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58화 (158/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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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흐흐……. 흐흐흐…….”

울고릭의 몸을 뚫고 튀어나온 대성을 본 기리아크는 헛웃음을 지었다.

앞에서는 헤카톤케일이 이상한 울음소리를 흘리고,

위에서는 베히모스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방어막을 깨부수려 했으며,

뒤에선 수많은 타이탄이 목숨을 잃고 떼죽음을 당하는 중이었다.

“촌극이다. 흐흐, 흐하하! 아주 그냥 싸구려 촌극이 따로 없어!”

눈물 자국이 선연히 말라붙은 뺨을 들썩이며 그가 광소(狂笑) 했다.

실성한 것이다.

모든 게 무너졌다는 사실을 깨닫곤 정신 줄을 놓았음이 분명하다.

“네놈들의 신이 저따위 모습으로 부활한 게 그리도 충격이던가?”

화륵-!

업화대검을 오른손에 그러쥔 대성이 능청맞게 말을 꺼낸 다음.

끄에에엑-! 끼이이익-!

아까부터 귀청을 따갑게 긁는 헤카톤케일을 올려다보며 선언했다.

“저걸 계속 보고 있기가 괴롭다면 내가 직접 태워서 없애주지.”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죽을 것 같은 저런 흉물을 처리하는 데는 한 방이면 충분하다.

칼자루를 움켜쥔 대성의 손에 힘이 실리려던 찰나.

파차창-!

거성을 덮은 방어막이 전부 무너지며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까짓 하찮은 결계 따위로 감히 나를 막으려 했는가!]

방어막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베히모스가 괴성을 지르며 쇄도했다.

상관없다.

헤카톤케일, 기리아크, 베히모스. 이 셋을 한꺼번에 불태워버리면 그만이니까.

파괴적인 힘이 담긴 불의 칼과 천둥과도 같은 기세로 닥쳐오는 거대한 고래가 서로 격돌하기 직전.

“끼에에엑-!!”

헤카톤케일이 끔찍한 비명을 토해내며 온몸에서 진물을 뿜어냈다.

치이익-!

산(酸) 성질을 띠어서 닿으면 치명적인 액체였다.

순간적으로 대성과 베히모스가 움직임을 멈췄다.

“끼이이익-!!”

그 틈을 타서 헤카톤케일이 꿈틀거리는 다리를 열심히 놀려, 거성의 꼭대기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마해의 군단과 아틀라스의 타이탄들이 난잡하게 뒤엉킨 전장 사이로, 녀석이 느닷없이 난입할 꼴이다.

부지불식 간에 기괴하기 짝이 없는 흉물이 나타나자 어인과 거인, 양측 전부 일순 움직임이 멎었다.

“힉! 저, 저게 뭐야!”

“윽! 냄새!”

“무, 물러서! 왠지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아!”

전장의 병사들이 질겁하는 반응을 보이며 흩어지기 시작하는 한편.

막레온과 로이먼의 얼굴에 점점 어두운 절망이 드리우고 있었다.

“어이, 막레온…….”

“…….”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부디 그냥 나 혼자만의 헛된 상상이라고 말해줘…….”

길 잃은 어린애처럼 하염없이 울부짖는 저 흉물을 바라보며.

어째선지 막레온과 로이먼의 뇌리엔 헤카톤케일의 장엄하였던 모습이 스치고 있었다.

주륵-.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동시에 눈물을 흘렸다.

실패했다는 걸 알았으니까.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와버렸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이때.

로이먼의 시야에, 높이 뛰어올라 헤카톤케일의 동체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대성의 모습이 들어왔다.

“으아아아아-!!”

캉-!

로이먼이 박도(朴刀)를 휘둘러 업화대검을 아슬아슬하게 받아냈다.

그냥 박도가 아니다.

태산 같은 몸집을 지닌 로이먼이 전용으로 다루는 대도(大刀).

대성의 처지에선 그냥 거대한 산이 덮쳐오는 느낌일 터였다.

로이먼의 공격을 막아낸 대성의 신형이 허공에 붕 떠오른 채 뒤로 한참을 밀려났다.

이대로 가다간 만주 벌판 끝자락까지 튕겨 날아갈 것 같았기에, 그는 [비행] 스킬을 발동해 용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쐐애액-!

이때, 하늘에 체공(滯空)한 그의 앞으로 창날이 날아들었다.

“……!”

대성은 잠시 날개를 접은 뒤 유려하게 몸을 비틀어 그것을 피해냈다.

사아악-!

마찬가지로 산만 한 크기의 창날이 한 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대성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막레온이 날린 공격이었다.

그가 서슬 퍼런 어조로 일갈했다.

“모습은 저래도 우리가 모셔야 할 분이다! 털끝 하나라도 댔다간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거 참 대단한 충성심이군.”

막레온과 로이먼은 그저 움직이는 살덩이에 불과한 저 흉물을 평생 안고 가기로 다짐한 모양이다.

비아냥거리긴 했어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충성심이 아닐 수가 없다.

그 사이, 전장을 휘젓는 헤카톤케일 위로 어인들이 포탄을 쏘아냈다.

펑, 퍼버벙-!

“끼에에엑-!!”

포탄 세례에 파묻히는 헤카톤케일이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그걸 본 막레온과 로이먼이 대성으로부터 이목을 거둔 뒤 외쳤다.

“신이시여!”

“헤카톤케일 님!”

지금 이 순간, 헤카톤케일은 마해 군단의 새로운 표적이 되었다.

어차피 타이탄과의 전투에선 우세를 점하던 참이니, 이제는 정체불명의 괴물을 공략하기로 전략을 바꾼 것이다.

순식간에 헤카톤케일을 중심으로 원형진을 구축한 어인 병사들이 집중포화를 가하기 시작했다.

“꺼져라! 생선 대가리들!”

“감히 신을 건드려!”

막레온과 로이먼이 헤카톤케일을 지키기 위해 분투를 벌였다.

헤카톤케일 또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처럼 동체에서 극독의 액체를 마구 분출해댔다.

“개판이군.”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그것은 정말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들썩이는 일대 장관 그 자체였다.

하지만 대성은 한편으론 잘 됐다고 생각하며 음습한 조소를 지었다.

“다들 한 곳에 뭉쳐 준다면 나야 좋지만.”

공평하게 몰살해주마.

화르륵-!!

업화대검이 근원의 파편의 힘을 최대한도로 끌어모았다.

[‘업화’ 모드의 첫 번째 특수 스킬이 발동됩니다.]

[특수 스킬 : <대로(大怒)>]

회오리치며 발생한 폭발적인 불길이 칼자루에 응집되고 또 응집되며 대기를 일그러뜨렸다.

직후, 가공할 힘이 응축된 검극(劍戟)을 대성이 앞으로 내찌른 순간.

콰콰콰콰콰-!

파괴적인 위력이 실린 폭염의 해일이 굉음과 함께 해방되었다.

“……!”

천지 만물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종말의 파도가 밀려오자, 전장에 선 모든 이들이 그것을 돌아보았다.

하늘의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핵탄두라도 발견한 듯한 표정으로.

모두가 잠시 넋을 잃고 말문을 잇지 못하던 가운데.

콰-앙!

고막이 터질 만큼 거센 폭음이 작렬했고, 빛이 세상을 뒤덮었다.

대성을 제외한 모두가 꼼짝없이 죽었으리라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공간을 찢어내며 쇄도해 온 불의 해일은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스으으-.

자욱하게 피어오른 검회색 버섯구름이 점차 걷혀가고, 그 너머에 선 존재의 윤곽이 빠르게 드러났다.

기리아크.

그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달려들어 <대로>를 막아낸 것이다.

“헉…… 허억…….”

기리아크는 <대로>를 정면으로 받아냈음에도 목숨이 붙어 있었다.

물론 죽지 않았다 할 뿐이지, 전신은 끔찍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간략하게 말해 몸뚱이 절반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을 정도니.

대성이 고개를 까딱였다.

“이걸 막아? 대단하군.”

“놀랄 필요 없다. 나 또한, 살아남을 각오로 네놈의 공격을 막아낸 거니까.”

“하지만 꼬락서니가 그래 가지곤 5분 후면 죽을 것 같은데.”

“5분? 어리석긴. 나는 그렇게까지 오래 살 생각이 없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대성이 질문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파스스-!

돌연 이마에 손을 얹은 기리아크가 자신의 영혼을 추출하기 시작했다.

“발악을……!”

그 행동이 무얼 의미하는지 직감한 대성이 서둘러 어검술을 펼쳐 업화대검을 투척했다.

콰직-!

총알과 같은 속도로 쏘아진 불의 칼이 기리아크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렇게 기리아크는 죽었다.

육신만.

[우리들의 구원자시여……!]

영체(影體)가 되어 현세의 몸뚱이에서 떨어져 나온 기리아크가 헐레벌떡 헤카톤케일을 향해 날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기리아크의 영체가 헤카톤케일의 몸에 스며들었다.

“하.”

그는 자신의 영혼을 직접 제물로 바쳐 헤카톤케일을 ‘다시’ 부활시키려는 것이다.

어떻게든 이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집념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끄아아아악-!!]

종기 가득한 살덩이에 파묻힌 기리아크의 영체가 비명을 질렀다.

올바른 부활 루트는 아니었는지, 그는 끝없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장렬히 산화되는 와중에도, 기리아크는 희열에 젖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흐, 흐흐…. 구, 구원자시여. 지, 지, 지금 다, 당신의 충실한 종이… 이, 이, 한 몸 바쳐 피와 살이 되어드리겠나이다……!]

광기.

끝을 알 수 없는 광기가 아닌가.

아무리 아카식 레코드라 할지라도, 이런 돌발 상황까지는 예측하지 못했다.

“끼에에엑-!!”

[끄아아아악-!!]

헤카톤케일과 기리아크의 비명이 중첩되는 가운데.

퍼-엉!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늘에 고정된 물방울이 한 번 더 폭발했다.

이어서 아카식 레코드가 경고한 마해의 두 번째 군단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갑옷 입은 병사와 날아다니는 상어 떼뿐만이 아니라, 수룡의 아종(亞種)들까지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끝이 없군.”

창공은 바다의 괴물로 뒤덮였다.

전쟁의 여파에 휩쓸린 거성이 굉음과 함께 붕괴하고 있었다.

전장엔 피비린내와 비명이 끊이질 않았고 숱한 목숨이 이승을 떠났다.

혼돈(混沌).

그리고 그 중심에-.

[다 꺼져라.]

혼돈의 거신이 깨어났다.

쿵-!

한 명의 타이탄이, 드넓은 대지를 딛고 몸을 일으켰다.

길게 늘어진 머리칼은 금빛 화염으로 넘실거렸고 창천의 구름까지 닿는 몸집은 거칠고 투박한 황색 갑주에 뒤덮였다.

그가 허리를 펴고 목소리를 낸 순간 이미 그을음 가득한 땅이 한 번 더 으스러지며 쩍쩍 갈라졌다.

이어서, 그의 강림을 환영한다는 듯이 강렬한 열기를 품은 용암이 지저(地低)를 뚫고 솟구쳤다.

헤카톤케일.

마침내 아틀라스의 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진정한 모습을 드러냈다.

“…….”

신의 등장을 본 타이탄들이 전시 중이라는 사실도 까마득하게 잊고 무릎을 털썩 꿇었다.

로이먼과 막레온… 그리고 그 뒤로 쭉 이어진 거인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경배를 올렸다.

“어…. 어어…….”

돌연 거대한 벽처럼 시야를 가득 메우는 헤카톤케일의 위용 앞에서, 베히모스를 비롯한 마해의 군단들은 기묘한 신음을 흘려냈다.

오직 대성만이 투지를 태우며 당당히 혼돈의 거신을 마주하던 가운데.

[다 꺼지라고 했을 텐데?]

번쩍-!

대지에서 광휘가 솟구쳤다.

그리고 빛이 사그라진 자리엔, 어느덧 커다란 대검 한 자루가 거꾸로 깊숙하게 박혀 있었다.

그 검의 형태가, 대성의 눈에는 너무나 낯이 익었다.

그럴 수밖에.

“저놈, <카오스>를…….”

불과 하루 전에, 본인이 직접 휘둘러본 경험이 있던 검이었으니까.

하지만 헤카톤케일이 직접 불러낸 <카오스>는 달랐다.

대성이 사용했던 건 어디까지나 ‘가짜’에 불과한 걸까?

이미 길이부터가 비교를 불허한다.

탁-.

헤카톤케일에 대지 위로 깊숙이 박힌 <카오스>를 움켜쥐기 무섭게.

화르륵-!

대성은 업화대검으로부터 불길을 끌어낸 다음, 그것을 결계처럼 자신의 몸에 한가득 둘렀다.

달려가서 응수하려 했다간 이어질 공격에 휘말리고 만다.

지금은 몸을 웅크리고 버텨내는 것만이 최선의 행동이다.

[아둔한 것들. 전부 사라져라.]

혼돈의 검이 헤카톤케일의 손아귀에 사로잡히며 뽑혀 나온 순간.

분지 끝부터 분지 끝까지 방출된 역천(逆天)의 섬광이 천지 만물을 난폭하게 집어삼켰다.

파괴를 넘어.

멸망(滅亡)이 내려앉았다.

***

“군주님. 모두 죽었습니다.”

한편.

세상 한구석에 자리한 어딘가에, 피로 얼룩진 대지가 하나 더 있었다.

환상성(幻想星).

몽환적인 이계의 식물이 흐드러지게 핀 초원은 지금 지옥이 되었다.

맑은 강물 대신 핏물이 흘렀고, 풀과 나무는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땅을 나뒹구는 참혹한 시체 사이로 매캐한 폭연이 피어오른다.

“아직 목숨이 붙은 엘프는 없는 듯합니다.”

“완벽한 압승이로군요. 이게 다 군주님의 뛰어난 지휘 덕분입니다.”

쿵, 쿵, 쿵-.

‘그들’이 땅을 밟을 때마다 맨틀이 으스러지는 것처럼 지진이 일었다.

불바다가 된 초원 위를 거닐며, 숯덩이가 된 엘프들을 짓밟는 ‘그들’의 정체는 드래곤이었다.

병사 하나하나가 전부 흑룡(黑龍)을 초월하는 위세를 지닌 마룡(魔龍)으로 구성된 용의 군단들.

그들이 전장의 한복판에 선 용인(龍人)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경건히 머리를 숙였다.

하나 용인은 병사들의 보고를 들었음에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룡들이 의문을 느끼던 찰나.

그들은 깨달았다.

부들부들-.

용인의 어깨가 경련하고 있음을.

“군주님?”

마룡 한 마리가 그걸 보고는 눈매를 좁히기 무섭게.

[아아…….]

용인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광풍(狂風)이 몰아치듯, 전장에 피어오른 불길들이 거칠게 흔들렸다.

한숨을 마친 용인이 물었다.

[너희는 들리지 않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잘…….”

[너희의 귀에는, 지금 이 혼돈이 태동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냔 말이다.]

‘혼돈’이란 말을 들은 순간.

그제야 마룡들이 숙였던 고개를 위로 쳐들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용인이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리고 외쳤다.

[왜 이리 늦었는가!]

고함을 지르는 그의 입에서 파동이 터져 나오자 지표면이 깎여갔다.

범접할 수 없는 맹위와 마주한 마룡들이 몸을 움츠리며 전율하였다.

[나의 오랜 숙적, 헤카톤케일이여!]

드래곤 로드(Dragon Lord).

고대룡(古代龍) 파프니르.

그가 온 세상을 뒤흔들 듯 쩌렁쩌렁 함성을 내질렀다.

[이제야 우리들의 싸움이 결착을 맺을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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