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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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는 제가 치울 테니 군주님께서는 쉬고 계시죠.”
“부탁하지.”
멜카논이 머리가 꿰뚫려 죽은 이창식의 시체를 들어올리려던 그때.
비틀!
철성 입구로 걸음을 옮기던 대성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걸 본 멜카논이 서둘러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
“너무 무리하셨습니다. 마력이 바닥났으니 무조건 절대 안정을 취하셨어야 했습니다.”
“마력이 없으면 나는 움직이지도 못하나?”
어쩐지 퉁명스레 들리는 어조에 멜카논은 입을 꾹 다물었다.
대성은 얌전히 멜카논의 부축을 받으며 미간을 꾹꾹 주물렀다.
“마력에 의존하고 싶지 않다. 심장이 뛰고 두 손 두 발만 멀쩡하면 돼. 나는 원래 그랬으니.”
그런 게 바로 ‘인간’이니.
마력이니 뭐니, 그런 비과학적인 힘이 없으면 무기력해지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보라는 듯이 오기를 부리고 싶었다.
자신은 ‘마력’이 아닌 ‘심장’으로 움직이는 평범한 인간이란 사실로부터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멜카논이 만든 ‘안식의 세계’에서 대성은 목소리를 들었다.
꿈결 속에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그 목소리 덕에, 그는 이창식의 침습을 깨달을 수 있었다.
“…….”
멜카논의 어깨에 팔 한 짝을 두른 채 비틀비틀 걸어가며, 대성은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끔찍하게 훼손되어 죽어있는 용아병들의 시체.
그들에게 이창식이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 또 얼마나 아찔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체크포인트 기능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대성이 마저 발걸음을 옮기던 가운데.
슥-.
저만치 떨어진 궁니르가 조금씩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물론 주인인 이창식이 죽은 지금, 궁니르에겐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기능 같은 건 없다.
‘궁니르가 놈의 손에 들어가면 그때는 정말 끝장이다.’
아르마간.
그의 의념(意念)이 실린 계약의 정령이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궁니르를 옮기고 있었다.
창을 회수하여, 이대로 지구를 벗어나 천상까지 이동할 작정이었다.
‘궁니르조차 저놈을 죽일 수 없다면 대체……. 아니면 휘두른 놈의 그릇이 시원찮았던 건가? 하나, 정보에 따르면 놈은 하얀 악마 다음으로 인간계에서 손꼽히는 실력자라고-.’
아르마간의 사고는 거기서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콱-!
계약의 정령이 화살촉처럼 생긴 빛에 관통당해 지상으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웬 모기 한 마리가 군주님의 전리품을 가져가는군요.”
빛의 화살을 맞은 정령이 그만 손에서 궁니르를 떨어뜨렸다.
황금의 창이 지면에 콱, 소리를 내며 거꾸로 박혔다.
기절한 정령의 얼굴을 살피던 멜카논이 나지막이 감탄을 터뜨렸다.
“저번에 보았던 계약의 정령들과는 급이 다르군요. 한낱 정령 주제에 성유물에 손을 댈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신력을 지녔습니다.”
“얼굴을 보니 그때 그놈이군.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자기가 최초의 사도라고 했다.”
“정령은 본체가 없기에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영술사의 영향을 많이 받죠. 최초의 사도라……. 이 녀석이 다른 사도들이 보냈던 계약의 정령들보다 뛰어난 이유가 여기에 있었군요.”
흰자를 드러낸 채 의식을 잃은 정령을 주시하던 멜카논의 눈길이 이번엔 궁니르로 향했다.
멜카논이 허리를 숙여 창대를 건드린 순간.
파직!
스파크가 튀자 멜카논이 황급히 손을 떼며 인상을 찡그렸다.
“잠깐이라면 모를까, 신력이 없는 자는 오래 다룰 수 없도록 설계된 무구입니다. 아쉽지만 그냥-.”
땅에 묻어버리죠. 멜카논이 제안하려던 참이었다.
대성이 심드렁하게 멜카논의 곁을 지나치더니 그대로 궁니르를 쥐고는 가뿐히 휘둘러 허공에 유려한 선을 그려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방금과 같은 스파크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순간 말문을 잃은 멜카논은 무안한 한편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군주님께선 신력도 지니고 계셨습니까?”
“그럴 만한 계기가 있었지.”
화륵-.
매혹적인 광휘를 빛내는 창대 위로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아이템 정보]
이름 : 궁니르
분류 : 장비
‘북쪽의 고대 신이 사용하였던, 세계를 창조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고 전승되는 성창(聖槍).’
특수 스킬 1 [요격] : 창을 던져 100%의 확률로 표적을 맞힙니다. 던진 창은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손을 뻗어 회수할 수 있습니다.
특수 스킬 2 [억압] : 10m 거리 내에 있는 적을 한 명 지정하여, 서서히 면적이 좁아지는 고유 결계 속에 가둡니다.
특수 스킬 3 [해방] : 다수의 적을 섬멸하는 섬광을 창날에서 방출합니다. 한 번의 방출 뒤엔 1800초의 재사용 대기시간을 가집니다.
인간인 이창식이 단신으로 섬멸룡의 둥지를 함락시키고 발라르크를 쓰러뜨리게 만들었던 무기다.
설령 이창식이 ‘규격 외’인 대성을 빼면 국내 최강의 사냥꾼이라고 해도, 그것은 비정상적인 이변이었다.
종족이 지닌 한계마저 초월하게끔 만들어주는 무기!
‘사도 놈들,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겠지.’
아르마간이 계약의 정령을 통해 창을 회수하려 했다는 것은, 분명 천상에서도 궁니르의 가치가 어마어마하게 높다는 의미일 터.
그런데 그것을 최악의 적에게 뺏겨버렸으니 지금쯤 놈들 사이에선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꾹-.
창대를 쥔 대성의 손에 선명한 힘줄이 돋아났다.
이창식도 이창식이지만, 애당초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건 천상의 사도들이 아니던가.
‘놈들이 만든 무기로 놈들을 죽이는 것도 재밌겠군.’
살심(殺心)에 젖은 대성의 입가가 기이하게 비틀렸다.
***
[‘생명 포식자’가 차원을 지배하는 자의 생명을 섭취 중입니다.]
[포식 완료까지 앞으로 48시간 남았습니다.]
대성은 생명 포식자에게 ‘아틀라스’와 ‘마해’, 그리고 ‘부유공장’의 지배자들의 생명을 먹였다.
나머지 하나, ‘헥카르’의 근원에는 이미 며칠 전부터 입장이 가능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섬멸룡의 둥지가 무너졌으니 새로운 방호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용아병과 센티넬이 죽었고, 발라르크는 전투 불능이 되었다.
즉, 자신이 없는 동안 혜정과 지수의 안전을 보장해줄 만한 수단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마음 편히 갈 길을 떠날 수 있겠는가.
‘무언가 방법이…….’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어마어마한 병력의 사령 병사들을 철성에 배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곧 철회했다.
‘나쁘지 않은 방안이지만 별로 효율적이지는 못하겠군.’
아무리 사령 병사가 많아봤자 용아병 수십 마리보다 못하다.
더군다나 소모되는 마력의 양도 무시할 게 못 된다.
섬멸룡의 둥지와 비교하면 최선의 방안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
그때.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린 대성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는 곧바로 아공간을 열어 청사진 한 장을 꺼냈다.
‘탑 설계도.’
얼마 전 멜카논을 구하기 위해 ‘발아의 탑’을 무너뜨렸을 때 보상으로 얻었던 도면(圖面)이다.
종이 위로는 기하학적인 그림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어서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건 결과물을 도출해내기 위한 하나의 ‘재료’에 불과하니까.
‘만약 이 설계도에 적힌 탑이, 발아의 탑과 유사한 구조라면 곤란하다.’
발아의 탑 내부에는 가상으로 구현한 이계와 괴물이 득실거렸다.
그런 지옥도 같은 장소에 가족을 욱여넣을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괜찮은 안전지대가 될 수도 있지.’
좌우지간 직접 두 눈으로 보기 전에 속단하는 건 이르다.
널찍한 철성의 앞마당으로 향한 대성은 설계도를 펼쳐 들었다.
[‘탑’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오리할콘은 1채당 총 30000개입니다.]
[오리할콘(x30000)을 소모하여 탑(x1)’을 건설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지체 않고 ‘예’를 선택한 순간.
쿠구구-!
지축이 뒤흔들리며 지진이 일어남과 함께, 대성이 선 지점의 땅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지하에서 거대하고 강력한 무언가가 치솟는 듯한 감각.
대성이 갈라지는 지표면으로부터 서둘러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콰아아앙!
원통형의 거탑(巨塔)이 단숨에 지면을 꿰뚫고 천공을 향해 솟구치기 시작했다.
거탑은 끊이지 않고 자라는 나무처럼 상승하고 또 상승하였다.
마침내 거탑의 꼭대기가 하늘의 구름을 뚫고도 몇 분간 지축을 거칠게 뒤흔든 끝에야,
[‘탑’의 시공(施工)을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탑’의 종료가 갱신됩니다.]
일대를 요란스럽게 만들었던 지진이 멈추고 적막이 찾아왔다.
대성은 눈에 담을 수조차 없이 까마득한 곳에 자리한 꼭대기 방향을 올려다보며 팔짱을 끼었다.
그런 그의 시야 위로 시스템 메시지가 드리운다.
[탑 정보]
- 현재 1층부터 100층까지 전부 공백(空白) 상태.
- 오리할콘을 지불하여 층계를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 하실 수 있습니다.
- 파손율: 0%
글귀를 보아하니, 다행히 내부엔 가상의 이계나 괴물이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진 안심할 수 없었던 대성은 게이트와 유사한 형태를 띤 탑의 입구로 발을 들였다.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무채색의 공간이 경계선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광활히 펼쳐졌다.
탑 내부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오리할콘만 있다면 이곳을 내 입맛대로 꾸밀 수 있단 말이지.’
그리고 오리할콘이라면 이미 넉넉하다 못해 차고 넘칠 수준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인 법.
대성이 무얼 필요로 하는지 감지한 시스템이 한 번 더 글귀를 띄웠다.
[오리할콘을 지불하여 다음과 같은 품목을 탑에 설치할 수 있습니다.]
1. 고블린 (1개체당 필요한 오리할콘: 50)
2. 가시밭 함정 (1개체당 필요한 오리할콘: 100)
3. 말단 오우거 (1개체당 필요한 오리할콘: 75)
⦁
⦁
⦁
……외에도 수많은 품목이 적힌 알림창이 쭉 나열되었다.
대부분이 고려할 가치도 없을 만큼 하찮은 것들뿐.
대성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건, 목록의 맨 뒤쪽에 자리한 품목을 확인했을 때부터였다.
300. 상급 거신룡 (1개체당 필요한 오리할콘: 4500)
301. ‘블러드 퀸(Blood queen)의 영지’ (100평당 필요한 오리할콘: 5000)
탑에서 구매할 수 있는 품목 중 가장 많은 오리할콘을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그만큼 질 또한 보장한다는 의미일 터.
대성은 고민하지 않고 막대한 오리할콘을 지급했다.
[‘블러드 퀸의 영지(1000평)’가 1층에 구현됩니다.]
[‘상급 거신룡(x10)’이 1층에 구현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기 무섭게, 무채색이던 공간에 어느덧 근위병이 잔뜩 늘어선 화려한 왕궁이 덧칠되었다.
붉은 융단이 길게 깔리고 그 끄트머리엔 붉은 드레스를 입은 한 여성이 황금 옥좌에 앉아 있었다.
고고한 존재감을 뽐내는 여인의 머리 위로는 [블러드 퀸]이라는 이름표가 떠올라 있었다.
실재(實在)하는 게 아닌, 어디까지나 기신족의 기술력으로 정교하게 구현했을 뿐인 가상의 존재. 그리고 가상의 공간.
그러나 냄새나 촉감, 흐르는 공기와 분위기는 한없이 진짜에 가까웠다.
쿵-! 쿵-!
왕성 외부로 우렁찬 발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유리창 너머를 보니, 너른 영지 위로 열 마리의 거신룡이 멀뚱멀뚱 배회하는 중이었다.
탑의 1층 내부엔 어느덧 하나의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괜찮군.’
열 마리의 거신룡과 블러드 퀸, 그리고 영지를 수호하는 무수한 근위병까지.
이만하면 섬멸룡의 둥지를 대신하기엔 충분하리라.
대성이 만족감을 느끼던 가운데, 시스템이 떠올랐다.
[‘설계자’의 권한을 통해 탑의 ‘명령체계’를 수정하실 수 있습니다.]
[추가로 원하시는 ‘명령체계’를 말씀해주십시오.]
추가로 원하는 명령체계라.
하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탑에 발을 들이는 자 중, 내 가족은 ‘적’으로 인식하면 안 된다.”
탑을 세운 건 어디까지나 가족의 이주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것.
그런데 정작 탑이 혜정과 지수를 침입자로 인식하면 큰 낭패이지 않겠는가.
[‘명령체계’를 인식합니다.]
[‘탑’에서 퇴장하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공간이 울렁이며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이제는 혜정과 지수를 탑 내부로 데려오기만 하면 된다.
대성은 탑을 뒤로하고 철성의 입구로 걸어갔다.
그런데.
저 멀리, 입구 앞에 대기하고 선 멜카논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대성을 발견한 멜카논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제가 군주님께 드릴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