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147
밤하늘에 떠오른 검고 작은 별.
하늘을 유심히 바라본다 하여도 발견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그 칠흑의 별을 보고 있었다.
인류, 란도족, 타이탄.
그들 모두가 땅거미 같은 새카만 별빛을 한가득 쬐었다.
“그 사이에 불청객이 더 늘었군.”
이들 중 오직 한 명만이 검은 별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름 아닌 흑성(黑星)을 떠오르게 한 장본인, 대성이었다.
후위에 수많은 러시아인을 이끌고 워프 게이트를 넘어오는 그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생성되었다.
[10분간 스킬의 사용자가 인식한 아군의 전투력은 상승하고 적군의 전투력은 하락합니다.]
안 그래도 타이탄의 난입 때문에 부산스러워진 전장이 대성의 등장으로 인해 한층 더 시끌벅적해졌다.
특히나 란도족 측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질겁을 해대며 당황했다.
“저, 저놈이 하필 지금 나타나는 건 또 뭐야!”
“이, 일단 후퇴해! 저놈이 끼면 승산이 없어진다!”
“후퇴하긴 뭘 후퇴해! 뒤를 봐! 도망쳤다간 우리 모두 저 거인들한테 개죽음당할 거라고!”
그들은 대성이 당분간 자리를 비울 거라 철석같이 믿고 군집을 이뤄 침공을 강행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믿음이 물거품이 되었으니 포기 선언부터 외치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그렇다 하여 꼬리를 말고 도망치자니 뒤에는 더 거대하고 압도적인 거인이 포진해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외통수에 걸려든 셈이다.
“젠장! 그냥 싸우자!”
무리의 대표자 격인 란도족, 하크락이 그리 외치며 영창을 외웠다.
어차피 목숨을 버릴 각오로 여기까지 왔으니 싸우다 죽겠다는 의미다.
그의 결의에 영향을 받은 다른 란도족 무리도 마나를 끌어모았다. 불, 얼음, 전기, 갖은 속성을 지닌 기운이 그들의 손에 응집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치이익…….
넓은 밤하늘에 위용을 드러낸 검은 별은 커다란 변화를 몰고 왔다.
“어, 뭐, 뭐야, 이거? 갑자기 캐스팅(Casting)이 잘 안 돼. 왜 이래?”
“아니, 하필 이럴 때 말썽이야!”
형형한 흑성의 별빛이 그들의 손에 모여든 마나를 갉아먹은 것이다.
이로써 항거를 이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무기도 고장 난 셈이다.
“…….”
하크락은 물을 끼얹은 듯이 초라하게 꺼져가는 손안의 불씨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란도족 또한 전의를 상실한 채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저들을 이끌고 인간과 거인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만용이다.
그는 차라리 전략을 조금 바꿔보자고 짧은 결단을 내린 후, 대성을 향해 발걸음을 움직여 다가갔다.
“저놈들은 타이탄이야. 아무리 당신이 강하다고는 해도 타이탄을 당해낼 순 없어. 저놈들은 무두질 한 방에 수백의 생명이 흙으로 돌아간다고 악명이 자자한 종족이거든.”
“…….”
“그러니까 잠깐 동맹을 맺자고. 서로가 혼자여선 개미처럼 짓밟히겠지만, 둘로 뭉치면 어느 정도 승산이 생기겠지. 어떻게 생각-.”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하려고 했던 하크락의 시야가 회전했다.
만병지왕으로 작은 소도(小刀) 한 자루를 만든 대성이 하크락의 목을 깔끔하게 절단한 것이다.
툭.
흙바닥 위로 떨어진 하크락의 목이 우스꽝스레 뒹굴었다.
“헉……!”
“히, 히익……!”
그 참상을 목격한 나머지 란도족이 심장이 멈춘 듯 헛숨을 들이켰다.
대성은 죽기 전의 표정을 아직 오롯이 간직 중인 하크락의 목을 발로 살포시 걷어차 저들 사이로 굴러가게 했다.
그리고 딱 한 마디만 내뱉었다.
“너희 중 한 놈, 아무나 저 멍청이의 목을 보관하고 있어라.”
“…….”
물론 그 말을 듣고 하크락의 목을 집어 드는 자는 없었다.
마치 란도족이 선 지점에만 혹한기가 찾아온 듯 냉랭함이 감돌았다.
반면, 인류 쪽 진영은 달랐다.
“겁쟁이들 같으니라고! 그러니까 왜 감당도 안 될 짓을 저질러!”
“기분 탓인가? 왠지 초능력도 좀 세진 것 같은데.”
“동양의 구세주께서 오셨어! 거인이고 뭐고 다 때려잡자고!”
검은 별의 은총은 사람들이 캐스팅한 마법이 지닌 위세를 더욱 강맹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용기와 의욕을 고취하게끔 만든 진짜 원인은 대성의 존재 그 자체에 있었다.
구세주의 등장!
별빛보다도 휘황찬란한 존재감이 사람들의 절망을 걷어낸 것이다.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사람들이 지금 당장이라도 거인을 향해 돌진하려 하자, 대성은 말없이 손을 들었다.
혼자 가겠다는 의미다.
“…….”
사람들은 진심이냐고 묻는 듯한 얼굴을 하면서도 그 무언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대성은 그들에게 무어라 더 말하는 대신 땅을 밟아 내달렸다.
대지를 가로지르며 질주하는 그의 뒤를 아크 리치 멜카논이 따라갔다.
***
“불나방이 두 마리 보이는군.”
양쪽 동공이 화염으로 불타오르는 타이탄이 입가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톱니같이 날카롭고 우둘투둘한 이빨이 섬뜩하게 드러났다.
신장이 웬만한 동네 뒷산에 버금갈 만큼 장대한 타이탄들의 눈에는 저 멀리서 쇄도해오는 대성의 모습이 가소로워 보일 수밖에 없다.
하나 그의 옆을 따르는 아크 리치만큼은 다소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무리 중 덩치가 가장 웅장한 타이탄이 넓은 손바닥을 둔기로 탁탁 내리치며 말했다.
“저기 있는 아크 리치부터 죽여라. 저놈만 짓밟으면 나머지 것들은 우리들의 예비 노예에 불과하다.”
물론 경계한다는 말이 패배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는 뜻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방심하지 말고 최대한 피해를 줄여보자는 취지에서 내린 명령에 불과하다.
설마 아크 리치 한 마리에 수십의 타이탄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므로.
타이탄 무리가 흉흉한 기세로 전진하려던 찰나였다.
화아아악-.
저 멀리서 아크 리치의 머리 위로 창천의 태양을 방불케 하는 불덩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열기가 적지 않은 간격을 두고 떨어진 타이탄에게까지 훅 끼쳐올 정도로 난폭한 불덩어리!
그러나 타이탄은 득의만면한 얼굴로 코웃음만 칠 따름이었다.
“우리를 상대로 화(火) 속성의 공격을 퍼붓겠다고? 저놈, 아크 리치가 맞긴 한 건가? 너무 멍청해서 의심이 갈 지경이군.”
가끔 화산 지대에 흐르는 마그마로 몸을 씻기도 하는 종족들이다.
그런데 저따위 불덩어리 하나로 시비를 걸어오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윽고 가라앉는 풍선처럼 천천히 불덩이가 날아들었다.
타이탄 무리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당당히 받아내려 했으나,
퍼버벙-!
“……?!”
“끄윽……?!”
지면에 내려앉은 불덩어리가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폭발했다.
새카만 창공을 주홍색으로 물들이는 불길이 지상을 아득히 수놓았다.
그 지옥과 같은 경관 사이로 타이탄들이 불에 휩싸인 채 고통 어린 절규를 내질렀다.
“이, 이건 불이 아니다! 불이라면 이렇게 뜨거울 리가 없어!”
“크아아아악-!!”
“불이 붙은 부위에 몽둥이를 내리쳐라! 비도 안 내리는 이곳에서 불길을 꺼뜨리려면 그 수밖에 없다!”
혈관에 피 대신 용암을 담고 다니는 타이탄들이 불에 타며 당황하는 것도 모자라, 그 불을 끄려고 자기들끼리 서로 둔기를 휘두른다.
아수라장을 넘어서 촌극에 가까운 상황이 펼쳐지던 가운데.
콰직-!
“이, 이놈! 저리 가라!”
“사방이 불지옥인데 휘말려 죽으려고 작정했군! 제정신이 아니다!”
그들이 하찮게 여겼던 남자가 장창 한 자루만을 그러쥔 채 난잡한 불지옥 속으로 몸을 던져왔다.
땅거죽이 녹아내릴 만큼 사나운 불길이 지척에서 활활 솟구쳤으나, 대성의 표정은 고향에 온 것처럼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세상의 불은 모두 자기 손아귀에 있다고 과시하는 듯한 그 모습에 타이탄들은 알 수 없는 섬찟함을 느꼈다.
그들이 지금 어떤 생각을 품고 있건 말건, 대성은 아크 리치를 돌아보며 제 할 말만 꺼낼 뿐이지만.
“절반은 내가 맡고, 절반은 네가 맡는다.”
“알겠습니다.”
“5분 안에 정리할 수 있나?”
“그보다 더 빨리도 거뜬합니다.”
검은 별의 광휘가 점점 거세진다.
10분이 지나면 사람들은 이성을 잃을 것이다. 그러니 그 안에 싸움을 끝낼 필요가 있었다.
흑성의 룬석을 시험해보자는 의도에서 스스로 둬본 제한시간.
그것은 대성의 움직임을 더 날렵하고, 잔인하게 만들었다.
그 시점에서 타이탄들의 패배는 필연(必然)이나 다름없었다.
***
“미쳤어…….”
“나, 동양의 구세주가 싸우는 걸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저 괴물 같은 거인들이 구세주 한 명한테 맥을 못 추잖아.”
사람들이 전율했다. 란도족 또한 두 눈을 의심하며 압도당했다.
저 먼 곳에서, 산허리가 움푹 주저앉듯이 타이탄들이 스러져갔다.
대성의 무위(武威)가 그려낸 기적과도 같은 장면이었다.
물론 그 옆엔 아크 리치도 있다고는 하나, 사람들의 눈에는 고작 창 한 자루만으로 몸집이 태산만 한 거인을 가볍게 격멸하는 대성이 훨씬 더 위대하게 보였다.
그렇게 모두가 영화라도 관람하듯이 넋을 잃기를 잠시.
지평선을 한가득 메운 먼지구름을 뚫고 대성과 아크 리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검은 별도 자취를 감췄다.
“음.”
호흡 하나 흩트리지 않은 채 다가온 그가 문득 란도족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들 발 사이에 나뒹구는 하크락의 목을 보았다.
“내가 분명 너희 중 아무나 한 놈이 보관하고 있으라 했을 텐데?”
“도, 돌려보내 주십시오! 다시는 기어오르지 않겠습니다!”
생뚱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피를 뒤집어쓴 채 귀기(鬼氣)를 뿜어내는 대성을 본 란도족 무리가 다짜고짜 머리를 조아린 것이다.
“저, 저희는 단지 이 하크락이란 자의 선동에 이끌렸을 뿐입니다.”
“따라오지 않으면 나중에 해를 끼칠 거라는 협박에 이기지 못했습니다!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완전히 기가 질려버린 그들이 덜덜 경련하는 목소리로 간청했다.
대성은 핏물에 젖어 선홍색으로 번들거리는 백발을 쓸어넘겼다.
“혹시 너희들끼리 매뉴얼 같은 거라도 하나 공유하나?”
“예?”
“저번에 왔다가 시체가 되어 돌아간 놈들도 지금 너희들과 같은 말을 했었다.”
대성은 만병지왕을 스파이크 달린 몽둥이로 변환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휘둘러 제일 가까이에 있던 남자의 정수리를 으깼다.
호박 껍질 갈라지는 소리에 이어 찢어질 듯한 비명이 난무했다.
바퀴벌레는 눈에 보이는 즉각 박멸하지 않으면, 언젠간 또 집구석을 기웃거리는 법.
퍽-! 콱-! 콰직-!
대성은 싸늘한 얼굴로 몽둥이를 붕붕 휘둘러가며 반동분자들을 마구잡이로 패 죽였다.
숙청의 시간이 끝나고 란도족 여자 한 명이 피떡이 되어 사망한 동족들 시체 밭 한복판에 주저앉았다.
여자는 동공이 뒤집힐락 말락 하며 눈물 콧물을 줄줄 흘렸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녀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을 때마다 오늘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이 악몽이 되어 생생하게 떠오르리라.
대성은 핏기가 완전히 사라진 하크락의 목을 그녀 손에 슬며시 쥐여주며 말했다.
“돌아가서 너희 동족에게 보여줘라. 될 수 있으면 지금 네가 본 것들을 생생히 얘기해주면 더 좋고.”
“히, 히익……! 힉, 히끅……!”
여자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오열하더니 곧 헐레벌떡 달아났다.
도망치는 와중에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토사물을 쏟아내는 여자를 멀찍이 바라보며 대성은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한 번만 더 기어오르면 그때는 전력이고 뭐고 모조리 죽여야겠군.’
일부러 란도족을 살려서 변방으로 보낸 이유가, 아군 전력으로 써먹을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돌발 사태를 만들면 미련 없이 싹을 잘라내는 것이 나을 터였다.
“그럼…….”
대성은 다시금 지평선 방향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곳엔 절명한 타이탄들의 유해가 동산처럼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
‘최근 들어 부쩍 타이탄과의 충돌이 잦아지는군.’
생명 포식자의 식사가 완료되기까지 이틀.
그동안 놈이 한 번 더 포식을 누릴 수 있는 상차림을 준비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