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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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
피투성이가 된 헤카톤케일이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쳐든 순간.
콰가가각-!
그의 지척에서 대기가 찢겨나가며 거대한 균열이 발생하였다.
균열 내부에서 휘몰아치는 흑색 소용돌이를 본 대성은 깨달았다.
‘도망칠 속셈인가.’
그 깨달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헤카톤케일이 내장을 줄줄 흘려대며 균열 안쪽으로 허겁지겁 다가갔다.
물론 그걸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을 대성이 아니었지만.
“어딜 도망가려고.”
팡-!
헤카톤케일의 오른쪽 팔목 부근에 매달려 있던 그가 허공을 박차 매섭게 쇄도하였다.
“내가 분명 뇌를 터뜨려준다고 했을 텐데?”
좌우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식은땀에 젖은 헤카톤케일의 얼굴과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헤카톤케일 또한 오싹한 낌새를 느꼈는지, 그 커다란 몸을 한껏 버둥대어 대성을 떨쳐내려고 했다.
푸-욱!
[……?!]
뒷덜미에 업화대검의 칼날이 사정없이 쑤셔 박히기 전까진 말이다.
주삿바늘에 꿰뚫린 환자처럼 헤카톤케일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대성이 폭주하는 전차처럼 헤카톤케일의 목덜미를 힘차게 내달렸다.
“끝이다.”
팍-!
경추(頸椎)를 박차고 높이 도약한 대성의 아래로 헤카톤케일의 정수리가 황량하게 펼쳐졌다.
그대로 낙하하기 시작한 대성이 업화대검의 칼날을 수직으로 세웠다.
화륵-!
검극에 불꽃이 맺혔다.
이대로 정수리를 넘어 뇌를 꿰뚫어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싸움에 종지부가 찍히려던 찰나.
크오오오오-!!
너무나 귀에 익숙한.
그러나 한편으로는 왜 지금 들려오는 건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그런 괴성.
‘드래곤 피어(Dragon fear)’가 느닷없이 창천을 쩌렁쩌렁 울렸다.
“……!”
하늘을 뒤흔드는 포효가 터져 나오기 무섭게.
중력을 따라 매끄럽게 떨어지던 대성의 신형이 폭풍에 휩쓸리는 배처럼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뿐만이 아니다.
와장창-!
헤카톤케일의 도주 경로였던 어둠의 소용돌이도 파괴되었다.
마지막 구명줄이 사라진 걸 본 헤카톤케일의 눈이 절망에 차올랐다.
“갑자기 무슨.”
콰드득-!
대성은 헤카톤케일의 어깻죽지에 칼날을 박아 넣어 가까스로 멀리 날아가는 사태를 막은 다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그야말로 뉴욕…… 아니, 미국 전역의 하늘을 지배할 만큼 커다란 게이트가 활짝 열려 있었다.
“…….”
부지불식 간에 벌어진 돌발 사태에, 일순 놀랄 뻔한 대성이었지만.
그는 곧 머릿속으로 한 가지 ‘정보’를 떠올리곤 얼굴을 굳혔다.
‘아카식 레코드의 [상급 정보]에 나와 있었어.’
이미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당연한 반응이었다.
참고로 아틀라스에 마해의 군단이 침공해 온다는 정보가 ‘중급’이었다.
즉, ‘상급’은 그보다 훨씬 웃도는 규모를 지닌 얘기라는 의미.
“이, 이런 상황에 게이트가?!”
“젠장! 조금만 있으면 저기 거인 놈 모가지를 딸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저 게이트 크기를 좀 보라고!”
수호막 안쪽에 있던 사냥꾼들도 하늘에 열린 게이트를 보고는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들은 과연 저 게이트 밖으로 무엇이 튀어나올지 가늠하지도 못한 채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그리고.
게이트가 개방되기 무섭게, 그 너머에 도사리고 있던 ‘존재’들이 현세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아아아-!
크오오오-!
드래곤!
육해공(陸海空)을 아우르는 최강의 생물이 한 마리도 아니고 수백 마리가 우후죽순 등장하고 있었다.
“아, 아아…….”
전설로만 접해왔던 가공할 존재의 위용 앞에서, 인간들은 목소리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섬멸룡 한 마리만 봐도 몸을 덜덜 떨며 이것이 현실인지 의심하였던 그들이다.
그러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은,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지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할 수밖에.
‘방금 그 피어…….’
한편.
유일하게 냉철함을 잃지 않았던 대성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저놈들이 내지른 게 아니야.’
대성의 몸을 날려버리고, 헤카톤케일이 형성한 균열과 소용돌이를 단숨에 파괴할 만큼의 위력이었다.
단순한 직감이지만 확신했다.
방금 포효를 내지른 자는 저들이 아니라, 저들을 ‘지배하는 자’라고.
그리고 대성의 직감은 적중했다.
[이게 얼마만의 재회인가! 나의 숙적, 헤카톤케일이여!]
피어와 똑같은 음색의, 중후한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이윽고 검붉은 피부를 지닌 한 명의 용인(龍人)이 천천히 내려왔다.
‘파프니르.’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아카식 레코드 덕에 알 수 있었다.
저 용인의 정체가, 모든 드래곤의 지배자인 로드(Lord), 파프니르임을.
동시에 환상성(幻想星)의 패권을 거머쥔 잔악무도한 폭군임을.
‘내가 죽여야 할 놈 중 하나다.’
로드고 뭐고, 폭군이고 뭐고.
그저 대성의 눈에는 생명 포식자에게 던져줘야 할 먹잇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상급 정보]에 기록되었던 사실들이 하나둘씩 실현되고 있군.’
폭주족처럼 사납게 울부짖으며 하늘을 배회하는 용들 사이로.
장대한 날개를 펼친 파프니르가 지상을 향해 서서히 내려오며 외쳤다.
[왜 이리 늦게 부활하였는가! 나는 네놈과의 승부만을 애타게…… 응?]
그때.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치는 파프니르의 얼굴에 짙은 당혹이 서렸다.
[헤, 헤카톤케일, 네놈……. 꼬락서니가 왜 그런 거냐?]
굳이 사정을 캐묻지 않아도, 파프니르가 헤카톤케일과의 승부를 고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둘은 오래전부터 싸워왔던 라이벌 관계인 듯했다.
그런데.
현재 파프니르의 시야에 비치고 있는 그 라이벌의 모습은 어떤가.
뱃가죽이 크게 찢어지고, 내장을 질질 흘리고 있는 처참한 모습이다.
기나긴 기다림의 끝에 승부를 내러 왔는데, 저래 가지곤 싸움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셈이다.
[왜 그러고 있는 거냐고!]
지독한 허탈감을 느낀 파프니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격분했다.
기다림에 대한 보상이 전부 물거품이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터.
그가 추하게 바닥을 기는 숙적을 허망한 눈길로 바라보던 가운데.
“내 먹잇감에 눈독 들이지 마라.”
대성의 낮은 목소리가 파프니르의 청각을 날카롭게 자극했다.
그러자 파프니르가 가라앉힌 눈초리로 목소리의 진원지를 보았다.
헤카톤케일에 비하면 워낙 몸집이 작았기에 아까는 발견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파프니르는 헤카톤케일의 어깻죽지에 있는 대성과 눈이 마주쳤다.
[너는 누구냐?]
“그건 알 필요 없고 내 말 못 들었나? 내 먹잇감에 그만 신경 쓰고 거기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라. 곧 네놈 모가지도 따줄 테니.”
[…….]
파프니르는 너무 어이가 없었던 나머지 헛웃음조차 짓지 못했다.
로드의 주변을 에워싼 드래곤들도 저 개미 같은 인간의 패기 앞에서 잠시 말문을 잃었다.
파프니르가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음, 그러니까…… 먹잇감이라는 말은 네놈이 내 숙적을 저렇게 만들었다는 뜻이냐?]
“그래.”
[하하하-!]
결국, 파프니르는 참지 못하고 이마를 쓸어넘기며 웃음을 터뜨렸다.
대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헤카톤케일을 저렇게 만들었다고? 네가? 헤카톤케일의 발톱 때보다 작은, 하찮은 인간 주제에?]
“…….”
[허풍을 쳐도 말이 되는 허풍을 쳐야지! 이거 원,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오는군! 하하하-!]
딱!
어깨를 들썩이며 폭소하던 파프니르가 손가락을 크게 튕기기 무섭게.
캬오오오-!
그의 주변에 있던 드래곤 몇 마리가 무시무시한 송곳니를 드러낸 채 대성에게 달려들었다.
[내게 웃음을 준 건 가상하지만, 시건방을 떤 것에 대한 죗값은 톡톡히 치르거라.]
검푸른 비늘의 마룡(魔龍) 다섯 마리가 대성의 근방까지 다가왔다.
그들의 날갯짓이 막대한 풍압을 자아냈고 활화산 같은 살기가 공기를 찍어눌렀으나.
대성은 일체의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그저 차분히 업화대검의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을 실어 넣었다.
그리고.
“꺼져라.”
불길을 둘러 입은 대검이 반원(半圓)을 그리며 휘둘러진 순간.
콰과과과곽-!
강대한 검풍(劍風)이 전방으로 방출되며 마룡들의 몸이 폭사했다.
[…….]
문자 그대로 ‘일격’에 마룡들이 격멸 당하는 광경을 본 파프니르가 엄격하게 표정을 굳혔다.
피 분수를 쏟아내며 추락하는 드래곤들 사이로, 악귀 같은 모습을 한대성이 이를 씩 드러내고 있었다.
파프니르도 웃었다.
[아무래도…….]
하나 아까처럼 하등 생물을 대할 때의 깔보는 듯한 조소가 아니다.
호승심.
[허풍이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새로운 ‘호적수’를 만나 즐겁다는 미소가, 파프니르의 입가에 선명히 번져갔다.
화르륵-!
맹렬한 투기(鬪氣)를 끌어올린 파프니르의 몸이 불꽃에 휘감겼다.
그는 오랜 숙적인 헤카톤케일을 없애고, 새로이 찾은 맞수인 대성마저 쳐죽일 작정이었다.
군주의 살기에 압도당한 드래곤들이 흠칫하며 물러서기 시작했다.
행여 군주의 싸움에 방해가 되거나 찬물을 끼얹다간 그대로 목이 날아갈 것이므로.
[어디…… 내 숙적을 저렇게 만든 네놈 실력을 한번 확인해볼까!]
휘오오오-!
구름마저 흩뜨리는 파멸의 기운이 파프니르의 손에 응집되었다.
섬멸룡의 필살기인 ‘광살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용!
‘시간석으로 막아낸다.’
대성은 깨달았다.
저 응집된 파멸의 기운이 파프니르의 손을 떠나는 순간, 미국은 지구의 지도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란 사실을.
막을 수도 없고, 쳐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아예 발동조차 할 수 없도록 만들 수밖에.
‘팔을 잘라내야 해.’
대성은 아공간을 열어 시간석을 꺼내는 것과 동시에, 훌쩍 뛰어올라 파프니르와 거리를 좁혔다.
시간석의 힘이 미치는 최대 범위인 10m의 간격을 만들기 위함이다.
[이미 늦었다! 지금 달려든다 하여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두고 보면 알겠지.”
대성이 시간석을 주물러 시간의 흐름을 늦추려던 그때.
콰-앙!
“……!”
[……?!]
바로 근처의 대지가 하늘까지 맞닿을 만큼 드높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내 깎여 나간 지표면이 흘러내리며 그 속에 있던 어떤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고함쳤다.
[찾았다, 아틀라스의 머저리!]
그것은 헤카톤케일만큼 커다란 육신을 지닌 ‘물의 거인’이었다.
그러나 저 거인의 정체는 아틀라스에서 온 타이탄이 아니다.
마해의 여제.
해신(海神) 사가라.
[감히 나의 소중한 레비아탄과 병사들을 죽여?! 심연에 처박아주마!]
권속과 늑골, 그리고 대다수의 군단을 잃은 그녀가 몸소 본신(本身)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크롸아아악-!
카아아아악-!
사가라의 머리엔 머리카락 대신 레비아탄과 흡사하게 생긴 수룡들이 꿈틀대며 울부짖고 있었다.
푸른 철갑을 덧대어 입은 그녀가 지상을 뚫고 나온 순간, 일대는 이미 물바다에 잠긴 상태.
넘실거리며 쏟아지는 파도가 도심지를 휘감은 수호막과 충돌하였다.
“아, 아아……! 아아……!”
“흑, 흐, 흐윽…….”
수호막 속에 있는 인류는 급기야 눈물을 흘리거나 절망하였다.
그들의 눈에 비친 헤카톤케일과 사가라, 그리고 파프니르의 모습은 ‘몬스터’가 아니었다.
자연재해.
제아무리 뛰어난 사냥꾼일지라도, ‘인간’이라는 종의 테두리에 갇힌 이상 거스를 수 없는 신의 분노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자연재해의 한복판에 태연하게 서 있던 대성은 생각했다.
아직.
‘아직 끝이 아니다.’
우르릉-!
하늘에서 천둥이 끝없이 내리쳤다.
모세가 바다를 갈랐을 때처럼 창공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고, 그 사이로 태양처럼 뜨거운 열기를 품은 빛이 연거푸 쏟아졌다.
우르릉-! 쿠릉-! 쿠릉-!
좀처럼 우레가 멈추질 않자, 파프니르와 사가라가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번쩍-!
빛이 점멸하고.
뒤이어 거대한 ‘기계 섬’ 한 채가 하늘 위로 나타났다.
대성을 제외하고 저 기계 섬의 정체를 제일 먼저 알아차린 건 파프니르였다.
[기신족(機身族) 놈들까지!?]
하늘을 가득 메운 기계 섬에서 증기가 마구 뿜어져 나왔다.
그 열기에 휩쓸려 비늘이 꺼멓게 타들어 간 드래곤들이 고통에 겨워하며 아래로 떨어졌다.
‘부유 공장.’
다름 아닌, 기신족들이 거주하는 차원이자 놈들의 본진이었다.
《유용한 실험 쥐들이 여기에 다 모였군. 우린 거신의 샘플만 채취해 갈 생각이었는데.》
부유 공장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중성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역시 확실한 승리를 위해 본대를 끌고 온 건 정확한 판단이었다.》
[오만하고 멍청한 고철 덩어리 놈들. 그까짓 호기심 때문에 너희들이 사는 세계를 통째로 끌고 와? 그러다 역으로 너희 쪽이 모조리 멸망할 거라는 생각은 못 했나 보지?]
노골적인 비웃음을 드러내며 그리 말한 건 파프니르였다.
그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총력을 끌어왔다는 건, 반대로 말해 이 싸움에 패배했다간 두 번 다시 재기할 수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래. 생각 못 했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뭐?]
《확률상 우리가 여기서 패배할 확률은 0.001%에 불과하다.》
[아, 그래. 숫자놀음 하나만 믿고 나와 나의 군단에 덤비시겠다? 미치겠군.]
꽈드득-.
파프니르가 주먹 근육을 풀었다. 바윗덩어리 같은 손아귀 위로 징그러운 힘줄이 한가득 용솟음쳤다.
[그렇다면 왜 0%가 아니라 0.001%인지 지금부터 내가 친히 알려주도록 하지.]
《고대룡의 해부도는 과연 어떻게 생겼을지 우리도 흥미가 생긴다.》
[개소리 그만하고 썩 꺼져라, 이 잡것들! 이건 나와 저 머저리, 헤카톤케일만의 문제다!]
지배자들 간의 불꽃 튀는 신경전에 사가라도 난입하였다.
한 명만 강림하여도 피바람이 불고 천지가 역전한다는 차원의 지배자가, 무려 넷이나 한자리에 모였다.
누가 먼저 움직일지, 지배자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려던 순간.
“꼴값들 떨고 있군.”
동양의 구세주라 불리는 한 남자의 낮고도 묵직한 목소리가 지배자들의 집중을 산산이 깨뜨렸다.
파프니르, 사가라, 부유 공장의 기신족, 모두의 시선이 한데 집중되었다.
거기엔.
“나한테 전부 뒈질 것들이.”
산양의 머리처럼 생긴 백골 가면을 뒤집어쓰는 대성이 있었다.
추후에 따르는 후유증이 크기에 웬만하면 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저 지배자들을 압도하려면, 역시 이 방법밖에는 없으리라.
[‘지옥 마신(魔神), <메피스토(Mephisto)>를 현세에 구현합니다.]
화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