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57화 (157/180)

# 157

157

“유드가 보이질 않는군.”

티타노마키아가 열리는 오늘.

아틀라스의 중심부에 자리한 거성 앞에 무수한 타이탄들이 집결했다.

오늘 의식을 주도할 기리아크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레이는 물론이고 막레온과 로이먼 또한 새벽부터 몸을 정갈히 하여 대기 중이었다.

그 와중에 아까부터 유드가 보이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구역 전체를 샅샅이 뒤져봤으나 도통 보이질 않습니다.”

“어제 축제 이후의 동태를 본 목격자도 없는 듯하여…….”

유드의 행방을 찾던 타이탄들이 속속히 보고해올 때마다, 기리아크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아틀라스의 역사상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날에, 이 무슨 추태인가.

더욱이나 그 누구보다 신뢰하였던 유드이기에 실망감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이런 생각까지 들겠는가.

“그놈…… 아직도 레이를 향한 질투와 시기를 버리지 못한 건가?”

실망과 분노를 금치 못한 기리아크가 미간을 꾹꾹 주무르던 사이.

“…….”

대성은 그저 침묵할 따름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울고릭의 가슴팍 속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첨탑처럼 뾰족한 거성의 꼭대기에는 거대한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승천자의 영혼을 바치고 헤카톤케일이 부활할 제단.

그리고 그 제단의 뒤로는 고치(繭)처럼 생긴 ‘실뭉치’ 한 덩이가 우뚝 세워져 있었다.

‘헤카톤케일의 피와 살을 입을 그릇이라 했던가.’

고치를 주시하는 대성의 눈매가 싸늘하게 좁혀졌다.

‘머지않았군.’

헤카톤케일을 죽이기 위해 일단 그를 부활시킨다는 터무니없는 목적의 달성까지 말이다.

하나 목적의 달성은 새로운 싸움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헤카톤케일을 죽이는 것이므로.

그리고,

“…….”

오늘 저들이 볼 것은 헤카톤케일의 부활과 죽음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 사실을, 대성은 이미 전날부터 아카식 레코드를 통해 확인하였다.

거기에 적힌 [상급 정보]는, 그야말로 대성마저도 일순 놀랄 정도로 어마어마한 내용이었다.

‘긴장을 놓으면 안 돼.’

곧 벌어질 대난투(大亂鬪)를 떠올리는 대성의 두 눈이, 사냥감을 발견한 맹금의 그것처럼 빛났다.

한편.

“곧 정오입니다, 대리자시여.”

“슬슬 준비하시는 편이…….”

높이 떠오른 태양이 거성의 제단 위로 쨍쨍한 빛을 쏟아냈다.

정오(正午)가 다가왔다는 신호다.

유드를 떠올리며 속상해하던 기리아크는 한숨으로 감정을 밀어냈다.

‘그놈 하나 없다고 해서 티타노마키아에 무슨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이와 관련해선 나중에 반드시 엄벌을 내려야겠군.’

그리 다짐한 기리아크가 행렬의 제일 앞에 선 대성에게 눈짓했다.

저벅-.

꼭대기와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는 기리아크의 뒤를 대성이 따라갔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는 몇몇 타이탄이 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일부에겐 그저 전설 속으로만 들어왔던 헤카톤케일이 조금 있으면 이 자리에 되살아난다 생각하니,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이윽고.

대성과 함께 꼭대기의 제단 앞에 선 기리아크가 저 아래 집결해 있는 타이탄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때가 왔다.”

대리자의 연설이 이어지자 모든 타이탄이 엄숙히 경청하였다.

“우리들의 구원자께서 곧 이곳, 아틀라스에 도래하실 거다. 바로 여기에 있는 위대한 승천자, 레이의 영혼을 통해!”

쿵, 쿵, 쿵, 쿵-!

타이탄들이 일제히 발바닥으로 대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승천자를 향한 경의(敬意)의 몸짓.

모두가 감격에 찬 눈으로 대성을 올려다보며 전율하였다.

“번영(繁榮)이 다가온다! 승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 동포들이여! 혼돈의 거신께서 우리와 함께 아틀라스를 영광의 길로 인도할지니!”

산봉우리보다 길쭉한 지팡이를 높이 쳐들며 기리아크가 외쳤다.

“모든 것이 갖춰진 지금! 티타노마키아의 의식을 거행하겠다!”

우오오오오오-!!

타이탄들의 함성이 만주 벌판의 대기를 찢어낼 기세로 터져 퍼졌다.

거신과의 재회를 상상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도 적지 않았다.

승리를 거머쥐며 영광의 길을 떠올리는 이들은 흥분에 겨워했다.

‘얼간이들.’

혼돈, 그 자체를 방불케 하는 열기에 대성은 속으로 비웃었다.

곧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도 못하고 희열에 빠진 저들의 모습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대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뒤,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슬슬…….’

심드렁했던 그의 얼굴에 험악한 기색이 짙게 떠올랐다.

거기엔.

부글부글-.

물이 끓어오를 때나 볼 법한 기포(氣泡) 현상이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투명하고 둥그런 거품이 한곳에 뭉치며 더 커다란 거품을 만들어냈다.

‘놈들이 오겠군.’

대성은 어제 확인하였던 아카식 레코드의 [중급 정보]와 [상급 정보]의 내용을 다시 떠올렸다.

[중급 정보]

「티타노마키아가 진행되는 도중, 마해의 군단이 침공해올 예정.」

「선봉장 베히모스가 이끄는 2천여 가량의 수상 부대로 구성됨.」

「베히모스가 지휘하는 ‘1군’을 시작으로 10분 뒤에 더 수많은 병력으로 구성된 ‘2군’이 닥쳐올 예정.」

틀림없다.

‘수룡의 보물고’가 함락됐다는 사실에 분노한 해신이 복수를 위해 군단을 보낸 것이리라.

하늘에 떠오른 저 거대한 물방울은 놈들이 육지로 상륙하기 위한 ‘문(Gate)’이었다.

“저게 대체……!”

그리고 그것을 올려다본 기리아크와 타이탄들이 크게 경악했다.

모두가 예기치 못한 사태에 얼음장처럼 굳어버린 순간.

퍼-엉!

“크라아아악-!!”

“카아아아악-!!”

막대한 굉음과 함께 물방울이 폭발하며 상어 떼들이 튀어나왔다.

수중이 아닌 지상임에도 멀쩡하고, 심지어 새처럼 비행까지 하는 괴기스러운 존재들!

떼를 지어 몰려오는 비행 상어들의 등에는 미늘 갑옷을 입은 어인(魚人)들이 탑승해 있었다.

“마해 놈들이 여기까지……!”

기리아크가 격하게 당황했다.

정오의 햇빛이 화창하게 빛나던 창공은 어느덧 빼곡히 쏟아지는 마해의 군단들로 인해 밤처럼 어두워진 상태였다.

타이탄들이 하늘 위의 적들을 망연히 쳐다보며 허둥지둥 대던 가운데.

구우우-!

뱃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이어 타이탄들마저 순간 압도당할 만큼 몸집이 커다란 고래가 물방울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나의 전우(戰友)인 레비아탄을 죽이고 여제님의 늑골을 훔쳐?]

베히모스.

마해의 군단장이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기를 쏟아내며 지상의 타이탄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에 대한 죗값으로 네놈들의 시체는 마해에서 가장 어둡고 추운 곳에 수장될 것이다.]

섬뜩한 경고가 이어지기 무섭게.

퍼버벙-!

어인 병사들의 오른팔을 휘감은 화포(Hand Cannon)가 불을 뿜었다.

진청색을 띤 에너지의 응집체가 지상의 타이탄들을 향해 쏟아졌다.

폭음이 연달아 이어지고 포탄을 맞은 타이탄들이 절규를 내질렀다.

거성의 주변은 순식간에 푸른 불꽃으로 뒤덮인 불바다가 되었다.

“오늘만큼은 안 된단 말이다! 제발 오늘만큼은!”

눈앞의 아비규환을 아연하게 바라보며, 기리아크가 울부짖었다.

신이 부활하는 날이다.

우리들의 구원자가 지상으로 강림하는 신성한 날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건…….

“대리자시여!”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타이탄들 사이로, 로이먼과 함께 분투하던 막레온이 제단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공황 상태에 빠진 기리아크를 발견하더니 다급히 소리친 것이다.

“저놈들은 저희가 맡을 테니 대리자께선 서둘러 의식을 거행하여 주십시오!”

“혼돈의 거신께서 부활하시면 어차피 저놈들은 죽은 목숨입니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거 아닙니까!”

바로 그때.

퍼버벙-!

화포가 토해낸 불의 구체가 고치 쪽으로 떨어졌다.

쿵-!

기리아크가 지팡이를 지면에 세차게 내려찍자, 반투명한 방어막이 거성을 감싸 안았다.

가까스로 제단과 고치를 지켜낸 기리아크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서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그래.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지는 것이다.

금방 침착을 되찾은 기리아크가 사방위의 강자들을 향해 말했다.

“의식의 거행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부디 조금만 더 버텨주거라, 전사들이여!”

기리아크는 절실하게 눈빛을 빛낸 뒤 몸을 돌려 대성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다짜고짜 팔을 뻗어 그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이제부터 너의 영혼을 거신을 품은 저 ‘알’에 불어넣을 것이다.”

“그렇군.”

“미안하다. 거룩한 희생을 치르는 네게 이런 아수라장을 보여줘서.”

“시간 없어 보이는데 그런 말 할 시간에 서두르는 게 어때.”

그 말을 들은 기리아크는 고개를 끄덕인 뒤, 신비로운 힘을 발휘했다.

우우우-!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소리가 서슬 퍼렇게 흘러나왔다.

울고릭의 오장육부까지 음산한 귀기(鬼氣)가 스며오자, 대성은 가벼운 추위를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쿵-!

영혼이 추출 당한 울고릭의 몸뚱이가 줄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승천자의 영혼이여…….”

기리아크가 진한 남색으로 빛나는 영혼의 불길을 조심스레 손으로 감싸 쥐었다.

방어막 너머에는 어인과 거인 간에 피를 피로 씻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쿵-! 쿵-! 쩌저적-.

제단을 직접 무너뜨리기로 마음먹은 베히모스가 그 커다란 몸집을 방어막에 미친 듯이 들이박고 있었다.

하나 기리아크는 상관치 않았다.

이제 이 전쟁을 아틀라스의 승리로 결정 지을 신께서 도래하실 테니!

“우리들의 구원자를 현세에 강림시켜 주소서-!”

파아앗-!

절실한 기색을 담아 소리친 그가 영혼의 불길을 고치에 불어넣었다.

그 순간.

두근! 두근!

“아……!”

가만히 있던 고치가 맥동하는 심장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이 요동치는 고치를 눈에 담은 기리아크는 감격에 찬 얼굴로 환희에 휩싸였다.

‘아아! 그분께서 오신다! 그분께서 오신다!’

푸확-!

고치의 껍질이 폭발했다.

손.

승천자의 영혼을 잡아먹고 마침내 피와 살을 얻은 손이, 터져나간 껍질을 뚫고 튀어나왔다.

썩어 문드러진, 부패한 손이.

“……?”

하수구에서 흘러나오는 폐수(廢水)처럼 뚝뚝 흐르는 진물.

썩을 만큼 썩어서 풍겨오는, 아주 고약하기 그지없는 악취.

뼈가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붙은 손가락.

기리아크는 할 말을 잃었다.

저게.

구원자의 손이라고?

푸확-!

이때 고치의 윗부분이 폭발했다.

그리고 ‘뭔가’가 뻥 뚫린 구멍을 힘겹게 비집고 꾸물꾸물 나왔다.

“끄에엑-. 끼엑-. 끄아아악-.”

온몸의 털이란 털은 모조리 곤두서게 만드는 불쾌한 울음소리였다.

울긋불긋한 종기들이 들러붙은 진흙 덩어리가 위아래로 쩍 벌어지며 검은 틈을 드러냈다.

기리아크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저 진흙 덩어리가 ‘얼굴’ 부위임을 깨달았다.

“아, 아아…….”

아무리 생각해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이해할 수가 없다.

고치를 뚫고 튀어나오는 저 흉물이, 아틀라스의 지배자라니!

저 끔찍한 괴물은 자신이 알고 있던 혼돈의 거신이 아니다!

‘승천자의 영혼만 있으면 됐을 텐데 어째서……!’

안색이 파리해진 기리아크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간 순간.

그는 헛숨을 크게 삼켰다.

파스스-.

영혼이 사라진 레이의 몸에서 심상찮은 잿빛 가루가 흘러나왔다.

가루가 레이의 몸뚱이를 떠날 때마다, 그 아래 가려져 있던 썩은 살갗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 언데드라고……?”

레이, 아니.

‘울고릭’의 정체가 사실은 언데드임을 알게 된 기리아크는, 그제야 고치가 어째서 저런 돌연변이를 낳은 건지 깨달았다.

‘타락하고 저급한 언데드의 영혼을…… 나는 혼돈의 거신을 되살릴 제물로 바쳤단 말인가?’

가장 깨끗하고 신성한 영혼을 바쳐도 아슬아슬할 판에.

가장 더럽고 추악한 영혼을 부활의 제물로 바쳐버린 것이다.

“이, 이, 이건 이럴 순……. 대, 대체 언제부터 이딴 바보 같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기리아크가 비틀거리던 찰나.

푸확-!

썩은 팔다리가 하나둘씩 튀어나오던 고치가 전부 폭발하고, 그 안에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끄에에에엑-!”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체’라기보다는 살갗이 기워진 ‘살덩어리’에 가까웠다.

어디서부터가 상반신이고, 어디까지가 하반신일까.

종기로 뒤덮인 저 ‘덩어리’ 위로 드문드문 튀어나온 사지 중에서 무엇이 팔이고 무엇이 다리인지.

그나마 특정할 수 있는 부분은 구더기가 마구 들끓는 휑한 눈두덩밖에 없었다.

“으아아아-!!”

한 번밖에 없었던 부활의 기회가 허망하게 날아갔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리아크가 깊이 오열했다.

저건 살았다 해도 산 게 아니다.

차라리 그냥 계속 죽어 있는 게 훨씬 나을 정도로 비참하고 끔찍한 모습이 아닌가.

“끼엑. 끼익. 끼에엑-.”

‘헤카톤케일’이라 칭하기도 싫은 살덩이가 제단 주변을 꾸물꾸물 기어 다니며 천진난만하게 울었다.

방어막 밖에선 무수한 타이탄들이 마해의 군단에 휩쓸려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고.

아틀라스는 불바다에 잠겼으며.

구원자의 부활은 처참한 악몽으로 전락했다.

“악몽…….”

그래, 차라리 이게 다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삶의 의미를 잃은 기리아크가 초점 잃은 눈으로, 앞에 있는 흉물을 멍하니 쳐다보던 가운데.

푸확-!

한 번 더, 고치가 터졌을 때와 같은 굉음이 지척에서 들려왔다.

“후…….”

대성이 한 줌의 영혼마저 잃고 완전히 무(無)의 세계로 떠난 울고릭의 가슴팍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상쾌한 공기를 맛보는 그의 시야 위로 시스템이 메시지를 띄웠다.

[혼돈의 거신, ‘헤카톤케일’이 부활하였습니다!]

모습은 저래도 부활은 부활.

대성은 애처롭게 울부짖는 헤카톤케일을 바라보더니, 수확을 앞둔 농부처럼 뿌듯한 어조로 말했다.

“신수가 훤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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