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71화 (171/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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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지 않습니까.”

“내 눈에는 기괴해 보이는데.”

“후후. 그것이 군주님의 솔직한 평가라면야 겸허히 받아들이죠.”

천장도, 벽도, 바닥도 없이 오직 순백으로만 물든 장소.

안식의 세계.

본래 대성과 멜카논 말고는 그 무엇도 발을 들이지 말아야 할 그곳에 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아니, 저것을 과연 ‘조형물’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얼핏 보기엔 전라의 여인을 본뜬 석상인데, 미간엔 살아있는 생물체 한 마리가 꿈틀거리는 중이었다.

대성은 저 괴이한 석상에 박제된 생물체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르마간이 보낸 계약의 정령.’

아까 화신체인 이창식이 죽자마자 도망치려던 걸 멜카논이 바로 살상한 줄 알았건만.

“박제라니, 상당한 악취미로군. 왜 죽이지 않았지?”

“저 정령이 군주님에게 ‘통로’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통로?”

석상에서 시선을 뗀 대성의 눈길이 멜카논으로 향했다.

그런 대성을 마주 보는 멜카논의 얼굴에 섬뜩한 음영이 드리웠다.

“얼마 전, 군주님께서 천상의 사도들에게 경고하셨죠. 오장육부를 입에 쑤셔넣어 주겠다고.”

“…….”

“그 목적을 성취하게 해주는 ‘통로’가 바로 저것입니다.”

“자세히 설명해봐라.”

탑을 세우고 돌아가는 길에 멜카논이 대뜸 좋은 소식을 알려준다고 했을 땐 뭐지 싶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이쯤 진행되니, 어떠한 감이 스친 대성은 귀가 솔깃해지는 걸 느꼈다.

멜카논은 장난감을 부모에게 자랑하는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을 띠며 계약의 정령을 가리켰다.

“이놈은 평범한 계약의 정령이 아닙니다. 무려 사도의 성흔(聖痕)을 받은 정령이죠. 격으로만 따지면 신수(神獸)에 버금갈 정도입니다.”

“간략하게 요약해라.”

“이놈을 모체(母體)로 삼아, 천상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 말이 멜카논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가늘게 좁혀졌던 대성의 눈이 한순간 크게 뜨였다.

군주께서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이미 예상하였던 멜카논 또한 한층 더 짙은 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내일이면 저 석상의 배가 열리고, 길이 개방됩니다.”

“……천상의 사도들은 눈치 못 챘나? 그놈들, 계약의 정령을 통해 이곳 상황을 주시하던 것 같던데.”

“제가 그 머저리들의 눈을 피하지 못할 정도로 미련하진 않습니다.”

차원의 파편을 모으는 것과는 별개로, 대성은 반드시 천상의 사도들을 죽여버리겠노라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천상으로 오를 만한 방법이 마땅치 않아서 속만 부글부글 끓고 있었건만.

‘하긴, 주술의 영역이라면 멜카논은 그 누구보다 능통한 녀석이니.’

대성이 눈을 감은 석상을 고요히 응시하던 가운데, 멜카논이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길이 개방되는 대로 떠나겠다.”

“그럼 오늘은 무조건 안식의 세계에서 휴식을 취하셔야겠군요.”

전쟁을 대비하여.

복수를 대비하여.

멀지 않은 핏빛 미래를 그리며, 대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우와. 여기 되게 크다!”

탑 1층.

가상으로 구현된 블러드 퀸의 고성에 들어온 지수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야말로 중세 시대 궁궐의 모습을 똑 닮은 내부 구조다.

혜정 또한 신기한 모양인지, 고성의 장식물로부터 눈을 떼질 못했다.

‘환경만 놓고 보면 발라르크의 철성보다 훨씬 낫군.’

한편.

정신없이 성을 돌아다니는 혜정과 지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대성 또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발라르크의 철성도 나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살기엔 너무 넓다는 점이 흠일 뿐.

하지만 블러드 퀸의 성은 다르다.

‘영지’ 그 자체를 소환함으로써, 퀸을 따르는 신하와 근위병 또한 부가적으로 구현되었다.

덕분에 철성에 살았을 적보다 훨씬 활기가 넘친달까.

그뿐만이 아니다.

“시장하실 것 같기에 조촐한 식사를 준비해봤습니다.”

잘 꾸며진 식당.

길이가 족히 7m는 될 귀빈용 테이블 위로 온갖 진수성찬이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차려져 있었다.

멋들어진 턱시도를 입은 노신사(老紳士)가 혜정과 지수를 대접했다.

‘식량 문제도 해결됐고.’

발라르크의 철성에 살았을 시절엔 사실상 고립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안전지대에 있긴 하지만, 결국 활동반경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식량이 전부 떨어질 날이 필연적으로 찾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블러드 퀸의 고성 내부엔, 보다시피 음식이 산만큼 쌓여있다.

게다가 중세시대 귀족 부럽지 않도록 세심하게 시중드는 하인들까지.

보안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성의 바깥엔 열 마리의 거신룡이 있고, 안에는 블러드 퀸과 근위병이 상시 대기 중이었다.

드래곤과 타이탄도 사라진 지금, 누가 감히 이 탑에 도전하겠는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탑을 세울 걸 그랬나.’

성대하게 차려진 만찬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혜정과 지수를 바라보며 대성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 밖은 지옥이지만.

여기는 천국이다.

불공평해 보일 수 있겠으나, 대성은 하나뿐인 가족을 지옥으로 내몰고 싶지 않았다.

“소첩은 블러드 퀸, ‘레이첼’이라고 합니다. 부디 당신들의 성이라 생각하시고 편히 지내주시길.”

“어, 어어. 네, 네. 아,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레이첼이 치마폭을 살짝 들어 올리며 고풍스러운 인사를 건네오자 혜정이 얼떨떨한 반응을 보였다.

그 모습이 퍽 재밌었던 지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

이걸로 됐다.

안심하고 다시, 마음 편하게 전장으로 떠날 수 있겠어.

그런 생각을 가슴에 품고 대성이 탑에서 퇴장하려던 그때.

“너도 와서 좀 먹고 가렴.”

“그래, 오빠. 꼴은 무슨 만신창이가 돼선……. 으이구, 배 안 고파?”

이제 막 식기를 들려던 참인 혜정과 지수가 그를 붙들었다.

대성은 발걸음을 멈춰 서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를 뺀 다음 지수와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의외라는 듯 지수가 놀랐다.

“웬일이래? 평소처럼 또 무게 잡으며 갈 길 갈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배가 고파서.”

당분간,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을 것 같으니까.

……라고는 할 수 없었다.

천상과의 전쟁이 끝나면, 대성은 바로 근원의 길로 떠날 작정이었다.

가족과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인 셈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

그 여정을 떠나기에 앞서,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대성이 나이프를 쥐려던 찰나.

옅은 주름이 보이는 손이 그의 손등을 살포시 덮었다.

혜정이었다.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니니?”

“…….”

“너도 당분간 여기서 우리랑 함께 있어 줬으면 하지만, 어차피 엄마 말 안 들을 거라는 거 잘 알아.”

부모를 속이느니 차라리 귀신을 속이는 게 더 쉽다고 했던가.

곧 있으면 대성이 다시 떠나리란 사실을, 혜정은 너무나도 예리하게 꿰뚫고 있었다.

“우리 아들이 선택한 길을, 이 엄마가 뭐라 하진 않을게.”

두 모자(母子)의 시선이 얽혔다.

“다만 이거 하나만 기억하렴. 우린 항상 네가 곁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네가 돌아올 장소에 언제나 우리가 있다는 걸.”

“…….”

“힘들면, 도저히 못 할 것 같으면 그냥 엄마한테 와. 사람들은 너를 동양의 구세주니 뭐니 떠받들지만…… 대성이 넌 그저 나한테 있어선 소중한 아들내미란다.”

“……응.”

“세상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렴.”

“약속할게.”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가족은 식사를 시작했다.

일상적이고 시답잖지만, 그렇기에 각별하고 애틋한 잡담이 오갔다.

대성은 생각했다.

조금 일찍.

싸움의 보상을 받은 기분이라고.

***

식사를 끝낸 대성은 멜카논의 인도를 받아 안식의 세계로 들어왔다.

거기엔 멜카논이 만든 석상 외에도 손님이 좀 더 추가된 상태였다.

바로 발라르크와 섬멸룡이었다.

“소환계에선 아무리 치료를 거듭해도 호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냥 여기로 데려왔습니다.”

멜카논이 말했다.

아직 상처가 회복되지 않아 피투성이가 된 섬멸룡의 거체에, 마찬가지로 중상을 입은 발라르크가 몸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

대성은 깊은 잠에 빠진 발라르크를 향해 천천히 다가섰다.

발라르크는 투구를 벗은 탓에 민얼굴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그가 혜정과 지수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처절한 싸움을 벌였는지.

“네가 전음을 보내지 않았다면, 나는 제 시간에 돌아오지 못했겠지.”

의식을 잃은 발라르크의 귀에 목소리가 닿지 않으리란 건 잘 안다.

상관없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으니.

“고맙다.”

대성이 지배자들과의 격전을 끝내고 기절했을 당시.

그는 꿈결에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발라르크의 목소리였다.

만일 그가 아니었다면, 이창식이 가족을 위협하는 와중에도 자신은 멍청하게 잠이나 자고 있었으리라.

대성이 발라르크의 옆에 주저앉아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무는 동안, 멜카논이 말을 걸어왔다.

“일단 섬멸룡의 상처는 빠른 속도로 쾌유하고 있으나, 아직 거친 행동을 하는 건 무리입니다.”

“그런가.”

“상관없으십니까? 내일 바로 천상으로 떠나신다고 하셨는데.”

“섬멸룡은 충분히 싸웠다. 더 쉬도록 놔둬라. 그리고 나와 함께할 소환수라면 녀석 말고도 많고.”

그래.

천상을 압박할 소환수라면, 아직 더 많이 남아있다.

그리고 설령 소환수가 없으면 또 어떤가?

‘내가 있는데.’

본래 대성의 전투 스타일은 소환수에 의존하여 방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전장의 한복판에 난립하여, 적의 피로 피를 씻으며 폭주하는 것.

그것이 대성이 싸우는 방식이니까.

‘기다려라. 곧 갈 테니.’

곧 천상으로 이어진 길을 열 석상을 노려보며, 대성은 살의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갔다.

***

“언성을 높이고 싶지도 않소. 어떻게 책임질 거요, 아르마간.”

“…….”

천상의 성역.

죽은 로드릭을 제외한 다섯 명의 사도가 싸늘한 눈초리로 아르마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호언장담대로 무려 궁니르를 인간의 손에 쥐어주었다.

한데 그 결과는?

멀쩡한 화신체 하나만 죽고, 궁니르는 가장 경계해야 할 최악의 적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뭐라 말 좀 해보시오! 꿍하게 입만 다물고 있지 말고!”

여섯 번째 사도, 에인리히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격분했다.

아르마간이 최초의 사도든 뭐든, 돌이킬 수 없는 실책 앞에서 그따위 사소한 계급 차는 무의미한 법.

아르마간 또한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기에, 무어라 대답할 말이 궁색해졌다.

쾅-!

다섯 번째 사도, 오르키엘이 원탁을 주먹으로 사납게 내리쳤다.

그러자 다른 사도들의 시선이 일제히 오르키엘에게 집중되었다.

“지금 누구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야. 일단 책임은 나중에 묻고, 당장 대안을 짜내야 해.”

오르키엘은 치아가 부러질 기세로 이를 갈았다.

“솔직히 나도 화신체에게 궁니르까지 투자했는데 이런 최악의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어. 이게 뭘 뜻하는지 너희는 정녕 모르는 거야?”

감정이 격해진 탓에 거친 숨을 내쉬며, 오르키엘은 다른 사도들의 얼굴을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젠 정말로 그 하얀 악마 놈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거야. 궁니르마저 통하지 않는 마당에, 우리가 암만 화신체를 보낸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

그 말을 들은 사도들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용하기 두려워 애써 회피하고 있던 불편한 진실이기도 했다.

그 진실로부터 고개를 돌리기 위해, 어쩌면 그들은 책임을 전가하고 감정을 쏟아내려고 아르마간을 과하게 질책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

납덩이가 가라앉은 듯, 무거운 침묵이 성역 위로 내려앉았다.

정말로, 이대로 손 놓고 하얀 악마가 천상을 습격할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사도들의 머릿속에 드리운 순간.

콰-앙!

“뭐, 뭐야?!”

“이, 이건……!”

성역이 울릴 만큼 어마어마한 폭음이 사도들의 귀청을 강타했다.

소스라치며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난 사도들이 성역을 벗어났다.

경계선을 넘자 바로 천상 세계의 경관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오, 주신이시여…….”

대지 위로 피어오르는 폭연과 불길을 본 사도들은 아연한 얼굴로 말문을 잃고야 말았다.

아니, 정확히는.

“……아, 아아!”

그 불길을 뚫고 유유히 걸어 나오는 남자의 모습에, 얼어붙었다.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헛것을 보는 게 아니라면.

하얀 악마가 천상에 강림했다.

공황상태에 빠진 사도들의 귀로, 악마의 목소리가 파고든다.

마력이 실린 그 음성은 아주 똑똑히 천상의 사도들에게 닿았다.

“약속 지키러 왔다.”

오장육부를 입에 쑤셔넣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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