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45화 (145/180)

# 145

145

[절대자께서 ‘타락한 대현자 멜카논’을 처치하셨습니다.]

[마력 봉인이 해제되었습니다.]

[타이머가 종료됩니다. 예정된 대혼돈이 취소되었습니다.]

무려 30km씩이나 떨어진 거리였으나 대성의 눈에는 보였다.

러시아 상공에 잠시 출몰하였던 검은 구덩이가 사라지는 것을.

“후…….”

싸움이 끝나고 탈력(脫力)에 젖은 한숨을 뱉어본 건 오랜만이었다.

새하얀 입김을 눈으로 좇던 대성이 문득 바닥에 널브러진 멜카논을 보았다.

‘시답잖은 명목으로 내게 시비를 걸어온 놈들은 많았다.’

머리 없이 몸만 덩그러니 놓인 멜카논의 시체는 너무나 초라했다.

그가 여명을 후광 삼아 화려하게 부활하였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기에 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혈육(血肉)의 복수를 하러 온 자를 상대해본 건 처음이야.’

피골이 상접한 멜카논의 시체 위로 점차 새하얀 눈이 쌓여갔다.

눈발에 덮여 천천히 가려지는 그 모습을, 대성은 고요하게 바라봤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진 않았다. 후회도 없고, 미련도 없다.

다만 뭔지 모를 불편함만은 흐릿하게 마음 한쪽을 맴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직 미미한 잠기운이 남은 듯이, 개운하지 않았다.

“…….”

대성에게도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식의 원수를 갚겠다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던 멜카논의 눈빛을 쉽게 잊지 못하는 것이다.

‘공감.’

대성은 차분하고도 객관적으로 자신의 감정 상태를 살폈다.

그래, 그것은 공감이었다. 슬퍼하지는 않을지언정, 그래도 대성은 멜카논의 심정을 이해하고, 헤아려줬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이 그저 닥치는 대로 적의 목숨을 앗았던 그였기에 더더욱.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눈에 파묻혀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멜카논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뻗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죽은 자의 각성>”

손끝에서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멜카논을 뒤덮은 눈밭 속으로 스며들었다.

곧이어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령단장 돌프’의 고유 권능이 일시적으로 절대자에게 전승되었습니다.]

[‘사령단장 돌프’의 고유 권능: <죽은 자의 각성>이 발동됩니다.]

단지 죽은 자를 언데드로 되살릴 뿐인 <죽은 자의 기상>과는 다르다.

<죽은 자의 ‘각성’>은 그보다 한 단계 앞선 상위 계열의 스킬이다.

‘돌프에게도 죽은 자의 각성은 익숙하지 않은 스킬이었겠지.’

익숙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터.

<죽은 자의 각성>엔 꽤 까다로우면서 얄궂은 조건이 붙었으니까.

[‘각성’을 행하시려면 죽인 대상에게 술사가 깊은 공감과 연민을 느껴야만 합니다.]

[공감과 연민의 감정이 강하면 강할수록 스킬이 적용될 성공 확률도 덩달아 상승합니다.]

[술사는 현재 죽인 대상이 지닌 전사(前史)에 가벼운 회한을 느끼고 있습니다.]

[성공 확률: 53%]

[사자(死者)를 각성시키겠습니까? 예 / 아니오.]

공감, 연민, 회한.

생명을 벌레보다도 하찮게 여기고, 무자비한 성정으로 죽음의 군단을 호령하였던 돌프에게 이보다 더 안 어울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물론 그건 지옥에서 80년을 굴러 있는 대로 독기가 차오르고, 적대하는 자에겐 절대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대성도 마찬가지지만.

그렇기에 돌프나 대성이나, <죽은 자의 각성>이 요구하는 조건을 수행하는 건 무리에 가까울 터였다.

지금 같이 특별한 경우만 제외하면 말이다.

‘성공 확률은 반반인가.’

신중해야만 한다.

실패할 경우, 그 여파로 스킬을 적용한 대상은 시체마저 영영 소멸하고 마니까.

단지 그것뿐이라면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시도했겠지만…….

‘각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은 많지 않을뿐더러,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 또한 제한적이다.’

<죽은 자의 각성>을 통해 새로이 태어날 자격을 부여받은 그릇은 그리 많지 않다.

오만하고 고고한 용족이라 하여도, 최소 섬멸룡만큼의 위상을 가진 존재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리고 대현자라는 작위를 지녔던 멜카논이라면 그릇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지녔다.

게다가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총 세 번. 운에 따른 문제이기는 해도 일단은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

물론 도박을 하는 대신 그냥 <죽은 자의 기상>으로 멜카논을 되살리는 선택지도 있다.

하지만 아까웠다.

<죽은 자의 기상>으로 되살아난 언데드와 <죽은 자의 각성>으로 새로이 탄생한 언데드 사이엔 땅과 하늘에 버금가는 차이가 존재하니까.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는 건 가능하지만, 없는 감정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한 법.’

여기서 성공 확률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올리겠답시고 신파극의 등장인물처럼 눈물을 쥐어 짜내는 것도 웃기는 꼴이 아닌가.

멜카논의 사정은 안타까웠다. 그래서 죽이고 나서도 혀를 끌끌 찼고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그뿐이다. 딱 거기까지의 감정이었다.

죽여서 미안하다고, 평생 속죄하면서 살아가겠다고 질질 짤 정도는 아니란 말이다.

무슨 배역에 몰입하는 톱스타도 아니고 여기서 뭘 더 감수성을 느끼고 공감하라는 건 대성에게 무리였다.

‘그냥 반반 확률을 믿고 가볼 수밖에 없겠군.’

마음을 가볍게 비운 대성은, 각성을 시도하겠냐는 시스템의 질문에 응답하였다.

해보겠다고.

***

우수리스크의 변두리는 처참한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고 있었다.

전부 러시아에서 내로라하는 사냥꾼들의 시체였다.

특히 우수리스크를 대표하는 대형 클랜, <아폴론>의 소속원이 많았다.

“윽…. 끅…. 커흑, 쿡?!”

클랜의 부단장, 콘스탄틴 모로조프가 피를 한 움큼 토했다.

그는 우람한 기골을 지닌 장성이었으나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왼쪽 팔다리는 공업 프레스에 짓눌린 것처럼 우그러들었고, 한쪽 눈은 안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함몰되었으니까.

그가 S급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뛰어난 사냥꾼이 아니었더라면 진즉에 숨이 멎었을 것이다.

“누구…. 누, 누구… 아직 살아있는 사람… 어, 어, 없나?”

그는 차갑게 얼어붙은 바닥을 기어 다니며 힘겹게 목소리를 내었다.

사방에 널브러진 단원들의 시체를 흔들어대며 같은 물음을 반복했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돌아오는 건 눈발이 흩날리는 소리뿐이었다.

휘오오오-.

“개, 개 같네…. 십…. 나, 나 진짜 여기서 주, 죽는 건가……?”

2차 대격변이 발발하자마자 우수리스크 도시에 거인처럼 생긴 몬스터가 나타났다.

그 거인은 다짜고짜 우수리스크를 자신의 영토로 삼겠다고 선포하며 사람들을 위협했다.

대형 클랜으로선 결단코 쉬쉬할 수 없는 노릇. 그래서 싸웠다.

그리고 이런 결말을 맞이했다.

정말, 스스로 생각해도 허무하고 꼴사나울 정도의 단판 승부였다.

“어흑…. 흐윽…. 흑…….”

솔직히 말해서, 잡혀간 사람들은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걱정되는 건 본인의 생사였다.

거인에게 덤빈 것도 대형 클랜이 지닌 의무를 수행하기 위함일 뿐.

거창한 사명 의식 따윈 없었다.

“살고… 살고 싶어…….”

그는 야속하게 진눈깨비만 쏟아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뇌까렸다.

S급 사냥꾼이 다 뭔가. 대형 클랜의 부단장이란 지위가 다 뭔가.

인간은, 걸어온 인생의 길이 가시밭길이든 꽃길이든 죽음 앞에선 그저 추레한 겁쟁이가 될 뿐이다.

콘스탄틴은 의식이 암흑에 물드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살고 싶다는 열망을 버리지 못했다.

얼마 안 가, 그의 눈꺼풀이 힘없이 닫히려던 그때였다.

《살고 싶으면 빛을 붙잡아라.》

난데없이 그런 속삭임이,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들려왔다.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려던 콘스탄틴이 눈을 번쩍 떴다.

“무, 뭐…. 아,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있었-.”

그는 귓가를 파고드는 속삭임이 주변 어딘가의 생존자가 낸 목소리라고 착각했다.

다급하게 고개를 들어 목소리를 좇으려던 콘스탄틴이 잠깐 멈칫했다.

《살고 싶으면 빛을 붙잡아라.》

반복되는 속삭임.

그리고 눈앞에 날아다니는 반딧불이 하나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눈 내리는 러시아에 반딧불이가 돌아다니는 게 상식적인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사경(死境)에 이르렀다 하여도 이토록 또렷한 환청이 들려오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콘스탄틴은 속삭임이 명하는 대로 눈앞의 반딧불이를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살고 싶으면’이라는 구절이, 바로 전에까지 생을 구걸하였던 그의 마음을 절절하게 울렸기 때문이다.

“허, 허억…. 헉…….”

콘스탄틴은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반딧불이를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천상의 네 번째 사도, 아도니스라고 한다.》

“처, 천상, 뭐, 뭐……?”

《너는 나의 계시를 받았다. 그러니 나의 화신(化身)이 될 영광을 누리게 해주마.》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만 이어지니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속삭임은, 청자의 의사에 상관없이 자기 할 말만 계속했다.

《나의 화신이 된다면 너를 죽음의 구렁텅이로부터 끌어 올려주마. 더는 고통받지 않도록 성은을 베풀어주마.》

속삭임은 어느덧 유혹으로 변했다.

《새로운 목숨을 주지. 그리고 지금보다 더 강맹한 힘을 가지고 살아가게 해주마.》

“사, 살려준다고……?”

《나의 계시에 응하겠다면 한마디만 해라. “짊어지겠다.”라고.》

“…….”

마음에 여유가 충분했더라면 우선 의심부터 했으리라.

하지만 콘스탄틴은 그러지 않았다.

절벽에 매달린 사람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이었으므로.

이러나저러나 죽을 목숨 아닌가?

그렇다면 차라리 희소한 가능성에 목숨을 걸어보기로 했다.

손에 움켜쥔 반딧불이를 직시하며, 콘스탄틴은 입을 열었다.

“짊어지겠-.”

“닥쳐.”

그때.

갑작스레 끼어든 그 한 마디가 콘스탄틴의 말을 가로막았다.

깜짝 놀란 그가 무심코 반딧불이를 쥔 손에 힘을 풀었다.

《응……?》

근엄함이 묻어나왔던 반딧불이의 속삭임이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저벅-.

발소리가 이어졌다.

반딧불이와 콘스탄틴이 동시에 발소리의 진원지를 돌아보았다.

《뭐……?!》

반딧불이의 목소리가 속삭임에서 고성으로 돌변했다.

시체 밭을 가로지르며 콘스탄틴의 옆에 다가온 대성을 본 반딧불이가 경악성을 흘렸다.

아니, 느닷없이 난입한 건 대성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옆에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로브를 걸친 정체불명의 소환수를 대동하고 있었다.

보랏빛으로 타오르는 안광, 오른손에 그러쥔 원목 지팡이, 청년의 형상을 한 얼굴 위로 구부정하게 솟은 한 쌍의 뿔.

반딧불이는 대번에 소환수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아, 아크 리치(Arc Lich)라고……?! 대체 어떻게……!》

“이놈 붙잡아라.”

《윽……!》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크 리치가 반딧불이를 거칠게 낚아챘다.

본래 반딧불이의 모습은 말을 직접 전달한 대상, 즉 콘스탄틴밖에 보지 못한다.

목소리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죽은 자의 각성>이 성공적으로 적용되어, ‘아크 리치’로 재탄생한 멜카논은 그러한 제한을 무위로 만들었다.

[‘아크 리치 멜카논’이 수상쩍은 정령의 목소리를 감지합니다.]

[아크 리치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은, 그와 같은 마력 회로로 연결된 절대자에게도 공유됩니다.]

그렇다.

50 대 50의 도박이었으나, 대성은 그 도박에서 훌륭히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대현자 멜카논은 아크 리치 멜카논으로 제2의 삶을 구가하게 된 것이다.

‘세상 만물의 소리를 듣는, 어둠의 대현자라…….’

든든한 아군이 생겼다. 모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흡족한 감상은 잠시 미뤄두며, 대성은 멜카논의 손아귀에 붙잡힌 반딧불이를 노려보았다.

사아악-.

빛이 사그라졌다. 불티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반딧불이의 모습이 조금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익숙한 얼굴이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손수 머리통을 박살 내주었던 적이 있었으니.

천상의 네 번째 사도, 아도니스. 그와 똑같은 생김새를 한 정령이 아크 리치의 손아귀 속에서 버둥댔다.

마치 어디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SD 캐릭터 같기도 했다.

“이건 ‘계약의 정령’입니다. 술사가 원하는 대상과 계약을 맺게 하여, 자신이 가진 힘을 일부 양도하게 해주는 정령이죠.”

아크 리치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이전의 삶을 대현자로 살았기 때문일까. 멜카논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 따로 없었다.

대성은 고개를 가볍게 주억였다.

“다 들었다. 이놈을 화신으로 삼겠다고?”

《이, 이놈……!》

“내려와서 나랑 직접 싸울 자신은 없으니 대타를 내세우겠다? 어째 네놈들은 하나같이 졸렬하기 짝이 없는 개수작만 부리는군.”

《빌어먹을 하얀 악마! 이거 놓지 못해! 네가! 네가 로드릭을……!》

“대타? 데려올 테면 데려와라. 열 명이든 백 명이든 천 명이든 내 눈에 띄면 모조리 죽여버릴 거니까.”

대성은 여유로운 손길로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을 물었다.

라이터 불이 담배 끄트머리를 태웠다. 그는 연기를 훅, 뱉으며 말했다.

“먼저 올 생각 없으면 그냥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조만간 내가 찾아가서 네놈들 아가리 속에 창자를 쑤셔 박아 줄 테니.”

《이놈-!》

파각-!

멜카논의 손아귀에 힘이 실리자,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도로 편 멜카논의 손바닥에서 정령의 피와 살점이 후드득 떨어졌다.

“…….”

대성은 연기를 한 번 더 뱉은 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콘스탄틴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그는 상점 창을 열어 ‘최고급 회복의 비약’을 하나 샀다. 어차피 공짜니 아까울 건 없었다.

뽕-.

대성은 비약의 뚜껑을 딴 뒤, 그 안에 담긴 액체를 콘스탄틴의 넝마 같은 몸 위로 콸콸 쏟아부었다.

“으헉! 헉! 으흑!”

갑자기 물세례를 맞게 된 콘스탄틴이 소스라치며 발버둥을 쳤다.

비약의 효과가 스며들자 그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잘린 팔다리는 재생되지 않았으나, 적어도 출혈은 막아줬다.

콸콸콸-.

플라스크 병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액체를 쏟아부으며, 대성은 짧게 한마디 했다.

물론 러시아인인 콘스탄틴은 못 알아듣겠지만, 전혀 상관치 않았다.

“개처럼 살지 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