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169
“너 혹시 심장이 똥구멍에 있냐?”
이창식이 가쁘게 호흡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궁니르의 창날은 본래의 황금빛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핏물로 흠뻑 적셔진 상태였다.
콱. 궁니르를 바닥에 쑤셔 박은 뒤 지팡이 삼아 기댄 이창식은 이마에 흐르는 비지땀을 슬쩍 닦으며 물었다.
“대체 왜 안 뒈지냐고.”
온몸이 난도질당한 채 쓰러진 발라르크를 향해서 말이다.
유령마는 진즉에 목숨이 끊어져 잔불로 돌아갔다.
승리는 이미 이창식의 손아귀에 들어왔음이 분명한 상황.
그러나 싸움을 끝낼 결정적인 한 방을 넣지 못하고 있었다.
“초주검 되기 일보 직전인 걸 보니 내가 그 라이프 뭐시긴가 하는 걸 건드리긴 건드렸나 본데…….”
-아예 흔적도 남지 않도록 확실하게 라이프베슬을 없애버려야 한다. 내가 보기엔 방금 했던 연속 찌르기를 한 번만 더 하면 끝날 것 같군.
“자기가 싸우는 거 아니라고 쉽게 말하네. 네가 준 창 더럽게 무거운 거 알긴 아냐?”
아르마간의 충고를 들은 이창식이 눈썹을 비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장난기 넘치던 이창식의 눈에, 순간 형형한 빛이 일렁였다.
야수처럼 눈을 빛낸 그는 바닥에 꽂은 창을 들어 발라르크를 향해 겨누었다.
“틀린 말은 아니네. 어차피 꼼짝도 못 하겠다, 이대로 정수리부터 시작해 새끼발가락까지 천천히 하나씩 찔러주면 언젠간 뒈지겠지.”
축축한 피로 젖은 발라르크의 손이 힘겹게 꿈틀거렸다.
어떻게든 발버둥을 치고 싶었으나, 제대로 된 거동조차 불가능할 만큼 근육이 파괴되었다.
끝이구나.
단지 그 한마디만을 흐릿하게 떠올리는 발라르크의 눈앞으로 궁니르의 창날이 매섭게 떨어졌다.
끝없는 암흑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곳은, 발라르크가 알고 있던 무(無)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렇게 온전한 의식을 지니고 있을 리도 없을 테니까.
따뜻하다.
익숙하지만 항상 그리웠던 온기다.
아아.
양수에 잠긴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채, 어둠 속 세계를 떠다니던 발라르크는 문득 깨달았다.
여기는 군주의 품이란 것을.
***
캉-!
“……응?”
발라르크의 피륙에 찔러넣었어야 할 창날이 엉뚱한 지면을 꿰뚫었다.
돌연 발라르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창식은 의문을 느꼈다.
아니, 느끼려던 찰나였다.
-피해라!
아마 목청에서 피가 터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아르마간의 외침보다도 먼저.
퍽-!
“거흑……?!”
벼락같은 기세로 날아든 주먹 한 방이 이창식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후려쳤다.
사도의 가호를 받았기에 두부 외상으로 그쳤으나, 느껴지는 고통은 머리통이 깨지는 수준과 비슷했다.
일격을 맞은 이창식이 지면에 코를 처박은 채 10m를 주르륵 날아갔다.
직후, 그는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갑자기…….”
-그놈이다.
“뭐?”
뇌가 흔들리고 정신이 흐려지는 탓에 시야 확보가 잘되지 않았다.
초점 기능이 망가진 카메라처럼 눈앞의 모든 것이 뿌옇게 보였다.
그런 와중에 들려오는 아르마간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놈이 누구-.”
머리를 털어낸 끝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이창식의 지척에선 둥지로 돌아온 대성이 힘차게 날아들어 주먹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창식은 미처 그걸 피하지 못했다.
쾅-!
“……!!”
턱뼈가 부러지고 몸이 꺾여서 신음조차 내뱉지 못했다.
방금과 같이 한 번 더 지면에 얼굴을 처박으려고 이창식의 몸이 기울어지던 순간.
턱-.
대성은 주먹을 휘두르지 않은 왼손을 뻗어 그의 반소매 티셔츠의 멱살 부위를 움켜잡았다.
그제야 이창식은 자신의 맞은편에 선 남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한대성?”
“아가리 닥쳐.”
어김없이 일격이 날아왔다.
관자놀이에 타격이 들어간 즉시 이창식의 두개골이 금이 갔다.
“어억!”
쉬지 않고 머리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쿵-!
신다 버린 헌신짝처럼 바닥에 쓰러진 이창식이 궁니르를 놓쳤다.
당연히 대성은 같은 사냥꾼이었던 이창식을 알고 있다. 심지어 그의 능력이 염동력이란 것도.
그런 그가 뜬금없이 창을 쓴다는 건, 천상에 있는 놈들의 후원을 받았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을 터.
대성은 바닥에 널브러진 궁니르를 집어 저 멀리 던져버렸다.
그리고 다시 이창식의 멱살을 잡아 일으킨 뒤, 팔다리를 동원해 얼굴과 복부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퍽-! 퍽-! 퍽-!
“커흑! 컥! 커헉……!”
“뒈질 때까지 처맞아라.”
살점이 찢어지고 핏물이 퍽퍽 터져 나와 대성의 얼굴에 튀었다.
올라간 무릎이 코를 찍고 망치처럼 내려친 주먹이 눈두덩을 박살 낸다.
오직 한 생각만이 이창식의 뇌리에 선명하게 들러붙는다.
계속 처맞다간 진짜 죽겠다고.
-정신 차려라, 이창식! 제발 정신을……!
“으아아악……!!”
동아줄을 잡으려는 것처럼 이창식이 팔을 앞으로 뻗었다.
쐐애액-!
그러자 방금 대성이 내던졌던 궁니르가 도로 이창식을 향해 날아왔다.
“개수작.”
캉-!
돌아온 궁니르가 이창식의 손아귀에 잡히기 직전, 이미 예상하였던 대성이 날파리 쫓아내듯 손바닥으로 궁니르를 후려쳐서 저 멀리 날려 보냈다.
“이런 시X……?”
이창식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콰아아앙!
곧 매끄러운 일직선을 그리며 날아든 스트레이트 펀치가 그의 안면에 작렬했다.
만약 천상의 가호를 받지 않았더라면 이창식의 이목구비는 뒤통수까지 함몰되었으리라.
더불어, 그가 이토록 구타를 당했음에도 살아있을 수 있는 건 대성에게 아직 마력이 없는 탓도 있었다.
-일단 거리를 두어라! 놈에게 가까이 다가가선 안 돼!
“우웨에엑-!”
피 가래 섞인 토사물을 쏟아내는 이창식의 머릿속에 아르마간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저벅, 저벅.
뇌가 칼날에 갈가리 찢기는 것만 같은 순간에도 대성의 발소리는 너무나 또렷하게 들려왔다.
-네게 신력을 불어넣었다! 빨리!
펄럭-!
이창식의 등 뒤로 황금의 날개가 찬란하게 돋아났다.
그가 손바닥으로 지면을 밀어내며 높이 날아오름과 동시에.
쾅-!
대성이 진각을 밟아, 지금 막 비상(飛上)하여 공중에 뜬 이창식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이, 이 새끼가! 이거 놔!”
이창식이 붙잡히지 않은 오른발로 대성의 머리를 콱콱 가격했다.
우드득!
“끄아아악-!!”
대성이 서슴없이 손에 힘을 주자, 발목이 엉망진창 부러진 이창식이 비명을 질렀다.
무시무시한 압력이 가해져 무릎뼈까지 박살이 난 이창식의 신형이 허공에서 살짝 기운다.
대성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놈의 옷깃을 붙잡은 뒤, 그대로 땅까지 끌어내렸다.
쿵-!
곤죽이 된 이창식의 이마가 지표면과 세차게 충돌했다.
대성은 슬며시 쪼그려 앉은 다음, 이창식의 뒤통수를 잡아챘다.
그리고 쉬지 않고 놈의 얼굴을 바닥에 내리쳤다.
쾅-! 쾅-! 쾅-! 쾅-! 쾅-!
“…….”
이창식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쯤 되니 자신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학대당하기 위해 태어난 인형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왜 나는 여기에 있는 걸까?
나는 어쩌다 이 괴물한테 덤벼서 이 꼴이 난 걸까?
뭐를 위해서?
-소원을 들어주마.
그래, 그랬지.
궁니르를 처음 얻었던 날.
머릿속 사도는 그렇게 제안해왔다.
-궁니르가 싫다면, 네가 원하는 소원을 딱 한 가지 들어주마. 그러면 만족하겠나?
이창식이 대성을 죽여달라는 아르마간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사실 그도 대가 없는 정의를 추구하는 대성의 행적을 마음속 깊이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언젠간 기회가 된다면 만나서 술이라도 한잔하자고 해볼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그런데 대성을 죽이면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에 혹하고 말았다.
확실히, 드래곤도 쉽게 죽일 수 있는 강한 창을 선물할 정도의 녀석이면 인간의 소원을 하나쯤 들어주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겠지.
달콤한 제안 앞에선 인정이고 뭐고 없었다.
용의 시체 더미에 걸터앉아, 사도의 속삭임을 듣는 이창식의 머릿속에 여러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은 없는, 지금은 볼 수 없는 그런 얼굴들.
전부 1차 대격변 이후 몬스터에게 스러져 간 존재들이었다.
그들을 볼 수만 있다면, 기꺼이 하늘의 노예가 되어주겠다.
구세주를 죽여주마.
쾅-! 쾅-! 쾅-!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죽음을 각오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죽음이 가시화되니 결연한 각오란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 ……!!
아르마간이 뭐라 외쳤다. 들리지 않았다. 그냥 귀울림 같았다.
살점이 찢어지고 머리통이 깨지면서 뇌수와 섞인 핏물이 흘러내렸다.
이제는 아픈 것조차 못 느끼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미안하다고 하면 용서해줄까.’
아니.
인정을 베풀 성인군자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대성은 이미 이창식을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밟아 죽여야 할 해충(害蟲)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살아야 해.’
죽음보다 더 지독한 고통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니, 이제는 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창식의 손이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던 대성의 손에 제동이 걸렸다.
쿠구구-!
생명을 쥐어 짜내어 방출한 염동의 오러가 지표면을 긁어냈다.
깎여 나간 땅의 조각들이 대성의 전신에 들러붙어 족쇄처럼 그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헉……! 헉……!”
대성이 묶인 틈을 타서, 이창식이 다시 궁니르를 불렀다.
그러나 궁니르는 이번에도 오롯이 그의 손아귀로 돌아올 수 없었다.
-저번의 그놈…….
망연자실한 아르마간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뇌리에 맴돈다.
이창식은 저 멀리, 허공에 붙들려서 부들부들 떨리는 궁니르를 누가 쥐고 있는지 보았다.
“아름다운 창이군요.”
아크 리치 멜카논.
그가 주인의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궁니르를 흥미롭게 어루만졌다.
“미개한 것의 손때가 좀 묻어있긴 하지만요. 마음이 아프네요.”
대성 말고도 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이창식이 가진 남은 희망의 실마저 잘라냈다.
쾅-!
그때 대성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족쇄들이 모조리 으깨졌다.
대성이 직접 푼 건지, 멜카논이 무슨 주술을 부린 건지는 알 수 없다.
아니면 무기력해진 이창식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 염동력을 해제한 것일 수도 있고.
“끝내자.”
사형 선고가 떨어졌다. 대성이 훤히 드러난 상체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이창식에게 다가갔다.
피에 절은 이창식의 몸이 쓰러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받으십시오.”
멜카논이 경건한 몸짓으로 궁니르를 대성에게 건넸다.
어딘가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아르마간이 펄쩍 뛰었다.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궁니르를 놈의 손에 쥐여주게 해서는……!
“너를 죽이면 최초의 사도라는 놈이 내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어.”
머릿속 목소리는 가볍게 묻어버린 이창식이 힘겹게 말문을 뗐다.
“사랑하는 내 가족……. 사랑하는 내 연인……. 그들이 내 곁에 다시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어쩔 수가 없었어.”
“…….”
“너도 내 마음을-.”
콱!
그때, 대성이 뭐라 중얼거리는 이창식의 복부를 거칠게 밟았다.
거친 숨결이 폐부에서 터져 나온 이창식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스릉-.
궁니르의 창날이 이창식의 미간에 닿았다.
“몰라, 개새끼야.”
“……!”
“넌 내 소환수를 건드리고 가족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게 했다.”
이창식이 몸부림쳤다.
대성의 손목에 힘이 실렸다.
콰직.
궁니르가 이창식의 이마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근데 누구 앞에서 신파 찍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