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175
천상이 불에 잠기는 광경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대성은 하늘에 열린 게이트를 넘어 ‘안식의 세계’로 귀환했다.
콰아아아아-!
‘통로’ 역할을 한 석상의 복부 안쪽에서 천지를 집어삼킨 멸망의 불길이 회오리 기둥으로 치솟고 있었다.
“폐문(閉門)!”
불의 회오리가 ‘안식의 세계’까지 뻗치기 직전, 멜카논이 다급하게 외쳤다.
덜컹-!
석상의 배가 순식간에 닫혔다. 불의 회오리로 인한 막대한 열기와 소음도 언제 그랬냐는 듯 멎었다.
“휴……. 아슬아슬했네요.”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막은 멜카논이 이마에 맺힌 비지땀을 닦았다.
찰박-.
얼떨떨하게 선 대성의 발아래서 물웅덩이 밟는 소리가 났다.
뭔가 싶어서 봤더니 물웅덩이가 아니라 피 웅덩이였다.
이건 아마,
“아까 이쪽으로 날아간 놈의…….”
“크르르-.”
이때, 섬멸룡이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대성의 곁으로 다가왔다.
살점이 덕지덕지 묻은 어금니에서 피비린내가 은근하게 풍겼다.
하지만 대성은 거리낌 없이 섬멸룡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에인리히인가 뭔가 하는 놈을 죽인 게 너인가 보군. 잘했다. 몸은 좀 괜찮나?”
“크르르-.”
괜찮다는 대답인지, 섬멸룡이 눈을 감으며 머리를 살살 흔들었다.
가까이 다가온 멜카논이 대성의 몸을 샅샅이 눈으로 살피며 물었다.
“돌아오셨군요. 빨리 치료를-.”
말을 이어가려던 멜카논은 순간 어깨를 흠칫 떨며 놀랐다.
아무리 군주의 몸을 살펴보아도, 사소한 자상(刺傷) 외에는 그 어떤 상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작은 싸움’을 끝내고 온 듯한 모습.
하지만 방금 군주께서 임하셨던 건 작지도 않을뿐더러, 하물며 ‘싸움’조차도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와 대적하는 ‘전쟁’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승리를 거두고 온 것도 모자라, 자잘한 상처밖에 입지 않으셨다니…….
‘역시 한계를 가늠키 어려운 분이군. 못 말리신다니까.’
끝을 알 수 없는 군주의 한계에 한 수 접을 수밖에 없었던 멜카논은 그저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지금은 ‘걱정’이 아닌, 다른 말을 꺼내야 할 타이밍이리라.
“승리를 거머쥐신 것, 진심으로 경축드립니다. 우리들의 군주시여.”
***
아까 정신없이 사도들과 격전을 벌일 때 시스템이 영지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새로운 종족이 합류하여 영지의 격이 상승했다고.
대성은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확인하기 위해 ‘안식의 세계’를 벗어나자마자 곧장 뉴멕시코로 향했다.
그리고,
“……장관이로군.”
뉴멕시코 일대에 벌어지는 광경을 본 순간, 대성은 중얼거렸다.
분명 마지막으로 영지를 떠날 때는 본 적 없었던 각양각색의 이종족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게 아닌가.
그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종족은 엘프였다. 그들은 체계적인 군사력과 뛰어난 마법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후웅-!
대성을 등에 태운 섬멸룡이 날개를 접어 지상으로 착지했다.
“동양의 구세주께서 오셨다!”
“아! 저분이…… 오오!”
“……맙소사. 정말로 드래곤을, 그것도 블랙 드래곤을 길들이다니.”
후광을 두른 듯 찬란히 빛나는 위용!
영지에 있는 이들이 우르르 대성과 섬멸룡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구세주를 영접하는 것처럼 손을 위로 뻗었고, 엘프를 비롯한 이종족은 경외를 느끼며 탄성을 발했다.
아직 ‘용족’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지 못한 이종족은 섣불리 대성과 섬멸룡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들의 본능에 깊숙이 각인된 ‘용족’과의 악연(惡緣)은 인간이 느끼는 것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길고 질겼으니까.
하지만.
저벅-.
그 악연과 두려움을 떨쳐내고, 종족을 대표해 한 발짝 앞으로 나선 자가 한 명 있었다.
“당신이 이곳의 영주이신 ‘한대성’ 씨군요.”
바로 엘프들의 여왕, ‘네비아’였다.
아직 이종족에 대한 경계심을 전부 떨쳐내지 못한 대성이 싸늘한 눈초리로 네비아와 시선을 마주쳤다.
네비아는 침을 꼴깍 삼키며 입가에 걸린 미소가 희미해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힘을 쥐어짜야만 했다.
‘파프니르…… 아니, 파프니르는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군.’
단 한 명의 인간이 다섯 상위 차원의 지배자들을 없앴다는 건 결코 과장된 소문이 아니었다.
만약 그가 파프니르처럼 탐욕스럽고 포악한 성격을 지녀, 다른 차원을 침공하고 다녔다면-.
‘생각을 말자.’
차마 상상하기도 싫은 아찔함.
가공할 만한 기감을 지닌 네비아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대성이 자신들을 경계하고 있음을.
네비아는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처음 뵙습니다. 저는 요정 왕국의 여왕이자 ‘차원 연합’의 대표자, 네비아라고 합니다.”
“차원 연합?”
“인류와의 공생을 택한 종족들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공생이라…….”
“물론 아직 저희를 신뢰하지 못하신다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대성의 무언(無言)은 그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저들이 겉으론 우호적으로 나와도, 뒤에선 어떤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지 아무도 모를 노릇이니까.
네비아는 대성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도록 최대한 호소력 짙은 눈빛을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약속드리겠습니다. 꼭, 짧은 시일 안에 당신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저희 또한 인류의 편에서 각고의 노력을 다할 것을요.”
네비아의 설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장황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대성이 자리를 비운 동안, 영지를 침공한 ‘몬스터 동맹’을 격멸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지에 있는 ‘차원 연합’의 일원들이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그 말을 듣는 대성 또한 서서히 마음속에 드리운 의심을 걷어냈다.
“그래서 요약하자면, 지구에 머물고 싶다 이 말이군.”
“……공생이란 단어를 앞세워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털썩!
아까부터 후들후들 떨리던 네비아의 무릎이 급기야 땅에 맞닿았다.
그녀 자신의 의지로, 대성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 순간.
그 광경을 본 이종족 무리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
모두가 우러러보는 요정 왕국의 여왕이 무릎을 꿇다니!
가장 고결한 엘프라 불리던 네비아가, 누군가의 앞에서 저런 자세를 취한다는 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분위기가 어쨌든, 네비아는 그저 땅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묵묵히 할 말을 이어갔다.
“남의 터전에 멋대로 빌붙으려면, 적어도 고개를 숙일 수 있는 간절함은 보여야 예의겠지요.”
“…….”
“저희는 이 푸른 별이 아니면 이제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부디, 저희를 받아주십시오.”
비굴하게까지 느껴지는 여왕의 말이, 이종족 무리의 혈색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어찌 여왕께서 한낱 인간 앞에 머리를 숙이실 수 있냐고 누군가 분개할 만도 하건만, 영지엔 침묵만이 흘렀다.
알고 있었으니까.
저 남자야말로 ‘정점’임을.
여왕의 감은 틀린 적이 없다. 그녀의 판단은 언제나 ‘최선’을 향했다.
그렇다면 답은 나오지 않았는가.
털썩!
털썩!
머리를 조아린 네비아의 뒤로, 족히 수천에 달하는 이종족 무리가 일제히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해일을 연상케 하는 일대 장관.
여러 차원의 종족들이 오직 대성 한 명에게만 머리를 조아린다.
그의 마음을 사기 위해.
한편, 다시금 대성이 자신들과 같은 ‘인류의 편’임을 상기한 사람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전율했다.
그리고 당사자인 대성은,
“개수작 부리는 놈들은 그 즉시 멸족(滅族)이니 그런 줄 알아라.”
나름대로 방식으로, 저들에게 호감을 표했다.
***
짧은 시일 안에 대성의 신뢰를 구하겠다는 네비아의 호언장담은 빈말이 아니었다.
땅-! 땅-! 땅-!
두두두-!
철골을 내리치는 망치 소리와 드릴이 회전하는 소리가 하모니처럼 어우러지며 뉴멕시코에 울려퍼졌다.
“와…….”
“영화랑 소설에서 보던 게 거짓말이 아니었네…….”
그야말로 신들린 솜씨로 무너진 건물을 재건축하는 드워프들을 본 사람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섯 개의 드워프 부족이 지금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자신들의 장기를 한껏 발휘하고 있다.
빠르게 재생되는 영상처럼, 앙상한 뼈대밖에 없었던 건물이 뚝딱뚝딱 재건되었다.
‘건축’이나 ‘제작’에 관해서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드워프의 종족 특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뿐일까?
“누가 여기 와서 돌 좀 치워줘!”
“여기선 엘프가 나서야지.”
엘프들의 원조 또한 대단했다.
인간이 지닌 기술력으론 단기간에 해낼 수 없는 작업을, 엘프들은 마법으로 손쉽게 해내었다.
덕분에 허름한 움막 몇 채밖에 보이지 않았던 뉴멕시코는 단 하루 만에 그럴싸한 도심지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우선 이곳을 시작으로 하여, 조금씩 재건 작업을 지구 전역으로 확장해나갈 생각입니다.”
“그렇군.”
네비아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성의 옆에 섰다.
그녀는 뒷짐을 진 채 손가락을 꼼지락대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이, 이제 좀…… 저희를 신뢰할 마음이 드셨나요?”
“아니.”
“…….”
네비아는 정수리에 납덩이라도 떨어진 듯한 표정이 되었다.
오기가 생겼는지, 그녀는 콧김을 내쉬며 재건 현장으로 달려가 직접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대성은 피식 실소를 짓고는 몸을 돌렸다.
말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나쁘지만은 않은 놈들이군.’
사실 대성은 이미 80% 정도는 저들을 신뢰하고 있었다.
한 치의 거짓 없이, 진심으로 사람들을 도와주는 저들의 모습에 믿음을 가져보기로 한 것이다.
“…….”
홀로 걸음을 옮기며 산책하던 대성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티 없이 맑은 하늘 위로 떠다니는 새하얀 구름.
뒤에선 이종족 무리와 빠르게 친해진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2차 대격변 이후, 좀처럼 들려오지 않았던 소리들이다.
‘평화가 찾아온 건가?’
그런 생각이 스친 순간, 대성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평화? 이렇게 갑자기?
하지만 돌이켜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상위 차원의 지배자들은 모두 죽었다. 인류에 적개심을 가진 차원의 종족들도 네비아의 말에 따르면 대부분 제거된 상태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인류와 이종족의 공존(共存) 정도일까?
“…….”
그 정도는 ‘새로운 시대’의 특이점이라고 보면 되겠지.
2차 대격변이라는 비극을 초래하였던 천상도 멸망했다.
그렇다면 결국,
‘……굳이 근원의 길로 떠나지 않아도 상관없나?’
대성이 ‘근원의 길’을 걸으려 했던 이유는 단 하나.
근원의 파편을 모아 시간을 되돌려, 만악의 원인인 차원수를 세웠던 자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도 충분히 평화롭지 않은가.
굳이 차원수가 세워지기 이전의 당시로 돌아가지 않아도 적은 사라졌고, 인류는 새로운 종족과 화합을 이루었다.
그저 이대로만 흘러가도 평화는 유지되는 것이다.
이전처럼 언제 몬스터가 나타날지 두려움에 떨 필요도 없고, 누군가가 무고한 죽음을 겪을 일도 없다.
어째서일까. 심장이 두근거렸다.
펄럭-!
대성은 괜히 ‘아카식 레코드’를 펴보았다.
하지만 거기에 적힌 미래의 정보는 죄다 시답잖은 것들뿐이었다.
적어도 내일 누군가 습격을 해온다던가, 누군가 죽음을 맞이할 거라는 정보는 하나도 적혀있지 않았다.
‘여기서…….’
두근! 두근!
대성의 눈이 점차 커졌다. 그의 동공이 파르르 흔들렸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뛰었다.
그건, 대성이 지옥에서 돌아온 뒤로 지금껏 한 번도 짓지 않았던 표정이었다.
‘여기서 멈춰도 되는 건가?’
80년을 지옥에서 싸웠다.
지구로 귀환한 뒤로도 2년을 쉬지 않고 싸웠다.
싸우고 계속 싸웠다.
싸움밖에 없었던 피투성이 삶.
그 빌어먹을 나날의 마침표를 지금 여기서 찍어도 된단 말인가?
[‘근원의 길’의 끝에 선 누군가가 절대자를 찾습니다.]
그 순간, 대성이 먼저 부른 것도 아닌데 ‘생명 포식자’가 느닷없이 그의 어깨 위로 나타났다.
“……!”
돌연히 시야를 가린 시스템 메시지와 ‘생명 포식자’의 등장에 대성이 무어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생명 포식자’가 절대자를 ‘근원의 길’로 인도합니다!]
[‘근원의 길’의 끝에 선 누군가가 연이어 절대자를 찾습니다!]
팟-.
대성의 몸은 점으로 변하여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