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153
“저는 인정 못 합니다!”
내부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 날카롭게 터져 나온 외침은 로이먼의 것이었다.
감히 대리자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다니, 불경스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사방위의 강자 중, 그 누구도 로이먼을 질책하거나 타박을 주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아도, 그들 또한 속으로 깊은 불만을 품었으므로.
‘지금 여기서 당장 승천자가 결정되었다고? 그럼 우리는?’
막레온과 유드는 기리아크의 결정에 수긍하지 못했다.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 해일의 시련도 시작하지 않은 후보를 다짜고짜 승천자로 인정하겠다니!
이제 막 트랙(Track)의 반 바퀴에 다다른 후발주자를 1등으로 인정해주는 격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대리자시여! 너무 섣부른 판단을 내리신 건 아닌지 재고하십시오! 저놈은 이제 막 물결의 시련을 끝내고 저희는 한창 해일의 시련을 이어나가는 중입니다! 저놈이 승천자가 되면 그간 있었던 저희의 노력과 경쟁은 뭐가 되는 겁니까?”
신성하고 엄숙한 제단 앞에서 고성을 내지르는 로이먼의 낯짝을, 기리아크는 말없이 응시하였다.
원래대로였다면 ‘언령’의 힘으로 닥치고 꺼지라 명령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반발이라고 흔쾌히 인정했으니까.
그래서 나름 ‘설득’이란 걸 해주자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누가 더 높이, 그리고 빠르게 하늘을 날 수 있냐 가리는 경주가 있다고 가정해보지, 로이먼.”
“예……?”
“너는 그 경주에서, ‘용’을 제치고 1등을 거머쥘 자신이 있나? 유드, 자네는? 막레온?”
“…….”
“그런 거다. 레이는 지금 내가 말한 비유 속에서 용과 같은 존재다. 이젠 경쟁이 의미가 없어졌어.”
요컨대, 앞으로의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니 입 다물고 승복하라는 의미였다.
슥-.
다음 순간, 느닷없이 기리아크가 거구 위로 걸치고 있던 검은 제복의 상의 부분을 벗어던졌다.
탄탄하고 위압적인 몸매.
하지만 동시에, 일순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깊게 파인 상처 자국들이 상반신 곳곳에 즐비했다.
특히 옆구리의 경우, 갈비뼈가 아예 사라진 건지 안쪽으로 깊숙이 움푹 파여 있었다.
“스물여덟 번째에 무엇이 나왔는지 말해보겠나, 레이?”
“히드라.”
“용족 사이에서도 기피 받는 변종(變種)이지. 놈의 꼬리가 내 옆구리를 후려치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더군. ‘포기’란 단어가 그토록 강렬하게 머릿속을 스친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
기리아크는 벗었던 용포를 다시 입었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건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스물아홉 번째부턴 어떤 적과 마주 섰을지, 마지막 서른 번째에선 어떤 적과 마주 섰을지…….”
기리아크의 눈길이 대성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존중과 경외…… 그야말로 ‘인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그리고 서른 번째 시련을 마치면 얻는다는 ‘절대적인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 지금 이 자리에서 알고 있는 자는 레이밖에 없다.”
“흠…….”
“레이, 너는 아틀라스의 대리자인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고,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로이먼의 어깨 떨림이 점점 더 심해졌다.
열등감, 분노, 질투, 시기.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란 감정은 모조리 뒤섞여 속에서 끓어오르는 중이었다.
“그런 네가 승천자가 되지 않으면 누가 되겠다는 거지?”
“그래, 나밖에 없겠지.”
“내 말을 이해해줘서 고맙군.”
승천자의 좌(座)를 정복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아틀라스에서 가장 위대한 타이탄뿐이다.
그리고 대성은 그 누구도 보지 못하였던 광경을 보았고, 견뎌내었고, 결국엔 이겨내었다.
헤카톤케일을 부활시킬 원천인 ‘승천자의 영혼’은, 고결하고 강맹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기리아크가 보기엔 레이, 아니 대성보다 그 기준에 알맞은 적합자는 없었다.
얘기는 여기서 끝이다.
남은 건 앞으로 진행해야 할 관례와 절차의 안내뿐.
“승천자가 정해졌으니 내일 당장 ‘티타노마키아’를 열도록 하지. 레이, 자네는 그동안 푹 쉬면서 상처의 치료에 전념-.”
스릉-.
그때, 칼이 검집을 스치는 소리가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유드.
그가 허리춤에 달고 있던 비도(飛刀) 한 자루를 갑자기 꺼낸 것이다.
다른 사방위의 강자들이 흠칫하였고, 기리아크가 미간을 좁혔다.
“말하고 싶은 게 있다는 표정이군. 유드.”
“기어코 이대로 저자를 승천자로 인정하시겠다면, 저는 여기서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
“그것참 지리멸렬한 발언이로군. 자네답지 않아.”
“뼈 빠지게 해왔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을 가만히 지켜보는 편이 더 추하죠.”
유드는 허언이 아니라고 과시하는 것처럼 목젖에 칼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기리아크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유드는 소중한 재목이다.’
그는 앞으로 있을 차원 대전쟁에서 활약을 선보일 용맹한 타이탄이다.
저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순 없다.
그렇다 하여, 한번 내린 선택을 철회할 생각 또한 없었다.
‘일단은 언령으로 진정시키는 수밖에 없겠군.’
그러나 언령의 효과는 일시적이다.
시간이 지나면, 유드는 다시 반발을 해오리라.
그때가 되면 언령이 아닌, 순수한 말로써 그를 설득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성가시지만 감내해야 했다.
유드, 그가 지닌 자존심이 얼마나 굳건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언령의 강제성이 실린 말이 기리아크의 입술 사이로 흘렀다.
“「당장 물러-.」”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군.”
바로 그때, 선수를 치며 흘러나오던 언령을 가로막은 이가 있었다.
대성이었다.
기리아크와 강자들의 이목이 동시에 그의 얼굴로 집중되었다.
“이런 식이면 나도 뒷맛이 개운하질 못해.”
“뒷맛이 개운하질 못한다니?”
눈매를 좁혀오며 기리아크가 그렇게 물었다.
굴러들어온 기회를 발로 뻥 차려는 듯한 모습이 답답해 보인 것이다.
하지만 대성은 어깨를 으쓱이며 할 말만 계속 이어나갈 따름이다.
“승천자는 모든 타이탄이 인정하는 위대한 전사가 아닌가? 그런데 저 유드란 놈은 날 인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자격 미달인 셈이로군.”
“즉석에서 받아들이기엔 벅찬 이야기라서 그렇다. 시간이 지나면 유드도 내 뜻을 헤아려줄 것이다.”
“표정은 안 그래 보이는데.”
그의 말대로, 유드는 속이 뒤집힐 것 같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까딱했다간 진짜로 목젖에 칼을 찔러넣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기세.
그 집착과 의지를 흥미롭게 여긴 대성이 제안 하나를 건넸다.
“내가 해일의 시련도 성공적으로 해낸다면, 그때는 네가 날 인정하지 못할 이유가 없겠지?”
“……물론이다.”
“좋아. 그 대신, 나를 승천자로 인정해준 대리자의 체면도 고려할 겸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말해봐라.”
“너희가 발만 동동 굴리고 있는 ‘골칫거리’ 지역을 내가 직접 점령해 주겠다. 그걸로 해일의 시련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하지.”
그 순간, 사방위의 강자들과 기리아크의 안색이 바뀌었다.
‘해일의 시련’은 주어진 시간 동안 누가 더 많은 외적의 영역을 점령하는지 가려내는 시련이다.
후보 한 명당 오십의 타이탄을 수하로 두어 시련에 임할 수 있는 지휘권이 부여된다.
그간 지역 각지에서 타이탄 무리가 활개를 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사방위의 강자들은 시련에서 1등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차원의 땅들을 휘젓고 다녔다.
하지만 딱 한 곳, 강자들조차 쉽사리 넘보지 못한 구역이 있었다.
‘마해(魔海).’
악마의 바다라 불리는 곳.
또한, 언젠간 대성이 근원의 파편을 얻어야만 하는 곳.
그곳만큼은 강자들도 어찌할 줄 모르며 ‘골칫거리’라 여겼다.
그런데 그 골칫거리를, 지금 대성이 해결해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수룡(水龍)이 지키고 있는 보물고를 탐내고 있다 들었다. 그곳을 내가 아틀라스의 소유로 만들어주지.”
“만일 그것마저 해낸다면…… 그때는 나도 두말하지 않고 너를 승천자로 인정해주겠다.”
그제야 만족했는지, 유드는 비도를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게 최선의 절충안이라 생각한 기리아크도 입을 다물었다.
***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대성 또한 이유 없이 시간이 지체되는 것은 사절이었기에 당장 내일 수룡의 보물고로 떠나기로 하였다.
‘마해는 어차피 언젠간 가야만 하는 곳이었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 쉬운 길을 포기하고 어려운 길을 택한 셈이다.
유드가 목숨을 끊든 말던, 기리아크가 승천자로 인정해줬을 때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대성은 굳이 거기서, 유드의 처지를 배려해주겠답시고 해일의 시련을 이어가겠다고 말한 것이다.
‘견학도 할 겸, 이참에 수룡의 보물고를 독식(獨食)할 기회니까.’
물론 부(富) 같은 것에 혹하여 보물고를 노리는 것이 아니다.
수룡이 지키는 그곳을 타이탄들이 눈독 들인 이유가 분명 있을 터.
높은 확률로 강력한 힘을 선사해주는 재보가 존재할 것이다.
또한, 수룡을 죽이고 보물고를 탈취한다면 그건 마해 측에서도 적지 않은 피해로 작용하지 않겠는가.
‘해볼 만한 도박이다.’
거성을 빠져나오자 밖은 다시 어둑어둑해진 상태였다.
<죽음의 동반자>가 곧 끝나기에, 대성은 자신의 본신이 있는 외곽 쪽으로 향했다.
[<죽음의 동반자>가 종료됩니다.]
[원래의 육신으로 돌아옵니다.]
팟-.
본신으로 의식이 전이된 대성이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
기묘한 광경이 보였다.
멜카논이 둥글게 솟은 흙더미 위로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꽂고 있었다.
무덤처럼.
누구를 위한 무덤일까.
“뭐 하는 중이지?”
“군주께서 자리를 비우신 틈에 한 여자가 습격을 해왔기에 제가 단죄했습니다. 이건 그녀의 무덤입니다.”
“무덤을 세워주는 이유가 뭐지? 그냥 길바닥에서 썩게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일 텐데.”
“뭐, 군주님을 기다리는 동안 할 짓이 없기도 했고…… 또 사정을 들으니 딱해서 말이죠.”
“…….”
불필요한 동정은 삼갔으면 좋겠지만 딱히 간섭할 마음은 없었다.
멜카논이 무덤을 만드는 동안, 대성은 울고릭의 가슴팍 속에 보관해 놓은 수정구 두 개를 꺼냈다.
두 개 전부, 물결의 시련을 헤치면서 얻었던 보상이다.
하나는 15회차 때, 다른 하나는 30회차를 돌파했을 때 얻었다.
‘먼저 15회차부터.’
대성은 불덩어리처럼 활활 타오르는 수정구를 입에 넣고 삼켰다.
목울대를 타고 수정구가 넘어감과 동시에, 진한 기운이 솟구쳤다.
[아틀라스의 결정체(結晶體)를 섭취하여 고유한 힘을 얻습니다!]
[스킬, <불꽃 거인의 날개>를 획득하셨습니다!]
<스킬 정보>
불꽃 거인의 날개
[사용자의 등에 자동으로 적을 공격하는 불의 날개가 총 여섯 장 소환됩니다.]
[날개는 원거리와 근거리 공격이 모두 가능하나, 비행의 용도로는 사용하지 못합니다.]
[스킬 발동 후 일정 시간이 지날 시, 여섯 장의 날개가 전부 폭발하여 넓은 영역에 피해를 줍니다.]
자세한 건 직접 시전해봐야 알겠지만, 설명문만 읽어봤을 땐 썩 나쁘지 않은 스킬인 듯했다.
근거리, 원거리에 모두 대비 가능하며 알아서 움직여주는 자동 조작형 스킬이라.
역시 일개 사령 병사에게 먹이기엔 아까운 성능이었다.
‘15회차의 보상이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그렇다면 30회차의 보상은 과연…….’
대성은 남은 수정구를 돌아보았다.
이 또한 마찬가지로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고 있기는 한데, 그 불길이 찬란한 금빛을 띠고 있다.
지평선 너머 떠오르는 여명을 작게 축소한 듯한 생김새.
아틀라스의 타이탄들 사이로 자그마치 ‘전설’로 전해져오며.
그들은 이것을 ‘절대적인 힘’이라 추앙하였다.
그 정체가 무엇일지, 지금부터 알아보기로 하였다.
꿀꺽!
이번에도 일체 망설임 없이, 대성은 황금 불꽃의 수정구를 먹었다.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가공할 힘이 절대자의 몸에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혼돈의 거신, 헤카톤케일의 전설 무구가 절대자께 계승되었습니다!]
[아이템, <혼돈의 검-카오스>를 획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