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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돌아온 한대성-174화 (174/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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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에인리히……!”

게이트를 넘어가는 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후회해봤자 때는 이미 늦었다. 에인리히는 이미 게이트를 넘었고, 천상에 드리운 암운(暗雲)은 한층 더 짙어졌다.

세계를 지탱하는 존재인 사도들의 이어지는 죽음으로 천상이 암흑에 잠긴 것이다.

에인리히는 죽었다.

이로써 남은 사도는 둘.

“으아아아아-!!”

아르마간이 절규하듯 고함치며 대성을 향해 돌진했다.

르뮈에 또한 격앙된 목소리로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자애로운 주신이시여! 부디 저희에게 악을 멸할 힘을!》

후우웅-!

르뮈에가 발한 전능의 힘이 아르마간의 신형을 휘감았다.

온몸이 금빛 불꽃에 휩싸인 아르마간이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흉흉한 기세로 장검을 휘두르려던 순간.

대성이 ‘영주의 반지’를 낀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나와라.”

[5인의 혼백(魂魄) 기사단이 영주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기사단은 앞으로 30초간 영주를 위해 목숨을 다해 싸울 것입니다.]

쿠구구-!

전장에 등장한 다섯 명의 유령 타이탄이 아르마간의 곁을 에워쌌다.

방금 대성이 부쉈던 성전에 버금갈만큼 커다란 혼백 기사단의 병기가 아르마간을 향해 떨어졌다.

“꺼져라!”

하지만 르뮈에의 전능을 등에 업은 아르마간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넓은 반경을 할퀴고 지나간 장검이 기사단의 영체(影體)를 베어냈다.

파스스-!

안개처럼 흩어지는 기사단을 뚫고, 아르마간이 순식간에 대성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쾅-!

<멸염>의 십자검과 아르마간의 장검이 충돌한 순간, 어마어마한 폭음이 작렬했다.

쾅-! 쾅-! 쾅-!

이어지는 건 검날의 형체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공방(攻防).

칼과 칼이 맞부딪치고, 땅을 울리는 폭음이 연달아 터질 때마다 충격파 같은 강풍이 터져 나왔다.

“……!”

지표면을 사과 껍질처럼 깎아내며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이 르뮈에의 몸을 뒤로 주르륵 밀어냈다.

맹풍을 막기 위해 들어올렸던 팔을 잠시 내렸을 땐, 그곳에 이미 대성과 아르마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서둘러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둘의 모습을 찾던 르뮈에는, 그들이 어느덧 지상이 아닌 하늘에서 공방을 주고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쾅-!

어김없이 작렬한 폭음과 충격파가 창공에 흐르는 구름의 형태를 엉망진창으로 일그러뜨렸다.

“네놈만 아니었다면 우리의 대업(大業)은 결실을 볼 수 있었다!”

“내 알 바 아니다. 그리고 싸울 땐 그냥 닥치고 싸워줬으면 좋겠는데.”

“이 미개한 것이……!”

초속을 가뿐히 벗어난 속도로 무기와 무기가 부딪친다.

언뜻 호각으로 보이나 검풍(劍風)이 일 때마다 아르마간의 팔다리엔 자잘한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났다.

이 격차는 뭘까. 르뮈에가 걸어준 전능의 힘이 나약해서? 아니면 하얀 악마가 너무나 강해서?

아니.

‘저 검은 별 때문이다……!’

쉼 없이 날아드는 십자검을 가까스로 쳐내며, 아르마간은 이를 갈았다.

아까부터 계속 하늘에 고정된 흑성(黑星)이 기력을 흡수한다.

‘저것만 어떻게 한다면 이 격차를 완전히 좁힐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단 0.01초라도 이 악마로부터 한눈을 팔았다간 그대로 목이 날아갈 터.

푸확-!

십자검의 궤적이 아르마간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뺨에 붉은 실선이 생기며 피가 확 뿜어져 나온다.

이대로 계속 압박당했다간, 마지막에 쓰러지는 건 결국 자신이리라.

피와 뒤섞인 식은땀 한 방울이 아르마간의 콧잔등에 흐르는 그때.

팡-!

“……!”

돌연 지상에서 발사된 백색 섬광 한 줄기가 둘 사이를 지나갔다.

미친 듯이 공방을 이어나가던 대성과 아르마간이 서로 거리를 벌리는 것과 동시에 시선을 위로 향했다.

그리고…… 콰아아앙-!

백색 섬광은 정확히 하늘에 떠오른 검은 별을 꿰뚫고 지나갔다.

불티에 휩싸인 검은 별의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화륵-.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가 대성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검은 별의 시간’이 종료됩니다.]

한편.

아르마간은 불과 수 초 전에는 없었던 활력이 몸속에 차오르는 걸 느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떨어져 내리는 검은 별의 조각들을 보며 안도하는 르뮈에가 보였다.

‘덕분에……!’

회심의 미소를 입가에 그린 아르마간이 더욱 강맹한 기세로 쇄도했다.

격렬히 뿜어져 나오는 투기(鬪氣)를 느낀 대성이 눈매를 좁혔다.

‘역시 저년부터 어떻게 해야겠군.’

적정 간격을 유지하며 뒤로 물러선 대성이 궁니르를 소환했다.

그리고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아르마간과의 거리가 좁혀진 순간.

[궁니르의 두 번째 특수 스킬, <억압>이 발동됩니다.]

콰콰콰콰-!

사방에서 나타난 황금의 벽이 삽시간에 아르마간을 가뒀다.

이어서.

파-앙!

대성은 특수 스킬, <요격>을 발동해 지상을 향해 궁니르를 투척했다.

지정한 목표물은 무조건 맞히는 특수 스킬, <요격>.

대기를 거칠게 찢어내며 날아간 성창은 정확히 르뮈에의 ‘복부’를 노리고 있었다.

“……!”

쩌렁쩌렁한 파공성과 함께 날아드는 궁니르를 본 르뮈에의 눈이 크게 뜨임과 동시에.

쨍그랑-!

아르마간이 휘두른 장검이 <억압>의 벽을 산산조각 깨부쉈다.

‘신력은 같은 신력으로 상쇄할 수 있어! 하지만 르뮈에가……!’

아르마간이 눈을 빠르게 굴려 궁니르와 르뮈에를 번갈아 보았다.

《엘리시움의 수호 정령이여!》

르뮈에는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지면에 양 손바닥을 짚었다.

콰드득-!

매끈매끈한 평지였던 땅이 기묘한 형태로 솟아오르며 방벽이 되었다.

콱-!

벽의 표면을 뚫고 나온 창날이 르뮈에의 눈앞에서 바로 멈췄다.

“힉……!”

순간 심장이 철렁한 르뮈에가 파리해진 안색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하마터면 눈이 꿰뚫릴 뻔했으나, 어쨌든 아슬아슬하게 살았다.

그 장면을 본 아르마간 또한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니, 쓸어내리려던 참이었다.

파바박-!

돌연 창날에서 붉은 기류가 가시처럼 방출되어 르뮈에의 얼굴을 덮치지만 않았으면 말이다.

“아아-악!! 아아아악-!!”

얼굴 살갗이 끔찍하게 난도질당한 르뮈에가 몽롱해지는 정신 속에서 비명을 터뜨렸다.

유형화된 마력의 가시가 그녀의 왼쪽 안구를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입가는 길쭉하게 찢어져 뒤쪽 어금니까지 훤히 보일 정도였고, 가시 파편이 잘게 박힌 목젖에서 후두(喉頭)까지 드문드문 드러났다.

“르뮈에-!! ……윽!!”

처절한 외침이 아르마간의 입에서 튀어나왔으나, 그것조차 허락지 않겠다는 듯 십자검이 짓쳐 들었다.

장검을 거칠게 밀어내는 십자검의 뒤로, 하얀 악마가 잔악한 미소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딜 가려고. 넌 나와 싸워야지.”

“이놈……! 이……!”

그 와중에도 르뮈에의 비명은 멈출 기미 없이 계속 들려왔다.

목젖에서부터 차오르는 핏물을 게워내며 바닥을 기던 르뮈에는 주문을 외우려고 했다.

아무리 위중한 부상이라도 깔끔하게 회복하는 성녀(聖女)의 전능을 발휘하기 위해.

그러나,

“꺽……. 끄흑, 꺽, 헉……!”

방금의 가시 폭탄으로 인해 성대가 엉망이 되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기괴한 신음만 흘러나온다.

힘겹게 십자검을 밀어내던 아르마간의 손목이 파들파들 떨렸다.

지독한 무력감이 그를 휘감았다.

“왜…….”

악마의 뒤로, 불바다에 잠긴 천상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한 꼬락서니로 죽은 사도들의 시체가 대지를 뒹군다.

남은 동료인 르뮈에마저 갈가리 찢긴 얼굴을 감싸며 경련한다.

이건 더는 천상이 아니다.

지옥이지.

“왜……!!”

카-앙!

일순 한계치 이상의 힘이 치솟은 아르마간이 잠시나마 대성을 튕겨내며 교착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 틈을 타서 태세를 빠르게 정비하고 반격을 이어나갈 법도 하건만, 아르마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암운에 가려진 천상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목청껏 외쳤다.

“왜! 대체 왜! 이런 비극 속에서도 당신은 코빼기 한번 내비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자신이 그토록 경외하고 존경하였던 주신을 향한 외침이었다.

“당신들의 어린 양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가꾼 세계가 지금 불바다에 잠겨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주신께선 저희에게 목소리를 들려주시지 않는지요!”

투명한 눈물이 아르마간의 뺨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렸다.

그 어떤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최초의 사도는, 사도의 좌에 오른 뒤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 비극을 헤쳐 나갈 자신이 없었다.

아르마간은 하얀 악마를 바라볼 때보다 더 짙은 원망이 담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대체 왜…… 컥!?”

푸우욱-!

불쾌한 소리와 함께 아르마간의 입에서 피거품이 흘러넘쳤다.

고개를 천천히 떨어뜨린 그가 본 것은, 자신의 배를 뚫고 나온 십자검 한 자루였다.

“주신인가 뭔가 하는 새끼를 찾을 시간에 나랑 싸웠으면 5분은 더 살 수 있었을 거다.”

하얀 악마의 조롱을 마지막으로, 아르마간의 의식은 빠르게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

툭-.

만신창이가 되어 널브러진 르뮈에의 옆으로, 덩어리 하나가 떨어졌다.

그녀는 남은 한쪽 눈을 힘겹게 옮겨 그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목.

눈물로 얼룩진 채 얼굴이 일그러진 아르마간의 목이었다.

입에는 번들거리는 선홍색 내장이 물린 채로.

“…….”

비명도,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르뮈에는 무감정하게 뜬 눈으로 아르마간의 목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려 거뭇하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툭, 투둑-.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 내려 그녀의 텅 빈 왼쪽 눈구멍 속을 적셨다.

가랑비는 곧 억센 폭우가 되었고, 뒤이어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천둥벼락이 휘몰아쳤다.

비가 이렇게나 많이 내리는데, 지상을 잠식한 불바다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더 거세졌다.

멸망.

그 짧은 단어 하나가, 피로 얼룩진 르뮈에의 시야에 어른거렸다.

“결국, 그 주신이란 놈은 끝까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군.”

어느덧 하늘에서 내려온 대성이 르뮈에의 옆에 서서 그리 빈정댔다.

그는 멸망해가는 세계를 허망한 눈길로 응시하는 르뮈에를 돌아봤다.

“대의니 뭐니 말만 번지르르할 뿐, 너희가 믿고 따랐던 존재가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겠지.”

“…….”

“한쪽 눈을 남겨두기를 잘했군.”

대성은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아 르뮈에의 머리채를 들어올렸다.

덕분에, 애써 하늘만 바라보던 그녀는 멸망해가는 천상의 모습을 똑똑히 눈에 담아야 했다.

“이걸 나만 보고 갈 수는 없지. 너는 이대로 너희의 세계가 무너지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불구덩이 속에서 죽어가라.”

“…….”

르뮈에를 제외한 일곱 사도 전원이 죽음으로써, 천상은 이제 그 존재를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태양이 없고 달이 없는 지구는 어떻게 되겠는가. 천상도 마찬가지다.

쩌저적-.

유리알에 금이 가듯, 광활한 지반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겨났다.

이내 대지가 마구잡이로 갈라지며 그 속에 있던 내핵(內核)이 시뻘건 화마를 토해낸다.

지평선의 끄트머리에서부터 솟구치는 불의 산은 지표면을 지워내고 강물을 말라붙게 하며 빠르게 이쪽을 향해 퍼져오고 있었다.

붕괴해가는 세계를 뒤로 한 채, 대성은 하늘로 올라가 게이트를 타고 천상을 벗어났다.

“…….”

천천히 몸을 일으킨 르뮈에는 다가오는 멸망을 보았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굉음 때문에 고막이 나간 걸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남은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흘러내렸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고열 때문에 턱에 닿기도 전에 메말라버렸다.

먼지 한 톨 남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르뮈에는 생각했다.

불길에 잠기며, 후회했다.

차라리 남은 오른쪽 눈도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광대한 우주 어딘가에서, 작은 빛이 잠깐 점멸했다.

또 하나의 별이 그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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