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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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에 흡수당한 뒤 펼쳐진 장소는 화염이 넘실거리는 불의 대지였다.
독특한 점이 있다면, 대지를 붉게 물들이는 화염들은 땅이 아닌 하늘에서 넘실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총합 서른 개의 불덩어리가 공중에서 원형으로 모여든 기묘한 장소.
‘열다섯 번이 통과 기준이라고 했었나.’
대성이 기리아크의 말을 속으로 되새기던 그때.
허공이 일그러지더니……
철그럭-.
울렁이는 허공을 우악스럽게 비집으며 강철의 골렘이 튀어나왔다.
철제 갑옷의 잔해들을 누더기처럼 기워 맞춘 듯한 형상이었다.
제아무리 골렘이 커봤자 타이탄 앞에서는 난쟁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물결의 시련이 만들어낸 골렘은 달랐다.
울고릭의 몸을 취한 대성과 시련 속 골렘은 서로 눈높이가 같았으니.
“저 정도면 그냥 갑옷 입은 타이탄이라고 봐도 무방하겠군.”
대성이 실없이 중얼거린 그 순간.
콰-앙!
아무런 예비 동작도 없이 갑옷 골렘이 땅을 박차 돌진해 왔다.
대지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파만파 퍼져나가고 발끝에서 터져 나온 풍압이 사방의 불길을 밀어냈다.
‘크기에 비교해 몸놀림이 빠르군.’
타이탄과 견줄 수 있는 신장 크기를 지녔으면서도 속도는 총알만큼 빠르다니.
분명 시련이 만들어낸, 상식과 규격을 벗어난 골렘이리라.
쾅-!
피할 새도 없이 골렘의 거구가 대성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대성의 신형이 덤프트럭과 충돌한 것처럼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곧이어, 그의 몸 위로 올라탄 골렘이 산봉우리처럼 뭉툭하고 커다란 주먹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대성의 등과 맞닿은 지면이 움푹움푹 주저앉을 정도로 흉악한 연타!
그러나 대성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얼굴이 함몰되고 옆구리와 빗장뼈가 으깨져도 괘념치 않았다.
그는 맞으면서 반격을 가했다. 맞은 만큼 똑같이 골렘의 신체 부위 곳곳에 주먹을 박아넣었다.
하지만 단단한 갑주가 실타래처럼 뒤엉킨 외피는 간단하고도 완벽하게 대성의 주먹을 막아주고 있었다.
오히려 그 반격이 역린을 건드린 건지, 골렘은 두 팔을 망치처럼 내려찍으며 사납게 폭주했다.
콰직-! 쾅-! 쾅-!
아픔은 느껴지지 않으나 얼굴이 짓이겨지면서 대성은 직감했다.
이대로 계속 맞고 있다간 언데드의 몸이 버티지 못한다고.
그는 오른손을 꾹 쥐었다.
그와 동시에, 최후의 한 방을 먹이기 위해 갑옷 골렘이 주먹을 천천히 치켜든 순간.
콰직-!
갑자기 갑옷 골렘의 가슴팍을 뚫고 진청색 칼날이 튀어나왔다.
“푸헉-!”
급소가 꿰뚫린 갑옷 골렘의 투구 사이로 시꺼먼 핏물이 터져 나왔다.
이내 대성은 침묵한 갑옷 골렘의 머리를 뒤로 밀어냈다.
스릉-.
갑옷 골렘의 몸이 검신(劍身)의 끄트머리까지 밀려나더니 이내 옆으로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대성은 손에 쥔 장검을 바닥에 꽂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걸 벌써 쓰게 될 줄은 몰랐군.’
느닷없이 튀어나온 장검의 정체는 만병지왕이다.
완벽한 시련의 통과를 위해 어제 <죽음의 동반자>가 해제된 직후 원래 몸을 통해 쥐여주었다.
혹시 원래 몸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건가 우려하였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듯했다.
화륵!
이때, 원형으로 둘러싼 서른 개의 화염 중 하나가 소화(消火)되었다.
남은 스물아홉 개의 화염을 바라보며 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통과 기준이 열다섯 번이라는 게 이런 의미였나.’
앞으로 열네 번 더, 저 일그러진 허공에서 출몰하는 몬스터를 격퇴하는 것.
이른바 웨이브(Wave)였다.
‘완벽하게 시련을 통과한다고 결심해놓고 어리석게도 긴장을 느슨하게 풀고 있었군.’
대성은 끔찍한 상처로 뒤덮인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상태론 남은 열네 번도 과연 이겨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고통을 느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지가 무너질 것이다.
방심이 불러온 결과다.
대성은 자신의 실책을 뼈저리게 반성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쉬어야겠군.”
그 말이 흘러나오기 무섭게 어그러진 허공이 적을 뱉어냈다.
철그럭-. 철그럭-.
같은 갑옷 골렘인데 이번엔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였다.
당연히 대성은 시련이 휴식 따위를 허용해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나 그는 상관치 않고 바닥에 주저앉은 뒤, 미세하게 갈라진 가슴팍 안쪽으로 손을 쑤셔 넣었다.
이윽고 살결 바깥으로 꺼내어진 손에는, 점 크기만 한 목걸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대륙 왕의 증표.
무전기를 통해 통신을 보내듯, 대성의 입술이 목걸이와 가까워졌다.
“나와.”
화르륵-!
그리고 다음 순간, 목걸이가 화염으로 화(化)하더니 곧 여신 ‘룬 퀴엘라’가 나타났다.
[부르셨…… 헉!]
타이탄이 된 대성을 본 룬 퀴엘라가 잠시 입을 틀어막으며 흠칫했다.
본래 대성의 몇 곱절이나 거대한 룬 퀴엘라였으나, 지금은 머리 높이가 서로 일치하였다.
[어, 언제부터 타이탄으로 종족이 변하셨는지……?]
“힘 빠지게 만드는 소리 그만하고 뒤를 봐라. 뭐가 보이지?”
크흠, 머쓱하게 헛기침을 한 룬 퀴엘라가 다시금 후방 쪽을 보았다.
그녀는 흘러가는 구름을 보았다는 듯 태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골렘 두 마리가 보이네요.]
“가서 죽여라.”
[으, 그게 명령이시라면야….]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결국 움직이는 룬 퀴엘라였다.
그녀가 힘차게 입에서 불을 뿜어내자 골렘 두 마리가 지지 않겠다는 듯 몸을 움츠리며 불길을 뚫어냈다.
한편, 군데군데 찢기고 뭉개졌던 대성의 몸이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이윽고 골렘 두 마리를 바싹 태워죽인 룬 퀴엘라가 헥헥 숨을 몰아쉬며 돌아왔다.
[헉… 헉……. 다 끝냈어요!]
“…….”
대성은 불꽃을 살랑거리는 룬 퀴엘라의 어깨 뒤편을 말없이 가리켰다.
그녀가 동그랗게 눈을 뜨더니 지목한 방향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이번엔 갑옷 골렘 네 마리가 우수수 쏟아지고 있었다.
“가.”
[…….]
“멍하니 보고 있지만 말고 얼른 뛰어. 시간이 별로 없다.”
룬 퀴엘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속에서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 중이라는 듯.
그러다 한숨을 푹 쉬며 다시 달려나가 갑옷 골렘 무리와 뒹굴었다.
상처가 전부 회복될 동안만 룬 퀴엘라에게 일을 떠맡기려 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잘 싸워준다.
‘편하군.’
대성은 영화라도 관람하는 것처럼 느긋이 손에 턱을 괴었다.
***
우득!
깡마른 손아귀에 잡힌 송골매 한 마리의 목이 잔혹하게 꺾였다.
“…….”
멜카논은 싸늘하게 뜬 눈으로 송골매의 사체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옆에는 의식이 전이된 대성의 본신이 여전히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리고…….
휘이익-!
대기가 파열하는 소리가 작렬했다.
사선에서 날아든 또 다른 송골매가 날카로운 부리를 꼿꼿이 세운 채 대성의 뒤통수를 노렸다.
“저는 귀가 아주 밝습니다.”
예기 어린 부리의 끝이 허점투성이인 대성의 머리에 꽂히기 직전.
콱-!
날아오는 화살을 낚아채듯, 멜카논의 손이 다시금 송골매를 붙잡았다.
“그러니 이까짓 새대가리 미물이 발버둥 치는 소리를 알아채는 거야, 일도 아니죠.”
뚜둑!
손아귀에 잡힌 송골매의 목을 기역 모양으로 단박에 꺾었다.
기계적인 반복이다.
매가 군주의 머리를 노리면, 손을 뻗어 잡는다. 그리고 꺾는다.
이게 벌써 몇 번째란 말인가.
멜카논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것들을 내세워 찔끔찔끔 기웃거리지만 말고 당당하게 본 모습을 드러내십시오. 어제부터 서로 기운 빠지게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마법이나 주술과 같은 이적이라면 통달의 경질에 다다랐기에, 멜카논은 알고 있었다.
전날부터 군주의 목숨을 집요하게 노리는 이 송골매들의 정체가 그저 평범한 맹금이 아님을.
모종의 존재가 테이밍(Taming) 하여 보낸 암살자임을.
“슬슬 이 지루한 소모전에 종지부를 찍읍시다. 나올 생각이 없으신 것 같으니 제가 나오게 해드리죠.”
황야의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매의 깃털 사이로 멜카논의 눈이 서늘하게 번들거렸다.
이내 그의 눈꺼풀이 닫힌 순간.
팡-!
“어헉……!”
안력(眼力)이 자아낸 파동이 지척에 숨어든 암살자를 강타했다.
직후 투명화가 풀린 검은 로브의 괴한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탓에 로브의 후드 부분이 내려가며 뺨이 앙상하게 파인 중년 여성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가 피멍이 된 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을 치켜떴다.
“비, 비켜……! 나,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남자를 죽여야 해……!”
“저분께서 그쪽한테 무슨 안 좋은 짓이라도 하셨습니까?”
“계, 계시…….”
아직도 통증이 가시지 않은 여성이 바닥의 진흙을 움켜쥐었다.
어금니가 우그러질 기세로 이를 악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계시를 내려주셨어……. 하, 하늘의 천사들께서…… 내가 저, 저 남자를 죽이면……!”
“죽이면?”
“한 가지…… 내가 원하는 비원(悲願)을 이뤄주겠다고……!”
멜카논은 새하얀 곱슬머리를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잠시 생각했다.
계시. 천사. 비원.
그리고 군주를 죽이겠다는 목적.
단서를 종합해본 결과, 누가 저 여자를 홀리고 암살자로 보냈는지는 너무나도 자명했다.
‘이번에도 계약의 정령이로군.’
비원 운운하는 걸 보니, 그게 군주를 죽이면 얻는 보상인 모양이다.
확실히, 천상의 성역을 뒤져보면 간단한 소원 정돈 이뤄주는 성물이 하나쯤은 나오리라.
멜카논이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서까지 이루고 싶은 소원이 뭡니까?”
하지만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벌판의 지면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쏴아아-!
그때, 인근의 벌판에 쌓인 진흙이 둥글게 일어섰다.
뒤이어 진흙들은 팔다리 달린 인영의 형체를 갖췄다.
멜카논은 대성의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흙 알갱이들을 보호막으로 가려주며 중얼거렸다.
“기초적임에도 조잡하기 짝이 없는 술법이지만…….”
쏴아아-! 쏴아아-!
높이 일어선 진흙이 인영의 형체로 굳혀지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멜카논이 픽 웃었다. 어딘가 대견스러워하는 듯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웃음이었다.
“이걸 보니 재능이 아예 없는 것 같지는 않군요.”
어느덧 눈앞에는 시야에 전부 담지 못할 만큼 무수한 진흙 인형들이 포진해 있었다.
여자가 입에서 피를 왈칵 쏟아내면서도 날카롭게 외쳤다.
“죽, 여……!”
쿵, 쿵, 쿵-!
눈대중으로 세기도 힘들 만큼 수많은 진흙 인영들이 일제히 대성이 있는 중심부로 돌격해 왔다.
“샌드 스톰(Sand storm).”
다음 순간 멜카논의 원목 지팡이가 암청색 빛을 뿜어냈다.
콰콰콰콰콰-!
검고도 푸른 섬광이 벌판 위를 빛냄과 동시에 웅장한 폭풍이 일었다.
지면을 깎아내며 사방팔방에서 휘몰아친 황색 소용돌이가 진흙 인형들을 일거에 집어삼켰다.
여자의 표정에 절망이 스쳤다.
지금 것은 얼마 없는 생명력을 남은 한 줌까지 긁어모아 발휘한 기적의 힘이었다.
일생일대의 소환술을 펼쳐, 즉석에서 괴물 군단은 창설했단 말이다.
그런데 저 하얀 머리의 마법사는 지팡이를 까딱거리는 것만으로 사태를 정리해버렸다.
마치 이 만주 벌판처럼,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황무지 위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재능이 있는 건 좋지만 그걸 개화시킬 명줄이 오늘 끊어지게 되었으니… 이쪽 분야의 대선배로썬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
한기가 스친 여성이 재차 소환술을 발동하려고 했다.
뭐라도 좋으니, 지금은 소환수를 앞세워 저항해야만 했다.
하지만 멜카논이 그 발악을 묵인해 줄 리는 없었다.
쿠구구-!
“커흑……?!”
여성의 복부와 맞닿은 지면이 칼날 같은 형체로 변이하며 솟구쳤다.
배가 꿰뚫린 채 공중에 뜬 여성의 눈에서 초점이 차츰 사라져갔다.
“내 딸… 나의 사랑스러운 딸… 레베카…….”
피 가래가 들끓는 목소리가 죽어가는 여성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고통스레 숨을 헐떡인 채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네 병을… 어떻게 해주지 못하고 먼저 떠나는… 이 못난 어미를 용서하렴…….”
그리고 여성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숨소리가 멎었다. 이때만큼은 몰아치던 황야의 바람도 잠잠해지고, 주변이 고요해졌다.
멜카논은 삭막하게 식어가는 여성의 시체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이전엔 다 죽어가던 남자에게 계약의 정령을 보냈었다.’
우수리스크의 사냥꾼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다행히도 미수로 그치긴 했지만.
‘그리고 이번엔 아픈 딸을 둔 여자를 정령과 계약시켰군.’
분명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내몰릴 대로 내몰린 자에게만 계약의 정령을 보낸다는 점이다.
벼랑에 매달려 절망하는 자들 위에 우뚝 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대성을 죽이지 않으면, 동아줄을 내려주지 않겠다고.
‘계시를 빙자한 협박이지, 이건.’
그의 눈빛이 맹금보다도 예리하고 냉정하게 변했다.
여자의 사정은 알 바가 아니다. 불쌍하고 딱하긴 하나, 그렇다 하여 용서해줄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화가 날 따름이다.
마법이라는 순수한 이적을 이런 식으로 오염시키는 저들의 작태가, 아크 리치 멜카논은 몹시나 불편했다.
그때였다.
파르륵-!
죽은 여성의 시체에서 정령 한 마리가 날갯짓하며 날아올랐다.
계약의 정령.
화신체의 죽음으로 인해 계약이 파기되어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것이다.
“이 여자는 당신들을 천사라고 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멜카논이 도망치려던 계약의 정령을 기민한 손놀림으로 잡아챘다.
다섯 번째 사도, 오르키엘의 모습을 한 정령이 마구 몸부림쳤다.
정령이 오르키엘의 목소리로 무어라 외쳤으나, 짜증이 머리끝까지 난 멜카논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제가 보기엔 당신들은 천사가 아니라 악마에 가깝습니다.”
멜카논의 손아귀에 점점 힘이 실렸다. 계약의 정령이 얼굴에 핏발을 세우며 버둥거렸다.
툭…….
그리고 곧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했다.
일부러 죽이지 않은 것이다.
의식을 잃은 정령을 노려보며 멜카논은 문득 어떠한 말을 떠올렸다.
-먼저 올 생각 없으면 그냥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조만간 내가 찾아가서 네놈들 아가리 속에 창자를 쑤셔 박아 줄 테니.-
최근에 군주께서 아도니스가 보낸 계약의 정령을 죽이면서 하셨던 말씀이다.
멜카논은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 대성을 흘겨보며 넌지시 말하였다.
“뜻대로 되게 해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