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162
[이런 결말이 오게 될 거란 걸, 우리는 알고 있었을까?]
“나는 알고 있었다.”
[죽을 거란 걸 알면서도 불에 달려드는 부나방인 줄 알았는데.]
“멍청하긴. 나는 부나방 같은 게 아니라 인간이다.”
마수의 시체가 쌓인 산 위에 쪼그려 앉은 채, 대성은 짧게 대답했다.
사각-. 사각-.
펜을 쥔 그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그리고 뒤에는.
길쭉한 팔이 네 개가 달린 산양 머리의 마수가 잿가루가 되어 서서히 소멸하는 중이었다.
산양 머리의 마수가 물었다.
빠르게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도, 어린애처럼 너무나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이다.
[너는 네가 어떤 ‘종족’이었는지 기억해? 놀랍네. 내가 지옥으로 납치한 놈들은 구르고 싸우고, 고통받다 보면 결국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기억 못 하던데.]
“난 했다.”
[어떻게?]
“…….”
[그만 끼적거리고 대답해줘.]
그 순간.
바쁘게 움직이던 대성의 손이 우뚝 멈췄다. 어째서인지는 본인도 잘 알지 못했다.
동정심은 아닐 터이다. 이쪽을 봐 달라고 사정하는 저 괴물의 호소에 마음이 움직인 게 아니다.
예의.
그래, 이건 예의다.
80년 동안 이어진 여정의 끝자락에 마주친 ‘적수’에게 보이는 예의.
슥-.
아까부터 계속 등을 보였던 대성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손에 들린 한 권의 ‘일기장’을 마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나는 내가 괴물이 아닌 ‘인간’임을 망각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적고 또 적었다. 80년 동안.”
[…….]
“파괴밖에 모르는 너희 마수 놈들은 못 하겠지. 무언가를 ‘기억하고’, ‘남긴다는’ 행위 말이다.”
[그동안 쭉 적어왔던 거야? 너의 행적, 너의 발자취를?]
“그래.”
[그럼, 거기엔 나에 관한 이야기도 적혀 있겠네?]
“지금 막 적으려던 참이다.”
[뭐라고 적을 건데?]
“강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덩치만 큰 병신.”
산양 머리 마수가 웃었다.
모욕 어린 말을 들었는데도, 그는 기분 좋게 폭소하였다.
잠시 후.
웃음이 멎은 산양 머리 마수가 불꽃이 넘실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눈을 떴을 때는 온 사방이 불이었고, 나는 혼자였어.]
“…….”
[나는 그 고독이 싫어서 온 차원의 존재들을 마구잡이로 납치했고.]
“설마 그게 내가 여기로 떨어진 이유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개새끼였군, 네놈.”
[나는 내 고독을 달래줄 존재가 필요했어.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어쩌면 나도 내 감정을 잘 몰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산양 머리 마수의 몸이 절반 이상 바스러져 갔다.
그가 목소리를 내뱉을 수 있는 순간도 머지않았으리라.
[나는 적수가 필요한 게 아니라, 내가 죽어서도 나를 기억해줄 존재를 갈망했을지도 몰라.]
시답잖은 쫑알거림이 이어지자, 대성은 도로 몸을 돌려 일기장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매몰차다고 생각하면서도 산양 머리 마수는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은 그저, 자신의 마지막 한탄을 들어줄 대상이 있다는 사실에 아주 큰 위안을 얻고 있었으니까.
[내 앞에 선 존재는, 모두 내 손에 죽었어. 나보다 빨리 죽었어. 그렇게 모두가 죽고 나면…… 내가 죽은 뒤에는 누가 나를 기억해줄까?]
“…….”
[하지만 이젠 안심했어. 왜냐하면, 네가 나를 기억해줄 테니.]
“그래. 너 같은 개새끼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겠지.”
스릉-.
펜을 놀리다 말고, 대성은 시체의 산 한편에 비석처럼 꽂아둔 업화대검을 뽑아 들며 몸을 일으켰다.
“감성팔이 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나서 못 참겠다. 그만 쫑알대고 이제 진짜 죽어라.”
[마음대로 해. 목을 베든, 심장을 찌르든.]
“그래.”
대성은 정수리를 세로로 가르는 쪽을 선택했다.
업화대검이 허공에 수직으로 떨어졌고, 용암 같은 핏줄기가 산양 머리 마수에게서 솟구쳐 나왔다.
그렇게.
지옥의 군주이자, 명계의 마신(魔神), 메피스토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
그로부터 1년이 지나고.
한창 인간 사회에 숨어든 디멘션 테이커를 색출하고, 황준영 일행을 훈련하며, 1년 뒤 벌어질 혼세와의 전쟁을 대비 중이었던 대성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혼세와의 싸움이 끝나고 나면, 그 뒤에는 더 강력한 적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한 예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옥 말고도 우주엔 무수한 이계(異界)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그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혼세 이상의, 그리고 지옥 이상의 적들이 언젠간 지구를 침공해 올지도 모른다고.
만약 그때가 오면, 자신과 황준영 일행, 혹은 인류가 쉬이 그 시련을 감당해낼 수 있을까?
아니.
대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족하다.
더 크고, 강대한 힘을 넣지 않으면 안 된다. 강박증이 일었다.
‘지구엔 내가 지켜야 할 존재들이 있다.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야.’
그 사실이, 대성을 더욱더 지독하고 철저한 성격으로 만들었다.
그에게 있어서 지옥과 지구의 가장 큰 차이점은, 마수가 있냐 없냐의 여부가 아니었다.
자신 말고도, 지켜야 할 존재가 있냐 없냐의 여부였다.
그렇기에 더 강한 힘을 갈구할 수밖에 없다. 변수 따위는 모조리 지워버릴 정도로 불합리한 힘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날, 대성은 판테온에 들어갔다.
그리고 힘을 원하는 절대자를 향해, 시스템 메시지는 그간 드러내지 않았던 ‘세 번째 형식’의 퀘스트를 제시하였다.
[‘마신 재림’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
-이렇게 다시 불러낸 걸 보니 정말로 기억해 줬구나. 감동인걸.
“입 다물지 않으면 도로 소환을 해제시킬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
-그놈의 쌀쌀맞은 성격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네.
일상적인 대화가 오가는 한편.
현세에 재림한 존재를 눈에 담은 지배자들이 짙은 경악을 드러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하찮디하찮은 저 작은 인간이 산양 머리 백골을 얼굴에 뒤집어쓴 순간.
지금껏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강맹한 염화(炎火)가 모여들더니 순식간에 몸집이 부풀려졌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건, 지배자인 자신들조차 순간 섬뜩해질 정도로 흉포한 기운을 지닌 존재였다.
해신 사가라도, 고대룡 파프니르도, 부유 공장의 기계의 신도, 혼돈의 거신 헤카톤케일도, 그 누구도 저 존재의 이름과 정체를 모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약해빠진 것들뿐이구나.]
다중 차원의 가장 밑바닥에 조용히 흐르던 심연 중의 심연.
‘지옥’에서 조용히 군림하던 자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그저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강자’라는 사실만 느껴질 따름이다.
[후…….]
그때.
다른 지배자들과 함께 침묵해 있던 파프니르가 돌연 이를 드러내더니,
[후, 후하하하하-!]
급기야 고개를 높이 쳐들며 폭소하기 시작했다.
광기에 찬 고대룡의 웃음이 지축을 울리자, 지배자들은 불쾌하다는 듯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파프니르는 주변의 분위기 따윈 개의치 않고 이렇게 말했다.
[즐겁구나! 아주 즐거워! 용들의 왕인 나조차 피부가 저릿해질 만큼 강력한 존재! 그리고 내로라하는 지배자들의 집결이라! 그야말로 내가 원했던 무대가 갖추어졌군!]
“곧 있으면 죽을 놈이 조잘대지 마라. 헤카톤케일을 없애고 나면 다음엔 네놈부터 먼저 죽여주마.”
마신 메피스토의 몸에 강체(降體)한 대성이 빈정거렸다.
마력이 존재하지 않는 지구는 오롯하게 메피스토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다.
다른 마수들과는 달리, 메피스토가 현세에 구현되는 순간 세계는 크나큰 거부 반응을 일으킬 터.
그리되면 메피스토 또한 온전한 모습으로 소환될 수 없는 셈이다.
그에 대한 억제책과 보충안으로, 막대한 마력을 지닌 대성이 메피스토의 본신에 강체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의식 한편에는 메피스토의 음성이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럼 옆에서 내장 질질 흘리면서 기어 다니고 있는 이놈부터 죽이는 거야?
“내가 알아서 한다.”
-남의 몸을 당당히 빌린 주제에 그 태도는 뭐람.
화르륵-!
주인을 따라 함께 몸집을 키운 업화대검이 사납게 불길을 쏟아냈다.
마신 메피스토의 몸이 여섯 개의 손 중 하나로 불의 칼을 억세게 쥐었다.
대성이 아까부터 말라붙은 식물처럼 천천히 죽어가는 헤카톤케일을 향해 말했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마.”
수직으로 세워진 칼이 당장이라도 헤카톤케일의 목덜미를 꿰뚫을 수 있도록 높이 올라갔다.
파프니르는 팔짱만 낀 채, 그 광경을 코웃음 치며 방관하였다.
그의 시선에 비친 헤카톤케일은 더는 ‘숙적’ 같은 게 아니었다.
그저 인간 하나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한심한 패배자에 불과할 뿐.
하지만 사가라는 파프니르와 달리 격한 반응을 보였다.
[아, 안 돼! 죽이지 마! 그놈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이겠다고……!]
하지만 다급한 외침이 무색하게.
푸-욱!
그대로 아래로 떨어진 불의 칼날이 헤카톤케일의 정수리를 관통했다.
[‘혼돈의 거신 헤카톤케일’을 처치하였습니다!]
[‘생명 포식자’에게 먹일 정순한 생명석 하나를 획득하셨습니다!]
숨이 멎은 헤카톤케일의 육신이 흩날리는 먼지가 되어 소멸하였다.
그 광경을 마주한 사가라가 순간 허무한 표정을 짓더니, 곧이어 서슬 퍼런 살기를 뿜어내며 격분하였다.
[그놈은 내가 죽일 놈이었단 말이다-!]
사가라의 일갈이 울려 퍼진 순간.
콰아아-!
물의 거인으로 영체화 한 그녀의 머리에 달린 수룡들이 일제히 눈보라 같은 숨결을 방출했다.
한 발, 한 발이 섬멸룡의 광살포와 비견되는 파멸의 광선이 무려 수백 개씩 중첩되어 날아왔다.
저것이 지상에 작렬하면 십중팔구 지구는 통째로 멸망하리라.
“그렇게 놔둘 순 없지.”
지독히도 시린 해일의 폭풍우가 저편에서 밀려오던 가운데.
메피스토의 몸을 빌린 대성이 마신의 권능 하나를 발동했다.
화르륵-!
끔찍한 불길이 여섯 개의 팔을 타고 끓어올라 메피스토의 휘어진 뿔로 한데 모여들었다.
[‘지옥 마신 메피스토’가 스킬, ‘영역 선포’를 발동합니다!]
[10분간 메피스토의 심상 세계가 담긴 고유 결계를 전개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의 등장과 함께.
메피스토의 뿔로 응집된 불덩어리가 광채와 함께 폭사했다.
세상에 잠시 빛이 내려앉았다.
수호막 속에서 지배자들의 싸움을 아연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이 눈을 질끈 감으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뒤이어.
용기를 내어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한 사람들은 곧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
누군가의 그 중얼거림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한마디였다.
수호막 밖에는.
겉면이 용암으로 너울거리는 불의 구체가 하늘에 떠올라 있었다.
마치 세상에 두 개의 태양이 공존하는 것처럼.
그와 동시에, 자연재해같이 세상을 휩쓸던 지배자들과 대성의 모습 또한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
“키에에엑-!”
“카아아악-!”
휘몰아치는 붉은 벼락이 창공을 빽빽이 메운 드래곤들 위로 내리쳤다.
그대로 동체 전체가 불탄 드래곤들이 단말마를 지르며 추락하였다.
전기장판에 들어온 모기처럼 한없이 초라하고 나약하게 죽어가는 병사들의 최후를, 파프니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심상 세계의 기운이 나약한 것들의 존재를 지워내고 있다.’
마치 주제넘게 함부로 발을 들이지 말라고 화내는 것처럼.
여기는 말이 심상 세계일 뿐이지, 사실상 의지를 지니고 살아 움직이는 ‘생명’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자아를 가진 세계라니!’
대체 얼마나 강대한 힘을 지녀야만 이토록 허무맹랑하리만치 위험한 심상 세계를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처음엔 호승심에 불탔던 파프니르도 지금만큼은 메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 펼쳐진 심상 세계에 압도된 건 사가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부유 공장’을 이끌고 온 기계의 신은 달랐다.
태생적으로 감정이란 것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그는, 다른 지배자들과는 달리 너무나 침착했다.
《필멸자가 그린 허상에 당황할 만큼 기계가 어리석은 존재 같나?》
“…….”
《물리적인 간섭이 가능한 허상이라…… 흥미로운 연구감이지만 지금은 일단 파괴하는 게 급선무겠지.》
바로 그때.
섬의 형태를 한 부유 공장이 변이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촤르륵-!
둥그렇게 생긴 동체가 서서히 길쭉해지더니, 급기야 두꺼운 거검(巨劍)과도 같은 외관으로 변하였다.
《잘라내 주마. 네놈의 허상을.》
심상 세계의 창공에 고정되었던 거검이 아래로 낙하하였다.
말 그대로 차원 하나를 통째로 때려 박는 악몽 같은 폭격!
심상 세계의 종말을 가져다줄 기계 신의 쇄도 앞에서, 메피스토의 몸을 빌린 대성은 조용히 여섯 개의 팔을 들었다.
그러자 파프니르가 흠칫 놀랐다.
[저놈, 설마 맨손으로 저걸 막아낼 작정인가……?!]
그러한 파프니르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는 듯.
투콰-앙!
추락하는 거검과 메피스토의 여섯 팔이 그대로 격돌했다.
상식에서 벗어난 미친 짓이다.
차원의 짓누름을 맨몸뚱이 하나로 막아내려 하다니!
그러나 파프니르와 사가라는 곧장 자신들의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걸 버텨……?]
거검이 된 부유 공장이 아무리 찍어 눌러도, 메피스토의 육신은 굴복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꼿꼿하게 두 다리를 펴, 팔을 곧게 내뻗어 밀어내고 있었다.
콰드득-!
무시무시한 중량을 감당하지 못한 지표면이 움푹 파이며 깊숙한 크레이터를 만들어냈다.
《어, 어떻게……?》
기계의 신이 당혹감에 찬 목소리로 말을 더듬거렸다.
처음이었다.
기계로 태어난 자신이, 그토록 하찮게 여겼던 필멸자처럼 감정에 좌우되어 허둥대는 건.
《이, 이건…… 이런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확률상 절대로 실현될 리가 없는-.》
“아까 분명 너희가 패배할 확률이 0.01%라고 했었지.”
콰직-!
거검을 붙잡은 메피스토의 여섯 손에서 날카로운 손톱이 돌출되었다.
메피스토의 입가가 섬뜩하게 일그러졌다.
“0%가 아닌 게 누구 때문일까?”
《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죽음의 공포를 기계의 신이 받아들인 찰나.
대성은 심상 세계의 힘을 받아 더욱 강력해진 마력을 여섯 손에 응축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쩌저적-.
콰아-앙!
파괴적인 마력의 향연을 버텨내지 못한 기계의 신이, 거검이 된 부유 공장과 함께 산산이 자멸하였다.
[‘기계의 신, 구세대호’를 처치하셨습니다!]
[‘생명 포식자’에게 먹일 정순한 생명석 하나를 획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