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154
[아이템 정보]
이름 : 혼돈의 검 - 카오스
분류 : 장비
‘아틀라스를 지배하고 혼돈을 관장하였던 타이탄들의 제왕, 헤카톤케일의 애검(愛劍).’
특수 스킬 [혼륜(渾淪)] : 혼돈의 검을 소환한 뒤, 적을 타격하여 혼돈기(混沌氣)를 흡수합니다.
특수 스킬 2 [카오스(Chaos)] : 혼돈기를 흡수하고 완전한 <카오스>의 모습을 되찾은 혼돈의 검을 휘두릅니다. 휘두른 뒤엔 다시 혼돈기를 흡수해야만 재사용할 수 있습니다.
타이탄들이 그토록 호들갑을 떨었던 ‘절대적인 힘’의 정체였다.
확실히 헤카톤케일의 애검이라면 ‘절대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30회차까지 고생한 보람이 있군.’
헤카톤케일과 대적한 적이 없었음에도, 대성은 후하게 평가했다.
직접 싸워본 적은 없지만, 직접 본 적이라면 있었기 때문이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천지가 요동쳤지.’
바로 라미쉬의 기억 속에서.
기억 속에서 본 하늘에서 쏟아지는 천상의 군단을 몰아붙이던 <카오스>의 위용은 대단했다.
어쩌면 근원의 파편을 머금기 이전의 업화대검보다 강력할지도 모를 정도로.
혼돈을 불러일으키고, 천지를 개벽하였던 최강의 검이 이제는 대성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다.
‘비록 오롯하게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닌 듯하지만, 상관없다.’
설명문만 읽어보면 아이템이라기보다는 스킬의 개념에 더 가까웠다.
완전한 형태의 검을 휘두르려면 적을 타격하여 ‘혼돈기’라는 에너지를 모아야만 했으니까.
뭐, 한 방의 위력만 확실하다면 사소한 제약 따윈 신경 쓸 바가 아니겠지만.
‘내일 마해로 떠나면 전부 시험해봐야겠군.’
힘들게 얻은 보상을 당장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죽음의 동반자>를 사용할 순 없을 터였다.
울고릭의 몸에 빙의해버리면, 쟁취하였던 것들을 써먹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방금 막 그에 대한 대비책을 떠올린 참이다.
출발까지는 시간이 남아도니 적당히 끼니라도 때울까 생각하던 중.
“앗, 이 녀석.”
무덤 앞에 쪼그려 앉아 비문(碑文)을 뭐로 새길까 고민하던 멜카논이 움찔거렸다.
그간 멜카논의 어깻죽지에 들러붙어 있던 ‘생명 포식자’가 쫄랑거리는 걸음으로 대성을 향해 다가가는 게 아닌가.
녀석은 어딘가 만족감이 떠오른 표정으로 대성을 올려다봤다.
[식사를 마친 ‘생명 포식자’가 만복감을 느낍니다!]
[<차원: 헥카르>의 근원과 이어진 길이 개방되었습니다!]
[‘생명 포식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근원으로의 길로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48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생명 포식자가 식사를 끝낸 것이다.
얼른 머리를 쓰다듬으라는 듯이 옆구리에 손을 올린 채 으스대는 녀석을 바라보며, 대성은 고민했다.
‘지금 가는 게 좋은가?’
근원으로의 길은 무엇이 펼쳐져 있을지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리 생각하니 고민 또한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틀라스 쪽 문제부터 전부 해결한 다음에 움직이는 편이 낫겠군.’
당장 몇 시간 후면 마해로 떠나야 할 몸이다.
시간에 쫓기느니 차라리 당면한 일부터 끝내자는 의미였다.
근원으로의 길에 입장했는데 생각 외로 시간이 지체되어버리면 계획이 틀어지지 않겠는가.
“지금 안 갈 거다.”
대성이 단호히 못을 박자, 삐쳤다는 듯 몸을 휙 돌리는 생명 포식자였다.
***
‘꼬락서니가 볼만한데?’
다음 날이 밝고.
로이먼이 히죽히죽 웃으면서 대성을 힐끔거렸다.
미라처럼 온 얼굴을 누리끼리한 붕대로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제처럼 대놓고 입 밖으로 조롱을 퍼붓지는 않았다.
일단 기분 따라 막 덤빌 상대가 아니란 걸 학습했기 때문이다.
“놀라운 회복력이군.”
어젯밤 집결지로 정하였던 거성의 입구 근처.
막레온이 대성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가볍게 경탄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처참하게 잘린 상태였던 팔다리가 지금은 깔끔하게 수복되었으므로.
“이 비상식적인 회복력이 네가 15회차 때 얻은 고유 능력인가? 뭐, 아직 얼굴은 다 낫지 않은 듯하지만…….”
“그래.”
“부럽군. 잘린 사지도 도마뱀 꼬리처럼 도로 자라나게 하는 능력이라니……. 그럼 30회차 때 얻은 ‘절대적인 힘’은 무엇이었지?”
“그걸 꼭 말해줘야 하나?”
“재수 없는 놈. 네놈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막레온이 툴툴거렸다.
사실 회복력은 물결의 시련과 일절 관련이 없으나, 일단 대충 둘러댔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의 몸이 사실 언데드라는 비밀이 들통날 테니.
이때 갑자기 대성의 눈살이 마구잡이로 찌푸려졌다.
“음…….”
여기서 눈살을 찌푸린 주체는, 울고릭의 몸이 아니다.
진짜 대성의 본신.
그의 원래 몸이 지금, 울고릭의 가슴팍 안쪽에 들어가 있었다.
‘후회되는군.’
대성은 코를 찌르는 시체 썩는 냄새에 진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가 지금 감행하고 있는 행위를 표현할 단어를 고르자면…… 탑승(搭乘) 정도가 적절할까.
그는 만화 속 캐릭터가 거대 로봇에 탑승하듯 울고릭의 몸속에 본신을 숨긴 상태였다.
기동(?) 자체는 시시각각 사령 병사인 울고릭에게 전음을 보낸다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얼굴에 붕대를 두른 것도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함이고.
입이 드러나면 상대방 눈엔 복화술을 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그런데 너희는 또 무슨 볼일이 있어서 모인 거지?”
대성은 거성의 입구 앞에 옹기종기 모인 사방위의 강자들을 바라봤다.
그가 날이 밝자마자 거성을 방문한 까닭은 기리아크에게서 ‘지배자의 종자’를 받기 위함이다.
얼마 전, 울고릭이 뉴멕시코를 침공했을 때 가져왔던 그 씨앗이다.
타이탄들은 이 ‘지배자의 종자’를 지역 곳곳에 심어 자신들의 영토를 차츰차츰 확장한 것이다.
어쨌든 대성은 거성을 방문해야 할 이유가 있었으나 사방위의 강자들은 딱히 명분이 보이지 않았다.
그 증거로 그들은 아까부터 입구 근처에서 기웃거리기만 할 뿐, 안쪽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바로 그때, 유드가 대표로 나서서 그 이유를 설명해줬다.
“네가 없는 곳에서 우리끼리 한 가지 의견을 냈다. 우리도 수룡의 보물고까지 너를 따라갈 거라고.”
“왜 굳이?”
“네놈의 실력을 우리 눈으로 봐두고 싶으니까.”
“아직도 의심하나? 실력이라면 어제 물결의 시련을 통해서 충분히 입증했다고 생각하는데.”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다만 너의 진면목을 곁에서 ‘직접’ 보고 싶을 뿐이다.”
썩 달갑지 않은 이야기다.
수룡의 보물고를 독식할 생각인데, 쓸데없는 것들이 들러붙으려 하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그러나 저들의 눈빛을 보아하니, 따라오지 말라고 설득해도 씨알 하나 먹히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그냥 저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섬멸룡 소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화르륵-!
미세하게 찢어진 울고릭의 흉부 사이로 검은 불꽃이 흘러나왔다.
“……?!”
갑자기 불길이 쏟아지자 사방위의 강자들이 소스라치며 물러섰다.
막레온이 입술을 떼어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핀잔을 주려던 찰나.
크오오오오-!!
검은 용이, 타오르는 불꽃을 걷어내고 우렁찬 포효를 터뜨렸다.
쩌렁쩌렁 창천을 울리는 괴성이 만주벌판을 힘차게 뒤흔들었다.
“…….”
“…….”
인지를 초월한 광경을 목격하면, 놀라기 이전에 먼저 얼음장처럼 굳는 건 타이탄들도 마찬가지인 걸까.
섬멸룡과 마주한 사방위의 강자들은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물론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간에 대성이 상관할 바는 아니다.
울고릭의 거구가 섬멸룡의 등허리 위를 올라탔다.
섬멸룡은 한계까지 몸체의 크기를 확장한 상태였기에, 타이탄을 등에 태우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크르르…….”
다만 버거워할 뿐.
후웅-!
날개를 펄럭이며 이륙(離陸)을 준비하는 섬멸룡의 등 위에서, 대성이 사방위의 강자들을 향해 말했다.
“난 먼저 가 있겠다. 기다려줄 생각은 없으니 그렇게들 알고 있고.”
펑-!
수직 발사하는 로켓처럼 섬멸룡이 힘차게 비상(飛上)했다.
삽시간에 지평선 저 너머로 사라지는 대성의 뒷모습을 사방위의 강자들이 망연하게 바라보던 가운데.
로이먼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저 새끼, 드래곤은 또 언제 길들였대?”
***
마해(魔海)는 유라시아와 남극 대륙을 관통하는 대서양(大西洋)에 자리하였다.
콰직-!
대성은 울고릭의 살결을 화끈하게 찢고 본신을 바깥으로 드러냈다.
호흡마저 고통스럽게 했던 악취가 사라지고 절해(絶海)의 내음과 신선한 공기가 머리를 맑게 해줬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대성은 섬멸룡의 등 위에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이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대하게 펼쳐진 대서양을 내려다봤다.
해저(海低)에 진입하여 심해의 영역까지 내려가면, 엄연한 문명이 살아 숨 쉬는 대륙이 나타난다.
그곳이 ‘마해’다.
하지만 이렇게 수면 위로만 봤을 땐 그저 평범한 바다에 불과하다.
직접 심층까지 잠수하지 않는 이상에야, 어디에 수룡의 보물고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런 건 대성에게 있어서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통찰안.’
통찰안을 열고 ‘지도’ 열람 기능을 확인하니, 곧바로 수룡의 보물고가 있는 지점에 좌표가 찍혔다.
지도에 일렁이는 붉은 점까지 이동하면 그만. 어려울 게 없다.
대성은 섬멸룡을 몰아 아프리카 남단 방향으로 이동했다.
[해저 200km 너머에 목적지, <수룡의 보물고>가 있습니다]
시스템의 안내가 떠오름과 동시에.
대성은 몸에 걸치고 있던 ‘발라르크의 갑옷’의 구현을 해제했다.
탄탄한 근육이 오밀조밀하게 잡힌 몸을 가볍게 풀어주며 중얼거렸다.
“수영은 오랜만이군.”
그리고 서슴없이 몸을 날렸다.
풍덩-!
수중에 잠긴 대성은 시퍼렇게 두 눈을 뜬 채 물속을 나아갔다.
수직 하강으로.
‘보물고가 있는 해저 동굴에 다다르려면 심해까지 내려가야 한다.’
깊은 수심(水深)까지 내려가면 갈수록 수압이 쇳덩이처럼 억세졌다.
온몸을 비늘로 할퀴는 듯한 한기가 짓쳐오고 호흡이 턱턱 막혀왔다.
시력을 잃은 것처럼 사방이 새카매지고, 스산한 소리가 울린다.
“…….”
그렇다 한들 여기서 꼬리를 말고 물러갈 이유는 되지 못한다.
강한 수압은 세면 그만이고 눈앞이 어두우면 감각에 의존하면 된다.
호흡?
‘그딴 사치를 바랐다면 이따위 짓을 시작조차도 하지 않았다.’
수중 장비 하나 없이도 대성의 신형은 파죽지세로 심해 깊은 곳까지 접어들었다.
그렇게 장장 200km를 헤엄치고 또 헤엄친 그때.
팟-.
암막이 쳐진 듯 새카맸던 주변이, 형광등에 불빛이 들어온 것처럼 환해지기 시작했다.
[목적지, <수룡의 보물고>에 도착하셨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곧이어 대성의 눈앞에 심연에 자리 잡은 해저 동굴이 나타났다.
입구가 블랙홀처럼 어두워 안쪽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 점이 묘한 탐구심을 자극했다.
“아가미도 없는 것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여기까지 찾아왔느냐.”
하지만 보물이 숨겨진 동굴에 파수꾼이 없을 순 없는 법.
심해 전역에 요동치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파수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빛 비늘로 뒤덮인 용의 머리가 입구의 어둠을 뚫고 튀어나왔다.
세포가 저릿해지는 무시무시한 살기(殺氣)가 음파처럼 요동쳤다.
수룡, 레비아탄(Leviathan).
팍-!
대화 따윈 사절인지, 녀석이 다짜고짜 아가리를 넓적하게 벌리며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마음에 드는군.”
그래, 어차피 충돌할 게 뻔한데 쓸데없는 말을 나눌 필요가 있겠는가.
펑-!
대성은 물살을 발로 걷어차, 그 반동으로 레비아탄과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여긴 물속.
지상에서와 같은 물리적 작용이 똑같이 발생할 순 없는 법.
동작에 많은 제약이 뒤따랐다.
콰직-!
거리를 벌리긴 하였으나, 레비아탄의 송곳니가 위아래로 덮쳐오는 반경을 벗어나진 못했다.
흉흉하게 빛나는 레비아탄의 안광이 심해를 밝혔다.
‘이런 걸 먹어봤자 간에 기별도 -.’
레비아탄이 이대로 입속의 잡것을 으적으적 씹어 삼키려던 순간.
화르륵-! 콰광-!
“……?!”
부지불식 간에 레비아탄의 입속에서 장렬한 불길이 솟구쳤다.
촘촘하게 박힌 송곳니들이 까맣게 그을려 가고 폭발 때문에 목구멍이 엉망이 되었다.
[크아아아악!]
어마어마한 격통을 느낀 레비아탄이 마구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아가리 속에서 자욱한 폭연(爆煙)과 꺼지지 않는 불길이 쉬지 않고 피어올랐다.
“제안 하나 하지.”
심연보다 깊고 어두우며, 그리고 서늘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화르륵-!
여섯 장의 불의 날개가 레비아탄의 망막에 짙게 새겨졌다.
[스킬, <불꽃 거인의 날개>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앞으로 5분 후에 모든 날개가 일제히 폭발합니다!]
불의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대성은 고통에 겨워하는 레비아탄을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얌전히 안에 들여보내 주면 목숨은 살려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