[중급 정보]

「서쪽으로 30km 떨어진 거리에 타이탄과 드래곤이 영역 하나를 두고 분쟁 중.」

「러시아 우수리스크(Ussuriisk)의 인구 대부분이 타이탄과 드래곤의 싸움에 휘말려 억류당하는 중.」

대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읽어봐도 이게 왜 ‘중급’으로 책정됐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용에서 유추할 수 있는 중요도만 따지면 ‘하급’만도 못 하지 않은가.

‘뭐지.’

눈발이 점점 거세졌다.

지금은 일단, 멜카논이 눈앞에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릴 뿐이다.

꼼짝 않고 자리를 지키고 선지 30분쯤 흘렀을까.

[‘유계로의 문’이 강제적으로 개방되었습니다.]

[마성(魔性)으로 가득 찬 괴수가 지상에 강림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제한시간 안에 괴수를 제거하지 않을 시, 폭주한 유계가 현계와 뒤엉키게 됩니다.]

쿠구구-.

정신없이 흩날리던 새하얀 진눈깨비들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한 방향으로 모여들더니 둥글게 뭉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공중에서 시커멓고 커다란 구덩이 하나가 생겨났고,

끼에에엑-.

죽기 직전의 짐승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절규하는 듯한 불쾌한 소리가 저 너머에서 메아리쳤다.

탁-!

이내 썩어 문드러진 손이 구덩이의 테두리를 강하게 짚었다.

“…….”

과연 멜카논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기에 저런 소리가 들리고, 저런 손이 보인단 말인가.

상상이 잘 가지 않았던 대성은 팔찌 모양의 만병지왕을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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