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152
룬 퀴엘라는 괜히 ‘여신’이라는 칭호를 가진 게 아니었다.
‘신(神)’이라는 이명에 부끄럽지 않게, 그녀는 정말로 잘 싸워줬다.
[흐아아악!]
실시간으로 전신에 불길을 둘러 입은 그녀가 불티 같은 땀방울을 뻘뻘 흘리며 뻗을 정도로 말이다.
화륵-!
허공에 피어오른 서른 개의 불꽃 중 열다섯 개가 드디어 소화되었다.
기리아크가 말한 시련의 최소 통과 기준이 충족된 것이다.
[더, 헉… 설마 더 남은 건 아니겠죠? 언제까지 싸워야… 헉…….]
대성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는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방금 열다섯 번째 불꽃이 꺼지자마자 수정구 하나가 지면 위로 반짝이는 것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물결의 시련을 끝내면, 다음 시련에 대비할 힘을 준다고 했지.’
첫 번째 시련을 통과한 전사에게 바치는 선물이자, 다음에 이어나갈 해일의 시련을 버티게 해주는 무기를 쥐여주는 셈이다.
대성이 지금 허리를 숙여 주워든 수정구가 바로 그러했다.
‘반소르는 불에 대한 무한한 내성을, 로이먼은 먼 거리를 내다볼 수 있는 천리안(千里眼)을, 유드는 얼음 폭풍을 다루는 능력을, 막레온은 지치지 않는 불굴의 힘을.’
사방위의 패권을 주름잡았던 강자들 또한, 다른 타이탄에겐 없는 희소한 이능(異能)을 지녔다.
전부 이 수정구 덕분인 것.
즉, 달리 표현하자면 이 수정구는 먹으면 힘을 얻게 해주는 ‘스킬 볼(Skill Ball)’이라고 보면 된다.
‘우선 나중에.’
하지만 대성은 당장 수정구를 먹고 스킬을 얻을 생각이 없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지금 지배하고 있는 몸은 원래의 본신이 아니니까.
꾸드득!
대성은 썩어 문드러진 가슴팍의 살결을 좌우로 찢은 다음, 그 안에 수정구를 넣어 보관하였다.
‘일단 통과 기준은 충족했다.’
현재 대성의 손등에는 커다란 X 표시가 새겨져 있었다.
이 곱표를 문지르면 언제든지 시련 밖으로 나갈 수 있다.
‘하지만 불꽃은 아직 열다섯 개가 더 남아있어.’
말인즉슨, 통과 기준은 넘어섰으나 물결의 시련 자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험난한 시련의 끝엔 언제나 값진 보상이 기다리는 법.
그렇다면…… 남은 열다섯 회차의 웨이브(Wave)도 통과할 시엔, 지금 얻었던 수정구보다 더 대단한 무언가가 주어지지 않을까?
‘사방위의 강자 그 누구도 30번째 웨이브까진 도달하지 못했다. 심지어 대리자인 기리아크조차.’
물결의 시련 최고 기록이 기리아크가 세운 스물여덟 번이다.
그를 비롯한 아틀라스의 그 어떤 타이탄도, 시련의 끝자락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지 못한다.
‘내가 끝자락까지 가겠다.’
대성은 손등에서 붉은빛을 일렁여대는 곱표로부터 시선을 뗐다.
보험이라면 많다.
위기에 빠질 경우, 여차할 시엔 곱표를 문지르고 빠져나가면 된다.
또한, 사실상 룬 퀴엘라가 지금껏 대신 싸워준 덕에 대성은 이제 막 시련에 들어왔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만전의 상태이지 않은가.
물론 이대로 남은 회차까지 모조리 룬 퀴엘라에게 대리전을 치르게 하고 싶지만, 그녀의 상태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건 요원한 듯싶었다.
‘내게는 더 많은, 더 강력한 힘이 필요하니…….’
촤르륵-!!
만병지왕이 시퍼런 빛살과 살기를 흩뿌리는 장창으로 변이했다.
‘여기서 끝을 봐야만 해.’
쾅-!
그리고 대성은 창대의 끝을 지면에 힘차게 두드렸다.
계속 나아가겠다는 선포이다.
화륵-!
16번째 불꽃이 꺼졌다.
그리고 허공에 생긴 균열에서 머리 셋 달린 맹견(猛犬)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튀어나왔다.
“그르르-.”
케로베로스(cerberus).
지옥의 수문장이라 알려진 녀석의 외관은, 마찬가지로 지옥에서 돌아온 대성의 눈에도 낯이 꽤 익었다.
다만 통상의 개체와는 달리, 지금 여기에 있는 녀석 또한 그 몸체가 타이탄과 비견될 정도로 커다랄 뿐.
“죽여주마. 개새끼.”
이번엔 기다려주지 않고, 대성 쪽에서 먼저 진각을 밟아 쇄도하였다.
흉맹한 창살이 끔찍한 빛을 토해냄과 함께 앞으로 쏘아졌다.
진정한 의미로, 대성의 진짜 시련은 지금부터 시작되었다.
***
레이라는 타이탄이 시련에 입성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다른 사방위의 강자들이 물결의 시련을 통과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평균적으로 세 시간 남짓.
하나 지금은 여섯 시간을 훌쩍 넘겨도 레이가 벽화 밖으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새끼 그거, 분명 저 안에서 이미 뒈진 게 틀림없어.”
로이먼이 아직도 저릿하게 아려오는 눈가를 매만지며 투덜거렸다.
유드와 막레온 또한, 내색하지는 않아도 로이먼의 주장에 내심 동의하는 중이었다.
평균보다 두 배를 웃도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 레이가 이미 저 벽화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암시밖에 되지 못했으니까.
“시련 속에서 죽었다면 지금쯤 벽화에서 피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이때, 우직하게 제단 앞을 지키고 있던 기리아크가 그리 말했다.
대리자의 중후한 목소리가 거성 속에서 울려 퍼지자, 다른 강자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한데 모였다.
“그러나 벽화가 아직 깨끗하다는 건, 녀석이 죽지 않았다는 증거지.”
“그럼 뭐, 죽을락 말락 안에서 빌빌대고 있다는 거겠죠. 하! 제발 죽지 말고 살아서 나와라.”
로이먼이 빈정거렸다.
사실 그는 속으로 레이가 안에서 죽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자기 손으로 직접 레이를 죽여버리고 싶었으므로.
“아무리 개인차가 있다곤 하나, 열다섯 번을 버티는데 반나절이 걸린다는 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그러나 벽화가 피눈물을 흘리지 않는 걸 보니, 그 레이라는 녀석은 아직 살아서 시련을 수행 중이겠군,”
촛불에서 흘러나오는 주홍빛이 은은하게 묻은 벽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리아크가 덧붙였다.
“그렇다면 한 가지 경우를 가정해볼 수 있겠어.”
“무슨 경우요?”
“이미 통과 기준은 넘어섰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시련을 이어나가는 경우 말이다.”
거성 내부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려앉는 정적을 깨뜨린 건 피식! 하고 터져 나온 로이먼의 조소였다.
막레온이 가면 너머로 붉은 안광을 형형히 빛내며 입을 열었다.
“무리하는군요. 열여섯 번째부터는 난도가 급격히 올라갈 텐데. 유드, 자네가 몇 번째까지 갔더라?”
“스무 번.”
참고로 북쪽을 지배하는 유드는 사방위의 강자 중 가장 용맹하다고 전해지는 전사였다.
헤카톤케일의 대리자인 기리아크가 자신의 후계로 둘까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로 말이다.
한데 그런 유드조차 마(魔)의 스무 번째를 넘지 못한 것이다.
둘의 대화를 듣던 로이먼이 무심코 혀를 내둘렀다.
“난 그냥 통과 기준 채우자마자 거기서 멈췄어. 열다섯까지 가는 것만 해도 힘들어 죽겠던데 그 짓을 계속할 엄두가 도무지 안 나더라고.”
아틀라스에서 위엄과 공포로 군림하는 사방위의 강자들마저 당시를 떠올리면 고개를 저을 정도.
그러니, 만족할 줄 모르고 계속 시련 속에서 헤매는 레이의 행색이 어리석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 괜히 시간 끌지 말고 미련 없이 깔끔하게 포기하고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 샘솟았다.
로이먼이 매섭게 부릅뜬 눈으로 벽화를 노려보더니 말했다.
“서른 번째까지 끝내면 ‘절대적인 힘’이 주어진다는 얘기를 주워들어서 저러는 거야. 눈이 먼 거라고. 멍청한 새끼.”
“절대적인 힘이라……. 그런 게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노릇 아닌가? 스무 번째에서 사경(死景)을 헤매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열다섯 번째를 통과하면, 다른 타이탄들은 가지지 못한 대단히 희소하고 고유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
이 힘만으로, 사방위의 강자들은 여타 타이탄들은 억겁의 세월이 지나도 결코 그 격차를 따라잡을 수 없는 위세를 등에 업게 되었다.
그렇기에, 웬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타이탄이 반소르를 물리쳤다는 소식에 모두가 깜짝 놀랐던 것이고.
서른 번의 중간째에서 주어지는 보상이 그 정도인데, 하물며 서른 번째 보상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아니, 어쩌면 보상이 아예 없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보지도, 얻지도 못했으므로.
하지만 기리아크는 그 대목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서른 번째 보상은 분명 존재한다. 내가 보증하지.”
사방위의 강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캐물을 생각은 없었으나,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냐’는 듯한 시선을 은근하게 보내왔다.
그 시선이 자아내는 낌새를 모르진 않았던 기리아크가 손을 들어 자신의 왼쪽 눈을 가리켰다.
“혼돈의 거신께서 직접 설계하시고, 내 눈을 바친 끝에야 완성할 수 있었던 시련이다.”
“…….”
“시련과 나는 영적(靈的)으로 이어져 있어.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다. 서른 번째의 보상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지금껏 그 누구도 쟁취하지 못했을 뿐.”
대리자가 직접 그리 말하자, 사방위의 강자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동시에 거두었다.
그 시점에서 대화가 끊기고, 촛불 일렁이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울리는 침묵이 다시금 찾아왔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만큼 흘렀을까.
화륵-.
“……!”
돌연, 제단의 벽화가 거뭇하게 그을리기 시작했다.
종이가 불에 타들어 가듯 붉은 원이 빠르게 크기를 확장해가며 헤카톤케일의 초상화를 집어삼켰다.
“뭐, 뭐야!”
화들짝 놀란 로이먼이 안 그래도 넓은 외눈을 한계까지 크게 떴다.
유드와 막레온 또한 침을 꿀꺽 삼키며, 불에 휩싸이는 벽화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린 유드가 기리아크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대리자시여, 이건 대체…….”
“…….”
“대리자시여?”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유드가 고개를 갸웃하며 기리아크의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리고 헛숨을 삼켰다.
“서, 설마…….”
기리아크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문장이 되지 못한 낱말의 파편들이 잇새 사이로 흘러나왔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당황하지 않고, 근엄하였던 기리아크가 지금은 전기에 감전된 듯이 온몸을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던 것이다.
벽화가 불에 타는 현상이, 이토록 격한 반응을 끌어낼 정도로 충격적이란 말인가?
유드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벼, 벽화가 불에 타고 있습니다. 얼른 진화(鎭火) 작업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무슨 특정한 의미라도 담겨 있는 건지……?”
“아니. 놔둬라! 물러서라! 벽화가 타오르고 있다는 건 설마-.”
그러나 기리아크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저 이상 현상에 관한 추가적인 설명을, 굳이 더 이어나갈 필요가 없었다.
팟-!
“……!”
불길에 잠긴 벽화에서, 우주의 탄생을 방불케 하는 막대한 광휘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태양을 바로 앞에서 마주 보는 것처럼 눈이 뜨거워졌다.
사방위의 강자들은 물론, 기리아크 또한 황급히 손으로 시야를 가리며 광휘로부터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아…. 아아…….”
시야를 가린 손가락 사이로, 기리아크는 보았다.
강렬하게도 섬뜩하게 뿜어져 나오는 광휘를 뚫고, 한 거인이 일렁이는 실루엣을 드러내는 광경을.
벽화의 불길을 헤치며, 거성을 뒤덮은 암막을 걷어내며 무심하게 걸음을 옮기는 ‘전사’의 자태를.
“아아……!”
기리아크가 깊이 탄식했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호흡이 곤란해지고 털이 쭈뼛쭈뼛 곤두설 만큼 전율이 일었다.
그는 안구가 바싹바싹 마르는 듯한 폭염(暴炎)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광휘를 똑바로 마주했다.
빛을 뚫고, 불타는 벽화를 찢어내며 나타난 건 대성이었다.
그제야.
기리아크는 넋이 나간 채 힘겹게 말문을 뗄 수 있었다.
“저건 시련의 서른 번째 벽이 허물어졌다는…… 종언(終言)의 신호다.”
모두가 말문을 잃었다.
살의를 품고 앙갚음을 다짐하던 로이먼마저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기록이 깨졌다는 표현은 너무 약하리라. 역사가 세워졌다. 대리자 기리아크조차 넘보지 못했던 벽이 붕괴했다. 아틀라스의 실록에 새로운 글귀가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기적의 중심에 선 자, 대성의 감상은 이러했다.
“어떤 멍청이가 설계했는지는 몰라도 더럽게 지X 맞군.”
벽화를 잠식해가던 불길이 확장을 멈추고 빛이 사그라졌다. 하지만 그 여파는 잔향(殘香)처럼 맴돌아 거성을 하얗게 밝히고 있었다.
대성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오른쪽 팔은 통째로 뜯겨나갔고, 상체에는 대포에라도 맞은 듯한 구멍 서너 개가 뻥뻥 뚫려 있었다. 관자놀이가 송곳니 같은 것에 뜯겨나가 살점이 너덜너덜 흔들렸다.
하지만 대성은 조금 격한 운동을 마치고 왔다는 듯 호흡만 빠르게 내쉴 뿐,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고통을 모른다는 듯이.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듯이.
기리아크가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그는 한참이고 뭔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눈치였다.
과연 자신이 지금부터 할 말이, 올바른 정답일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결심이 섰는지, 기리아크는 대성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운을 뗐다.
“시련은 전부 끝났다.”
“그래. 다음이 해일의 시련이었나? 얼른 시작하자고.”
“아니. 내 말은 ‘모든’ 시련이 끝났다는 뜻이다.”
그 순간, 사방위의 강자들이 눈을 크게 뜨며 기리아크를 돌아보았다.
설마, 하는 심정이 어린 눈.
그들은 다음에 이어질 말을 내뱉을 기리아크의 입술을 주목하였다.
이내, 기리아크는 자신이 방금 막 끝마쳤던 결심을 입에 담았다.
“‘티타노마키아’에 영혼을 바칠 승천자는 너다, 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