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67화 (167/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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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만 보면 별 상처는 없어 보이는데……. 몸에 묻은 피도 이분한테서 나온 건 아닌 것 같고.”

“그런데 이렇게 죽은 듯이 잘 리가 없잖아. 몸에 무슨 이상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

모든 싸움이 끝난 뒤.

대성의 곁에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이 그리 수군거렸다.

인류를 대신하여 분투를 벌여준 구세주에게 감격을 느끼는 것도 잠시.

사람들은 하나같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진 대성의 후속 조치 때문이었다.

“오러가 겉도네요. 따로 조치가 필요할 만큼 다치신 건 아닌 듯해요.”

치유의 오러를 펼칠 수 있는 한 여성 사냥꾼이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딱히 대성을 병원으로 데려갈 필요도 없다는 말.

“그냥 주무시고 계신다는 거군. 아니, 이런 소음 속에서도 눈을 안 뜨신다는 건 그냥 기절했다고 보면 되겠지.”

상황을 지켜보던 헨리 글로버가 새하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다행히 근방에는 헨리 글러버가 단장으로 있는 클랜, <밀레니엄>의 뉴욕 지부 건물이 있다.

“일단은 이분을 그곳에 데려가-.”

헨리의 말이 이어지던 그때였다.

화르륵-!

“……!”

돌연 대성의 오른쪽 손등에 새겨진 문신에서 검은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놀란 사람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맹렬한 열기를 뿜으며 타오른 불길은 곧 사람의 형상으로 맺혔다.

“휴, 겨우 나왔네.”

불꽃이 만들어낸 괴한의 입에서 냉기 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성의 손등에 새겨진 문신에서 튀어나온 건 로브를 걸친 남자였다.

그가 머리칼을 긁적이며 중얼댔다.

“멋대로 소환계 뚫은 걸 군주께서 아시면 노하시려나…….”

“누, 누구십니까.”

헨리가 경계하며 물었다.

괴한은 뒤늦게 주변에 보는 눈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곤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아, 너무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군주님의 충복…… 아니지. 음, 그래. 소환수라고 보시면 됩니다.”

“구, 군주님이라면…… 여기 계신 한대성 사냥꾼님?”

“달리 누가 있을까요.”

괴한, 아크 리치 멜카논이 사람들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최대한 상냥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멜카논은 곤히 잠든 대성을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군주님께서는 그 어느 때보다 요양이 필요하십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그래서 저분을 우리 측 클랜 본부로-.”

“그 클랜 본부라는 곳에 데려가신 다음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아니 뭐…… 어떻게 한다기보다는 그냥 푹 주무실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드릴 생각이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헨리가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니.

마치 이거 말고 더 좋은 수가 있다는 듯한 뉘앙스 아닌가?

그리고 다음에 이어진 멜카논의 말은 헨리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제가 더 좋은 요양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이분은 제가 맡도록 하죠.”

“더 좋은 요양 장소라니……. 그게 어디요?”

“굳이 그걸 제가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까?”

“…….”

“그리고 말해봤자 당신들은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다소 냉담한 어조로 쏘아붙인 멜카논은 조심스레 대성을 어깨에 둘러메었다.

기분이 상할 법도 하건만, 헨리는 그 이상 뭐라 덧붙이지 않았다.

이건 자신들의 손을 떠난 문제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딘가 웃는 얼굴로 하대하는 듯한 멜카논의 태도에 별다른 분노를 느끼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아쉬울 뿐.

‘우린 항상 받기만 하는군.’

멀어지는 멜카논과 대성의 뒷모습을 보는 헨리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래, 인류는 항상 저 남자에게 받기만 했다. 특히 2차 대격변이 벌어진 이후론 더더욱.

우리는 저 남자가 안락하게 숙면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는 일조차 못 해준단 말인가?

괜히 죄스러움을 느낀 헨리가 주먹을 부르르 떨던 찰나.

“아, 그래.”

멈칫.

걸음을 옮기던 멜카논이 돌연 멈춰 서더니 헨리를 돌아보았다.

“저와 같은 소환수들은 군주님과 여러모로 많은 부분에서 연결되어 있죠. 그래서 그분의 감정도 어느 정도는 저희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렴풋한 수준이지만요.”

“……?”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헨리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멜카논을 응시했다.

“그래서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평소에 군주님이 당신들 같은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는지.”

“…….”

“다만 묘하게 솔직하지 못하신 분이라 표현을 잘 안 하실 뿐이죠.”

두근, 두근.

멜카논의 말을 들은 헨리의 가슴이 뛰었다.

헨리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다른 이들 또한 침을 꼴깍 삼켰다.

이렇게 긴장할 일이 아니란 걸 마음 한편으론 알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적표를 받기 직전의 학생처럼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헨리는 저도 모르게 작아진 목소리로 나직이 물었다.

“저분께서는 평소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오?”

멜카논이 맹금 같은 눈으로 헨리의 표정을 은밀히 살폈다.

그렇군.

저들은 이런 사소한 평가 하나하나에 마음을 졸일 정도로 군주를 존경하고 있는가.

그분께서 이토록 고생하신 보람이 아예 없지는 않나 보다.

“만약 당신들을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여기셨다면.”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멜카논은 대답했다.

“군주께선 애초에 피를 뒤집어쓰면서까지 싸우지도 않았을 겁니다.”

***

“아저씨! 안 추우세요? 내려와서 같이 식사나 해요!”

검은 철성.

그 꼭대기에 앉아 하염없이 먼 곳을 주시하던 발라르크의 귀에 문득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보니, 지수가 손을 흔들며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발라르크는 지수가 잘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에 마력을 실었다.

묵직한 음성이 확성기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널리 울려 퍼졌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작게 말씀하셔도 다 들리니 고함 지르실 필요 없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그렇다고 진작 말하지, 목청 터질 뻔했네. 아무튼, 그러지 말고 내려와요. 배 안 고프세요? 나 아저씨가 뭐 먹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저는 일개 소환수라 공복을 느끼지 않습니다.”

“아, 하여튼 오빠 부하 아니랄까 봐 되게 무게 잡네. 닮아도 좀 좋은 상사를 닮으세요, 아저씨.”

“주군 정도면 좋으신 분인데…….”

존경하는 분의 여동생이라 계속 말대꾸를 하기도 뭣했다.

괜히 난처해진 발라르크가 투구를 긁적이던 와중 지수가 말했다.

“배는 안 고파도 맛은 느낄 수 있을 거 아니에요? 평소에 저희 때문에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아 뭐라도 보답해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내려와서 잠깐 식사나 해요.”

“…….”

발라르크는 고개를 돌려 철성의 앞마당을 바라보았다.

너른 평지 위로 하얀 갑옷을 입은 마수들이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서 진을 치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 대성이 적룡의 뼈와 와이번의 시체를 제물로 바쳐 만든 용아병 군단이었다.

‘주군께서는 목숨을 다하여 이곳과 가족분들을 지키라고 내게 명하셨지만…….’

벌써 며칠째 가만히 서서 한 발짝도 떼지 않는 용아병들의 기세는 실로 발라르크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역시 섬멸룡의 둥지라 그런지 함부로 이곳을 넘보는 놈들이 없군.’

무려 용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섬멸룡의 입김이 서린 요새다.

그 대단한 드래곤들조차 발을 들이길 꺼리건만, 다른 하위의 종족들은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

대성이 있는 곳을 제외한다면, 아마 이곳은 지금 지구상에서 제일 안전한 장소일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아주 잠깐이라면, 저분 응석을 받아주는 것도 괜찮겠지.’

주군의 여동생분께서 굉장히 고집이 세다는 사실을, 발라르크는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상태였다.

한 번쯤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결심을 마친 발라르크가 꼭대기에서 내려가려던 참이었다.

“……!”

발라르크는 자세를 일으키려다 말고 잠시 굳었다.

지금 분명, 똑똑히 느껴졌으니까.

둥지에 발을 들인 자의 기척이.

‘침입자……!’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발라르크의 시선이 재빠르게 정면을 향했다.

저 멀리서.

한 남자가 둥지의 경계선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망원경으로 보지 않으면 제대로 눈에 담을 수도 없을 만큼 먼 거리였으나, 초인적인 시력을 가진 발라르크는 또렷하게 남자의 행색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얀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외관상으론 평범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물론 전신에서 흘러넘치는 기백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았지만.

‘인간이라고?’

남자는 이종족이 아닌 틀림없는 인간이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발라르크를 놀라게 했다.

한낱 인간의 몸으로 저토록 당당히 용의 둥지에 들어온단 말인가?

‘불길하다.’

좋지 않은 징조라 생각한 발라르크가 둥지의 경계선을 지키고 선 용아병들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저 남자를 막아라.’

척-!

발라르크의 지휘에 따라, 용아병 무리가 남자의 앞을 막아섰다.

경계선을 대놓고 넘으려던 남자의 발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뭐야.”

입구에서 가로막힌 남자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용아병을 노려봤다.

이창식.

그의 이마에 혈관이 돋았다.

“난 너희한테 볼 일이 없어. 썩 비키는 게 서로한테 이로울 거야.”

당연히 그 말을 듣고 용아병이 비켜설 리는 없었다.

반대로 그들은 손에 그러쥔 장병기를 위협적으로 들이밀었다.

적의를 내뿜는 용아병으로부터 문득 어떤 분위기를 눈치챈 이창식이 씩 웃었다.

“네놈들도 드래곤이냐? 어째 좀 비슷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

“……아무래도.”

일체 대꾸도 없는 용아병의 반응이, 이창식은 몹시나 거슬렸다.

그는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사람 말귀를 못 알아먹는 부류인가 보군.”

번쩍-!

세찬 빛이 점멸함과 동시에, 그의 손아귀에 기다란 황금의 창 한 자루가 나타났다.

궁니르였다.

“……!”

무기를 본 용아병들이 매섭게 달려들었다.

이창식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창을 가로로 휘둘렀다.

콰콰콰콰콱-!

무시무시한 맹풍이 창날에서 방출되어 용아병들을 일거에 휩쓸었다.

사지가 끔찍하게 잘려나가 선혈을 흩뿌리는 용아병들 사이로,

이창식이 실소했다.

“내가 또 드래곤 하면 기가 막히게 때려잡거든.”

순간.

발라르크는 두 눈을 의심했다.

‘인간이 용아병을?’

그것도 그냥 용아병이 아닌, 둥지의 가호를 받은 용아병이다.

한 마리, 한 마리의 저력이 지구상의 S급 사냥꾼이 지닌 전투력과 비견될 정도란 말이다.

그런데, 그런 용아병들을 일격에 격퇴하다니!

‘인간의 규격에 속하는 놈이 아니다. 저 창도 그렇고, 분명 모종의 존재가 뒤에서 지원하고 있어.’

어찌 됐든 용아병들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는 적이란 건 자명한 상황.

이창식은 순식간에 용아병의 포진을 뚫고 철성까지 쇄도하고 있었다.

발라르크는 철성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며 뇌창을 꺼내 들었다.

한편, 이창식의 등장을 본 지수가 안색을 파리하게 물들였다.

“아, 아저씨……!”

“들어가 계십시오. 제가 해치울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길.”

발라르크가 용맹하게 지수의 앞을 막아섰다.

지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급히 철성 안으로 들어갔다.

“센티넬.”

쿵-!

발라르크의 부름에 반응한 센티넬이 미늘창을 굳세게 움켜쥐며 육중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우리 둘이서 저놈을 막는다.”

발라르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남자는, 자신 혼자만으로는 상대하기 버겁다는 사실을.

바로 그때, 앞을 막아섰던 용아병을 전부 격멸한 이창식이 발라르크와 대치했다.

발라르크가 험악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건 아니겠지.”

“뭐래. 살아서 돌아갈 거야.”

“무슨 용건이냐.”

“한대성 집 주소가 이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놈 지금 여기 있어, 없어?”

“네놈은 몰라도 된다.”

발라르크와 센티넬이 동시에 거친 진각을 밟았다.

두 자루의 창이 이창식을 향해 난폭하게 짓쳐 들었다.

***

벽도, 천장도, 바닥도 없는 새하얀 미지의 공간이었다.

다름 아닌 멜카논이 직접 전개한 고유 결계 내부였다.

‘안식의 세계.’

목숨만 붙어 있다면, 그저 주둔하는 것만으로도 그 어떤 치명적인 중상도 빠르게 치유되는 공간.

고갈된 마력도 여기라면 외부 세계보다 훨씬 빠르게 충당될 것이다.

‘너무 무리하셨군.’

기절한 대성의 손목을 붙잡아 맥(脈)을 살피던 멜카논은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력을 가동하는 특정 회로에 아무런 기류도 감돌지 않았다.

대성이 그야말로 바닥까지 마력을 긁어모아 메피스토를 구현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안식의 세계 내부라고는 해도, 마력이 일정 수준 차오르려면 적어도 사흘은 가만히 있으셔야겠는걸.’

반대로 생각하면.

메피스토와 같은 한 차원의 지배자를 소환하는 대가가 고작해야 이 정도라는 거다.

새삼 군주께서 지니신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릇에 멜카논이 눈을 감으며 경탄하던 와중.

턱-.

“군주시여?”

손목이 붙잡히는 감각이 스쳤다.

다시 눈을 뜬 멜카논이 대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기절에서 깨어난 대성이 멜카논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저, 정신이 좀 드십니까?”

“여긴 어디냐.”

“아, 예. 여기는 안식의-.”

“당장 날 밖으로 내보내.”

“예? ……어어!”

그때,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키는 대성을 보고 멜카논이 깜짝 놀랐다.

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군주의 반응이 그저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구, 군주시여.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간청하려던 멜카논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섬찟.

목이 바싹 말라오고, 전신의 피부가 칼바람에 찢기는 듯이 따가웠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어떤 행동을 취하려고 했는지.

멜카논은 모조리 잊어버렸다.

단지 압도당할 뿐이다.

이쪽을 향해선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 군주의 뒷모습과 마주한 채.

그 끝을 알 수 없는 폭발적인 살기에 짓눌렸다.

한때 대현자라고 불리었던 멜카논은 지금 이 순간, 입도 뻥긋 못하는 벙어리가 되고야 말았다.

군주께서 말씀하셨다.

“웬 개새끼가 내 가족에게 접근한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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